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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통로인 교회
20: 22-26
2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23.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고
24.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25. 네가 내게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로 쌓지 말라 네가 정으로 그것을 쪼면 부정하게 함이니라
26. 너는 층계로 내 단에 오르지 말라 네 하체가 그 위에서 드러날까 함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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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실 때에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가운데 임재 하시어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위엄찬 광경 앞에서 심히 떨며 두려워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이 같은 초자연적인 현상을 동반하여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나심으로써, 십계명을 주신 분이 바로 자신이심을 이스라엘 백성의 뇌리 속에 확실히 각인시켜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친히 명령하신 십계명을 준수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축복과, 지키지 않는 자에게 경고하신 저주가 결코 취소되거나 변경되지 않고 그대로 집행될 것이라는 자신의 굳은 의지를, 그 같은 위엄찬 현상을 통해 분명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우리 송정 중앙 교회 성도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을 때의 그 위엄찬 광경을 평생토록 잊지 마시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홀히 여기는 성도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라며, 미련할 만큼 우직스러울 만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여러분 자신과 후손들이 자자손손 영. 육간에 넘치는 복을 받고 살게 되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축원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십계명에 이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명령으로, 하나님을 무슨 신상으로든지 만들지 말라는 말씀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 지낼 제단에 관한 규례입니다.
먼저 22-23절을 보시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라. 내가 하늘에서부터 너희에게 말하는 것을 너희가 친히 보았으니,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뢰와 번개와 나팔 소리와 연기 가운데 시내 산에 강림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영광을 눈으로 친히 목격하였습니다.
그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를 비겨서 은으로 신상이나 금으로 신상을 너희를 위하여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물질세계의 한정된 그 무엇으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나, 하나님과 흡사한 것이라 하여 그 분을 형상화하려는 시도는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요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입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은 인간과 같은 육체를 갖지 않으시고, 따라서 하나님의 지으신 피조 세계의 그 어떤 것으로도 표현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전능하시고 무한하신 신적 속성과 능력을 인간의 좁은 상상력 안에 묶어 둘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신 분이시요, 온 세상에 충만하신 분이므로 하나님을 형상으로 표현하는 것은 그 발상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너희를 위하여’란 말씀이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을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사람들이 금이나 은으로 신상을 만들려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신상으로 하여금 자신을 보호하고 축복을 가져오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잘 되고 평안할 때에는 신상을 잘 섬기다가도 어려움이 닥치면 신상을 원망하고 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는 겉으로는 사람이 신상을 섬기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신상이 자신을 만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자신을 위하여 신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대로 움직여 그들을 보호하고 축복하기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게 하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들의 삶에 평안과 축복만이 아니라, 때로는 고난과 어려움이 닥친다고 해도 결코 하나님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제나 평안과 축복을 주시기 위해 존재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 때로는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닥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아무런 불평이나 원망 없이 순종하며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자신의 삶에 일어나는 평안과 고난에 따라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태도가 바뀐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자신의 종으로 만드는 심각한 죄악을 범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어떤 상황이 닥쳐도 하나님을 향한 원망이나 불평을 하지 않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이나 역경이 닥쳐왔을 때에는 과연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뜻이 무언인지를 먼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임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정받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4절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드릴 단을 만들 때는 흙으로 만든 토단을 쌓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25절을 보면 만약에 돌로 단을 쌓는 경우에는 정으로 쪼아 만든 다듬은 돌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단은 자연 그대로의 돌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면 우리의 이성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다듬은 돌을 사용하여 단을 쌓으면, 흙이나 자연석으로 만든 단보다 견고하고 보기에도 좋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굳이 흙이나 아귀가 잘 맞지 않아 외관상 아름답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하여 단을 쌓도록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받으시기 원하시는 제사는 진실한 마음으로 드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듬은 돌로 멋있는 제단을 쌓는 데 관심을 기울이다가, 진짜 중요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예배의 본질을 소홀히 할까 염려하여 자연석으로 제단을 쌓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백성들이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멋있고 화려한지를 보시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지금 하나님께 앞에 예배드리는 백성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믿음과 경배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드려야 할 진정한 예배란 형식이 아름다운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교회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진정한 예배가 점차 사라지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들은 저마다 화려하게 치장하기에 바쁘고, 많은 악기들의 반주에 맞춰 웅장한 찬양을 드리는 데 많은 힘을 쏟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과거 성도들이 가졌던 뜨거운 열정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점차 식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께서 그 예배를 기뻐 받으시겠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으실 것입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는 화려하고 멋진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멋있는 교회와 웅장한 찬양도 필요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과 헌신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예배드릴 때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과 헌신을 준비함으로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토단을 쌓고, 거기서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로 특별히 번제와 화목제를 지목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정말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줍니다. 