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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트만(이단 보편구원론), 칼 바르트, 헨리나우웬(동성애자)을 경계하라!
한국교회를 세속화하며 이단화하려는 [몰트만]과 독일신학!!!
독일교회를 세속화하여 문닫게 했던 [몰트만]과 그의 이단성 독일신학이
이에 그치지 않고 한국까지 진출하여,이제는 한국교회를 세속화시키고 문닫게 하려고 하는데,
우리는 사탄의 전략을 파악하여 몰트만과 그의 신학과 추종자들을 철저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희망의 신학으로 포장된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은 →사탄의 [[몰모트]]인가?
<공공의 유익을 위해 ⓐ칼바르트 ⓑ헨리나우웬 ⓒ김석년목사에 관해 검증과 분별>
몰트만은
2013년 10월 1일 서초교회(=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 or 서초중앙로 소재 :
●담임: 김석년 목사 [ 헨리 나우웬(= 이단 카톨릭 사제이고 보편구원론자이며 동성애자 )의 추종자 ] )에서
열리는 콘퍼런스에서 강의한다.
이단 보편구원론(만유구원론)과
이단 보편화해론(만유화해론)을
주장하는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의 이단성을
숙지하고 몰트만을 경계하라!!!
희망의 신학으로 포장된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은 →
사탄의 [[몰모트]]인가 혹은 아닌가?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고린도후서 11:14
몰트만, 칼바르트, 헨리 나우웬을 경계하라
1. 이단성으로 가득찬 독일의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Jurgen Moltmann)을 경계하라 !!!
"몰트만은 그의 주요 저서인 [오시는 하나님]에서
죄인들과 심지어 마귀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시적인 심판이 있겠지만 심판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적인 몰트만의 신학사상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개혁주의 교회들과 성경적 오순절 근본주의 교회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 사상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은 종말론적인 계시관에 의하여
확증되지 않는 미래의 부활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보류시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을 못박아 버려서 제거합니다."
칼 바르트는 독일 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려지는 자유주의 신학자입니다.
칼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하는 이단 입니다.
칼 바르트 사후 독일 신학계에는 세 명이 등장합니다.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
에버하르트 융엘 입니다.
몰트만은 1926년 독일에서 태어났으며 1954년 시골교회에 시무하기도 하고,
브레멘에서 교목생활도 하고, 1955년 괴팅헨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1958년에 '퍼젤과 브레멘에서의 칼빈주의' 를 필두로 1961년 '예정과 견인',
1965년 '기독교 종말론의 定礎와 결론에 관한 논구(희망의 신학)' 를
마르크스 사회주의자인 에른스트 블로흐의 喜望의 哲學에 대한 神學的 비판과 대답으로
출간하게 됨으로 화제가 되기 시작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의 기독론은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되는데,
먼저 부활에 대한 사상은 역시 종말론적으로 봄으로 말미암아 미래 부활의 선취로 상징으로 보게 되고
그리스도의 부활사실을 역사 밖으로 추방하고 부정하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인 몰트만의 십자가와 부활은
성경적 근본주의 신학자의 십자가와 부활의 의미와 너무나 다릅니다.
몰트만이 말하는 부활은 희망의 논리를 전개하기 위해서 십자가신학은
신을 십자가에 못박아 제거하기 위한 방편으로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언약이 성취되는 실증으로 증거하므로
장차 성도의 부활의 확증을 갖습니다.
이단성이 농후한 자유주의 신학자인 몰트만의 십자가 사상은 종말론적으로
삼위일체론에 적용하여 실존주의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 결과 사신신학으로 전락하는 계기를 만들고 말았습니다.
성경신학은 하나님이 구약에서 하신 약속의 성취로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즉 언약대로 오셔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으므로 신실성을,
하나님의 계시된 뜻대로 되었으므로 주권성을,
그의 부활하심을 인하여 전능성을
그리고 단번에 영원한 속죄를 이루시므로 영원성을
또한 죄인을 위하여 지셨으므로 자비성을 계시하셨다고 증거합니다.
또한. 몰트만의 역사관은 보편역사관을 부정하고 종말론적인 역사관을 말합니다.
그는 미래의 희망이 역사를 이끌어 간다고 하므로 인간을 역사의 주관자로 삼고
하나님의 존재를 역사에서 제거합니다.
성경신학에서는 하나님이 과거의 역사에서 약속하시고 그것을 때가 차매 성취해 나가시므로
역사가 하나님에 의해서 시작되어졌고 주관되어지고 종말을 향해서 나아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특히 몰트만은 성경을 장래 주어질 종말에 의해서 해석하므로
하나님의 자기 계시로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이르지 못합니다.
