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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6일 북한 개성 판문역에서 남북한의 철도, 도로 연결 및 현대화 착공식이 있었습니다. 정부 여당은 이를 문재인 대통령이 제안한 「동아시아 철도공동체」의 전제이자 「한반도 신경제 구상」의 기본 토대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일부 언론은 ‘평화의 기적이 시작되었다’, ‘경제적 파생효과가 30년간 140조 원을 기대한다’면서 남북 철도 연결사업 비용을 많게는 80조 원 소요로 예상했습니다. 지
지난 지방선거 때도 50만 원이면 유라시아 기차를 타고 북한,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갈수 있다는 식의 정부여당의 홍보에 유권자들의 표심도 묻지마 투표로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50만 원으로 유라시아 기차를 타고 북한, 모스크바를 거쳐 유럽으로 가게 될날이 언제 올까요? 유라시아 열차의 꿈은 문재인 정부가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02년 캠브리지 선언을 계기로 민족의 아젠다로 유라시아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쏟았습니다.
3년 전 저는 유라시아 원정대 대장으로 국회의원 다섯 분 280여 명의 국민 원정대와 백여 명의 취재진, 그리고 50여 명의 외교부 및 코레일 정부 관계자와 함께 러시아에서 유럽까지 기차로 가는 대장정에 올랐습니다. 백 년 전 손기정 옹은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러시아 기차로 바꿔 탄 다음 러시아를 횡단해 베를린으로 가서 올림픽에 참가해 금메달을 땄습니다. 우리 원정대는 러시아 블라디보스톡까지 비행기로 가서(또다른 팀은 몽골을 거쳐 러시아 중간 기착지 이르쿠츠크에서 합류) 그곳에서 모스크바를 거쳐 베를린까지 9880킬로를 기차로 달렸습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2002년 발표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즉 유라시아의 동서를 연결함으로써 지구촌의 평화와 번영을 증진시키려는 구상이 현실에서 첫 발을 뗀 시도였습니다.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역사 왜곡 등 역사 분쟁이 끊이지 않았던 때라 민족애적 측면에서 출발부터 감회가 남달랐는데 돌아와서 원정기록을 정책자료 화보집으로 냈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정략적인 목적이 아니라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진정성으로 이 유라시아 프로젝트를 시도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당시 발간한 정책자료집 중 일부 기억을 여기 간략히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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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과 현실 사이, 시베리아 횡단철도>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가 황태자 시절에 추진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는 공사 25년 만인 19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모스크바 야로슬라블역까지 거리는 9288km. 경부선 거리의 20배가 훨씬 넘으며 지구 둘레의 4분의 1, 미국이나 중국을 두 번 횡단하는 길입니다. 겨울철 기온이 영하 40도 이하로 내려가는 러시아에서는 도로는 폭설로 막히고 혹한으로 파손되기 쉬워 철도가 주 교통수단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일 년 중 절반이 겨울인 기후, 광활한 국토, 긴 여행에서의 숙식 해결 등 열차만큼 요긴한 교통수단이 없기 때문입니다.
현재도 지방의 숙박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라 아무리 짐짝처럼 사람들을 가득 태우는 6인실이라고 할지라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모스크바까지 쉬지 않고 달려도 6박 7일이 걸려 열차 여행만큼 효율적인 교통수단이 없어 여객의 40%, 화물의 85%를 철도가 담당할 정도로 교통에서 철도의 역할은 막중합니다.
시베리아 철도의 폭은 광궤인 1520mm로 우리나라의 표준궤 1435mm와는 차이가 납니다. 러시아가 유럽의 표준궤와 달리 광궤를 채택한 것은 넒은 객실을 위한 의도도 있지만 실상 외부의 침략에 대비한 것이라고 합니다. 실제 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의 소련 침공 때 유럽과 호환되지 않은 광궤 때문에 독일군의 보급품 전달이 늦어져 공세를 늦출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표준궤와 광궤가 교차하는 역에서 화물과 사람이 열차를 옮겨 타야 했지만 요즘에는 차량을 통째로 바꾸는 대차 교환 시설이나 바퀴 폭이 자동으로 바뀌는 시스템이 개발돼 이동할 필요가 없습니다.
