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시간...노래를 부르며...수많은 시행착오와...부단했던 노력들....
노래가 내게 무엇인지도 모른채 그 마력에 끌려..전 아직도 노래를 부릅니다..수많은 가수들의 노래를 따라불렀고..한때는..고음에 심취해..고음보컬을 흉내내기도 했습니다..어릴때이죠..나이를 먹어가고 인생의 경험도 늘어갔습니다..어릴적 어려웠던 가정환경과..지병으로..10 여년 넘게 투병하시던 아버지...그옆을 지금도 지키고 계신 어머니...그어머니 덕분에..보란듯이 살아나신 아버지...어떤 누구도..아버지의 병이 나을거라고 애기하지않았죠...의사들도...포기해버린...그러나..아버지는 제게 이렇게 애기하셨습니다...광재야...아버지 안죽어..너들놔두곤..절대로...어릴적 나의 가슴에..비수같이..꼿히던 그말 한마디........
그리고..의사도 포기해버린..죽어가는 아버지 곁을 ..항상 지키시고..보살피시던 어머니...아버지를..믿고..다시 살리신 장본인이 바로 어머니셨죠.....어머니는..자신이 할수있는 최선을 다하셨죠..아버지를 살리기위해...그런 어머니 곁을 전 잠시도 떠나지 않았습니다..살구씨를 돌로 깨던 기억이..아직두 생생하게 떠오릅니다..어린시절...그렇게..초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아버지는 대 수술을 받으셨죠...아버지를 포기하셨던 그 의사분 한테요...어떻게..사람을 이상태까지..호전시켰냐는 의사에 말에...어머니는 그저 빙그래 웃기만 하셨습니다..2차례 더 수술을 받으시고..아버지는 일어나셨죠..몸 밖으로..호수를 두개 빼낸채..거기로 간의 이물질들이 나왔던거 같아요..중학교1,2학년을 아버지랑 같이..친구처럼 지냈답니다..호수로 나오는 물이 다차면 항상 제가 비워드리고..아들 세명중..유일하게 제가 아버지를 모시고 목욕탕두 가고 그랬습니다..그때 아버지의 젊은시절 애기와..인생관...절대로 포기하지않는..정신을,,,그때..배운거 같아요...그무렵...우연히 김현식의 노래를 듣게 되었습니다..그전까지만해도...어머니가..아버지를 간호하시면서..들으시던..라디오와..배호,현철,등등의 트로트가수들......이게 음악의 전부라고 생각한 저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온..김현식의 목소리..가슴으로 전해지는 전율은..지금도 말로 표현할수가 없군요...........김현식에 심취해..중학교 시절을 보냈답니다..그때두 저는 걸걸한 목소리였던거 같아요^^..제법 김현식 흉내를 내고 그랬더랬습니다..........<생략>.........
-아래는 고 김현식옹의 프로필 입니다....
1958년 1월 7일 서울 인현동에서 출생했다. 친가는 충남 홍성에서 조그만 사업과 농사를 함께하는 유지 집안이었고, 외가는 충남 옥천의 명문가였다.
1965년 서울 혜화 국민학교 입학, 3학년때 옥천 외가에서 시작하는 갈포공장에 참여하러 아버지가 식구들과 함께 내려가 죽향 국민학교로 전학했고, 1년후 다시 서울 삼청국민학교로 전학, 이때 가수 전인권이 동교 6학년에 재학중 이었다.
1971년 보성중학교에 입학, 중학교 시절 초반의 성적은 꾸준히 상위권을 유지했으나 아이스 하키, 기타등의 과외 일에 몰두하면서 하락했다.
이 시절 그에게 기타와 60년대 미국 록큰 롤을 함께 가르쳐준 사람이 일곱 살 손위 사촌형 양국정이다.
