‘생명의 불꽃’
올랴 아주머니는 나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며 목소리를 높여 명령조로 말했다.
“무얼 쓸거니? 가서 바람도 쐴 겸 꽃밭 일이나 도와주렴.”
그녀는 헛간에서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바구니를 꺼내왔다. 내가 신이 나서 허리를 굽혔다 폈다 하며 쇠스랑이로 축축한 흙덩이를 깨고 있을 동안 올랴 아주머니는 나지막한 토담 위로 걸터앉아 무릎 위에 여러 가지 꽃씨 봉지를 꺼내 놓고 그 종류를 고르고 있었다.
“올랴 아주머니, 그 양귀비 꽃씨를 뿌리실 건가요?”
내가 말했다.
“양귀비도 꽃이가! ”그녀는 자신있게 대답했다.
“그건 채소 같은 거야. 채마밭에 양파나 오이와 함께 심는거지.”
“참 아주머니도! 옛 노래 가사에도 이런 말이 있잖아요. ‘그녀의 이마는 대리석같이 희고 볼은 양귀비처럼 붉게 타오른다고.’ ”
“꽃이래야 한 이틀 반짝하고 마는 거지.”
올랴 페트로브나는 고집했다.
“꽃밭에 양귀비는 어울리지 않아요. 금방 피었다가 사그러지는 것, 그런 다음에 여름내 방망이 같은 게 매달려 있고, 꽃밭 모양만 망치는 거지------.”
하지만 나는 몰래 양귀비씨 한 줌을 꽃밭 한 가운데에 뿌려 놓았다. 며칠 후에 가보니 양귀비 씨는 파랗게 싹을 틔웠다.
“너 양귀비씨를 많이 뿌렸구나!”
내 곁으로 다가오면서 올랴 아주머니가 말했다.
“너는 고집쟁이로구나. 네가 불쌍해서 세 그루만 남겨 놓고 모조리 다 뽑아버렸다.”
나는 볼 일이 있어서 2주 만에 돌아오던 참이었다. 무덥고 피로에 지친 여행 끝에 조용한 올랴 아주머니 집으로 돌아와 보니 기분이 좋았다. 말끔히 닦아 놓은 바닥에서 시원한 기운이 올라왔다. 창 위까지 높이 자란 자스민 나무가 책상 위에 레이스 같은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끄바스(곡물로 만든 달콤한 음료수)를 따라 줄까?”
땀과 피로에 지친 나를 측은한 얼굴롤 바라보며 그녀는 말했다.
“알료사가 끄바스를 아주 좋아했지. 그래서 옛날엔 자기가 직접 그걸 병에다 넣어가지고 밀봉을 해두고 했었지.”
내가 이 방을 처음 쓰게 되었을 때 올라 페트로브나는 여름옷을 입고 있는 알료사의 초상화로 눈을 가져가며 이렇게 물었다.
“괜찮겠어?”
“그럼요.”
“이게 내 아들 알료사야. 이것이 그애 방이었고, 자, 이 방을 쓰도록 해요.”
나에게 끄바스가 든 묵직한 구리컵을 주면서 올랴 아주머니가 말했다.
“너의 양귀비는 커서 벌써 꽃망울을 맺었지.”
나는 꽃을 보러 밖으로 나갔다. 꽃밭은 몰라 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삼색 오랑캐 꽃이 씁쓸하면서도 향긋한 냄새를 풍기며 아리따운 파리 아가씨들의 모자처럼 가냘픈 줄기 위에 흔들리고 있었다. 그 외에도 이름 모를 꽃들이 많았다. 하지만 꽃밭 한 가운데 꽃과 나비가 함께 울긋불긋하게 돌아가는 그 위로 나의 양귀비는 우뚝 솟아 태양을 향해 세 개가 크고 뭉툭한 꽃망울을 내밀고 있었다. 다음날 가보니 양귀비는 활짝 피어 있었다.
“자아, 이리 와 보세요. 꽃이 피기 시작했어요.”
멀리서 보니 양귀비는 마치 불꽃이 활활 타오르는 횃불과도 같았다. 미풍이 가볍게 흔들리고 태양이 새빨간 꽃잎을 거의 꿰뚫을 듯 환하게 비추자 양귀비는 눈부신 불꽃처럼 무섭게 타오르고, 새빨갛게 변해갔다. 이제 금방이라도 손을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겨 손가락을 태워버릴 것만 같았다. 양귀비는 그 강렬한 빛으로 해서 눈이 멀고 그와 함께 다른 모든 꽃들 ---, 아리따운 파리 아가씨들과 같은 오랑캐꽃도, 금어초도, 그밖에 꽃의 귀족이라 할 수 있는 것들도 잠시 동안 반작하다가 시들어져 같다. 이틀 동안에 양귀비도 광란의 불꽃을 태우다 해질 무렵 갑자기 꺼져 버렸다. 그리고 그렇게 환하던 꽃밭도 양귀비 꽃이 없어지자 이내 텅빈 것같았다. 나는 아직도 이슬방울에 젖은 조금도 시들지 않은 양귀비 꽃잎을 땅에서 주워 손바닥 위에 오려 놓고 펴 보았다.
“이게 다예요!”
아직도 가시지 않은 기쁜 마음에 큰 소리로 말했다.
‘으음, 다 타버렸군------ ’ 마치 사람을 걱정하듯이 올랴 아주머니는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는 이 양귀비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 본 적이 없지. 양귀비는 생명이 너무 짧거던. 대신에 뒤돌아 볼 틈이 없이 멋지게 살다가 가기는 하지. 사람도 그와 마찬가진 것 같아. 어떤 사람은 잡초처럼 햇볕이나 가리고 제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이 있는가 하면, 양귀비처럼 눈부신 빛을 발하여 그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 만약 죽게 된다면 영광의 제 목숨을 바쳐야지.’
나는 올랴 아주머니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기 아들 알료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알료사는 독일 파시스트들의 중폭격기가 내려 꽂는 폭격으로 죽었다.
지금 나는 시내 저쪽 끝에 살면서 이따금 올랴 아주머님 댁에 들른다. 요 얼마 전에 나는 다시 그 집에 갔었다. 우리는 테이블에 앉아서 차도 마시고 새로운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꽃밭에는 커다란 양귀비꽃이 모닥불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그 밑에 축축하고 활력에 가득찬 땅에서는 조그만 순이 자꾸만 새로 돋아나고 있었다. 이것을 계속해서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생명의 불꽃이 꺼지게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꺼지지 않는 불꽃을 바라보면 빛과 기쁨을 함께 가져다 준 사람들에 대한 올랴 아주머니의 말을 머리에 떠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