시베리아 철도 여행의 묘미는 열차 밖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광활한 대륙을 관조하는 것입니다. 시베리아 열차는 은백색의 나무껍질을 두르고 하늘을 향해 힘차게 뻗어 있는 자작나무 숲을 무심한 듯 무수히 지나칩니다. 자작나무의 은백색 외투는 다른 나무들의 거무튀튀한 그것과는 확연히 차이가 나 서로 섞여 있으면 자작나무는 우선 겉모양에서부터 도드라집니다. 어디에서고 환하게 빛나는 그 외양은 가히 나무의 귀족이라고 불리울만 합니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시베리아 농가의 울타리는 모두 목재였습니다. 쉽게 구할 수 있고 값싸기 때문일 것입니다. 광활한 시베리아 일대에서 이같은 나무들을 벌목하는 벌목공들의 주 조달처는 북한이라고 합니다. 북한의 열악한 인권 실태로 시베리아 벌목공 사례가 종종 등장하는데 그들은 혹한 속에서 안전장치도 제대로 갖추지 않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벌목장으로 내몰린다고 합니다. 1990년대 북한은 외화벌이 명목으로 최대 2만 명까지 이곳 시베리아 벌목장에 파견시켰다고 합니다.
유라시아 국민 원정대 중 상당수가 참가 계기로 <닥터 지바고>를 꼽았을 정도로 한국인들은 영화에 나오는 러시아 설원의 눈썰매 영상을 러시아 하면 떠오르는 겨울 풍경으로 연상하는것 같습니다. 톨스토이 원작의 영화 <안나 카레리나>나 <러브 인 시베리아> 나오는 화려한 기차 객실 풍경이 이런 러시아 겨울 판타지를 더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 속의 러시아 기차는 그다지 낭만적이거나 쾌적하지 않았습니다. 식당칸 운영 때문에 식수 외 물은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사정으로 샤워는 생각할 수도 없고 온갖 신공을 다 부려야 간신히 고양이 세수라도 할 수 있습니다.
수도꼭지를 힘주어 누르고 있을 때만 물이 나오고 배수구를 막는 마개 자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일반 객실은 보통 6인 1실 기준인데 좁아서 제가 감옥에 있을 때의 1평 반 독방을 연상케 했습니다.
달리는 객차 안에서 몸을 밖으로 내밀 수 있는 유일한 해방구는 식당칸 옆의 조리실 지나 요리사들이 담배를 피우는 난간입니다. 이곳에 기대어 달리는 기차를 찍었습니다.
<한민족 생존을 위한 역사 서사시, 시베리아>
유라시아 친선 특급열차가 달린 시베리아 지역은 북만주와 연해주, 곧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고 조선 효종 때는 조선의 조총 부대를 필두로 한 나선(羅禪)정벌군이 2차례에 걸쳐 러시아 정벌에 나섰던 선조의 얼이 담긴 대륙입니다. <토지>와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에 등장한 민초들의 꿈과 사랑의 현장이었고 주권을 빼앗긴 나라 잃은 동포 각자가 항일 투쟁에 앞장섰던 불굴의 전선이었습니다.
시베리아 열차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 중 가장 자주 보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연두색 치마에 봉숭아 꽃물이 흩뿌려진 듯 군데군데 피어 있는 연보라색 꽃 이반차이입니다. 시베리아 녹색 들판 여기저기 피어 있는 연보라색 꽃 이반차이는 영하 40도 이상씩 내려가는 시베리아의 혹한을 뚫고 6월 봄날이 되면 마침내 아름다운 꽃을 피웁니다. 이반차이는 오직 불이 난 땅에서만 핀다는 꽃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잿더미에서 생명을 얻고 피어난다는 이반차이는 시베리아의 가혹한 자연환경 속에서도 끈질기게 살아남아 꽃을 피우는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합니다. 제 눈에는 이국땅에서 지난한 생존 투쟁을 하면서도 독립운동과 민족혼을 불태운 우리 선조들의 치열한 얼이 차창 밖에 흩뿌려진 이반차이에 투영되어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얼은 시베리아 곳곳에 새겨있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톡과 바이칼 호수가 있는 이르쿠츠크 사이에 있는 하바롭스크는 아무르강을 경계로 중국, 몽골과 접해 있는데 중국에서는 이 아모르강을 헤이룽강, 우리말로는 흑룡강이라 부르고 몽골인들은 하라무렌(‘검은 강’이라는 뜻)이라 부릅니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 조정래의 「태백산맥」 등 일제 강점기에 나라를 빼앗긴 선조들의 이주 무대로, 독립운동 활동지로 이 흑룡강이 종종 등장하기 때문인지 우리에게 낯설지 않게 여겨지는 이 아무르강은 맑은 날씨엔 평화로워 보였지만 세계에서 8번째로 긴 강으로 공인된 넒은 강폭과 길이를 과시라도 하듯 물 흐름은 거셌습니다.
