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9월15일(화)흐림
역사는 진보하는가?
베르톨트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는 “민주주의는 위기를 만나면 곧잘 파시즘으로 변한다.”라 주장했고,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은 니체를 따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모든 문명의 역사는 야만의 역사였다.”
가을 하루 보낸다. 마음은 주위환경을 비추어 밝힌다, 마치 가로등처럼. 가로등에 의해 밝혀진 공간은 가로등의 마음 씀(sorge)의 범위이다. 마음은 비춘다. 마음 빛이 가닿는 데까지 어둠이 밝혀져 드러난다. 그런데 마음-비춤은 자기 영역의 끝을 감지하는 즉시 그 끝을 넘어선다. 마음의 비춤은 한계가 없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마음을 넘어간다. 마음을 넘어선 마음은 자신을 잊어버린다. 그래서 마음은 마음-없음이다. 마음-없음은 마음-없음을 넘어간다. 그래서 마음-있음이다. 마음-있음은 다시 마음-있음을 넘어선다. 마음은 있음과 없음을 호환자재한다. 마음을 뭐라 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벌써 텅 비워져 자유로우니, 아무런 장애 없이 삼라만상을 비춘다. 지금 가을 보름달은 침대에 누워 잠을 잔다.
2020년9월16일(수)흐림, 간혹 부슬비
하늘에 구름이 흘러간다. 하늘은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고 안다. 생각이 흘러가는 걸 알고 보는 눈이 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은 일이 없이 그냥 쉰다. 생각이 사라지면 눈은 볼 일이 없어 그냥 쉰다. 볼 것이 없어 볼 일이 없는 눈은 눈이기를 놓아버리고 쉰다. 그렇다고 잠든 것도 아니요 흐리멍덩해진 것도 아니다. 다만 묵연하게 쉴 뿐이다. 그러나 침묵을 고수하지도 않으며 명경지수에 얼어붙지도 않는다. 그것은 죽은 게 아니어서 어떤 부름에도 잘 응한다. 부름이란 대상과 일이 다가오든지 사람이 찾아오는 일이다. 가을 물에 단풍잎 떨어져 추파가 번져간다. 삽짝 밖에서 부르는 소리 있어 고개를 돌린다. 불단에 차를 올릴 때가 되어 물을 긷는다. 할 일이 하나도 없다가는 문득 어디선가 일이 생기면 저절로 응한다. 할 일 없이 쉬면서도 늘 일 할 준비가 되어있다. 일하다 쉬다가, 쉬다가 일하다가, 自가 他타를 부르고 他의 부름에 自가 응하며 호응이 자재하다. 모든 게 한때다. 한때에 한 가지 일을 한다. 한 가지 일이 한때이다. 지금 한때면 족하다. 사실 지금 한때가 백척간두다. 백척간두에 서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과거를 굽어보고 다가오는 죽음을 본다. 백척간두에서 툭 떨어지면 지금 한때! 바로 여기다. 여기 지금 한때 살아 있음!
2020년9월17일(목)흐림
당신은 홀로 떨어져 있지 않다. 그건 착각이다. 홀로임을 느끼는 그것이 바로 전체이다. 전체가 홀로임을 스스로 연출하여 외롭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니 홀로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온몸으로 껴안고 안심하라. 전체인 당신이 어떤 계기로 홀로 남겨져 외로움을 느낄 때도 그 외로움을 감싸고 있는 무한 여백은 네 편으로 남아 있다. 그 무한한 여백이 함께 하고 있음을 느껴라. 아, 무한 여백의 입김은 따스하구나. 아침 울타리에 파란 나팔꽃을 피우고 담장 위에 진분홍 능소화를 벙글게 하지 않느냐? 나팔꽃과 능소화에게 색깔을 부여하는 저 힘, 그 은혜가 너를 빼놓지 않고 주어졌느니, 그대여, 가을 아침 공기를 감사히 들이마시고 발걸음 가볍게 세상으로 나아가라.
