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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행차
누가복음 19:28~40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기 위하여 베다니 동네에서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행진 과정을 기록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날은 유월절 닷새 전 날입니다. 전날 밤 베나디 동네 문둥병자 시몬의 집에서 나사로의 누이 마리아의 향유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던 예수님은 이제 다음날 해가 떠오르자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올라가시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이 예루살렘의 입성은 예수님의 사역의 최종적인 마무리를 위한 중요한 전환점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이제 분명하게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명백히 드러낼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하심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전에는 예루살렘의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에 대한 적대감을 극명하게 드러냄으로 조용히 시골로 물러나서 은인자중하며 이방 지역 베뢰아를 중심으로 전도 활동을 했지만, 이제는 자신이 성경에서 약속된 메시야라는 것을 공공연히 나타나실 때가 되었다고 여기신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예수님은 한 가지 일을 준비하기 위하여 제자 두 사람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우리 28절로부터 3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 불리는 산쪽에 있는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예수님께서 주무신 베다니 동네는 예루살렘으로부터 동쪽으로 2km 떨어진 동네요 벳바게는 베다니에서 조금 올라가다 보면 나오는 감람산 동쪽 기슭의 동네입니다. 벳바게는 예루살렘에서 10분 거리에 있는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은 벳바게 동네를 거쳐 감람산 기슭을 돌아 산 정상을 통과하여 예루살렘 동문으로 들어가면 됩니다. 그러니 지금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들을 벳바게 동네로 보내어 그 동네 길에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보면 풀어 끌고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여기서 왜 갑자기 나귀 새끼를 타고 가실 생각을 하셨을까요? 오랜 여행 끝에 몸이 고단해서 그렇게 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자 하신 것은 자신을 왕으로 선언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이는 이미 구약 성경에 예표적으로 나타난 일입니다. 다윗이 자기 여러 아들 중에서 솔로몬을 자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삼는다는 것을 공식화하였을 때에 명한 명령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주의 신하들을 데리고 내 아들 솔로몬을 내 노새에 태우고 기혼으로 인도하여 내려가고 거기서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은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너희는 뿔나팔을 불며 솔로몬 왕은 만세수를 하옵소서 하고 그를 따라 올라오라 그가 와서 내 왕위에 앉아 나를 대신하여 왕이 되리라”(왕상 1:33~35)
여기서 보면 이스라엘의 왕은 노새를 타고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백성들의 환호 속에 취임하는 왕은 노새나 나귀를 타고 보좌에 올라 앉는 것입니다. 나귀와 노새는 다 키도 작고 성격이 온순하여 농삿일을 하고 짐을 나르는 짐승인데, 이스라엘의 왕이 이 작은 짐승을 타고 왕의 자리에 등극하는 전통을 지키는 것은 그들이 세상의 임금처럼 포악하고 권위적인 왕이 아니요 백성들에게 지극히 온유하고 평화로운 왕권을 행사하는 왕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 선지자의 예언에도 장차 그리스도가 오시면 그가 바로 나귀를 타고 왕위에 오를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 바 있습니다. 스가랴 9:9,10 말씀에 이르기를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내가 에브라임의 병거와 예루살렘의 말을 끊겠고 전쟁하는 활도 끊으리니 그가 이방 사람에게 화평을 전할 것이요 그의 통치는 바다에서 바다까지 이르고 유브라데 강에서 땅끝까지 이르리라”
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렇게 예루살렘의 입성을 앞두고 제자 두 사람에게 시켜서 나귀 새끼를 데려와 준비하라고 명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요 약속된 구원자요 그를 통하여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실 평강의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시려는 뜻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곧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실 일을 눈앞에 앞두고 있는데, 자신이 그렇게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가장 중요한 일을 더 이상 조용히 은밀하게 덮어두고자 아니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시는 이 구속 사역은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알고 기억하게 하시려고 이제 공공연하게 자신을 대중 앞에 드러내려고 이렇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영광을 얻으시고 만민의 구원의 터를 완전히 닦을 때가 왔기에, 이렇게 담대하게 사람들 앞에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런 의도에서 예수님은 이제까지의 은밀한 사역 방식을 완전히 버리고 유월절 명절에 예루살렘에 모여든 유대인들과 당시 페르시아, 아프리카, 유럽 각처에 흩어져 살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모여든 눈앞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실하게 보여주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대적자들조차 예수님의 역사 속의 현존했던 일과 그가 로마 제국의 통치 한복판 가운데 십자가에 죽으신 사실만큼은 도저히 부정하지 못하고 인정하는 명백한 역사적 사실로 만들었습니다. 이는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예수님을 믿는지, 안 믿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는 공개적인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믿든지 안 믿든지, 예수님이란 존재가 있었고 그가 이천년 전에 예루살렘에서 모든 인류의 죄를 대속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든지 비웃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는 표지로서 주어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은 세상의 한쪽 구석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요 모든 세상 사람들의 눈앞에서 공공연하게 벌어진 하나님의 구원 사건인 것입니다. 