우수리스크 고려인 문화센터에서는 1920년부터 고려인들의 삶을 담은 사진들이 전시되어있습니다. 거대한 강폭의 아무르강을 헤치며 내다 팔 것을 채취해 자식들을 키웠던 고려인 어머니들, 아연이나 수정 광산에서 중 노동을 하면서 힘겹게 번 돈을 독립운동의 불씨를 살리는 데 보태는 것 을 주저하지 않았던 고려인 아버지들의 기록입니다.
나라 잃은 동포들의 뜨거운 생존의 현장인 이 아무르 강, 흑룡강에 서 보니 현재와 같은 중국, 러시아 열강의 틈 속에서 우리 세 대가 굳건히 발전 계승시켜야 할 우리 나라에 대한 역사적 책무가 가슴을 뻐근하게 했습니다. 시베리아의 이반차이같이 고난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아 민족혼을 꽃피웠던, 우리 선조들의 족적은 응축된 한국의 힘 다이나믹 코리아(Dynamic Korea)의 전신이었고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K-pop과 한국 드라마의 열 풍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는 확신마저 들게 합니다. 이질적인 환경 속에서도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민족의 넘치는 흥과 끼가 세계를 매료시킨 창의성의 원천이 아니었을까요?
<시베리아의 푸른 눈 바이칼 호수>
러시아인에게 바이칼 호는 민족의 발원지이자 자궁과도 같은 성스러운 호수로 여겨집니다. 러시아인들이 경외하는 ‘시베리아의 진주’,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문화유산인 ‘시베리아의 푸른 눈’ 바이칼호의 첫 인상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습니다. 청색 물감을 통째로 수면에 부어 놓은 듯한 코발트색 바이칼호는 호수라기보다는 수평선이 펼쳐진 끝없는 바다였습니다. 열차가 바이칼호를 끼고 달리기 시작해 호수를 벗어나기까지는 무려 2시간이 걸릴 정도로 면적은 남한의 3분의 1과 맞먹고 길이는 636km에 달했습니다. 세계 담수량의 20%를 품고 있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차가우며, 가장 깊은 호수 바이칼호는 바다의 표면보다 1295미터 낮고 지구상 대지의 가장 깊은 심연에 자리잡고 있으며 1,500여 생물 종(種)과 1000여 종의 식물이 서식하는데 이 중 80% 가량이 오직 바이칼호에만 존재하는 희귀종이다고 합니다.
2500만 년 전에서 3000만 년 전에 생겨난 것으로 추정되는 바이칼호에는 336개의 강이 유입되는 반면 유출구는 단 한 곳 앙가라(Angara)강뿐입니다. 지구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오염되지 않은 호수로 정평이 난 바이칼호는 40m까지 맑게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한 수질을 자랑하는데 바이칼호에 사람이 손을 담그면 5년이 젊어지고 발을 담그면 10년이 젊어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입니다. 경이로운 것은 3만 년까지 추정되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바이칼호는 멈추지 않고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이칼호 주변에는 매년 3000번 이상씩 지진이 발생하는데 이 때문에 바이칼호 외연은 매년 2cm씩 넓어지고 1㎝씩 융기하고 있습니다.
바이칼호 주변을 구경하노라면 잔가지 나무에 천 조각들이 줄레줄레 걸려 있는 것을 간간히 보게됩니다. 우리나라 서낭당처럼 바이칼호를 바라보며 천을 매달고 소원을 비는 것이라 하는데 이는 바이칼호를 영적인 대상으로 여기는 러시아인의 의식 세계와 관계가 있어 보입니다. 바이칼호 알혼섬의 토착 부족 브리야트족의 언어로 ‘무당의 물, 큰 물’이란 뜻을 가진 바이칼호는 고대로부터 경이로운 영험의 장소로 여겨졌습니다. 이 때문에 세계 샤머니즘의 본산으로도 불리는 바이칼호는 10월부터 얼기 시작해 한 겨울에는 얼음의 두께가 1미터까지 두꺼워집니다. 5월이 지나 봄이 오면서 바이칼호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며 깨지는 소리는 인간 위에 존재하는 초자연인 존재를 떠올리게 합니다. 얼음이 갈라지는 소리는 바이칼호로부터 10여 킬로미터 떨어진 지역까지 생생하게 전달되는데 가히 자연에 대한 경이(驚異)와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바이칼호에 계절풍이 불면 어선들이 조업하던 도중 어떤 배가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없이 호수 저편으로 떠밀려 사라지곤 했다는데 옛 사람들에게는 인간의 언어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힘으로 여겨졌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제물로 바쳐 풍랑을 잠재운다’는 우리나라 심청전에 나오는 인당수 이야기와 흡사한 민담이 이곳 바이칼호에도 전해지고 있다.
