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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성경본문: 시편 122: 1-9
1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2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3 예루살렘아 너는 잘 짜여진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도다
4 지파들 곧 여호와의 지파들이 여호와의 이름에 감사하려고 이스라엘의 전례대로 그리로 올라가는도다
5 거기에 심판의 보좌를 두셨으니 곧 다윗의 집의 보좌로다
6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형통하리로다
7 네 성 안에는 평안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함이 있을지어다
8 내가 내 형제와 친구를 위하여 이제 말하리니 네 가운데에 평안이 있을지어다
9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내가 너를 위하여 복을 구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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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금요일 오후 늦게 한 경건한 유대인이 숲에서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해는 지고, 그는 슬픔에 잠겨 울기 시작했습니다. 안식일을 지킬 수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갑자기 나무들 사이로 궁전이 보이더니 한 노인이 나타나 그에게 따라오라고 손짓을 합니다. 노인은 그를 향기 나는 연못으로 데려갔고, 그는 거기서 목욕을 했습니다.
노인은 그에게 멋진 안식일 예복을 주었습니다.
그가 무엇을 물어 보려고 하자 노인은 그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내었습니다.
노인은 은과 금, 진주와 온갖 보석으로 빛나는 방으로 그를 인도하였습니다.
노인은 그를 계속 다른 방으로 인도했는데, 거기에는 큰 촛대와 상들리에가 ‘창조의 엿새’를 나타내는 일곱 촛불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방을 옮겨갈수록 더욱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으며, 이를 본 유대인은 그저 황홀하기만 했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방에 이르자, 흰 수염이 있는 일곱 노인이 나타났습니다.
그들은 그를 반갑게 맞이하면서 이제야 <“민얀“ miynyan> - 열 명이 드리는 유대인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는 어리둥절했습니다. 여기에는 일곱 사람뿐이었고, 자신과 자신을 데려온 노인까지 합하면 아홉 명이었던 것이지요.
어디에서도 열 번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곧 그는 그 문제의 열 번째 사람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참으로 생생한 것이었고, 그는 곧 강한 두려움과 경외심에 사로잡히고 말았습니다.
온 몸이 떨려오는.. 이제껏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두려움이었습니다.
왕관을 쓴 장로가 단에 올라 마치 시편 기자처럼 감미로운 노래로 안식일을 찬양하였습니다.
기도 후에 그는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의인이 낙원에서 먹는 고기와 메시아의 도래를 위하여 준비해둔 포도주를 대접받았습니다. 이렇게 그는 장로들과 함께 기도하며, 안식을 찬양을 부르며, 토라를 공부하며 안식일을 보냈습니다.
그가 속된 일들에 대하여 한 마디라도 하려고 하면, 모두들 그에게 입을 다물라는 신호를 보냈습니다. 안식일이 마칠 때, 그는 생명나무의 향기가 나는 향료를 받았습니다. 마침내 그를 인도해주었던 노인은 그를 다시 숲으로 데려다 주었으며, 그가 방금 낙원에 다녀왔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가 더불어 앉아서 예배를 드리던 일곱 명의 장로들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세, 아론, 다윗, 솔로몬이며 궁전 관리인인 그 노인은 아브라함의 종인 엘리에셀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열 번 째 사람은 다름 아닌 ‘거룩하신 그분’이셨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대해서 전해 내려오고 있는 유대인들이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 앞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 얼마나 깊고 오묘한 것들을 우리를 위해서 준비하고 계신지... 이 시간은 우리들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숲 속에서 우연히 체험하게 된 세상입니다.
하지만 아무에게나 쉽게 열려지는 그런 세상은 아닙니다.
이렇게 숲 속에서 헤매다가 안식일 예배에 참석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나... 그것 때문에 아파하고 눈물 흘릴 때... 다른 어떤 이유가 아닙니다.
길을 잃어버려서 그런 것도 아니고, 숲속을 지배하는 사나운 동물들이 무서워서도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숲을 헤매고 있는 동안에도 진행되고 있을 세상의 일들에 대한 염려나 조바심 때문도 아닙니다.
단지 안식일 예배에 참여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문득... 그에게 열려지는 전혀 다른 신비함으로 충만한 세상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에게 그런 안타까움이 있는지요.
“혹시라도 몸이 갑자기 아파서... 갑자기 피할 수 없는 급한 일이 생겨서... 그래서 주일에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참여할 수가 없게 되어서... 그래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이 경건한 유대인처럼... 가슴 아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눈물을 흘려 보신 일이 있으신지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초대는 바로 그런 사람을 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말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생각할 수도 없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볼 수 없는 화려함과 장엄함으로 충만한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단지 우리가 귀로만 들었던 훌륭한 신앙의 선배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습니다. 그곳에는 풍성함이 있습니다. 친히 주님께서 준비하신 고기며,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가 준비되어 있어서 풍성한 하늘나라의 잔치를 경험할 수가 있는 곳입니다.
