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국 아일랜드 기행 65 /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다른 아침이 와서
내가 그대 앞에 멈추어서거든
그대 발길도 내 앞에서 잠시 멈추어 다오
이윽고 다른 아침이 우리 앞을 찾아와서
내가 그대를 떠나야 할지라도
아직 그대 눈길 한 번 못 만나 서성이거든
바람에 흔들리는 나를 잠깐 붙잡아 다오
먼 곳으로 떠나야 하는 날이 와서
바람 속에 촛불인 양 내 몸이 나부끼거든
내가 아직 못 열어본 그대 미소
한 번만 더 만나게 해 다오
다소곳한 그대 아미蛾眉
나의 눈이 되고
나의 귀가 되어
어두운 밤길 가다가
몰래 한 번만 더 꺼내 보게 해 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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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내셔널 갤러리National Gallery
‘내셔널 갤러리’는 입장료가 없었다
돈에 한눈을 팔지 않고
트라팔가 광장의 북쪽에서
누구라도 찾아오는 이의 발길을 막지 않았다
국립미술관이 공짜라니!
나는 믿을 수 없는 곳에서 믿음을 얻었다
세금을 낸 국민들은 이것이 마땅하다는 논리다
이 마땅한 논리가 내게는 왜 낯선 것일까
무료입장은 나에게 익숙하지 않은 세계
낯선 세계를 만나면 시간이 필요하다
갤러리의 입구 쪽 트라팔가 광장으로 면한 벽면에는
들라크르와Delacroix 특별전이 열리는 중임을 알리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판넬이 걸려 있었다
전체 전시관 가운데서 가장 인기 있는 곳은
동관east wing
모네・세잔느・고흐・르누아르・시슬레
나에게 주어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작품을 빨리 보겠다는 생각을 단념하고
몇 작품만을 천천히 보기로 마음먹는다
모네는 한가롭고
세잔느는 조용하고
고흐는 아직도 불타는 중이다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을 대할 때마다
나에게는 그림을 대하는 어떤 버릇 같은 것이 있다
그건 이렇다
나에게로 오고 있는 그림
나로부터 가고 있는 그림
오지도 가지도 않은 채 지금은 멈추어 선 그림
이 세 가지가 그렇다
모네와 세잔느는 멈추어 선 그림
고갱의 ‘타히티의 여인’은 오고 있는 그림
고흐의 ‘해바라기’는 지금도 가고 있는 그림
노르웨이 오슬로 미술관에서 본
뭉크의 ‘절규’도 나에게는
아직도 가고 있는 그림이었다
내셔널 갤러리 동관에서 내가 본 고흐의 ‘해바라기’는
아직도 누군가를 찾아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절규’는 지금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고
‘해바라기’는 누군가의 눈을 들여다보려고
쉼 없이 누군가의 얼굴을 찾아가고 있는 중이었다
내게는 그렇다
그러나 내게는 멈추어 선 그림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지금도 가고 있는 그림이리라
내게는 조용한 그림이
다른 이에게는 떠들썩한 그림일 수 있으리라
지금 오고 있는 그림 중에는
찾아오다가 방금 멈춘 채로 서 있거나
또 다른 길을 찾아 가는 것도 있으리라
대상물의 의미는 그것을 보는 자가 만들어 낸다
바라보는 눈이 대상을 변화시킨다
벽면에 걸려 있는 세계는 붙박이로 서 있는 게 아니다
아는 자와 만나서 대화하고 싶다
‘절규’는 많이 말한다
큰 소리로 부르짖는다
갈 곳을 잃은 채 방황하고 있다
‘해바라기’는 정물이 아니다
방금도 불타는 중이다
손끝으로 건드리면 더욱 맹렬히 불타오를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성전
‘가우디Antoni Gaudí’의 ‘사그라다 파밀리아Sagrada Familia’는
홀로 걸어서 지금도 가고 있는 중인 건축물이다
가우디의 진행형은 아마도 영원히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딘가로 굴러가서 부딪쳐 깨어질지라도
가우디는 죽어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셔널 갤러리는 공짜였다
공짜는 낯설다
낯선 세계에서 나는
지금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인 영혼들을 본다
방황은 멈추려고 있는 것일까
신의 자비를 만나면 방랑을 그칠까
나는 홀로 기다리는 누군가에게로 걸어가서
그의 눈이 되고
그의 빛이 되어
우리들 굴레 밖을 사는 목숨이고 싶다
홀로 제 몸을 태워
어둠을 사르는 불빛이고 싶다
고흐의 ‘귀가 잘린 자화상’을 바라보면
아직도 내 귀가 아프다
그것은 그림이 아니라
숨 가쁜 영혼의 질주이다
아직도 가고 있는 떨림이다
나는 고흐의 작은 그림 ‘해바라기’를 바라보면서
고흐가 자신의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를 떠올린다
광기의 영혼이 쏟아내던 그 순결성이 떠오른다
궁핍과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끝없이 외롭던 영혼의 기나긴 통증을 생각한다
한 폭의 그림이 단 며칠간의 밥값에도 못 미치던
고독하던 영혼의 허기를 생각한다
외로운 영혼은 불타지 않으면 견뎌낼 수 없었으리라
아픔을 견디는 길은 계속해서 불타는 것뿐
‘별이 빛나는 밤’에서
나는 아직도 세상을 떠도는 그의 허기를 본다
항시 목마른 강박공포증
어디론가 가야 하는 그의 눈물겨운 방랑을 본다
입장료가 공짜라니!
공짜로 보는 영혼이 저토록 눈물겹다니!
그렇다
해바라기는 없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
광기는 돌아앉아 방금 쉬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걸어와 눈감고 앉아 있는 것은
그저 꽃의 그림자일 뿐
광기는 제 몸을 벗어 놓고
먼 곳을 향해 다시 걸어가고 있었다
어제의 꽃은 그림자만 쓸쓸히 남고
오늘의 꽃은 분주히 걸어서
아직도 어디론가 가고 있는 중이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버린 그 꽃
한 번만 더 이쪽으로 돌아서서
아직 내가 못 열어본 그녀의 미소를
한 번만 더 보여 달라고
어느 외로운 길 위에서 내 몸이 지칠 때
한 번만 더 몰래 열어보게 해달라고
나는 꽃의 언저리에 귀를 기울여보지만
떠나버린 광인의 발자국소리는 너무도 희미하다
(이어짐)
첫댓글 싱그럽게 깨긋한 북극이 하늘과 이어지는 아일랜드의 환상이 다가옵니다.
미술관람도 내용을 알고 보면 인생이 거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가깝다면 한번 가고 싶은 아일랜드,
시로 감상할 수 있어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