몰트만이 주장하는 희망의 신학을 자세히 상고해 볼 때,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은 희망의 근거로 약속을 제시하지만
계약의 관점으로 이해하므로 인간이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현재적 결단과
계약의 준수를 해야 하는 인간에 의한 신학이므로 인본주의 신학입니다.
참고로, 성경신학은 성경은 하나님이 자기계시를 위해 약속하시고
약속하신 하나님이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주권성을 계시하고 약속을 성취하심으로 하나님의 속성과 존재를 증명합니다.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에서는 희망의 원리를 부활에 두면서 부활은 역사적인 성격이 아니고
종말론적이어서 종말에야 확증될 사건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그의 사상의 중심에 있는 부활신학에서 하나님의 존재의 확정을 미래에 보류하여
불가지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몰트만의 십자가의 신학(?) 에서 종말론적 삼위일체를 제시하여
신이 십자가에서 죽음을 말하므로 신을 제거하게 됩니다.
성경신학에서는 십자가와 부활은 언약 성취의 실증으로 제시함으로
언약하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적으로 증거합니다.
자유주의 신학자 몰트만은 제 3세계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서
자유주의 정치신학을 전개해 왔습니다.
몰트만은 특히 흑인해방신학, 여성 해방신학, 남미 해방신학, 민중신학 등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그들의 영향을 받은 자유주의 신학자 중 한 명 입니다.
몰트만은 초월적 하나님을 부정하면서 에브너의 말을 인용하여
"영원한 삶은 말하자면 절대 현재에 있어서의 삶이요
실제로 하나님의 현재를 의식하는 인간의 삶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위르겐 몰트만(Jurgen Moltmann) 같은 자유주의 신학자를 경계해야 합니다
동성애자이며 이단 카돌릭 사제인 ●헨리 나우웬의 [[한국 추종자들 종교카르텔]]에 의해 →→
몰트만은 한국교회에 잘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한국의 여러 교회에서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밥벌이 종교인들의 농간 때문에 몰트만을 건전한 신학자로 혼동하고 있는
정신나간 목회자들도 있습니다.
특히 이단성이 농후한 자유주의 신학자인 몰트만의 교회관은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교회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몰트만은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의 모임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있는 곳이 곧 교회라는 논리를 폅니다.
자세히 설명한다면 몰트만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이 가난한 자들이나 병든 자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으며 이는 가난한 자나 병든 자와 함께 하는 것은 자선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것이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즉 그는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의 영향을 받은 정치신학에 의하면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이시니 그것이 곧 교회라는 것입니다.
결국 몰트만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한 성도들의 모임으로 된 성경적인 교회를 무시하고,
본인의 정치신학에 의거하여 교회를 자유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는 것입니다.
몰트만이 가진 신학사상은 엄청난 이단성을 가진 매우 불건전한 신학사상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몰트만을 이단이라고 강력하게 정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개혁주의 교회와 성경적 근본주의 오순절 교회가 →
이단성이 농후한 문제의 인물인 몰트만과 몰트만의 신학을 경계해야 합니다.
A ◆우선 그의 신관은 뉴에이적 만유재신론적 신관입니다.
만유내재신론 (萬有內在神論) 이란 영어로 panentheism으로서
만유가 하나님을 담고 있다는 뉴에이저 신관과 연결되지요.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신학에서 강조된 하나님의 초월성은 약화되고
하나님의 내재성이 극단적으로 강조됩니다.
B ◆또 하나의 심각한 문제는만유회복론입니다. 몰트만은 그의 주요 저서 [오시는 하나님]에서
죄인들과 심지어 마귀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일시적인 심판이 있겠지만 심판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마귀도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과 화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단적인 몰트만의 신학사상은
성경을 근거로 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수용하는 개혁주의 교회들과
성경적 오순절 근본주의 교회들은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 사상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은 종말론적인 계시관에 의하여 확증되지 않는 미래의 부활에 대한 기대에 의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보류시키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을 못박아 버려서 제거합니다.
이제 남은 것은 미래에 희망과 기대를 심어주어서 역사함으로 나타나는
인간 공동체인 교회만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 교회는 인간의 결단과 노력으로 가난과 질병과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상황으로부터 해방시켜야 할 의무가 남은 것입니다.
그 일을 하는 것이 선교이고 교회의 사명이라 하므로
해방신학과 정치신학, 그리고 사회구원론에 이릅니다.