게다가 그곳은 친히 그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고 경험할 수가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알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게 나타나는 현상은 아니었습니다.
보일 듯 말듯하고... 느낄 수 있기도 하고, 못 느낄 수도 있는... 손에 잡힐 듯하지만... 결코 붙잡을 수 없는 아주 신비한 현상입니다.
단지 온 몸과 마음이 어떤 신비함으로 마구 떨리고 두려움에 사로잡힐 따름입니다. 이렇게 두렵고 떨림을 경험하면서... 비로소 그는 하나님께서 지금 자기들과 함께 계시다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가 있게 됩니다.
결코 많은 숫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열 명만 있어도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단지 두 세 사람만 있어도 그곳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자리라면 이미 주님은 그 자리에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18:20)
어떤 화려한 장식이나 근사한 치장을 해놓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을 예배하고 싶은 마음으로 충만한 곳, 그런 마음만 있으면 좋습니다. 단지 한 사람만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가 서 있는 자리가 어떤 곳이든지 바로 그 곳은 하늘의 은혜와 영광이 가득한 천국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이 시간을 사모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시간을 그리워하고, 온 맘과 정성을 다하여 예배드리기를 사모하는 마음만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십니다.
하늘의 온갖 신비함과 화려함으로 응답하여 주시며, 이 시간이 우리들에게도 그렇고, 하나님께도 얼마나 행복하고 소중한 시간인지...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하나님의 전을 향하면서 불렀던 찬양 중의 하나로 전해 내려오는 말씀입니다.
시편에 보면 120편부터 134편까지의 말씀이 그런 주제로 묶여져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부제가 붙어 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 사람들은 한 해를 보내면서 세 번 성전에 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성전에 올라간다고 하는 것은 예루살렘에 워낙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서 자연히 그렇게 된 것이지요.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전에 올라가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들과 같은 시대를 살지 못했지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가진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을까 합니다. 아마도 마치 의무처럼 생각했던 사람도 있지 않을까요?
우리처럼 쉽게 갔다가 돌아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닙니다.
자기가 하던 모든 일들을 중단하고 먼 길을 떠나는 마음으로 출발합니다. 그리고 절기는 보통 한 주간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니 절기를 한 번 지키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으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최소한 열흘 이산의 시간이 걸립니다.
그동안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성전에 올라가서 시간을 보내는 것... 성전에 올라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시간을 좋아하였을지 그것은 참 궁금합니다.
아마도 시편에 나오는 이 노래들은 성전을 향하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좀 정리하고, 그 마음을 하나님을 향하여 열도록, 그래서 처음에는 혹시 마지못해서 순례를 시작했더라도... 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보내는 시간이 그들의 삶에서 정말 중요한 시간이 되도록... 하려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가 그 마음 가운데 담겨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우리의 마음도 똑같지는 않다고 생각합니다. 어떤 마음과 동기로 이 자리에 오셨든지, 오늘 이 자리가 마치 숲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던 그 사람에게 문득 열려진 신비한 하늘의 은혜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경험하는 소중한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은 하나님의 전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기쁨을 고백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저는 이것을 초대받은 기쁨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아마 어떤 모임이나 자리에 초대를 받았을 때... 그것은 참 우리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가슴 설레게 하는 일입니다. 더욱이 그 자리가 아주 근사하고 멋진 모임이라면... 자리를 준비하고 우리를 초대하는 사람이 아무 대단한 사람이라면... 초대받은 것만으로도 우리는 참 기쁘고 행복합니다.
만일 그 초대가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면 초대받은 우리들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우리는 매 주일마다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것,그것도 거룩하신 하나님이 마련하신 하늘나라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항상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나를 보고 “주님의 집으로 올라가자” 할 때에 나는 기뻤다.’(1절)
그들의 예루살렘을 향한 순례는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축제에 초대받은 사람이 느끼는 깊은 기쁨을 표현하는 일로부터 시작됩니다.
물론 여기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습니다.
단지 주변의 사람들이 ‘이제 절기가 되었으니 함께 예루살렘에 갑시다...’ 이렇게 제안할 뿐이지만 그것조차도 기쁘고 좋은 것은 그는 그들의 이야기 속에서 자기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아... 하나님이 나를 아주 특별한 자리에 초대하시는 구나...’
예전에는 예배를 알리는 종을 쳤었습니다.
