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
서울역 인근 동자동엔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큰 쪽방촌이 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민 판자촌이었고, 이후 여인숙이 되고, 쪽방촌이 되었다. 나는 용산에 살아온 지 15년이 되었지만 8년 전 지역 활동으로 세월호 노란 리본을 함께 만들며 동자동을 알게 되었다. 내가 만났던 쪽방촌 주민 중에는 고추잡채를 기가 막히게 만드는 중식 요리사도 있었고, 멋진 한국화 화가, 단소 연주와 창을 하는 거리 연주자도 있었다. 어떤 분은 은평구의 단칸방으로 이사하면서도 궁궐로 가는 기분이라 했다. 남자 어른들만 살 것 같지만 여성들도 있고 손녀딸을 키우고 있는 할머니도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사람 사는 곳이다. 책 한 권으로 담을 법한 사연도 있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주로 듣는 소식은 죽음이었다. 40을 넘긴 나이까지 엄마를 애타게 찾던 주민의 갑작스러운 죽음, 알코올성 치매로 쪽방촌 활동가를 경찰서에 들락거리게 했던 주민의 죽음.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게으르기에 자업자득한 것이며 복지를 늘려봤자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 말한다. 하지만 내가 만났던 쪽방촌 주민들은 어떻게든 자신의 존엄을 지키고자 몸부림치는 사람들이었다. 단 1,000원을 내더라도 비용을 지불하고 먹는 식사를 기뻐했고, 알코올중독으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노란 리본을 만들면서도 사회에 참여하는 자신을 매우 뿌듯해했다. 그곳은 어떤 지역보다 주거가 취약하다. 수년 전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이어갈 수 있는 공공재개발 방안이 약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논의와 진행이 멈추더니 최근에는 민간재개발로 기우는 듯하다. 경제 논리로 주민들은 처음부터 권리가 없다 할 수 있겠지만 주민들은 약속되었던 미래가 박탈당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점점 밀려날 수밖에 없다.
희망을 찾으려니 막다른 골목에 갇힌 듯
가난, 정치, 세대, 젠더, 이념 문제부터 이웃의 관계까지 곳곳에 날이 서 있다. 사람들이 언어는 타인을 이해하기 위함이 아닌 자신의 논리를 강화하고 공격하는 데 사용된다. 마음속에 이미 판단하고 결론을 내린 후 그 논리를 정당화하고 더욱 강화할 뿐이다. 넷플릭스 다큐 <소셜 딜레마Social Dilemma>, 요한 하리의 책 <도둑맞은 집중력>에서는 스마트폰과 미디어 환경이 사람을 어떻게 더욱 양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는지 보여준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 양극단으로 치닫는 기후 위기처럼 사람들도 서로 다른 극을 향해 빨려들어간다. 결국 파괴로 향하는데도, 고통이 발생하는 것을 보면서도 사람들은 멈출 줄 모른다. 우리는 어디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희망을 찾으려니 막다른 골목에 갇힌 듯 오히려 무력해진다. 뉴스에서 쏟아지는 수많은 이야기를 보며, 무슨 특별한 일 없나 하며, 나 스스로 고통을 구경하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가슴에 다 담을 수 없는 아픔과 슬픔과 고통이어서 어쩔 땐 망각하는 능력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리 똑똑한 사람이라도 세상 모든 걸 다 알 수 없다. 사람은 분명 한계가 있기에 모든 일을 가슴에 담아두고 함께 아파할 수는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 실체는 교만일 테다. 그러기를 강요한다면 폭력이 될 것이다. 세상의 아픔과 고통을 다 알 수는 없지만 마음이 쓰이는 일을 외면하지 않고 동참한다면 좀 더 나은 세상을 사는 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사람이 좀 더 많아질 때 뉴스는 전시된 고통이 아닌 연결의 허브가 될 수 있다. 나와 거리가 먼 뉴스에도 연결되어야겠지만, 일상에서도 좀더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너의 이야기를 듣고, 너는 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다고 고백하며, 바로 옆에 있는 사람 말에 귀 기울이면 어떨까.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늘 강조하는 경청, 그 능력이 필요할 때다. 거기에서 공감과 연대가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