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숙 시인의 단시조집 『어긋나기』
약력
박명숙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1999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중앙시조대상, 이호우 · 이영도시조문학상,
김상옥시조문학상, 노산시조문학상,
성파시조문학대상 수상
시집 『맹물 같고 맨밥 같은』,
『그늘의 문장』, 『어머니와 어머니가』
,『은빛 소나기』.
시선집 『찔레꽃 수제비』.
E-mail . pms5507@daum.net
시인의 말
침묵으로부터,
첫발을 내딛게 도와 준
빗방울 같은 낱말들을 기억하며.
2024년 5월
박명숙
녹색짚신벌레
마침표가 꿈틀댄다 길은 아직 뜨겁다
온몸으로 홀로 사는 짚신벌레 한 마리
발자국 끝날 때까지 삶은 아직 멀었다
어긋나기
끝없는 어긋나기로
긴 하늘 밀어 올리며
홀로 선 잎새들은
마주보지 않는다
아슬한
눈금 사이로
외로움을 가로지르며
웃음끼리
헛웃음과 쓴웃음 너머
옷들이 걸려 있네
옷 안에는 몸이 없네
빈 몸으로 펄럭이네
옷들을 우러르면서
웃음들이 뒤엉키네
소쩍
제 살을 다 발라서 소반에 차려놓고
남은 뼈로 절하는 한 사내를 바라보네
울음도 굶어야 하는 소쩍 새가 그 절 받네
반납
작은 새가 울컥,
작은 혀를 내밀었다
말랑한 붉은 살점을
세상에 반납했다
노래를 뽑아 던지자
뜰의 앞니도 빠져나갔다
해설
형이상학적 언어 탐구로서의 개벽
이 근 배 | 시인,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처음 우주론을 써낸 프톨레마이오스는 2세기 때 그리스의 천문학자로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고 「알마게스트」에 썼었다. 별자리 찾기 등 빼어난 성과도 있고 아직도 다 풀리지 않는 저 무변 광대한 하늘 밖 세계를 내다볼 수 있었다는 것은 하나의 경이이다.
아직 누구도 찾아내지 못하는 한 편의 시를 만날 때 나는 시는 곧 말의 우주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 말 속의 말, 뜻 속의 뜻을 찾아 헤매면서 불타가 꺼냈던 삼천대천세계를 떠올린다. 네 개의 천하가 천개 모인 것이 소천이고 다시 천을 곱하면 중천, 다시 천을 곱해야 대천이라 하니 사람의 생각이 아무리 깊다 한들 어디 그곳까지 이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뒤집어보면 모래알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 하니 시인의 생각이 부딪치고 깨지고 모이면서 얻어낸 것은 어차피 미지의 경지에 닿는 것이고 하늘밖의 하늘만큼이나 아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박명숙 시인은 서른 해 전 나와 시를 함께 공부한 동학同學이다. 한 편 한 편 뽑아 드는 시적 상상력의 넓이와 깊이는 늘 한 걸음 앞서간 것이었으며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조가 문화일보 신춘문예에서는 시가 당선되면서 우리 시단의 신예로 눈부신 광채를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박명숙 시인을 만난 것이 늘 자랑스럽고 그가 내놓는 작품들을 볼 때마다 신선한 충격을 받았고 보다 더 높고 멀게 비상할 것을 예감해왔었다. 더욱 아름다운 것은 아주 멀리 역사가 있었을 때부터 형성되어와서 내 나라 글자인 한글과 만나면서 인류 속으로 파고드는 시조에 몰입하고 있다는 것이며, 그의 창작들은 지금 바깥의 인류가 한글 시에 젖어들고 있는 현상에 큰 깨우침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글 시"에 대해 한 마디 덧붙이자면 시조는 글자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어 한글이 아니고는 쓸 수 있는 시 형식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