최근 대표적인 무신론 철학자인 리처드 도킨스도 말하기를 “예수는 실존했겠지만 성경 이야기는 사실 아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철저한 무신론자 역시 예수의 실존과 그의 죽음에 대하여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임을 수긍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쉬웠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역사적 실존과 그의 죽으심과 부활은 후일에 누구라도 나는 몰랐다고 핑계대지 못하고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합당한 대답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려고 준비하는 과정을 보면, 우리 주님의 기이한 지식과 세상의 모든 것들을 그 뜻대로 다스리시는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31절로부터 3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말하기를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를 태우니”
예수님은 베다니의 맞은편 마을은 벳바게 동네로 추정되는데 그 마을에 제자 둘을 보내면서 매여 있는 나귀 새끼를 풀어오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나귀 주인이 그 이유를 물을 때에 “주가 쓰시겠다”라고 말하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보면 주인이 이 말을 들으면 즉시 보낼 것이라는 말씀도 덧붙여 제자들을 보내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맞은편 마을에 들어가면 나귀가 매인 것도 미리 아셨으며, 그 나귀 중에 아직 한번도 사람이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있는 것도 아셨습니다. 마태복음은 나귀 어미와 나귀 새끼 둘이 매여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으니, 이 나귀 새끼가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는 어린 풋내기 나귀 새끼인 것을 더욱 분명히 말해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주인이 항의할 때에 주께서 쓰시겠다는 말을 하면 곧 순종하여 그 나귀 새끼를 보내줄 것이라는 것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나귀 새끼는 본래 한번도 사람을 태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사실 예수님을 태운다면 거부하고 싫어할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한번도 등에 사람을 태워본 적 없는 새내기 나귀가 어떻게 한번에 사람을 태우고 잘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이 타실 때 그것이 순종하여 예수님을 잘 태울 것을 아시고 그렇게 나귀의 행동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그 주권대로 다스려 이루어가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주인이 왜 내 나귀를 풀어 가져가냐고 항의했을 때 예수님께서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무엇이냐면 “주께서 쓰시겠다”라고 대답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원문으로 살펴보면 더 뜻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그 원문의 뜻은 “그것의 주인이 필요로 하신다”라는 뜻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기가 나귀의 원 주인이라고 그 나귀와 나귀 새끼의 주인에게 전하라고 말씀해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그 나귀 새끼의 주인이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면서, 그 주인에게 그것을 지금 필요하여 잠시 쓰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주인이 그것을 줄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했는데,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아마도 이 나귀 새끼의 주인은 예수님을 아는 자요 믿는 자였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제자들의 얼굴도 알아보았을 것이요 예수님이 자기 나귀 새끼를 가져다가 쓰신다는 사실을 알고는 도리어 기뻐하면서 어서 가져가 쓰시라고 내어드렸을 것입니다.
이 일을 통하여 우리들은 지금도 예수님께서 온 세상의 주인으로서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고 있고 그 주인들이 누구인가도 다 알고 계심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것들의 주인이 바로 예수님 자신이고 그것들을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쓰고자 하실 때 얼마든지 그것들을 불러 쓰신다는 사실도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날도 온 세상의 왕이신 주님께서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우리의 것을 쓰고자 하여 요구하실 때에는 우리들은 그것들이 내 것이라고 내놓지 않으려고 움켜쥐지 말고 이 나귀의 주인처럼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즉시 내어놓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님이 자기의 필요를 위하여 우리의 자녀들을 내놓으라고 하실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좀 주의 일에 써야 하겠으니 주의 종이 되도록 내놓으라고 하시면, 아무리 가문을 일으킬 재목으로 생각하고 법대를 보내고 의대를 보내고 사업가로 쓸 계획이 있었을지라도 주님이 쓰신다고 말씀하시면 주님께 자기의 아까운 자녀라도 기꺼이 주의 종으로, 선교사로 내어드려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재능이나 우리의 시간이나 우리의 재물이나 우리의 열심, 우리의 건강도 원주인이신 주님께서 필요하다고 요구하시면 “주님이 오죽하면 나를 쓰시겠다고 하시는가” 하고 오히려 기뻐하며 감격하면서 주저없이 기꺼이 내어드리는 주님의 진실한 종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 한번도 사람이 타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타신 영적 의미를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구약 성경에 보면, 사람이 한번도 타지 않고, 멍에 매지 않은 짐승을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적이 있습니다. 레위기에 보면 사람이 부정해졌을 때 그 물을 뿌려 정결케 하는 물을 만들 때 사용된 것이 멍에 매지 아니한 붉은 암송아지의 재였습니다. 또한 신명기에 보면 목격자가 없이 피살자가 들판에서 발견되면 가장 가까운 마을의 장로들이 그 무고한 자의 피에 대하여 속죄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그 때 쓰인 속죄 제물은 멍에 매지 아니한 암송아지였습ㄴ이다. 또한 법궤가 이방 지역 블레셋에 빼앗겼다가 다시 되돌아올 때 그 법궤를 모시고 이스라엘로 모셔 오는 수레를 끄는 짐승으로 한번도 멍에 매지 아니한 암소 두 마리가 젖 먹는 새끼를 떼어 놓고 끌도록 했습니다.
