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도 창세신화가 있다
창세신화 하면 누구나 먼저 성경의 창세기를 떠올릴 것이다. 각 나라나 민족마다 나름대로의 창세 신화를 가지고 있다. 이웃 나라 중국과 일본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유독 우리에게는 창세신화가 없다고 하였다. 단군신화를 우리의 창세신화로 아는 이가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을 창조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나라를 세우는 건국신화다. 그래서 여태까지 우리에게는 창세신화가 없다는 것이 통설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은 문헌에 기록되어 있는 신화만을 보고 한 일면적 주장이었다. 무릇 문학이란 기록문학과 구비문학으로 대별된다. 구비문학이란 문자로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뭇 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오는 문학을 가리킨다. 신화, 전설, 민담, 속담, 민요, 무가(巫歌 무당 노래), 수수께끼 등이 이에 속한다.
우리의 창세신화는 이 중 무가 속에 찬연히 담겨 있다. 곧 우리의 창세신화는 문헌에 기록되어 전해오지는 않았지만 구전으로는 완벽하게 전해온 것이다. 이 중 대표적인 창세신화는 제주도의 ‘천지왕 본풀이’와 함경도의 ‘창세가’이다. 그러면 천지왕 본풀이부터 보기로 하자.
천지왕본풀이는 큰굿의 첫머리에 신들을 청해 모시는 제의절차인 초감제에서 불리는 무가다. 초감제란 처음으로 신을 내려오게 하는 강신제라는 뜻이다. 즉 신을 청할 때 부르는 청신의례(請神儀禮)다. 큰굿에서는 옥황상제 이하 모든 신을 청하는데, 천지왕본풀이에 나오는 천지왕은 우주기원과 관련되는 신이기 때문에 초감제에서 가장 먼저 불린다. 그러면 그 내용을 한번 보자.
태초에 천지는 혼돈 상태로 있었다. 하늘과 땅은 떨어지지 않아 서로 맞붙어 있었고, 암흑으로 휩싸여 한 덩어리로 되어 있었다. 이 혼돈천지에 개벽(開闢)의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갑자(甲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하늘의 머리가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을축(乙丑)년 을축월 을축일 을축시에 땅의 머리가 축방(丑方)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생겼다. 이 금이 점점 벌어지면서 땅덩어리에서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점점 분명해졌다.
이때 하늘에서는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이슬이 솟아서 서로 합수되어 음양의 상통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저 별이 생겨나고, 아직 태양이 없을 때 천황닭이 목을 들고 지황닭이 날개를 치고 인황닭이 꼬리를 치니 갑을동방에서 동이 트기 시작했다. 이때 하늘의 옥황상제 천지왕이 해와 달을 두 개씩 내보내어 천지가 개벽하게 되었으며, 아직은 질서가 없어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느 날 천지왕은 좋은 꿈을 꾼 후 지상으로 내려가 총명부인을 배필로 맞고자 했다. 며칠간의 동침 후에 천지왕이 하늘로 올라가려 하자 총명부인이 자식을 낳으면 어찌할지를 물었다. 이에 천지왕이 아들을 낳거든 이름을 대별왕․소별왕이라 짓고, 딸을 낳거든 대월왕․소월왕이라 지으라고 했다.
그리고 박 씨 세 개를 내주며 자식들이 자신을 찾거든 이를 심어 하늘로 뻗쳐 올라간 줄기를 타고 올라오라 하였다. 천지왕이 하늘로 올라간 후 총명부인이 아들 형제를 낳으니 이름을 대별왕과 소별왕이라 하였다. 형제는 자라나서 아버지를 만나고자 박씨를 심었다. 박씨에서 움이 돋아 덩굴이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이에 형제는 그 덩굴을 타고 하늘에 올라가 천지왕을 만났다.
천지왕은 형인 대별왕에게 이승, 아우인 소별왕에게 저승을 각각 차지하도록 했다. 그러나 소별왕은 욕심이 많아 이승을 차지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형에게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자가 이승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청했다. 동생은 먼저 수수께끼로 다투었으나 이기지 못하자, 한 번 더 하자고 졸라서 서천꽃밭에 꽃을 심어 더 번성하게 한 이가 이승을 차지하자는 내기를 청하였다.
꽃을 가꾸는 데 있어 대별왕의 꽃은 번성했지만 소별왕의 꽃은 번성하지 못했다. 이에 소별왕이 대별왕에게 잠을 자자고 하고는, 대별왕이 잠든 사이에 몰래 대별왕의 꽃을 자기 앞에 가져다 놓고, 자신의 꽃을 대별왕 앞에 가져다 놓았다. 잠에서 깬 대별왕은 꽃이 바뀐 것을 알았으나 소별왕에게 이승을 차지하도록 하고 자신은 저승으로 갔다.