이와 같은 몰트만의 신학사상은 에른스트 블로흐의 희망의 철학의 도전에 대한
신학적인 비판과 답변이라기보다는
희망의 철학을 기독교로 각색한 철학사상에 불과한 기독교의 탈을 쓴 사회주의 사상입니다.
이러한 그의 사회구원적인 교회관은 세계교회연합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현재의 종교연합운동인 종교다원주의의 모체가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단성으로 가득찬 자유주의 신학자인 몰트만의 교회론은
실존주의적인 교회론으로 해방신학과 정치신학에 귀결됩니다.
결론적으로 몰트만은 성경이 말하는 부분을 넘어서 성경이 말하지 않는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고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와 신학의 절대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몰트만의 신학은 이단성이 농후함으로 한국교회는 몰트만을 경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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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독일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독일 기독교 연합회와 독일의 크리슬람 운동
2. 지금 독일 기독교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독일 기독교 연합회와 독일의 크리슬람 운동
독일 기독교연합회(EKD : Evangelischen Kirche in Deutschland)는
독일 교회들을 대표하고 있다. 그리고 독일 정부 관할 교회(Landeskirche)들은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에 깊이 물들어 있으며, 동성애 결혼을 지지한다.
EKD는 동성애 목사들을 인정하고 동성 결혼을 축복하며,
심지어 포르노 잡지를 교회 차원에서 나누어주는 일도 한다.
EKD 핵심 인물인 ‘니콜라우스(Nikolaus Schneider)’는 성경만이 진리이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기독교 진리’를 공식적으로 부정한다.
EKD의 또 다른 핵심 인물인 ‘마르고트 캐스만(Margot Kaßmann)’은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을 부정한다(Margot Kaßmann - wikipedia).
EKD는 성경의 절대적인 권위를 부인하고 자유주의 신학을 근거로 해서
성경 비평에 입각한 학문연구의 결과를 중요시 여긴다.
이제 독일에서는 기독교와 이슬람이 연합한 ‘크리슬람’ 운동이 보편적인 현상이 되었다.
그러나 독일 정부로부터 월급을 받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경적 근본주의 오순절 목사들은
‘예수님 만이 구원자’임을 외치며,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내세워 영혼구원에 앞장서고 있다.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교회들을 위해 중보 기도해야 할 때이다.
크리스찬트리뷴 특별호(2013년 3월 28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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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단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보편구원론] 사제는 행복한가?
김석년목사[서초교회]와 관련하여 생각하며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 소재]의 말과
이단이며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웬의 특별한 행복
동성애 사제 헨리 나우웬을 경계하며
이단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보편구원론] 사제는 행복한가?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서초구 반포동 or 서초중앙로 소재)의 말과
이단이며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웬의 특별한 행복
이단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혼돈에 빠지는 크리스찬이 있는 듯하다.
김석년목사(서초성결교회)같은 종교인은, 동성애자이며 이단인 헨리 나우웬 카톨릭 사제를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국민일보에서 자랑스럽게 인터뷰를 했다.
그런 경우를 볼 때 헨리 나우웬은 특별히 행복한(?) 사람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진리이신 예수를 따르는 목회자 및 성도들과 참된 예수님의 몸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는 보편구원론자이며 동성애자(Gay)인 헨리 나우웬】은
① 행복하지 않을 뿐더러,
② 지금 지옥에서 엄청나게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③ 광명의 천사 가면을 쓰고 많은 사람들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지옥 인도자’들의 롤모델이고,
④ 이단 헨리 나우웬을 통하여 참다운 인생의 성공을 발견했다는 김석년목사 같은
부류의 사람들을 조심해야 할 것이라고 많은 크리스찬들이 언급하고 있다.
⑤ 참고로 이단이며 동성애자인 헨리 나우웬을 통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 믿음의 고백은 김석년목사의 신앙의 고백일 뿐이다.
⑥ 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은 이단을 경계하면서,
‘동성애자 헨리 나우웬은 성공한 인생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Gay(동성애자) 사제’ 라고 경계한다.
⑦ 이것이 김석년목사와 예수님의 참된 목회자들의 차이점이다.
⑧ “ 국민일보는 기독교신문을 표방하나, 많은 사람들은 국민일보를 단순한 세상 일간지로 여기고,
이태형 기자는 월급 받는 기자일 뿐 ”이라고 언급하는 크리스찬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기독교 신문을 표방한 국민일보는 동성애자이며 이단인 헨리 나우웬 사제에 대해
정확하게 글을 써서 국민일보에 대한 독자들의 우려를 없애고, 기독신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하도록 ‘미션’면 담당 종교국의 편집방침이 정비되어야 한다고 많은 분들이 지적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보편구원론자인 이단 헨리 나우웬을 미화하는 글을 쓰는 종교부 기자들에 대해
올바른 기사 작성의 방향을 제시해 주어야 할 것이다.