만상이 허공중에 가설되어 있다. 인간조차도 가설된 존재이다. 架設, install, (장비, 기구, 장치를) 설치하다. (건물을) 짓다, (프로그램을) 설치하다. 자아, 세계, 대상도 가설된 것이다. 가설되었다는 말은 한시적으로 기능하는 기계장치가 구성되어 있다는 말인데, 주변환경의 여타 장치와 연결되어야 기능하므로 환경의존적이다. 환경과 분리된 그 자체로는 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기에 지극히 조건의존적, 상황의존적이다. 이런 면에서 고유의 속성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불교적으로 말해서 조건의존적-연기적 존재이기에 자성이 없다. 架設은 架空이다. 空에 架하여 設한다. 즉 空에 시렁이나 횃대를 걸어 사물을 설치, 설비한다. 걸음 걸음 空, 들숨 날숨에 空. 만상이 공중에 가설되어 있다.
초하루 독경법회 하다. 일진스님에게서 문자가 오기를 정오스님이 돌연 입적했다 한다. 정오스님은 1987년 봉암사에서 처음 만난 참선수행자이다. 그가 야외에서 결가부좌로 24시간 장좌불와를 하는 것을 보고 내가 크게 감명을 받아 지금까지 그를 기억하고 있었는데, 이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입적한 원인이 패혈증이란다.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다. 도인은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거나, 양약을 쓰지 않고 수행으로 이겨낸다는 믿음 때문에 치료할 기회를 놓쳐버린 것이다. 수행으로 병을 낫게 한다는 믿음은 순진하도록 무지한 일이다. 道人病도인병이 그를 잘못 이끌었다.
2020년9월18일(금)흐림
1. 맛지마 니까야 135, 쭐라 깜마 위방가 숫따
존재들은 자신의 업의 소유자이며 kammassaka
자신의 업의 상속자입니다. kammadayada
그들은 자신의 업으로부터 비롯되고 kammayoni
자신의 업에 묶이고 kammabandhu
자신의 업을 귀의처로 합니다. kammapatisarana
모든 존재는 자신의 행위를 소유하고,
행위를 물려받으며,
행위로 인해 생겨나고,
행위에 얽매여있다.
자신의 행위가 자신의 안식처이다.
자신이 자신의 주인이고, 자신이 자신의 미래를 만든다.
행위의 천함과 고귀함에 따라 자신의 삶도 그러할 것이다.
2. 카프카의 변신 The Metamorphosis
자기를 도구화한 삶은 마침내 벌레가 된다. 먼저 변신하지 않으면 배신당하리라.
가족에게 헌신한다는 이유로 자기의 삶을 방치하지 말라. 그건 자기기만이다.
자기 자신으로 살라.
3. 타자의 시선은 지옥이다. -사르트르
타자의 등장. 내가 타자를 바라보듯이 타자도 나를 바라본다. 타자는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서 나를 객체로 만든다. 타자는 나를 바라보고 판단하고 평가하고 규정하는 힘이다. 나도 타자를 바라보고 객체화한다. 이제 나와 타자는 서로를 바라보며 상대방을 객체화하려고 싸우는 관계가 형성된다. 내가 상대방을 객체로 파악할 때 상대 또한 나를 바라보며 대상으로 삼는다. 헤겔식으로 표현하자면 ‘인정투쟁’이다. 이런 갈등은 너무 강력해서 상대방이 없는 곳에서도 상대방의 시선을 느끼고 마치 누군가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런 점에서 타자는 나의 자유를 제약하는 존재다. 이런 나와 타자의 관계를 사르트르는 “타자, 그것은 지옥이다.”라고 했다.
4. 현존재가 사태를 바라볼 때 언제나 이미 자신의 거기에(da)를 갖고 들어간다.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없으며, 언제나 이미 거기에를 앞서 갖고 있다. 존재론이 인식론보다 앞선다.
초록보살이 점심 공양 청을 해서 사천 비란치아 식당에 모이다. 모두 아홉 명. 공양 마치고 사천치과에서 스케일링 하다.