소별왕이 이승에 와서 보니 해도 두 개가 뜨고 달도 두 개가 뜨고, 초목이나 짐승도 말을 하고, 인간 세상에는 도둑․불화(不和)․간음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을 부르면 귀신이 대답하고 귀신을 부르면 사람이 대답하는 실정이었다. 이에 소별왕은 형에게 이 혼란을 바로잡아 주도록 부탁했다. 대별왕은 활과 살을 가지고 해와 달 하나씩을 쏘아 바다에 던져 하나씩만 남기고, 송피가루 닷 말 닷 되를 뿌려서 짐승들과 초목이 말을 못하게 하였다. 또한 귀신과 인간은 저울질을 하여 백 근이 넘는 것은 인간, 못한 것은 귀신으로 각각 보내어 인간과 귀신을 구별하여 주었다.
다음으로 함경도의 창세가를 보자. 이 창세가는 함경도 함흥 지역의 무녀 김쌍돌이[金雙石伊]가 구연한 무속의 창세신화인데, 민속학자 손진태가 1923년에 채록하여 1930년에 조선신가유편(朝鮮神歌遺篇)이라는 책에 그 내용을 소개한 것이다. 그 줄거리는 이러하다.
하늘과 땅이 나뉘지 않은 상태였다가 하늘이 가마솥 뚜껑처럼 볼록하게 도드라지자, 그 틈새에 미륵이 땅의 네 귀에 구리 기둥을 세워 천지가 분리되었다. 이 시절에는 해와 달이 둘씩 있었는데, 미륵이 해와 달을 하나씩 떼어 북두칠성과 남두칠성 그리고 큰 별, 작은 별들을 마련했다.
미륵은 칡넝쿨을 걷어 베를 짜서 칡 장삼을 해 입었다. 그런 연후에 물과 불의 근본을 알아내기 위하여 쥐의 말을 듣고 금덩산으로 들어가서 차돌과 시우쇠를 톡톡 쳐서 불을 만들어 내고, 소하산에 들어가서 샘을 찾아 물의 근본을 알아내었다.
미륵이 금쟁반․은쟁반을 양손에 들고 하늘에 축수하여 하늘로부터 금벌레․은벌레를 다섯 마리씩을 받았다. 그 벌레가 각각 남자와 여자로 변하여 다섯 쌍의 부부가 생겨나 인류가 번성하게 되었다.
미륵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있을 때에, 석가가 등장하여 미륵에게 인간 세상을 내놓으라 했다. 미륵은 석가의 도전을 받고 인간세상 차지 경쟁을 하게 되었다. 미륵이 계속 승리하자 석가는 잠을 자면서 무릎에 꽃을 피우는 내기를 제안하고, 미륵이 잠든 사이에 미륵이 피운 꽃을 가져다 자기 무릎에 꽂아 부당하게 승리한다.
미륵은 석가에게 인간 세상을 내어주고 사라진다. 석가의 부당한 승리로 말미암아 인간 세상에는 부정한 것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면 위에서 본 두 편의 창세신화에 나타난 우리 신화의 근본 사상과 특색은 무엇인가를 더듬어 보기로 하자.
성서의 창세기에는 “태초에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 하느님이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라 하여 창조주가 이 세상 만물을 창조하였다고 되어 있다. 중국 신화에도 “여와가 황토를 빚어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였고, 또 “여와가 정월 초하룻날에 닭을 만들고, 이튿날에는 개를 만들고, 사흗날에는 양을 만들고 …… 이렛날에는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여 여와가 창조의 주체가 되어 있다. 알타이 지방의 달단족과 시베리아의 야쿠트족, 바이칼 호수 주변의 부리아트족 등의 인류시조 신화들도 한결같이 창조주가 먼저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 신화에서는 위에서 보듯이 그러한 창조주가 없다. 모든 사물의 존재에 우선하여 태초부터 존재하는 창조주의 실체가 설정되어 있지 않다.