예수 외에도 구원이 있다고 믿는 이단 헨리 나우웬에게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을 발견했다’는
김석년목사의 글도 실어서는 안된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하는 바이다.
국민일보는 미션면(종교면)을 면밀히 지켜보는 기독인 독자들이
예기치 않는 행동(국민일보 불매운동)을 촉발하지 않도록 자체 정화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국민일보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진실한 크리스찬 기자도 있음을 알고 있다.
국민일보 이태형 종교 기자는 국민일보 ‘한마당’이라는 기고란에
‘나우웬의 벤치’
(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0003684304&code=11171211 )
라는 기사를 쓰며 이단 카톨릭 동성애 사제 헨리 나우웬을 은근히 좋은 각도로 홍보하고 있다고
많은 목사님들이 염려하며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또한 국민일보 이태형 종교 기자와 김석년목사는 얼마나 친밀한 관계인지,
이단 동성애(Gay)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의 영성을 추구하는 바에 있어서
아름다운 동행을 하는 관계인지는 몰라도, 이태형기자는 기사를 쓸 때
“서초교회 김석년 목사는 “목회는 하나님이 ‘봐 주셔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봐 주시는 만큼’ 목회하다가 어느 순간 ‘하나님이 봐 주시지 않는다’고 느껴지면
항복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다시 ‘하나님이 봐 주신다’고 느껴지면
‘다시 목회를 하면 되는 것’이라는 설명” 을 인용한다.
참으로 아름다운 동행인 듯 하다고 많은 성경적 목사들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보면 김석년목사는 동성애자 이단 카톨릭 사제 헨리 나우웬을 통해서
참다운 인생의 성공이 무엇인지를 발견하게 되었다고 말한 것이
시간이 지나가면 하나님이 봐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이 아닌지
많은 목사님들이 실소를 금치 못한다고 많은 성도들이 언급한다고 전해진다.
한국 사회와 한국 교회, 공공의 유익을 위해 이 글을 공표합니다.
†한국교회이단연구소
출처:크리스찬트리뷴
http://www.kctn.net/contents/news/newsView.asp?board_type=0105&board_title=&board_nm=&search_field=&search_word=&page_no=1&action_flag=&page_str_menu=0105&bbs_seq=6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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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독일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단 칼 바르트는 누구인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과 믿음은 아래와 같다
1. 성경은 무오(無誤)하지 않다.
선지자들과 사도들 자신은 심지어 그들의 직분에 있어서도, 심지어 증인으로서의
그들의 역할에 있어서도, 심지어 그들의 증거를 기록하는 행위에 있어서도,
우리와 같이 실제, 역사적 인간이었고 그러므로 그들의 행동에 있어서 죄가 있고
그들의 말이나 기록에 있어서 잘못을 범할 수 있었고
또 실제로 범했다(Church Dogmatics, I. ii. pp. 528, 529).
2. 성경의 역사적 사건들 전반에 대해 회의적이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같은 인물들이 후대의 신화 제작의 산물들이든지 아니든지
무슨 문제가 되는가[!](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65).
구약과 신약의 성경 역사는 실상 전혀 역사가 아니고,
위에서 보면 일련의 자유로운 신적 행위들이며 아래서 보면 본질상 불가능한 어떤 것을 이루려는
일련의 결실 없는 시도들이다(Ibid.).
진정한 역사 속에 ‘역사적인’ 것과 ‘비역사적인’ 것이 동반하고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고 의무적이다(Church Dogmatics, III. i. p. 81).
우리는 아담 안에 있는 전체 진리가 위치한 앞뒤 문맥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 자체로는 그것이 거짓이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에 관계된다는 사실에서만
어떤 타당성을 가진다(Christ and Adam, pp. 54, 55).
3. 성경의 천지 창조 기록은 사가(saga)이다.
그것은 자체 안에 시간의 시작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의 역사적 실상은
모든 역사적 관찰과 진술을 피하며, 성경의 창조 이야기들에서 오직 순수한 사가(saga)의
형태로만 표현될 수 있다(Church Dogmatics, III. i. p. 42).
[그는 사가를 ‘역사의 선(先)역사적 실상에 대한 시적 묘사”라고 설명했다(Ibid., p. 81).
그것은 신화와 같은 개념이다.]
4. 아담의 타락은 사가(saga)이다.
