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5년 10월 8일 새벽.
일본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로 일본공사관 수비대와 낭인들, 그리고 조선군 훈련대가 명성황후가 거처하던 경복궁으로 들이닥쳤다.
궁내부대신 이경직, 시위연대장 홍계훈과 시위 병사들은 무기를 들었지만 모두 죽음을 맞았다.
일본공사관 수비대 등은 경복궁 내 가장 안쪽 건청궁에서 명성황후를 찾아내 참혹하게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웠다.
을미사변이다.
1900년 고종은 황후의 시해를 막다 희생당한 홍계훈, 이경직 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남소영(한양 남쪽을 방어하던 수비대) 터에 추모 공간을 마련했다.
장충단(獎忠壇)이다.
충절을 권면한다는 뜻에서 장충(獎忠)이다.
'대한제국의 현충원’인 것이다.
지금의 신라호텔 자리다.
고종은 단을 올리고 매년 봄, 가을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조선에서 일본 세력이 커지면서 1908년 장충단에서의 제사가 중단됐다.
1909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당해 사망하자 일제는 이곳에서 이토의 추모회를 가졌다.
일본은 1910년 8월 장충단을 폐사하고 1919년부터 벚꽃을 심어 이 일대를 일본인의 공원으로 만들었다. 1920년에는 장충단 비석을 뽑아버렸다.
1932년 제1차 상하이사변 당시에는 결사대로 전사한 일본 군인들의 동상을 세웠다.
이토 히로부미의 신사인 박문사(博文寺)도 지었다.
지금의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다.
박문사는 경희궁 정문인 흥화문을 통째로 뽑아다가 박문사 정문으로 사용했다.
난간엔 광화문에서 가져온 석재를 쌓았다.
왕의 어진을 모신 경복궁 선원전은 승려 주거용의 고리(庫裡)로 사용했다.
환구단 돌북을 안치했던 석고전을 가져다가 종루로 둔갑시켰다.
조선과 대한제국의 상징물을 동원해 이토를 장식한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6.25를 거치면서 장충단은 사당과 부속건물 등 많은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비운의 장충단비는 신라호텔 뒤쪽에 버려져 나뒹굴다가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겼다.
원래의 위치에 신라호텔이 들어서면서 건너편으로 옮겨진 것이다.
장충단은 일본풍이 짙은 시설들은 사라졌지만, 공원으로서의 기능은 계속 유지됐다.
1970년대까지는 정치 유세 현장으로도 많이 쓰였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 당시 박정희, 김대중 후보가 이곳에서 대규모 군중 연설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1942년 생으로 중국 산동성에서 태어난 배호는 <안개 낀 장충단공원>으로 국민 가수가 됐다.
장충단 답사는 지하철 3호선 동국대역 6번 출구 앞에서 시작한다.
장충단비는 장충단과 관련해 남아있는 유일한 흔적이다.
장충단비는 펜스로 둘러싸여 있다.
철책 앞에는 ‘장충단터’라는 표지석이 서 있다.
회색 비석은 높이와 폭이 각각 2m, 50㎝ 정도 된다.
앞면의 ‘奬忠壇’(장충단)은 당시 황태자였던 순종이 글씨를 썼다.
뒷면의 143자 비문은 당시 육군부장이자 을사조약 체결 뒤 자결한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환이 썼다.
비문에는 “난국에 뛰어들어 죽음으로 몸 바친 사람이 많았으니 기록으로 남겨야 마땅하다”라고 적고 있다.
장충단비를 지나 국립극장 방향으로 가는 길은 잘 가꾸어진 숲길이다.
솔향과 풀 향기가 싱그럽다.
장충단공원을 흐르는 실개천으로 내려가면 수표교(水標橋)가 보인다.
조선시대 청계천을 가로지르던 돌다리인 수표교다.
1959년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종로2가에 놓여있던 수표교가 통째로 이곳으로 옮겨졌다.