먼저 번제란 하나님께 대한 자발적이고 온전한 헌신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화목제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의 표시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번제와 화목제를 요구하시는 것은, 그들을 구원하시고 축복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진정한 감사와, 그로부터 우러나오는 헌신과 충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로서 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것은 진정한 감사와 헌신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람은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의 마음을 다 알고 계십니다. 따라서 만일 여러분의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가 없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모습만 가지고 있다면, 또한 말만 앞세우고 뒤로는 자신을 먼저 챙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 온전한 헌신을 드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나 물질, 그 어떤 것도 하나님께 상달되지 못하며 오히려 하나님의 책망만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과 온전히 헌신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실한 믿음과 감사하는 마음으로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면 그 제사를 받으시고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이란 어디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말할 것도 없이 지금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는 제단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에 가까이 나아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제단에서 성도들에게 강림하셔서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성도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기념하는 제단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곳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자신의 피로 값 주고 사신 하나님의 집이며, 성도들이 모여서 하나님께 예배와 찬양을 드리는 교회입니다. 그런 점에서 성도에게 교회는 축복의 보고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교회를 가까이 하면 할수록 더 많은 축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성도들은 자신의 생활에 바빠 교회를 멀리하는 것을 봅니다. 그렇지만 직장이나 사업 때문에 또는 여가를 즐기기 위해, 또는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이유로 교회를 멀리하는 것은 정말 어리석기 그지없는 행동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토록 얻기 원하는 축복은 다른 곳이 아닌 하나님께서 강린하시겠다고 하신 교회 안에 있는데, 그것을 모르고 다른 곳에서 축복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며 교회를 멀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미련하고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회는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축복의 보고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가까이 할 때 넘치는 큰 축복으로 채움을 받게 될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층계로 단 위에 오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체를 가리는 속옷을 별도로 입지 않았습니다. 남자도 바지를 입지 않았고 치마처럼 통으로 된 겉옷만을 입었습니다. 따라서 제사장이 높은 층계를 오르내리게 되면 자연히 그의 하체가 거룩한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단 위에 드러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사람의 하체는 부끄러움 또는 수치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체가 드러나는 것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망령되고 부정한 행위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체가 드러날 수 있는 층계를 오르내리지 말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체가 드러난다는 이유로 단 위에 오르지 말라고 하신 의미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범죄한 자는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음을 말씀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제단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 죄스럽고 부끄러운 죄인이 나아가지 못하고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주시는 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우리 자신이 죄로부터 멀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여전히 죄악 속에 머무르고 죄와 함께 살아간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외면하시고 축복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복 받기를 소망하며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러면서도 과연 나 자신이 하나님의 주시는 복을 받을만한 사람인가에 대해서는 살펴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나 자신은 전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여전히 죄를 지으면서,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간구하고 바라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주시는 복을 받기 원하시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회개를 통하여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비겨서 금이나 은으로 신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또한 하나님께 제사드릴 단을 쌓을 때는 토단을 쌓고, 돌로 단을 쌓거든 다듬은 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금속이나 석재로 제단을 만들지 말고 쉽게 쌓고 쉽게 허물어질 흙으로 제단을 만들라고 하신 이유는, 첫째 당시 화려하고 정교하게 꾸몄던 가증스런 우상 제단과 하나님의 거룩한 제단을 구별시키기 위해서이고, 둘째, 제단 자체가 우상시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며, 셋째 하나님 이외의 것은 모두 임시적인 것이고, 궁극적으로 인생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섬겨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가르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토단을 쌓고 양과 소로 번제와 화목제를 하나님께 드리면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굳게 언약을 하셨습니다. 미술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스메탄이라는 사람은 몹시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왜 교회에 나갑니까?” “축복을 받으려고 나갑니다.” “무슨 축복입니까?” “분노와 경멸, 그리고 냉대를 하게 하는 유혹이 사라지고, 기쁨과 만족이 가득 차게 되고, 하나님의 섭리에 만족하게 되는 것이지요. 어둡고 복잡한 생각으로 가득 차서 교회에 나가지만, 돌아올 때는 평안하고 새로운 마음으로 돌아오지요. 모든 근심은 사라지고, 내가 구원받은 기쁨과,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러한 축복이지요!”라고 대답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돌아갈 때, 비록 내가 많은 재산은 없고, 권력은 없지만, 나는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때,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커다란 은혜요, 축복인 것입니다.
