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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추천여행지 스크랩 [경북영천] 농업생활의 기반이 된 수리시설인 청못과 그 기록이 있는 청제비
아도니스 추천 0 조회 76 12.01.01 22: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농업생활의 기반이 된 수리시설인 청못과 그 기록이 있는 청제비

 

우리나라는 삼한시대때부터 벼농사를 위한 수리시설이 있었다. 대표적인 3대 수리시설로 김제의 벽골제, 밀양의 수산제, 제천의 의림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곳 청못도 그에 버금가는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다.

 

 

 

 

 

채약산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모아 논농사에 이용하고자 두 개의 산을 막아서 만든 청못은 우리나라 농업수리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

으로 제방의 길이가 약 240m, 그 높이는 12.5m의 흙댐이다.  저수면적은 11만㎡이고 저수량은 약 59만톤에 이르고 있으나 유효 저수량은

52만 톤이라 한다.

 

청못 아래 펼쳐진 30만평의 구암들 일대가 아직도 이 청못을 중요한 용수원으로 사용하고 있기에 구암들은 가움을 거의 타지 않는다고 한다.

 

청제비는 영천시 도남동 도남농공단지 뒤편에 위치하고 있어 찾는데 조금은 수고스러움이 따랐다.

 

 

  

 

청못의 서북쪽에 위치한 비각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이는 영천 청제비(菁堤碑)와 청제중립비(菁堤重立碑)이다.

문화재청의 기록에 따르면, 이 청제비는 1968년 신라삼산학술조사단(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해 발견되었으며, 양문비로 새겨진 비석으로

년대가 다르다. 신라 법흥왕 23년(536)의 명문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때 새긴 것이고, 반대면의 신라 원성왕 14년(798)의 명문이

있는 것은 임금이 왕대사를 보내어 연인원 14만800여명을 동원하여 이 제언을 수축하였으며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 새긴 것이다.

각기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명칭, 규모, 내용, 동원된 인원수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청제비의 전체적인 모습은 화강암의 자연 판석으로 직사각형의 형태를 하고 있다.

1986년 3월 영천군에서 조사한 바에 따르면 최초의 축조연대는 330년(신라 흘해왕 21)이라 하는데, 이 연대는 벽골제(碧骨堤)의

시축연도와 같다.

 

청제중립비는 1688년(숙종 14년)에 청제를 수리하면서 세운 중립비(重立碑)이다. 이 비는 높이 107cm, 너비 77cm, 두께 15cm인 화강암

비석으로, 비문은 전문 10행 14열이다. 비문에는 청제비가 1653년(癸巳年, 효종 4년)에 두 동강이 나서 먼지 속에 묻혔던 것을 최일봉(崔一奉)

등이 다시 맞추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제중립비에 새겨진 내용중

“지난 순치(順治) 계사년(1653)에비석이 누군가의 손에 절단되어 땅속에 파묻혀버리니 이 고적(古跡)이 전해지지 않음을 안타까워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에 비석을 고쳐 세우고 그 일을 기록하는 바이다. 아, 훗날 사람들이 이 비로 말미암아 제방을 허물지 말아야 할 까닭에

생각이 미친다면 비가 제방에 도움이 없지 않다 할 것이다.“

옛 선조들의 이러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경부고속도를 내면서 청못을 가르는 일이 생겼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보물 제517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관리가 전혀되고 있지 않음에 더욱 마음이 아플 뿐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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