그 첫번째 사람이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이런 식으로 존재하게 된 자로서
존재했다고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역사가 아니고 오직 사가(saga)일 뿐이다. . . .
그리고 타락, 즉 그 첫 사람의 타락이 발생했던 것은 바로 이런 영역에서,
다시 말해 예언적으로 증거된 말씀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이었다(Ibid., IV, i, p. 508).
5.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들은 신화이다.
우리의 세계가 예수 안에서 다른 세계에 의해 접촉될 때, 그것은 역사, 시간, 혹은 사물로서
직접 관찰될 수 있기를 그친다. . . . 그리스도로서, 즉 메시아로서의 예수는 역사의 종말이시다.
그리고 그는 오직 역설로서(키에르케골), 승리자로서(블룸하르트),
원시 역사로서(오베르베크)만 이해될 수 있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해 있는 지평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그 지평을 수직적으로 위로부터 가로지르신다.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역사 안에서 오직 문제 혹은 신화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Ibid., pp. 29, 30).
6.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탄생을 분명히 긍정하지 않는다.
그의 어머니가 젊은 부인으로 불리우는가 아니면 처녀로 불리우는가 하는 옛 논쟁은
그 진정한 의미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다(Church Dogmatics, IV. i. p. 5, footnote).
7.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역사적 확실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
역사적 사건이 아니다(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부활은 역사 안에서 일어난 한 사건(an occurrence)이다. . . .
[그러나] 부활은 도무지 역사상의 사건(an event in history)이 아니다
(The Epistle to the Romans, p. 30).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Church Dogmatics, IV. i. p. 335).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의 역사는--현대 학자들의 사고형식들과 용어로--사가(saga) 혹은 전설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대항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현대적 의미에서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Ibid., pp. 335, 336).
8.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나 그의 재림은--그것은 동일한 것인데--역사적 사건이 아니다.
여기에서 우리의 관심은 한 사건 즉 비록 그것이 역사 안에서의(in) 유일한 실제적 사건이지만
역사의(of) 한 실제적 사건이 아닌 사건에 대한 것이라는 것을 역사가들은--
물론 그것이 그들의 확신을 파괴하게 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재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9. 보편 구원론적 경향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버려두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버림을 당하거나
최종적으로 타락하도록 허용되지 않는다. . . .
하나님의 은혜는 반드시 죄인에게 심판의 형태를 취하지만 그를 포기하지는 않는다.
심지어 심판의 형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는 은혜이기를 중단치 않는다
(The Word of God and the Word of Man, p. 90).
하나님의 ‘예’[용납]는 선언되었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 . .
그것은 영원 전부터 그가 아들 안에서 택하시고 사랑하신 인류에 대한 그의 ‘예’이었고
‘예’이다(Ibid., IV. i. p. 356). 하나님의 영원한 뜻에 근거하여 우리는 모든 인간 존재가,
심지어 가장 쓸데 없는 자들, 가장 악하고 불쌍한 자들까지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형제이시며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이심을 생각해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생각 위에서 그를 취급해야 한다(The Humanity of God, p. 53).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대해 그 어떠한 종류의 제한을
가할 아무런 신학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만큼은 확실하다.
우리의 신학적 의무는 그것[하나님이 인자하심]이 우리가 전에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을 보고 깨닫는 것이다(Ibid., p. 62).
10. 죽은 자의 몸의 부활을 부정한다.
몸의 부활은 스캔달이요 부조리요 종교적 물질주의요 거침돌이다(죽은 자의 부활, 89쪽).
11. 성경은 윤리의 객관적 규범이 아니다.
사람은 자유의 은사(gift)에 내재한 명령에 따라 행동할 때 선을 행한다.
그는 그의 자유에 반대되는 법에 복종할 때 악을 행한다. . . .
[그러나] 어떻게 인간의 자유가 인간의 행위에 대해 지침과 기준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자유인은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인 명령에 복종한다.
왜냐하면 이 명령을 통하여 인간의 자유가 권위적 형태를 취하고 인간이 직면하고 측정되는 바
그 명령이 확고하게 되기 때문이다
(“The Gift of Freedom: Foundation of Evangelical Ethics,” The Humanity of God, p. 84).
선과 악의 문제는 결코 사람이 일련의 규범들로서의 하나님의 권위적 말씀을
인용함으로써 대답되지 않는다.
그것은 결코, 선하고 악한 행위들의 법전, 선하고 악한 것에 대한 일종의 잣대로서
사람에 의해 발견되거나 자신과 타인들에게 부과되지 않는다(Ibid., p.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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