수표교는 길이 27.5m, 폭 7.5m, 높이 4m로 화강석으로 만들어졌다.
세종이 1441년 놓았는데, 청계천의 수위를 측정해 홍수를 대비하려는 용도였다.
청계천 다리 중 원형이 그대로 남은 유일한 다리다.
교각을 마름 꼴로 세워서 물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화강석을 짜 맞추는 기법을 사용해 상판을 놓았다.
이후 영조 때 눈금을 새긴 돌기둥을 세웠는데 이 기둥은 10척, 즉 약 3m까지 물의 양과 높이를 측정할 수 있었다.
수표교를 지나 남산쪽으로 올라가는 길 오른편 동국대 정문으로 들어가면 정각원이란 한옥 건물을 만난다. 경희궁의 정전인 숭정전을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정전은 궁궐 건물들 가운데 가장 위계가 높은 전각이다.
정조가 즉위 직후 오나는 사도의 아들이다”라고 선언한 곳이 숭정전이었다.
경희궁 숭정전은 동국대에 오기까지 오랜 시간을 떠돌았다.
숭정전은 일제강점기 필동에 위치했던 일본사찰 조계사 경내로 옮겨졌는데, 지금 동국대의 만해광장 자리였다.
광복 이후 만해광장 쪽에 위치한 숭정전은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장충단공원엔 산책로를 따라 동상들이 줄지어 있다.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 모두 일제에 항거한 이들이다.
장충단비를 시작으로 한국유림파리장서비~수표교~이준 열사 동상~이한응 선생비~최현배 선생 기념비~유관순 열사 동상~3·1독립운동 기념탑~국립극장~자유센터로 이어지는 길의 이름도 ‘호국의 길’이다.
장서(長書)는 '긴 글'이므로 파리장서는 파리강화회의에 우리나라의 독립을 지지해달라는 긴 서한을 보낸다는 뜻이다.
일제의 주권 찬탈을 폭로하고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는 내용이다.
1919년 3.1운동 직후 유림 대표 137명이 서명을 했는데, 경남 거창 출신 선비 곽종석이 대표였다.
파리장서비는 이를 기념해 건립됐다.
이준 열사는 1907년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고종의 특사로 파견됐지만 일제의 방해와 열강들의 냉대 탓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현지에서 순국했다.
이준 열사의 유해는 수유리에 안장됐고,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됐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한글문법의 초석을 닦은 외솔 최현배 선생의 동상은 별세 다음해인 1971년 세종대왕의 생일에 맞춰 세워졌다.
숭례문 앞에 있던 유관순 열사 동상은 1971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됐다.
3.1독립운동 기념탑은 높이가 19m 19cm인데, 이는 3.1운동이 일어난 1919년을 의미한다.
남산순환로를 통해 국립극장을 들른 뒤 다시 동국대입구역 쪽으로 되돌아온다.
장충단로에서는 장충테니스장, 장충리틀야구장, 길 건너 장충체육관 등 서울미래유산들을 볼 수 있다.
장충테니스장(지금은 장호테니스장으로 이름이 바뀜)은 1971년 지어진 우리나라 테니스 역사의 요람이다.
장충체육관은 우리 건축설계와 기술로 지어진 최초의 돔형 체육관이다.
장충단에서 유래한 장충동이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건 1980년대부터 일대를 중심으로 자리잡은 평양냉면집과 족발 식당 덕분이었다.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나와 남소영길을 시작으로 장충단길 먹자골목에는 <태극당>과 <할머니 족발> 등 유서깊은 노포들이 몰려있다.
기자 시절 밤에 시간을 내 동국대에서 석사와 박사과정을 밟은 내겐 개인적으로 친숙한 공간이다.
많은 분이 장충동의 맛을 느끼면서 장충단의 역사를 생각했으면 좋겠다.
ㅡ사진 왼편은 장충단비(위)와 수표교(아래). 오른편은 위부터 동국대 정각원(경희궁 숭정전), 파리장서비, 이준 열사 동상.
* 모셔온 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