30분 전에 치는 종을 초종이라고 하고 임박해서 치는 종을 재종이라고 하였는데... 교회들마다 종탑이 있었고, 종을 잘 치시는 나이가 드신 어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그 종소리가 사라지고 찬송가 같은 것을 틀어주는 차임벨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런 종소리를 들을 때에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던 경험이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음성이로구나... 하나님이 나에게 너 어디에 있느냐? 하고 물으시는 구나... 하나님이 나를 예배의 자리로 초대하시는구나... 아이들과 장난을 하다가도 문득 마음이 경건해집니다. 아마 프랑스의 농민화가 밀레가 그렸던 ‘만종’이라는 그림이 그런 경건함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합니다.
저 멀리 교회당에서 들려오는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하던 일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부부의 모습, 아마 그보다 더 엄숙하고 경건하며 간절함이 담겨 있는 예배를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나 올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며칠 전에 어떤 분을 만나서 ‘왜 요사이 주일에 볼 수가 없으시죠?’ 물었더니 아주 자랑스럽게 대답을 합니다. ‘놀러 다니느라고 바쁩니다. 이번 주말에도 일박 이일로 스키를 타러가느라고 못 나옵니다.’
목사인 제게 이런 이야기를 당당하게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는데... 그런 것을 보면서 “이 자리가 정말 귀하구나... 아무나 올 수 있는 자리는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아주 특별한 축제에 초대를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에게 오늘의 주일이라는 생각이 들게 하시기도 하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통해서든지 신앙의 형제와 자매들을 통해서 인지 하나님은 여러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오늘 아주 특별한 자리가 이 곳에 준비되었음을 알리시며, 우리를 초대하여 주셨습니다.
초대받은 사람들만이 누리는 기쁨과 감동... 이것이 하나님의 전을 향할 때마다 우리들 가운데 항상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가 어떤 길을 지나서 예루살렘까지 왔는지... 예루살렘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길 때, 그의 기분은 어떠했는지... 그것은 잘 나타나 있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아 우리의 발이 네 성문 안에 들어서 있다.’(2절)
이미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였고, 성문 안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것을 강조하고 있는 대목입니다. 이렇게 성문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 여기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느낌은 어떤 것입니까?
만약에 우리들이 그 사람이 되어서 짧지 않은 여정 끝에 드디어 성문 안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그 때에 가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요? 아마 그것은 안도감이 아닐까 합니다.
제가 좀 소심하고 겁쟁이라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여행을 하는 동안에 불안한 마음이 있습니다.
순례자라고 해서 누구나 다 호의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은 아니겠지요.
“혹시라도 나쁜 사람이 내가 가는 길목을 노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이야기 속에서도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은 참 위험하고 강도들이 출몰하는 곳인데... 그런 길을 다닐 때에 우리는 누구나 다 불안함을 느끼면서 빨이 그곳을 지나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성 안에 발을 들여 놓았을 때 이제는 아무런 걱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든든한 성벽이 자기를 지켜주고 보호하여 주어서, 아무도 자기를 해치거나 공격할 수가 없습니다. 성문 안은 나를 해치려하는 사람들의 손길이 미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자기를 지켜주는 든든한 성벽... 그것은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예루살렘 성 안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 기쁜 것은 목적한 곳에 도착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가 머무르는 곳이 마치 든든한 성벽처럼 자기를 지켜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품 안 인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이스라엘의 시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모습을 참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진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는 시편 18편에서 이렇게 멋진 언어로 자기가 경험한 하나님을 표현하였습니다.
‘주님은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건지시는 분, 나의 하나님은 내가 피할 바위, 나의 방패, 나의 구원의 산성이십니다.’(시편18:2)
그가 이렇게 하나님을 고백할 때에 하고 싶은 말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만이 나를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지켜주시기에... 산성처럼 떡 버티고 나를 품어 주시기에, 어떤 거칠고 강한 적도 나를 공격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순례자가 예루살렘 성안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느끼는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산성이 되셔서 나를 보호하시니 누구도 나를 공경할 수가 없다. ”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마음이 오늘 이 자리에 발을 들여놓을 때마다 여러분에게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생각해보면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얼마나 불안합니까?
밖에 나가있는 우리의 가족들이 다 집에 들어올 때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는 세상입니다. 우리가 가는 길에서 어떤 어렵고 힘든 일을 직면하게 될지... 우리는 그것을 모르는 채로 불안하고 아슬아슬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성전에 발을 들여 놓을 때마다 “아...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의 방패ㅡ 나의 산성, 나의 요새가 되셔서 나를 지켜 주시는 구나... 사랑하는 나의 가족들... 나의 소중한 일터가 온통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는 구나... 그러한 것을 온몸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이 자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다른 여러 곳에서 온 서로 다른 지파의 사람들과 알게 되고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게 되고... 함께 위로하고 격려하고... 사진도 같이 찍고... 한 마음으로 예배도 드리고... 헤어질 때에는 서로의 연락처나 주소를 주고받으면서 만남의 기쁨을 나누는 것... 이것은 순례자들에게 주어지는 생각하지도 못한 기쁨이요 뜻밖의 선물입니다.(4절)
5절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다스리는 보좌가 놓여 있으니, 다윗 가문의 보좌로구나.’