2020년9월19일(토)맑음
시선의 무게
-황인숙
한, 시선이 사라졌다는 것
저 모든 집들과 길들,
사람들, 팽이처럼 쏘다니는
바람, 햇빛의 도금이
씌워졌다 벗겨지는 유리창들
응시하던 시선의
무게가 툭, 떨어져 나갔다는 것
둥둥 떠오르는 지상의 시선들이
납작하게 맺힌 잿빛 구름
흩어져 아득히
흘러간다
이곳에서 멀리
그대에게 몸을 굽혀
나는 천천히
천천히 절을 하네
움찔, 아찔
-황인숙
햇볕에 따끈하게 데워진
쓰레기봉투를 열자마자
나는 움찔 물러섰다,
낱낱이 몸을 트는 꽃잎들
부패한 생선 대가리에 핀
한 숭어리의 흰 국화
그들은 녹갈색과 황갈색의 진득거림을
말끔히 빨아먹고
흰 천국을 피워냈다,
싸아한 정화의 냄새를 풍기며
나는 미친 듯이 에프킬라를 뿌려대고
한 천국을 지옥으로 만들고
지옥을 봉했다,
그들을 그들이 태어난
진득거림으로 돌려보냈다.
<감상> 관계를 망치는 건 천국의 나날 저 밑에서 조금씩 움트는 캄캄한 욕망이다. 내가 만든 지옥에서 그도 나도 고통받겠지만, 부디 나 혼자 오래 괴롭기를, 내가 후회와 반성, 부끄러움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나라는 지옥에서 그가 영영 벗어나기를.
동초스님과 진안 연세안과를 다녀오다. 도착하니 이미 진료예약이 마감되었다고 해서 하릴없이 돌아왔다.
2020년9월20일(일)맑음
展開風月添詩料, 전개풍월첨시료
裝點江山歸畵圖. 장점강산귀화도
눈 앞에 펼쳐진 풍월은 시의 재료에 보태지고
거기에 강산을 점점이 장식하면 그림이 된다.
시가 그림이 되고, 그림이 시가 되는 건 작가의 안목에 달렸다. 작가의 안목은 감상자의 안목으로 간파된다. 곧바로 사람의 마음을 보아 소통한다. 見心直通견심직통이다. 비단 시와 그림뿐이랴. 인간 만사가 그러리라. 마음을 얻지 못하면 무슨 짓을 해도 불통한다. 어떻게 해야 타인의 마음을 얻을까? 타인의 마음은 고사하고 자기의 마음과도 불화하는 사람이 어찌 타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으리오! 자신 내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를 듣는가? 구름이 하늘을 밟고 가는 소리를 듣고 바위가 바람께 전하는 말을 듣는가?
초유, 초아, 초연보살 방문하다. 세 보살은 오랜만에 스님을 찾았다. 초아는 갓 난 아이를 안고 왔다. 아이를 축복해주다.
이담메 뿌냥 아유-완노-수캉-발랑 빠짜요 호뚜
idhamme punam ayu vanno sukham balam paccayo hotu
이러한 공덕으로 장수를 누리며, 아름다운 외모를 지니고 행복하며 건강하기를!
초유와 초연은 남편들이 얘를 돌보는 사이, 틈을 타서 온 것이다. 얘를 어떻게 키울까를 이야기하면서 차를 마시다. 어린이에게 부모의 욕망을 투사하지 말라. 어린이는 아득한 과거 생부터 자기가 만들어 온 자기 세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니 이생에 부모 자식으로 맺은 인연일랑 영겁을 윤회하는 시공간에 바둑돌 하나 놓는다는 것으로 만족하라. 자식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보내온 선물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내 자식’으로 와준 것만으로도 행복했고 감사했던 초심을 잊지 말라. 그 마음으로 얘를 키우라. 아이가 자기 세계를 되찾아 자기로 살게 도와주라. 부모세대의 복사품으로 만들지 말라. 아이를 믿어주라. 모든 인간은 자유롭게 놓아두면 스스로 행복한 길을 찾아가게 마련이다. 모든 인간은 즐거움과 자유와 밝음과 선함을 원한다. 부모는 아이의 善友가 될지언정 독재자나 관리인이 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