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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여인은 누구실까?”] “평생 동정”
미사를 시작하고 참회 예식을 거행할 때 모든 이는 고백의 기도를 바치며 성모님을 부릅니다. 이때 등장하는 성모님 호칭이 “평생 동정”(semper Virgo)입니다.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와 모든 천사와 성인과 형제들은 저를 위하여 하느님께 빌어주소서.” 우리 문화 정서에는 어머니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게 맞지 않아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라고 합니다만, 라틴어 기도문은 “평생 동정이신 복되신 마리아”(beatam Mariam semper Virginem)라고 이름을 직접 그대로 부릅니다. 교회의 신앙은 마리아를 “평생 동정”이라 고백합니다. 미사를 시작하면서도 “평생 동정이신 성모 마리아”를 부르니, 이 호칭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습니다.
“평생 동정”은 예수님 출산을 기점으로 성모님의 일생을 세 단계로 나누면서 생겨난 말입니다. 어떻게 나눌 수 있을까요? “출산 전”, “출산 중”, “출산 후”입니다.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출산하시기 전에 동정녀 셨고, 출산하시는 중에도 동정녀 셨고, 출산하신 이후에도 동정녀 셨고, 그러니 성모님은 평생 동정이시라는 고백입니다.
“출산 전의 동정”(virginitas ante partum)은 성모님께서 자기 자신을 온전히 주님께 바치셨고, 남자의 개입 없이 성령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마음과 몸 안에 잉태하신 신비를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동정 마리아에게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새 아담이시기에, 오롯이 하느님께 속한 죄 없고 흠 없는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고 나셔야 했습니다. 강생의 신비는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구원 사건입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받아들이는 이는 하느님의 생명을 받아 새롭게 태어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예수님의 제자들은 성령 하느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며 성모님과 함께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성령께서 내려오시자 이들은 두려움과 죄의 어둠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당당하게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제자들은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나신” 주님의 신비를 알아듣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만물을 새롭게 하시기 위해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파견하셨고, 성모님께서 성령의 능력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잉태하셨으며, 성모님과 함께 성령 하느님을 깨어 기다리며 기도할 때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워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신 사건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구원 사건입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에게서 잉태되어 나신” 신앙의 진리를 강조하며 선포하는 겁니다.
성모님은 원죄의 결과에 매이지 않으신 분
“출산 중의 동정”(virginitas in partu)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낳으실 때 여전히 동정녀로서 동정성을 잃지 않으셨다는 신비를 일러줍니다. 창세기 3장은 여자가 겪어야 할 원죄의 결과를 말합니다. “나는 네가 임신하여 커다란 고통을 겪게 하리라. 너는 괴로움 속에서 자식들을 낳으리라.”(3,16) 성모님은 은총이 가득하신 분, 원죄로부터 보호받으신 분, 인간이 되신 하느님의 아드님을 낳으신 분, 원죄의 결과에 매이지 않으신 분입니다. 고통과 괴로움은 하느님께서 원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오로지 당신께 의지하는 동정 마리아를 모든 죄와 그 결과로부터 보호하시어 성모님께서 해산의 고통과 육신의 훼손 없이 예수님을 출산하도록 하셨습니다.
“출산 중의 동정”은 하느님께서 인간의 육신을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지 알려주는 신앙 고백입니다. 인간의 몸은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하느님의 아름답고 위대한 작품입니다. 죄와 죽음은 인간의 몸을 파괴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돌보아 주시고 영광스럽게 변모시켜 주십니다. “육신의 부활”을 믿는 신앙은 인간의 몸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찬란히 빛나는 구원의 자리임을 고백합니다. 하느님께 오롯이 속한 동정 마리아는 출산 중에도 육신의 훼손이 없었고, 죽음의 세력도 그분의 육신을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은총이 가득하신 분”은 죄와 죽음에 지배되지 않는 인간 육신의 고귀함을 밝히 알려줍니다.
성모님은 동정녀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봉헌
“출산 후의 동정”(virginitas post partum)은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출산한 이후에도 동정녀로 살아가셨다는 신앙 고백입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동정 부부로서 가정을 이루셨습니다. 여기서 항상 문제로 대두되는 것은 예수님의 형제들에 대한 증언입니다.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마르 6,3). 예수님의 형제들이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와 개신교의 입장이 각기 다릅니다.