그가 예루살렘순례의 길에서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 그것은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보좌입니다. 물론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의 가문을 통해서 이어져 내려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다윗의 가문을 확고하게 세우신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러니까 겉으로 보기에는 다윗과 그의 후손이 앉아서 나라를 다스리고 통치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그 보좌를 바라보면서 분명히 알게 된 것이지요.
“아 하나님께서 여전히 그 보좌에 앉으셔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구나...
한 때는 그런 생각이 많이 흔들렸습니다.
삶이 어렵고 힘들어지면서... 국가적으로 이스라엘이 큰 위기를 겪으면서... 이런 저런 나라들의 공격의 대상이 도기도 하고... 마침내 나라까지 빼앗기고 예루살렘 성전까지 적국의 조롱의 대상이 되었을 때... 그것도 모자라서 불에 타버렸을 때... 그리고 자기들이 살던 곳에서 쫓겨나게 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포로 생활을 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 릴 수밖에는 없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이 계시기는 한가? 내가 이렇게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하나님은 안 계실지도 몰라... 계시더라도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야.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내가 이렇게 될 수가 있어?’ 이런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일어났는데... 이제... 그는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은 살아 계시구나... 저 보좌에 앉으셔서...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다스리고 게시고, 나의 삶을 인도하고 계시구나... 이것을 순례자는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두에게 이런 하나님께 대한 확신과 믿음이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서두에 소개해드렸던 그 경건한 유대인의 이야기를 속에서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바로 그 부분입니다.
진정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원하시는 이들 가운데 하나님은 찾아오신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그렇게 요란스런 모습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마음이 향하지 않은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원하는 사람들... 진정 그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의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아... 내가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구나...
이러한 느낌은 우리를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초대합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기쁨과 희망이 솟아납니다.
어떤 어려움에 직면해도 낙심하지 않게 되고 어떤 장애물도 극복하며 헤쳐 나가게 됩니다.
“나는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나에게 주어진 삶은 얼마나 거룩하고 존귀한 것인지... 나의 삶은 다름 아닌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응답”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전의 우리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살아 왔다면, 이제 우리는 끊을 수 없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려는 새로운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변화된 순례자의 모습을 말씀의 후반부에서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제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주신 행복...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하는 축복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제 그가 하는 일이라는 것은 온통 평화를 선물하는 것입니다.
예루살렘과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예루살렘 성벽에도 궁궐에도 만나는 친척들과 이웃들에게도 그는 하나님의 평화와 복을 빌어주느라고 바쁩니다.
바쁘지만 그처럼 행복하고 좋은 일은 없습니다.
제가 목사라는 직업에 대하여 가장 행복하게 생각하고 만족할 때도 바로 그러한 순간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복을 빌어주는 일... 그것처럼 좋은 일도 없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러한 일들이 우리가 진정한 예배자가 될 때에 비록 아주 짧은 시간이지만, 우리의 마음이 이 시간만이라도 진정 하나님을 향할 때에 우리 가운데서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인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특별한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이라는 것... 이것을 주님 전에 나올 때마다 항상 기억하며 초대받은 사람의 기쁨으로 이 자리를 찾아 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전에 발을 들여 놓을 때에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만이 든든한 성벽이시고 방패가 되셔서 우리를 지켜 주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곳에 올 때마다 든든한 팔로 나를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 내가 지금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 줍니다.
이러한 거룩함의 경험이야 말로 우리의 덧없고 무의미한 삶을 거룩하고 존귀한 것으로 바꾸어 줍니다.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거룩한 것이지...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알게 됩니다.
예배가 가지는 신비는 그것을 경험한 사람이 아니면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신비를 모르는 이들에게 오늘 우리가 모여 있는 이 자리는 참 어리석고, 쓸모없는 낭비인 것처럼 보이지만, 유진 피터슨은 예배가 우리에게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한 여름 풀 베는 이를 보라. 해 지기 전까지 베어야 할 풀이 들판에 가득하다. 그는 잠시 일손을 멈춘다. 게으름인가? 그는 숫돌을 찾아든다. 그러고는 쓱쓱 낫을 갈기 시작한다. 웬 한가한 연주인가? 그는 귀한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가? 낫에다 곡조를 실을 시간 있으면 풀이나 벨 일이지... 하지만, 그는 지금 연장을 갈고 있다. 이제 그가 그의 낫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그 앞에서 줄지어 쓰러질 풀들은 훨씬 더 수북할 것이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