이처럼 멍에 매지 아니하고 사람이 한번도 타지 아니한 짐승을 하나님의 일에 쓰는 것은 그것이 사람에게 그 힘을 소진되지 않고 오직 거룩하게 하나님께만 사용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한번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택하시고 예루살렘을 타고 입성하신 것 역시 예수님께 순수하게 드려져서 거룩하게 사용되기 위함입니다. 이후에 예수님의 시신을 보관했던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 역시 사람이 한번도 쓰지 않았던 새 무덤이었던 점과 같은 맥락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세상 일에 우리 자신의 힘을 소진하기 전에 주님께 먼저 드려서 주님께 쓰임받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일주일의 첫 날인 주일을 주님께 온전히 드려서 주님께서 한 주간의 첫 시간을 사용하게 합시다. 하루의 첫 시간을 주님께 기도하며 예배하는 시간으로 삼고,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고자 할 때에도 쓰다가 남은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 귀한 부분을 드리고 난 이후에 사용하도록 합시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기쁘게 우리들의 헌신을 받으실 줄 믿습니다.
이제 주님이 말씀하신 대로 그 두 제자가 나귀 새끼를 풀어 끌고 오자,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십니다. 그 때 일어난 일을 36절로부터 38절까지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가실 때에 그들이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 내리막길에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들이 본 바 모든 능한 일로 인하여 기뻐하며 큰 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 이르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라도 하니”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가시자 사람들의 반응이 뜨거웠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신 의미를 그들이 거의 다 알아챈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바로 약속하신 그리스도시라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한 선지자의 행동이 아니요 왕의 등극을 알리는 왕의 행차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자 예수님의 제자들도 뜨거운 열정이 생겨났고 예루살렘에 명절에 찾아온 순례객들도 이 모습을 보고서 열렬히 환영하는 표현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나귀 타신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자기의 겉옷을 폈습니다. 겉옷을 펴는 행위는 지극한 존경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 아합 왕가를 멸절시킨 예후 장군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을 보면, 엘리사가 보낸 젊은 선지자가 전시 지역에 찾아와 기름붓고 왕이 될 것을 예언한 사실을 측근 장군들이 알자마자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서 섬돌 위에 깔고 나팔을 불면서 “예후는 왕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이러한 풍속을 순례자들이 기억했는지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예수님 앞에 펴놓음으로써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들에서 나뭇가지를 꺽어서 주님 앞에 펴면서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면서 큰 소리로 찬양하며 외쳤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는 이렇게 찬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오늘 본문 말씀과 마태, 마가복음에서 기록된 이 찬송은 시편 118편 25절, 26절의 찬송시를 노래한 것입니다. 시편 118편은 장차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적 시편이었는데, 거기에 그리스도가 오실 때 즐거워하며 기뻐하면서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하게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라고 노래하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서 사람들이 ‘호산나’라고 외친 것은 시편 118편 25절의 ‘이제 구원하소서’라는 뜻의 히브리어 ‘호시안~나’라는 어귀를 그대로 노랫말로 부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호산나’를 예수님을 향하여 부른 것은 그를 메시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인정하는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적잖은 백성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당시 로마 제국의 압제 아래 시달리는 폭정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인즉, 예수님은 분명 그리스도시요 인간의 모든 죄와 저주와 사망과 멸망의 폭정에서 인간을 구원해주실 자인 것은 분명하지만, 당시의 유대인들이 바라는 현실적인 로마의 정치적 폭정에서 그들을 건져내고 옛날 다윗 왕국의 지상적 영광을 재현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유대인들의 성급한 열망을 다 아시고 여리고 삭개오 집에서 ‘한 므나의 비유’를 가르치면서 왕위를 받으려고 먼 나라로 떠난 한 귀인의 이야기를 가르치신 바 있었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이루어질 그 날은 우리 주님이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신 후에 다시 재림하실 먼 훗날이 될 것입니다. 주님은 유대인들과 명절 순례자들의 들뜬 환호성과 찬양 속에는 그들의 이러한 조급한 정치적 열망, 곧 지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열망이 담긴 것을 다 알면서도 그냥 내버려두셨습니다.