이 시간 교회에 나아와 앉아 계신 여러분의 마음 상태는 어떻습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약간은 서먹서먹한 사람도 있겠고, 어떤 분은 그저 담담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어떤 분은 마치 힘든 일을 끝내고 들어와 안방에 누운 것처럼, 마음속에 깊은 평화를 느끼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교회에 와서 우리가 느껴야 할 가장 정상적인 마음은, 마치 고향에 온 것 같은, 그리고 마치 가정에 돌아온 것 같은 그런 느낌이어야 할 것입니다.
‘존 호와드 패인’이 춥고 배고픈 런던 거리의 겨울 나그네로 지내던 시절에 ♪즐거운 곳에서는 날 오라 하여도, 내 쉴 곳은 오직 내 집뿐이라♪고 노래했던 것처럼, 그 내 집 같은 평온하고 행복한 느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우리의 ‘영적인 고향’이고 ‘영적인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12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셔서, 서기관들과 제사장들과 함께 성경 토론을 하다가 심취되셔서 날짜 가는 줄을 모를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 마리아와 요셉은 아들을 잃어버린 후 사흘 길을 찾아 되돌아 와서 나무랍니다.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건물이 좋고 누가 반겨서 그런 것이 아니고, 내 아버지의 집이기에 그 곳이 좋고, 시간가는 줄을 모르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내 아버지의 집이요, 내 마음의 고향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일주일 동안 세상에서 지치고 힘든 삶을 사시면서, 정말로 주님을 만나는 이 예배의 시간이 그리워지고 사모되어집니까? 이 예배가 정말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만나는 것과 같은, 해갈함과 영혼의 감격함을 누리는 예배입니까? 그래서 이 한 시간 드리는 예배가 세상에서 천 날보다, 세상에서의 어떤 잔치나 오락보다 더 행복하다는 느낌이 드십니까? 잘 믿는다는 것을 어렵고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습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거기서 듣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모든 집회의 시간을 사모하며 잘 나오는 것입니다.
철이 없는 어린아이와 어른의 차이는, 키만 다른 것이 아니라 지혜의 차이가 있음과 같이, 신앙이 어린 사람과 성숙된 사람과의 차이는, 가치관에서 차이가 나는데 그 중에 바로 하나가 교회관입니다. 사람들은 다이아몬드와 같은 보석들을 좋아하는데, 그 가치를 모르는 어린아이는 귀중한 보석을 한 개의 장난감만도 못하게 여기는 것처럼, 교회의 가치와 귀중함을 잘 알지 못하는 신자는 가정이나 직장만을 소중하게 여기는 반면, 교회는 소홀히 여기고 홀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로 우선되어야 할 것은 교회출석을 부지런히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고 하셨고, 또한 시 128:5에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찌어다.”고 했습니다. 시온은 예루살렘을 말하며 예루살렘은 곧 교회를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두가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여 이 곳에서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복을 풍성히 받아 누리는 복된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