가톨릭은 예수님의 형제들을 처음부터 그분의 사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교회는 외경의 전통에 따라 요셉 성인의 전처소생, 곧 예수님의 이복형제라고 말합니다. 개신교는 마리아가 낳은 다른 자녀, 곧 예수님의 친형제라고 주장합니다. 가톨릭과 정교회는 성모님의 출산 후의 동정을 고백하지만, 개신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히브리어 문화권에서는 친형제나 사촌 형제를 모두 형제라고만 불렀기 때문에, 성경 본문만으로는 확답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승, 살아있는 전통이 중요합니다.
가톨릭교회의 전승에 따라 복음서와 사료들을 읽으면 예수님의 형제들이 그분의 친형제가 아님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보던 여인들 가운데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등장하는데(마르 15,40),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아닌 다른 마리아였습니다. 복음사가 스스로 예수님의 형제 야고보와 요세는 예수님의 친형제가 아니라고 일러주는 셈입니다. “주님의 형제”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수장이었는데(갈라 1,19; 2,9), 에우세비우스의 「교회사」는 그의 죽음 이후 “주님의 둘째 사촌”인 클로파스(의 아들) 시몬이 예루살렘의 주교로 임명”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이렇듯 마리아의 출산 후 동정은 역사적 정황에 상반되지 않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하느님께 순종하여 성가정을 이루고 동정 부부로 생활하셨습니다. 성가정은 하느님의 은총이 충만한 가정 교회였고, 성모님은 동정녀로서, 어머니로서, 신부로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 자신을 봉헌하였습니다. “평생 동정”이신 성모님 안에 동정녀요 어머니이며 신부인 교회의 신비가 광채를 발하고 있습니다.
[저는 믿나이다] (33) 사도들의 업적과 신앙 유산들
눈부신 복음화 활동과 신앙의 초석 놓은 사도들
이제 사도 시대 교회 역사를 마무리하려 합니다. 사도들은 “먼저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선포되어야 한다”(마르 13,10)는 주님 말씀에 따라 극히 짧은 시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제국 전역을 넘어 인도까지 전해질 수 있도록 헌신했습니다. 요한 사도를 제외한 사도들 모두는 순교로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증거했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로마뿐 아니라 팔레스티나와 시리아·소아시아·마케도니아·크레타 지역 60여 개 도시가 등장합니다. 복음은 이곳뿐 아니라 지금의 프랑스와 스페인 지역인 갈리아와 에스파냐에까지 전해집니다. 갈리아 지방의 론 강 하류에 세워진 도시 마르세유는 일찍부터 소아시아와 긴밀한 무역 관계를 맺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계 상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했고, 도시 베즐레는 마리아 막달레나와 관련한 아름다운 교회 전승을 품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짧은 시기에 눈부신 복음 선포의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정치·사회·지리 환경도 한몫했습니다. ‘로마의 평화(Pax Romana)’는 정치 안정, 원활한 공용어 소통, 편리한 광역 도로망, 자유로운 여행 보장을 제공해 복음 전파에 기여했을뿐 아니라 지역 신앙 공동체들을 서로 연결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사도들은 자신들의 선교 지역에 교회를 세웠습니다. 시리아에서 사도들이 세운 교회는 안티오키아뿐 아니라 다마스쿠스·티루스·시돈 등이 있습니다. 또 동시리아 지역 오스로에네 지방의 에데사 교회도 큰 교회입니다. 에우세비우스 「교회사」에 따르면 이곳 아브가르 왕이 예수님과 서신을 주고받았고, 토마스와 타대오 사도가 이곳에서 활동했습니다. 그 결과 에데사는 이미 200년께 그리스도교가 국가 종교로 자리합니다.
이집트 교회는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성장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제자 마르코 복음사가가 알렉산드리아에 처음 신앙 공동체를 세웠다는 전승도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교부 시대 클레멘스와 오리게네스 같은 저명한 신학자들을 배출합니다.
그리스와 소아시아 지역은 신약 성경에서 볼 수 있듯이 사도들에 의해 많은 교회가 세워집니다. 그중 에페소와 코린토·테살로니카·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등이 대표하지요.