실상인즉, 주님은 그들의 들뜬 세상적 욕망으로 인한 주님을 향한 뜨거운 환영이 며칠 후 예수님이 체포되고 비참하게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때에는 변하여 순식간에 그들이 예수님께 냉담함과 비웃음을 퍼부을 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과거 다윗 왕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열렬한 환영 속에 왕위에 올랐고 나라를 위하여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하며 많은 전리품을 가져올 때에 열렬한 환대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중년과 후반에 이르러서 압살롬의 반란이 일어나자 그의 백성과 친구들 중에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배반하고 저주하고 대적하는 편에 가담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들은 변덕스러운 사람을 믿을 대상으로 삼지 맙시다. 우리는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 말고, 항상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고 칭찬받기를 늘 힘쓰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나귀 타신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나아갈 때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하는 그 때에 아주 기분이 상하고 얼굴을 찌뿌린 얼굴을 한 일단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9절로부터 40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 바리새인들도 예루살렘으로 예배 드리러 올라오는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여 하룻밤을 보냈다는 것을 알게 된 대제사장과 종교 권력자들이 예수님의 동태를 살펴보려고 예루살렘 성에서 내려보낸 사람들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으로 오실 때 수많은 사람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예수님을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왕으로 인정하면서 호산나라는 감탄사를 연발하는 것을 보면서 극렬한 불쾌감을 느꼈습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 때문에 일어난 소란 때문에 로마의 정치 군사적 압제가 강화되어서 자기들의 지금까지 누려온 그나마의 제한된 평안이나 종교적 기득권을 잃어버릴까봐 불안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예수님께 환호하며 찬송부르는 제자들과 순례자들을 비난하면서 예수님께 무리를 잠잠하게 할 것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말을 듣고서 단호하게 거절하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만약 저들을 침묵하게 만들면 온 세상 피조물들이 일어나 소리치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점을, 그가 왕이라는 것을 인정하며 찬양을 부를 것이라는 겁니다. 그러므로 제자들과 순례자들의 찬송과 기쁨의 고백과 겉옷을 펴고 경배를 드리며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가 옳게 행한 것이라고 그 대적들 앞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변호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침묵은 금이요 웅변은 은이다.”는 격억이 있지만 이 말이 모든 상황에서 맞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 마땅히 영광을 돌리며 주님을 인정하고 찬양하며 경배 드려야 할 때에 사람들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다물고 침묵하는 것은 주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시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이단의 괴수로 여기며 비난하며 핍박하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을 공개적으로 메시야라고 고백하며 겉옷을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면서 큰 소리로 호산나를 외치며 뒤따르는 이들은 굉장한 용기를 가진 행동임이 분명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록 그들 가운데 온전하지 못한 지식과 그릇된 열심도 갖고 있었지만 그들의 언행을 주님께서 귀하게 받아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때로 주님에 대하여 그릇된 열심을 가졌거나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행동함으로써 세상으로부터 비난과 멸시를 불러오기도 하고 의도치 않게 주님의 이름에 손해를 끼친 형제와 자매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걸고 때로는 실수도 하고 잘못도 범할 수 있지만, 그들이 진심으로 주님을 믿고 섬기는 형제 자매라면 그들 가운데 있는 허물과 죄성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과 함부로 합세하여 거세게 비난하거나 내치는 매몰찬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들은 그런 형제와 자매들의 잘못들을 인하여 비난과 멸시를 세상으로부터 함께 묵묵히 당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형제들의 연대를 끊어내는 어리석은 자들이 절대로 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 때의 바리새인들처럼, 오늘날 세상은 형제들의 실수와 허물과 범죄를 트집 잡아서 주님을 향한 성도들의 경배와 찬양과 예배와 봉사를 완전히 침묵시키려고 몰두합니다. 