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먼저 행동하는 신업과 말로 내뱉은 구업은 빠른 반면에 생각 즉 의업은 어떨까? ‘내가 도와야지’라는 생각만으로는 쉽게 저질러 돕지 않게 된다.
사실 생각이라는 것은 진리의 편이 아니다. 생각은 늘 아상(我相)의 편이며 아상과 아집에 기초해서 일어날 뿐이다. 따라서 생각은 항상 이기적인 마음을 돕는 쪽으로 일어나고,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될까 안 될까’를 가장 먼저 따지게 되어 있다.
생각은 항상 우리를 비본질적인, 아상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몰아간다. 생각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나’를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타적이기 보다는 이기적인 쪽으로 늘 방향을 틀 수 밖에 없는 것이 생각의 특성이다. 그렇기에 생각의 노예가 되면 아상을 강화시키는 수행자답지 못한 행동, 욕심과 이기와 집착에 물드는 행동밖에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생각 분별에 휘둘리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심(無心)’, 무분별심(無分別心)을 귀하게 여긴다. 이 마음공부는 머리에서 가슴으로의 여정이라고 할 만큼, 머리로 생각하기 보다는 뜨거운 가슴에서 곧장 실천이 나오는 것이다. 생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지켜보게 되면 생각 너머의 근원적인 본질을 볼 수 있다. 분별과 생각을 비웠을 때 더 근원적이고 직관적인 영감에 다가설 수 있다.
이렇듯 생각만을 믿다 보면 언제까지고 풍요로움이 깃든 행동인 보시와 나눔은 실천하기 어려워지기 때문에 신업과 구업으로써 먼저 저질러 보시하고, 나누며 살겠다고 말로써 직접 선언하는 실천이 중요하다. 보시를 직접 행동에 옮기고 선언할 때 그 행위와 말 자체는 무한한 풍요로움을 가져오는 씨앗이 된다.
보시하고 나누는 것은 풍요롭지 않으면 못 하는 것.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결코 내 것을 이웃과 나누지 못한다. 나누는 행위 자체는 직접적으로 ‘나는 풍요롭다’는 것을 확증하는 행동인 것이다. 그렇기에 보시하고 나눌 때 우리 내면에는 ‘나는 풍요롭다’는 근원적인 생각, 즉 의업이 토대로써 확고히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이 바로 업의 법칙이며, 끌어당김의 법칙이다. 나누는 행위를 실천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복을 끌어당기는 것이며, 내 안에 풍요로운 정신을 끌어들이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근원 토대 생각은 이런 식으로 작용한다. 억지로 풍요롭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풍요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먼저 보시하고 나누는 순간 저절로 내면에서는 ‘풍요롭다’는 깊은 자각이 일어나 세포 하나 하나에까지 퍼져나간다.
그렇게 ‘풍요롭다’는 것이 자각된다면, 그 이후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내면에 결핍과 가난을 심으면 현실세계도 끌어당겨지고, 풍요와 부를 심으면 현실세계도 풍요로움과 부유함이 끌어당겨진다. 마음은 현실세계의 거울이다. 언제나 내면세계에 있는 것만이 외부로 투영되는 것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먼저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면을 풍요롭게 가꾸는 것이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에게 이 우주는 당연히 걸맞는 현실세계를 가져다주기 때문이다. 로또 같은 복권에 당첨된 사람이 얼마 안 되어 다시 가난해 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리 물질적으로 풍요로워도 그 마음이 그 물질적 풍요를 밀쳐낼 수밖에 없다. 마음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에서도 그 돈과 부유함이 멀어질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결국 얼마 못가 그 풍요는 바닥이 나고 만다.
먼저 마음을 결핍에서 풍요로 바꾸라. 부자라는 것은 언제나 내면의 상태를 의미하지, 외적인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이 먼저 풍요로워진다면 물질은 저절로 따라오게 될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