로마 교회는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세운 신앙 공동체로 처음부터 교회 신앙의 규범이 되었습니다. 로마 교회는 1세기 말부터 실질적인 수위권을 지닌 교회였습니다. 이 시기부터 로마 교회의 기준에 따라 신앙의 정통과 이단이 구분됐습니다. ‘사도 신경’과 주교들의 ‘사도 계승’에 대한 고증도 로마 교회 관습에 따른 것입니다. 지역 교회는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로마 교회에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로마 교회 역시 이들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힘 닫는 데까지 지원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모든 형제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돕고 모든 도시에 있는 많은 공동체에 기부금을 보내는 관습이 처음부터 있었습니다. 로마인인 여러분은 전승된 로마 관습을 철저히 지켰기 때문에 예부터 보낸 희사금으로 곤궁한 이들의 가난을 덜어 주었으며, 광산에 사는 형제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여러분의 거룩한 주교 소테르는 이 관습을 철저히 지키는 데 그치지 않고, 자애로운 아버지가 자식에게 따뜻한 말로 위로하듯이 성도들뿐 아니라 로마에 오는 형제들에게도 많은 희사금을 나누어 주어 이 관습을 더 확대했습니다.”(에우세비우스 「교회사」 4,23,10)
사도들은 선교뿐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앙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먼저 미사 전례의 틀을 마련했습니다. 사도들은 성찬례 모임에서 성경을 낭독하고, 설교했으며 전구 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빵과 물을 섞은 포도주에 대한 성찬 축복 기도를 했습니다. 그리고 성찬례에 참여한 모든 이와 축성한 빵과 포도주를 나눠 먹었습니다.
215년께 저술된 히폴리투스의 ‘사도 전승’은 사도 시대 행해졌던 성찬례 감사 기도를 다듬어 담아놓았습니다. 이 감사 기도는 오늘날 ‘로마 전례서’ 성찬 전례 감사 기도 제2양식으로 계승돼오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또한 전례력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사도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인 주간 첫째 날을 ‘주님의 날’ 곧 ‘주일’로 정해, 유다인들의 금요일 안식일을 대체했습니다. 사도들은 주일에 동트기 전 성찬례를 거행해 행동이 자유로운 시민뿐 아니라 노예·노동자도 미사에 참여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새벽 미사가 여기서 유래된 것이죠.
사도들은 또 주일과 더불어 주간 넷째 날과 여섯째 날, 곧 수요일과 금요일을 특별한 단식일로 지냈습니다.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하는 유다교 관습을 본받은 것입니다. 이 전통을 계승해 요즘도 수도원에서는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과 금육재를 지킵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공식 전례인 미사 외에 개인 기도를 허용하고 권장했습니다. 「디다케」는 주님의 기도 외에 하루 세 번 18 축복문을 바칠 것을 권고했습니다. 이것이 훗날 매일 3시·6시·9시에 기도를 바치는 시간 전례로 발전합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인 생활 규범의 틀도 제시했습니다. 사도들은 ‘이웃 사랑’ 특히 고아와 과부, 가난한 이들을 우선하는 사랑을 강조했습니다. 사도들은 겸손과 자비, 도덕과 사랑을 그리스도교 윤리 규범으로 제시했습니다. 특히 도덕의 힘인 ‘양심’을 높이 인정했고, 주님 가르침대로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고 보복하지 말며 원수까지 사랑하라며 윤리 쇄신을 요구했습니다. 사도들은 하느님 사랑은 인간 사랑으로 완성된다고 가르쳤습니다.
[매주 읽은 단편 교리] 교회의 두 기둥,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오늘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입니다. 이 두 사도는 ‘교회의 두 기둥’이라고 불릴 만큼 우리 교회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합니다. 베드로는 ‘사도들의 으뜸’로서, 바오로는 ‘이방인의 사도’로서 교회의 두 차원을 대표합니다.
갈릴래아 벳사이다 출신인 베드로는 본래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베드로를 당신 제자들 가운데 으뜸으로 세우십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 지방에서 베드로가 “스승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마태 16,16)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16,18-19). 또한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을 때, 특별히 베드로에게 “내 양을 돌보아라.”(요한 21,15.16.17) 하시며 그 사명과 지위를 재확인해 주셨습니다. 이후, 베드로는 새 사도 선출 모임을 이끌고(사도 1,15-26) 성령 강림 때 사도단을 대표해 설교하였으며(2,14-41) 첫 번째로 기적을 행하였습니다(3,1-10).