예를 들어 최근 대전에서 IM 선교회에서 영어 교습을 위한 집회를 하여 코로나가 몇 백 명이 감염되었고, 전남 광주의 안디옥 교회 같은 경우에도 감염자가 누적 확진자가 약 80여명이나 나왔습니다. 이로 인하여 광주 시에는 대면 예배 금지가 실시되고 있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제가 보건대, IM 선교회 지도자인 선교사는 이단은 아니고 좀 부주의한 분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위중한 시기에 잘못된 판단을 하여 다중이 모이는 집회를 열었던 것은 참 지혜롭지 못한 판단입니다. 청소년들이 한 자리에 많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먹고 마시고 접촉이 클텐데, 그런 점을 계산하지 못하고 영리 목적에 빠지고 또 지나친 영적 자만심으로 그렇게 집회를 감행하여 이런 문제가 일어난 것 같습니다. 이 점에서 그의 지혜롭지 못한 판단력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또 그와 관련된 안디옥 교회를 보면 담임 목사님인 박영우 목사님은 통합 교단 교회 중에서 유일하게 WCC부산 총회를 반대한 올바르고 소신 있는 목사님이고, 그분의 동생은 ‘두고 보리라’는 유명한 천국 지옥 간증을 하고 소천하신 깡패 출신 박영문 장로님의 친형입니다. 그래서 박영우 목사님은 기도 많이 하시는 분이요 충성스러운 주의 종으로 인정받을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그 교회에 터졌습니다. 이처럼 안타까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우리는 비둘기같이 순결하면서도 뱀처럼 지혜로울 필요가 있는 것을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혹은 그릇된 열심이나 실수 때문에 본의 아니게 생기는 잘못과 허물로 인하여 세상이 주님을 향하여, 교회를 향하여 침묵하게 만들려고 옥죄는 현실 속에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이 시대도 세상 사람들의 매서운 눈초리와 비난과 멸시를 면해보려고 만약 주님을 향한 경배와 찬양과 섬김을 외면하고 조용히 침묵한다면, 하나님은 하찮은 돌과 나무와 바람과 들풀로라도 소리쳐 왕 되신 주님을 찬양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보다 더 부족한 미물이나 또 다른 사람들을 통하여 주님은 마땅히 받으셔야 할 영광과 존귀를 반드시 취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엄중한 상황 속에서 뱀처럼 지혜롭되, 최선을 다하여 여전히 주님을 신실하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신앙 때문에 핍박과 멸시와 비방을 받을지라도 묵묵히 주님을 위하여 섬김을 계속합시다. 세상이 침묵을 강요할지라도 더욱 크게 소리를 쳐서 “호산나 우리 주님이 여전히 왕이시다”라고 인정하며, 그가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것을 굳게 믿고 기다립시다. 주님은 자기 백성이 부족하고 연약하고 어설픈 지식과 부족한 지혜를 가진 것을 아실지라도 그들이 드리는 찬양과 경배와 섬김을 받아주실 것입니다. 또한 자기 백성들을 세상으로부터 변호해주시고 끝내 이기게 해주시고 왕이 그 영광 중에 다시 오시는 날에 자기의 충성스러운 종들에게 크신 상을 베풀어주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맺겠습니다. 온 세상의 왕이신 주님은 십자가가 기다리는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십니다. 그 때 왕이신 주님은 겸손하고 온유하게 나귀를 취하여 타고 올라가셨습니다. 주께서는 그 성품이 겸손하고 온유합니다. 우리들도 겸손하고 온유합시다. 그리고 나귀 주인에게 주님께서 “그것의 주인이 필요로 하신다”라고 말씀하시며 요구하매 나귀 주인이 기꺼이 주님께 내어 드렸듯이 우리도 주님께 요구하실 때 언제든지 기꺼이 우리 자신과 소유를 내어드리는 종들이 됩시다. 왕이신 주님께서 우리가 올려드리는 찬양과 경배는 자기의 겉옷을 그 발 아래 깔아드린 당시 사람들처럼 최상의 경배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마귀와 세상과 우리의 타락의 본성은 자꾸만 주님께 드리는 우리의 경배와 신앙과 헌신을 억누르고 침묵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침묵하면 돌들이 입을 열고 들풀이 춤을 추며 산들이 박수치며 바다가 함성을 질러 왕 되신 주님을 높이 찬양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침묵을 강요하는 이 시국에도 더욱 기쁨과 감사함으로 주님께 경배하며 우리 주님을 지극한 열심히 섬깁시다. 호산나 주님께서 우리를 곧 구원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