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에 한 번,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아시아 교회에서 나온 문헌을 함께 읽고 나누는 공부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지난 겨울 동안은 사회주교연수회(BISA) 관련 문헌을 읽었는데, BISA는 1970~80년대 아시아의 빈곤 현실에 대해 주교님들이 논의하던 자리였다. BISA는 단순히 말로만 나누는 연수가 아닌 며칠간의 생활 현장 체험이 먼저 이뤄졌는데, 그 체험 덕분인지 여기에서 나온 문헌들은 현실에 대한 성찰이 무척 깊이 있고 교회의 역할에 대한 제안도 구체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특히 1986년 1월에 태국에서 마지막으로 열린 7차 BISA를 앞두고, 한국 주교님들이 1985년 8월 말 국내에서 2박 3일 동안 자체 현장 생활 체험을 진행하고 내놓은 보고서가 인상 깊었다.
주교님들은 가난한 이들을 방문하거나 시찰하며 그들과 피상적인 대화를 나눈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분을 밝히지 않고 농민, 노동자, 빈민들과 같이 먹고 자며 그들처럼 함께 가난한 사람으로 지내는 체험을 하였다. 2박 3일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이 연수에 참여한 주교님들은 교회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해야 하는 존재라는 신원의식을 되새겼다. 좀 길지만 현장 생활 체험 종합보고서에 실린 인상적인 성찰을 그대로 옮겨보겠다.
“우리는 이상과 같은 상황을 체험을 통하여 확인하면서 가난한 이들이 이토록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된 근본 원인을 생각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추구하여 온 개발과 발전의 실체는 인간을 더욱 인간답게 만들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개발과 발전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을 비인간화시키는 개발과 발전이 아니었던가를 심각하게 자문하게 되었다. …중략… 그러한 가운데서도 복음적 가치를 잃지 않고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을 발견하였을 때 그리스도의 고통과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다.
즉 가난한 이들이 외부적으로 강요된 삶의 틀에서 해방되고 가진 자들이 회심할 때 참다운 복음화가 이 세상과 모든 인간에게 일어나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가난한 이들의 삶을 체험하면서 그들이 바로 이 세상과 우리 모두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있는 이들인지도 모르며 그러기에 그들의 삶 속에 우리 모두를 복음화시키는 힘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교회를 겸허히 되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동일시하셨던 가난한 이들에게 교회는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얼마만큼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가난한 이들을 단지 동정과 자선의 대상으로만 보아온 것은 아니었던가를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이 자신들의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노력을 통하여 그들 스스로가 인간답게 되어가는 것을 볼 때 교회도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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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수환 추기경도 1985년에 사북탄광 현장체험을 했다. 아시아 사회주교연수회(BISA) 프로그램에 따라 주교들이 현장체험을 하기로 했는데 김 추기경은 '인생 막장'이라는 탄광을 선택했다. 당시 추기경은 이렇게 술회했다. "막상 갱까지 기어들어가서 탄을 캐는 척 해보니까 이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몸을 곧추세울 수도 없이 좁은 탄구덩이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 7시간, 8시간씩 일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에 한국인 노무자들과 막장에 가본 적이 있지만 한국 탄광은 작업환경, 특히 안전 면에서 너무나 열악했다. 나 같은 사람은 한나절은 고사하고 한시간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
광야에서 예수님께서 마주친 악마의 유혹은 단순히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욕망을 부추겨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만들려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유혹은 ‘하느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단서처럼 하느님의 뜻을 찾아 광야에 나선 이들과 교회를 향해, 힘 있는 존재가 되어 그가 지향하는 하느님 뜻을 실현하라고 부추긴다.
선한 의지로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다면 자신뿐만 아니라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다 먹여 살릴 수 있을 테니 유혹이 아니라 오히려 하느님 뜻을 실현할 기회로 여겨질 수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든 불구덩이에 빠지든 나를 구해 주실 거라는 믿음으로 위대한 권능을 몸소 보여주어 악마의 비아냥거림을 잠재울 수도 있다. 그런 확신이 아니더라도 세상 모든 나라와 그 영광을 가질 수 있다면, 그냥 눈 한 번 딱 감고 악마에게 경배하고 이 세상에 메시아가 되어 원래 품은 선한 뜻을 실현할 수도 있다.
이제는 교회도 세상에 줄 것이 많아야 사람들을 모을 수 있고 그 힘을 바탕으로 하느님 뜻을 이 땅에 더 잘 전할 수 있다고 여겨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교회를 꿈꾼다. 그리고 신자들에게도 일단 세상에서 성공하여 사회지도층이 되어 봉사하는 것이 하느님 권능을 드러내는 일이라고 권한다. 굳이 사회 불의에 맞부딪쳐서 시끄럽게 소란 떨지 말고, 교회가 가난한 이들보다는 힘 있는 이들과 잘 어울려서 좋은 사회를 이루는데 한몫을 할 수 있으면 하느님 나라를 앞당기는 일이 될 거라고 처신하는 듯하다. 성공과 권력과 영광을 가지는 길이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는 길이라고 공공연히 말한다. 이건 악마의 유혹이 아닌가?
악마는 결코 뻔히 그 속내를 알아낼 수 있는 쉬운 유혹을 우리 앞에 내놓지 않는다. 감히 시편 말씀을 인용하며 예수님을 유혹하는 것처럼, 그 모든 일이 하느님 뜻인 양 교묘히 포장한다. 태초의 인간을 처음 유혹했던 뱀도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하신 말씀과 정반대되는 말을 일부러 던지면서, 하느님이 모든 것을 다 허락하셨다는 확대해석을 하도록 간교하게 유혹한다.
하지만,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세상의 영광을 쫓으라는 악마의 유혹에 대해 하느님의 뜻을 따라야 하며, 하느님의 뜻은 '철저한 포기'라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악마의 유혹은 하느님 뜻을 내세우지만 결국은 하느님 뜻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권능을 더 드러내고 싶은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공의 메시아가 아니라, 철저히 포기하는 메시아였다.
가난한 생활을 체험하면서 그 안에 복음의 길이 있음을 발견한 주교님들의 맑은 성찰을 지금의 교회 역시 되새길 필요가 있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가난과 함께 하기를 선택하는 것이 바로 악마의 유혹을 거세게 밀쳐내는 힘이 될 것이다.
이미영❘우리신학연구소 연구실장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