바오로는 소아시아 타르수스 출신입니다. 이곳은 로마 제국의 속주 킬리키아의 수도로서 그리스 문화가 자리 잡은 도시였습니다. 이러한 환경 속 독실한 유다교 가정에서 성장한 바오로는 예루살렘으로 가 당대 최고의 율법 교사였던 가말리엘에게서 교육을 받기도 했습니다. 특별한 점은, 그의 부모가 유다인이었는데도 로마 시민권을 얻었기에 그가 태생 로마 시민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오로는 초기에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는데, 이 일을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다가 예수님을 만나 회심합니다. 그 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한 생을 바칩니다. 세 차례의 전도 여행을 하면서 여러 지역에 교회를 세우고 그곳에 편지를 보내면서 공동체를 돌보았습니다. 결국 유다인들의 고발로 붙잡히지만,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여 로마로 압송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합니다.
오늘 미사의 감사송은 이 두 사도의 사명과 역할을 잘 설명해 줍니다.
“주님께서는 저희가, 복된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의 대축일을 지내며 기뻐하게 하셨으니, 베드로는 신앙고백의 모범이 되고, 바오로는 신앙의 내용을 밝히 깨우쳐 주었으며, 베드로는 이스라엘의 남은 후손들로 첫 교회를 세우고, 바오로는 이민족들의 스승이 되었나이다. 두 사도는 이렇듯 서로 다른 방법으로, 모든 민족들을 그리스도의 한 가족으로 모아, 함께 그리스도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같은 승리의 월계관으로 결합하였나이다.”
베드로와 바오로는 네로 황제의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64~68년) 중, 로마에서 같은 날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베드로는 바티칸 인근 언덕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고, 바오로는 로마 성 밖에서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습니다. 훗날 이들 자리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과, 참수된 곳에 세 줄기 샘이 솟아났다는 ‘세 분수 성당’이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세 분수 성당 가까이 바오로의 무덤 위로는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이 세워져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19) 하느님 백성의 특성, 「교회헌장」 제9항
「교회헌장」 제9항은 세상의 역사를 통해 나타난 종교적, 민족적, 정치적, 문화적 여러 집단과는 분명히 구별되는,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새 계약의 새 백성으로서의 하느님 백성의 특성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첫째, 하느님께서는 시대와 민족을 구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당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본래 어느 시대와 어느 민족에도 속하지 않는 분이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보편적입니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구원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백성을 이루어 당신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어 계약을 맺으시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질 새 계약의 준비와 표상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새로이 부른 백성과 당신의 피로 새 계약을 맺으시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백성은 공동체를 이룹니다.
셋째, 하느님의 백성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서 새로 나고(1베드 1,23 참조), 육체적 출생에 의해서가 아닌 물과 성령으로 위로부터 태어남(요한 3,3-5 참조)으로써 그 일원이 됩니다. 곧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백성이 됩니다.
넷째, 하느님 백성의 머리는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 이,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의 기름부음인 성령께서 그 머리로부터 몸으로 흘러들기 때문에, 하느님 백성 역시 성령의 도유를 받은 메시아 백성입니다.
다섯째,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 자녀다운 품위와 자유’의 신분을 지니며,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 안에 머무르십니다.
여섯째, 하느님의 백성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사랑의 새 계명을 그 법으로 삼고 있습니다(요한 13,34 참조). 이는 성령의 새 법입니다.
일곱째, 하느님의 백성은 세상의 빛이 되고 지상의 소금이 되는 사명을 지닙니다(마태 5,13-16 참조).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사랑과 진리의 친교를 이루도록 세우신 이 백성을 모든 사람을 위한 구원의 도구로 삼으시기에, 하느님의 백성은 지금은 작은 무리더라도 온 인류를 위한 일치와 희망과 구원의 튼튼한 싹이 됩니다.
여덟째, 하느님 백성의 목적은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친히 시작하신 그 나라는 세상 마지막 날에 당신 친히 완성하실 때까지 확장되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의 교회라고 불린 것처럼, 새 이스라엘인 새 하느님 백성도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불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교회를 당신 피로 얻으셨고, 당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셨습니다. 이 교회는 구원을 이루는 일치의 성사이며, 성령의 힘으로 쇄신하여 마침내 십자가를 통하여 꺼질 줄 모르는 빛에 이를 것입니다.