1976년 포크송 가수 이장희의 주성으로 김현식 1집 녹음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장희가 갑작스런 부도사태이후 미국으로 도피해버려 마스터 테이프까지 나온 상태에서 첫 번째 독집 출반이 미뤄졌다.
1980년 서라벌 레코드사에 의해 계획보다 2년 늦게 김현식 1집이 출반됐다. 아직은 앳된 목소리에 소울, 록, 트로트들이 융합된 김현식의 초기 음악세계를 보여주는 앨범이었으나 거의 대중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김현식은 주로 밤무대를 중심으로 활동한다.
1982년 81년 우연히 신촌의 한 의상실에 들어 갔다가 만난 김경자씨와 결혼한다. 동부이촌동 공무원 아파트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인근에 피자가게까지 열어, 직접 배달도 하는 등 결혼이 가져다 준 행복에 빠져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1983년 그가 늘 '나의 분신'이라고 부르던 아들 완제가 태어난다
1984년 10월 '사랑했어요'를 타이틀로 <회상> <바람인줄 알았는데> 등을 실은 2집 앨범 출반, 다운타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는다. 전인권과 그룹 '동방의 빛'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하고 그룹 해체 후에는 정성조가 리드하던 '메신저스'의 싱어와 <라스트 찬스> <검은나비>
등의 싱어를 거치면서 서서히 밤무대 최고의 가수로 부각되어 간다.
1985년 김종진, 전태관, 고 유재하와 함께 그룹 '봄여름가을겨울'을 조직한다. '봄여름가을겨울' 은 여러 가지 면에서 그가 리드하기 시작한 최초의 그룹이다. 그러나 누나, 어머니등 가족들이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고 부인 김경자씨와도 별거에 들어가 개인적으로는 가눌길 없는 고독이 시작되던 때이다.
1986년 '비처럼 음악처럼'을 타이틀로 '봄여름가을겨울'과 함께 3집 출반, 30만장 이상이 팔려나가면서 음악대중들의 폭발적인 호응을 받는다.
서서히 얼굴 없는 가수로 통하기 시작한다. 동숭동 파랑새 극장에서 그들의 첫 무대가 이루어졌다.
1987년 10월 전인권, 허성욱등과 함께 마약상용혐의로 구속된다. 이때 복용한 마약이 그의 건강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다.
1988년 2월 7일 63빌딩에서 삭발한 채 재기 콘서트. 6,000여명이 들어찬 관중들은 그의 재기를 열화 같은 박수로 성원해 주었다. 김현식에게 재기의 힘을 주었던 콘서트였다.
1988년 9월 <언제나 그대 내곁에> <사랑할 수 없어> 등이 실린 4집 앨범을 낸다.
1989년 1월 이정선, 엄인호, 한영애와 함께 '신촌블루스' 3집 앨범에 참여한다. '골목길' ' 환상' '바람인가 빗속에서' 등의 곡들에서 강한 재즈, 블루스 지향이 보이기 시작한다.
1989년 11월 강인원이 주도로 권인하, 신형원과 함께 영화음악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 에 참여한다. 이 가운데 '비오는 날의 수채화' 이 각종 방송 차트에 오르면서 가끔씩 방송에 얼굴을 비친다. 그러나 마약에 이은 폭음으로 건강은 계속 악화돼 이때부터 병원을 주기적으로 드나든다.
1990년 3월 15일 '넋두리'를 타이틀로 한 5집 앨범과 '신촌블루스' 3집을 동시 출반한다
'신촌블루스 3집에는 그가 부른 '이별의 종착역' 등이 있다. 건강이 악화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6집 녹음과 '신촌블루스' '비오는 말의 수채화' 팀과 전국 각지를 누비며 라이브 콘서트를 연다. 이때는 어쩌면 다분히 술의 힘에 의해 그의 몸이 유지되던 때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1990년 11월 1일 하오 5시 20분 지병인 간경화로 자택에서 사망. 장례식장에는 많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참석해 요절한 가수의 명복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