천지왕본풀이에는, “태초에 천지는 혼돈 상태로 있었다. 하늘과 땅이 떨어지지 않아 서로 맞붙어 있었는데, 하늘의 머리가 자방(子方)으로 열리고, 땅의 머리는 축방(丑方)으로 열려 하늘과 땅 사이에 금이 생기고, 이 금이 점점 벌어지면서 땅덩어리에서 산이 솟아오르고 물이 흘러내려 하늘과 땅의 경계가 점점 분명해졌다.”고 하였다. 이어서 “하늘에서는 청이슬이 내리고 땅에서는 흑이슬이 솟아서 서로 합수되어 음양의 상통으로 만물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때 하늘의 옥황상제 천지왕이 해와 달을 두 개씩 내보내어 천지가 개벽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창세가에서도, “하늘과 땅이 나뉘지 않은 상태였다가 하늘이 가마솥 뚜껑처럼 볼록하게 도드라지자, 그 틈새에 미륵이 땅의 네 귀에 구리 기둥을 세워 천지가 분리되었다. 이 시절에는 해와 달이 둘씩 있었는데, 미륵이 해와 달을 하나씩 떼어 북두칠성과 남두칠성 그리고 큰 별, 작은 별들을 마련했다.”고 했을 뿐 어느 특정한 창조주는 없다.
여기에 미륵이 등장하지만, 미륵은 하늘과 땅이 붙지 않도록 기둥을 받치는 거인신에 불과할 뿐 창조주는 아니다. 카오스 즉 혼돈의 상태가 음양의 원리에 의하여 하늘과 땅이 분리되고, 하늘의 청이슬과 땅의 흑이슬이 합수되어 만물이 창조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창세신화는 창조신화가 아니라 천지가 개벽하는 신화다. 어느 절대자의 손에 의하여 창조되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조화에 의하여 전개되는 개벽신화다.
인간 역시 창조주의 손에 의하여 만들어지지 않는다. 천지왕본풀이에서는 하늘의 천지왕이 지상에 내려와 총명부인과 결합하여 인간이 만들어지고, 창세가에서는 미륵이 금쟁반․은쟁반을 양손에 들고 하늘에 축수하여, 하늘로부터 받은 금벌레․은벌레가 각각 남자와 여자로 변하여 인류가 생기게 된다. 벌레가 스스로 자력으로 자라고 변신하여 사람으로 변신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 신화에 나타나는 인간관은 조물주에 의하여 처음부터 완벽하게 인간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저절로 개벽된 다음 점차 변화되어 지금의 상태와 같이 조화롭게 되었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이다. 이와 같은 우리 민족의 진화론적 세계관은 현재의 세상이 완벽하다고 보지 않고, 앞으로 더 바람직한 세상으로 발전될 것이라고 보는 미래지향적 세계관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불완전한 현세를 설명고자 하는 것과 합리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천지왕본풀이에서는 대별왕과 소별왕이 세상을 다스리기 위해 다툼을 벌이고, 창세가에서는 미륵과 석가가 서로 경쟁한다. 그런데 두 신화에서 보듯이 시합에서 거짓을 행한 소별왕과 석가가 이겨서 이 세상을 다스린다. 그 결과로 지금 인간 세상에는 도둑, 불화, 간음과 같은 부정한 것들이 성행하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비판적 현실 인식의 한켠에는 미래에 대한 기대와 전망이 내포되어 있다. 비록 지금은 부조리하고 혼탕한 세상이지만, 미륵이 다스리는 미래 세상에는 온전하고 바른 세상이 온다는 진화론적 세계관을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창조론적 신화는 창조주가 우주와 인간 그리고 삼라만상을 완벽하게 창조해 놓았는데, 인간이 잘못을 저질러 이 세상이 부조리한 세상이 되었으며, 그 원죄에 의하여 고통 받는 삶이 되었다고 말한다. 즉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결과로 에덴에서 쫓겨난 것이다. 우리의 진화론적 개벽신화에서는 모든 사물이 자력적 생명력을 지니며 생성 발전해 가는데, 세상을 차지하려는 신의 욕심 탓에 세상이 잘못되어 여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서양의 창조신화가 현실의 부조리를 인간 탓으로 돌려 인간에게 원죄의식을 심어 주는 신본주의라면, 개벽신화는 사람들은 원래 선한데 부정한 신이 세상을 다스리는 탓이라 하여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래서 저쪽의 창조신화가 속죄의식으로 신을 섬기도록 하는 종속적 믿음을 요구하는 개별신앙 중심인데 비하여, 우리의 개벽신화는 현세의 신이 아닌 미래의 신이 구원자로 나타나, 세상이 다시 개벽되기를 소망하는 미래세를 꿈꾸고 있는 것이다.
첫댓글 장 박사님이 아니면 들어볼 수 없는 우리의 창세신화를 잘 읽었습니다.
정말 희귀한 자료를 올려주셔서 고맙습니다.
서양의 기독 신앙은 신본주의인 반면에 우리의 신화는 인본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사실도 수긍을 하게 됩니다.
송하 선생님 오랜만입니다. 졸고 읽어주시고 격려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처음으로 들어보는 신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오작교 선생님 변변찮은 글에 대하여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