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그친 불암산/靑石 전성훈
장대비처럼 쏟아지는 비가 더위를 저 멀리 날려주니 너무나 고맙다. 밤새 내린 비가, 아침이 되어서도 그칠 줄 모른다. 창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고, 핸드폰으로 일기예보를 몇 번이나 확인해 본다. 오전 9시 30분이 지나니 하늘이 개고, 새들이 아파트 꼭대기까지 날아오른다. 이제는 날이 개는 것 같아 산에 갈 준비를 한다. 물 한 병, 막대 사탕 두 개와 과자를 등산 가방에 넣는다. 잊어버리지 않고 필기도구와 노트 그리고 돋보기안경도 챙긴다. 4호선 상계역에 내려서 조금 걸으니까 어느 가게에서 팔려고 굽는 족발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기막힌 족발 냄새가 빨간 뚜껑 소주를 부른다. 당현천에는 제법 많은 물이 콸콸 소리를 내면서 힘차게 흐른다. 재현고등학교 방향으로 가려다가 제4 등산로 이정표를 보고서 방향을 바꾸어 불암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조금 올라가니 대여섯 사람이 일행을 이루어 오르고 있다. 부지런히 걸어 그 사람들을 지나쳐서 앞에서 걷는다. 어제 비가 많이 내린 탓에 바위틈으로도 물이 흐르고 있다. 잠시 물끄러미 소리도 없이 흐르는 물의 모습을 쳐다본다. 여름철 비가 많이 내릴 때를 제외하고는 좀처럼 이런 멋진 장면을 볼 수 없다. 예전에 보지 못하던 계단이 설치된 것을 보니까, 이 코스로 불암산을 찾은 지 제법 오래된 듯하다. 바위와 모래가 섞인 언덕길에 온통 물이 흥건하여 평소보다 신경 쓰면서 조심스럽게 걷는다.
오늘은 내가 다니던 불암산 등산로 중에서 가장 짧은 코스로 오르고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는다. 불암정 정자에 앉아 쉬면서 숨을 고른다. 금강산 자락에서 한양 땅 남산이 되려고 헛된 꿈을 꾸었던 불암산 전설 안내문을 읽으며 웃음을 짓는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오니 땀에 젖은 얇은 옷가지만 걸친 몸이 으스스하다. 더 이상 쉬지 말고 다시 걸어야겠다. 땀을 흘리며 바위에 설치된 물 먹은 밧줄을 잡고서 오르고 또 올라 다람쥐광장에 도착한다. 찬 바람 부는 인적없는 다람쥐광장, 고개를 들어 건너편 불암산 정상을 바라보니, 바람에 휘날리는 태극기 옆에 웬 사람이 혼자 서 있다. 정상에 혼자 있는 사람의 가슴이 뿌듯할 것 같다. 불암산에 가면 정상까지 올라 주위를 바라보기도 하지만, 사람이 북적이면 정상을 피하여 석장봉이나 다람쥐광장에서 쉰다. 오래전 어느 해 추석 전날, 혼자서 이곳에 오르다가 갑자기 소나기를 만난 적이 있다. 소나기가 멈추자 한 걸음조차 내디딜 수 없을 정도로 안개가 심하게 끼어, 한동안 그 자리에 꼼짝 못 하고 그대로 가만히 있었다. 안개가 조금씩 걷히자 주위를 둘러보니, 다람쥐광장 끄트머리 낭떠러지 가까이 서 있는 내 모습을 보고서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히말라야산맥 에베레스트를 가장 먼저 올랐던 영국인 등산가 힐러리경은 “산이 거기 있기에 간다”는 명언을 했다고 한다. 내가 산을 찾는 이유는 뭘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특별한 이유는 없고 심신 단련을 위해서다. 평소 산을 찾을 때 일행과 함께 가는 경우가 드물다. 대게 혼자서 간다. 친구나 일행과 더불어 이야기를 나누며 산을 찾는 것도 좋다. 하지만 자연과 함께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이 즐기기 위해서 홀로 산을 찾는 것을 더 좋아한다. 더하여 몸의 상태를 확인해 보는 덤도 얻을 수 있어서 그만이다. 머지않아 가을이 오고 익어가면 이곳의 나무들도 계절의 부름에 따라 옷을 갈아입을 준비할 때가 오겠지. 산의 그림이 변하여 ‘날 보러와요’하고 손짓하는 그 날을 기대해본다. 물을 흠뻑 먹어 푸르른 숲속의 정취를 마음껏 즐기고 마음의 위로와 평화를 얻을 수 있어 고맙다. 이제는 조심하면서 계곡을 따라서 내려가야겠다. 산에서 내려가려 하니, 얼마 전에 갑자기 세상을 등진 친구 생각이 떠오른다. 시끌벅적거리는 속세에서 함께 지지고 볶으면 될 것을 뭐가 그리 바쁜지, 아프다는 말도 없이 허겁지겁 떠나갈 일이 있을까? 돌아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친구를 그리며 인생의 덧없음에 남은 녀석들과 얼굴을 마주하며 술잔을 나누고 싶다. 울긋불긋하게 가을이 깊어가면 돌투성이 산허리를 껴안고 목청껏 소리 지르며 부르고 싶다. 친구야 보고 싶어. (2024년 10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