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해 여름 아내가 꽃꽂이를 위해 성전으로 가져온 어떤 화초.
며칠 후부터 한 주간에 걸쳐 두세 마리 씩 모두 열여섯 마리가 부화되어 날아다니다가
창밖으로 나가는 놀라운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성전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비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내 가슴은 경이로움의 고동을 느꼈었다. 아, 세상은 살아있는 무엇이다.
가까운 곳에 조그만 동산을 둘러싼 둘레길이 있다.
가을이면 몇 그루 떡갈나무 아래로 많은 도토리가 떨어지고
내가 지나갈 때면 여기저기서 "툭 툭"하고 도토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면 그때부터 어김없이 아주머니들이 올라와서 다 떨어질 때까지 도토리를 줍는다.
한 개의 도토리를 주워서 바라본다. 반짝반짝하는 고동색의 귀여운 알맹이.
그런데 그것 역시 단순한 물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 한 알의 도토리가 떡갈나무가 되고, 그 떡갈나무에서 수많은 도토리가 생겨나는 것,
다시 말하면 이 한 알의 도토리는 이미 거대한 떡갈나무를 포함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집 콘크리트 바닥에서 돋아난 잡초를 본 적이 없으신가.
콘크리트 틈새, 아스팔트를 비집고, 보도블럭 사이, 바위의 미세한 틈 등
불모의 바닥에서 그 억압적 조건을 헤치고 올라온 초록 잎사귀와 조그만 꽃망울엔 이상한 힘이 있다.
그것은 단순한 감상이 아니라 조그만 생명체 안에 움직이는 기적 때문이다.
이른 봄 나뭇가지에 돋아나는 연한 순과 꽃봉오리들을 보라.
분명히... 분명히... 그것은 말을 한다. 나에게 걸어오는 무슨 비밀 언어가 있다.
내 밥상 위에 놓여있는 한 그릇 쌀밥, 쟁반 위에 담겨있는 한 알의 사과는 기적이다.
그것은 왜 그런 모양으로 생겨나서 어떤 과정을 지나 내 앞에까지 올 수 있었겠는가?
내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 하나, 눈송이 하나는 기적이다.
그것의 구성 성분이나 형태나 목적은 나 자신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나 자신을 향하고 있다. 이 우주에 내재하는 어떤 의미와 어떤 언어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수십년을 채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도박이요 의무요 짐이요 기회이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간은 이 삶을 힘겨워하며, 이 삶의 무게를 견디다 못한 사람들은 중도 하차를 한다.
한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아이가 감내해야 할 인생 과제는
이 길을 걸어왔던 사람들로 하여금 측은함마저 느끼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도 그 얼마나의 사람들이 희망과 기쁨을 뒤로 하고 생의 저편으로 떨어져갈 것인가?
살아가는 동안 인간의 삶은 풍전등화이고 조그마한 행복마저 벌레 먹은 흔적이 가득하다.
고급 주택의 창문엔 밝은 불빛이 흘러도 그 창문 안엔 두려움과 외로움에 냉각된 군상들이 오물거린다.
인간은 삶의 고단함 아래서 눈물만을 흘리다가 사라져야 하는가.
아니다. 삶에는 은총과 고통이 공존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의 삶에 작용하고 은혜가 아니면 인간은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다는 게 일차 사실이다.
일상화된 생활 때문에, 치열한 삶의 틈바구니에서의 호흡 곤란으로,
또 어느 정도는 인간의 어둡고 부패한 본성 때문에 우리는 보지 않는다. 보지 못한다.
굳이 일반 은총이니 특별 은총이니 신학적 분석까지 할 필요 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 은혜라는 것을, 자신이 사는 것이 온전히 은혜라는 바탕 위에서라는 것을.
한편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인간의 일생은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 무거운 짐에 억눌린 아픔으로 말미암아 은총의 하나님께로 피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니
삶은 하나의 기회도 되는 것이다. 그것도 은총이다.
도토리 속에 떡갈나무가 있다.
우리가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분도 우리 안에 계신 것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생명과 은혜가 작동 원리이기에 우리는 생명과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그 은혜가 이 세상 바위틈에서도 당신의 한평생을 받쳐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
2023. 11. 25
이 호 혁
첫댓글 아멘! 주님 안에 거함으로 더 많은 은총을 누리게 하소서.
나비 장면은 정말 신비로운 경험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