[교회의 언어] 헤렘, 전멸
성경을 읽다 보면 이스라엘과 이민족들 간의 전쟁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이때, 전쟁 과정의 모든 것들을 예외 없이 하느님께 ‘완전 봉헌물’로 바친다는 내용은 우리를 무척 당황스럽게 합니다.(민수 21,2; 신명 2,34; 여호 10,40 등) 이 잔혹한 폭력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고대 근동의 사고에서 전쟁은 신들의 전쟁의 연장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시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여겨 모든 전리품과 포로를 하느님께 바치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멸’로 번역되는 ‘헤렘’이 실제 일어났다는 고고학적 발굴이나 문헌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헤렘은 종교적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헤렘의 동사원형인 하람의 뜻은 ‘금지하다’인데, 이는 (거룩하므로) ‘세속적 사용을 금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의 명령으로 이루어지는 ‘거룩한 전쟁’에 세속적인 마음이나 행위는 끼어들 수 없습니다. ‘헤렘’은 인간의 편에서 사심 없이 순결하고 철저한 마음으로 하느님께 믿음을 두겠다는 응답이며 다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거룩한 전쟁은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악과의 (육적, 영적) 전쟁을 치르는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다름 아닌 우리의 삶을 참된 평화로 이끌어 가시는 하느님께 대한 철저한 신뢰입니다.
[가톨릭 교리 상식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희년에 대해 알려주세요
이제는 5년도 더 된 일이지만, 서울 시내 어느 아파트 단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이곳은 1차, 2차라는 이름으로 서로 구분되기는 하지만, 같은 브랜드의 아파트가 서로 경계를 마주하고 있는 곳이었습니다. 아파트 단지 가운데를 관통하는 도로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도로의 유지보수비를 누가 부담하느냐를 놓고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갈등이 커진 끝에 한쪽에서 다른 쪽의 차량 진입을 막는 말뚝을 세웠습니다. 그랬더니 이번에는 반대편 아파트 단지에서 철제 보안문을 설치하여 아예 사람도 못 다니게 막고, 해당 아파트의 주민에게만 통행할 수 있도록 열쇠를 나눠줬습니다. 그랬더니 이제는 그 반대쪽 단지에서 바리케이드와 철조망까지 설치하여 삼엄하기 짝이 없는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종종 배타성의 장벽을 세우며, ‘우리’라는 범주 밖에 있는 사람들을 밀어내곤 합니다. 단순히 이득을 위해서 그렇게 할 때도 있지만, 나와 다른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완고함에서 그러할 때도 있습니다. 종교가 달라서, 경제적 지위가 달라서, 성별이 달라서, 세대가 달라서, 정치적 입장이 달라서, 다른 이들을 ‘우리’가 아닌 사람으로 규정하고 밀어내곤 하죠. 심지어는 아파트 단지가 다르다는 이유로 밀어내기도 한다니, 웃고 넘길 문제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역사는 이 모든 종류의 차별과 혐오, 배타성과 불평등을 뛰어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그것을 보여주는 가장 극적인 발자취 중 하나가 바로 ‘희년’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은 50년 주기로 서로에게 진 빚을 완전히 탕감하고, 노예가 있으면 해방시키며, 하느님의 자비와 해방을 기억했습니다. 구약의 백성이라고 빌려준 돈을 못 받고, 샀던 노예를 무상으로 해방시키는 것이 안 아까웠을까요. 하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이집트 노예살이에서 먼저 해방시켜 주셨기에, 이스라엘에서 누리던 그 모든 삶이 가능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믿음이 그들에게 있었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감정을 뛰어넘는 실천이 바로 구약의 ‘희년’이었습니다.
초대교회도 전통을 이어갔습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 여정은 경제, 사회적 장벽을 허물어, 부유한 이들이 가난한 이들과, 지배하던 이들이 지배당하던 이들과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는 ‘희년’의 정신이 가득한 분이셨던 셈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시기 위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오르셨던 여정을 성지순례로 이해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동안의 삶을 참회하고 하느님과 화해하며, 순례의 여정을 떠나는 신약의 희년을 기리기 시작했습니다.
‘희년’을 맞아 드러나는 중요한 하느님 자비의 표지 중 하나는 ‘전대사’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벌을 대신 짊어진 자비로운 분이심을 다시금 기억하고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다른 이들을 향하여 닫힌 마음의 문을 열고 화해의 손길을 내밀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그분의 자비를 충만하게 입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현재 희년은 바티칸에서 4대 대성전의 성문을 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닫혀 있던 문을 여는 예식은 우리가 서로에게 닫았던 마음의 문을 여는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서로에게 철조망을 치고, 인터넷에서 악플을 날리며 혐오를 일삼는 이 시대에, 구원의 문을 여시는 주님 뒤를 따라, 우리도 마음의 문을 열고 이 세상을 향해 ‘희년’을 선포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