브리아트 족이 살고있는 바이칼호의 22개 섬 가운데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알혼(olkhon)섬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련해서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곳입니다. 우리 민족의 발원지가 백두산이 아니라 바이칼호라는 주장은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국문학자겸 문화학자인 육당 최남선 선생에 의해 처음 제기되었습니다.
육당은 1925년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에서 한민족의 기원, 발원지를 바이칼 호 알혼섬의 부르한 바위라 했습니다. 육당은 바이칼호의 탄생 신화인 게세르 신화와 일연선사가 기록한 삼국유사에 수록된 단군신화의 유사성을 지적하며, 단군을 건국의 시조 개인이 아니라 원시사회의 신앙에 근거를 둔 종교적 제사장으로 이해해야 한다며 동아시아 고대 신화와 서사시를 비교 연구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하였습니다. 제가 하바롭스크 주정부 주지사와 면담하기 위해 주청사를 방문했을 때 청사 중앙에 새겨져 있는 타일 벽화 앞에는 우리 단군 신화와 유사한 바이칼 창조 신화, 게세르 신화에 나오는 곰 모형이 서있었고 벽화 중앙의 시베리아 삼림 주위로는 18마리의 동물들이 타일로 새겨져 있었습니다.
현재에도 브리야트족 출신 학자들은 한반도의 단군신화와 바이칼 탄생 신화인 게세르 신화의 유사성을 들어 육당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인구 25만 명의 브리야트 공화국 사람 중 상당수가 한국인과 자신들은 바이칼에서 난 한 민족이라고 믿고 있다고 합니다. 실제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유라시아 대축제에서 공연한 브리야트족들의 얼굴을 보니 생김새가 전통 의상만 아니라면 한국인으로 착각할 정도였습니다. 골상이 비슷한 점 외에 양국 사이에 발음과 뜻이 유사한 단어가 수백 가지이며 효도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고 전통을 중시하며 2세 교육에 열성을 다하는 의식 세계도 매우 비슷합니다. 우리와 같은 고수레 풍습과 민속학적으로 공통점이 많은 것은 셀 수가 없고 곰 건국 설화 외에 선녀와 나무꾼, 심청전과 같은 유사한 설화, 민담들이 전래되고 있는것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독립운동가이자 근대 민족주의 사학의 효시인 단재 신채호 선생은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중심으로 시베리아에서 활동하며 지난 천 년간 은폐되었던 한국 고대 역사를 연구 체계화했습니다. 일제에 의해 8년째 수감 도중 옥사한 단재의 공은 우리 역사를 중국사에 종속시킨 중국 중심적 역사관에서 탈피하여 독자적인 영역으로 우리 역사를 조명했다는 것입니다. 단군 시대부터,기자, 마한, 통일신라, 고려를 정통으로 한 한국사 체계를 완성했던 민족주의 사관의 효시인 단재는 민족의 대륙이동설을 주장했습니다.
단재는 635년 ‘대(大)불가리아(Magna Bulgaria)’를 건국한 불가족(Bulghar)이 동방의 부여족, 즉 우리 민족의 직계 조상과 같은 뿌리라고 했다. 서양 사학자들은 그 기원을 알 수 없다고 규정한 그 고추 불가족에 대해 1910년경 단재와 2007년 저명한 국사학자 신영하 교수는 다음의 역사적 근거를 들었습니다. ‘고추 불가’국 명칭은 고구려에 신분제로 승계된 통치 체계 ‘고추가(加)’임을 표시하며, 국호에 ‘불’자를 붙이고 수도를 소피아로 명명한 것은 수도를 ‘사비(泗=)’로 호칭하는 고추 불가족의 관례이며(‘소비’와 ‘사비’는 호환됨), ‘발칸’(밝안산, 밝산, 白山·고대 한민족이 제천의식을 행한 산)으로 명명한 산에 올라 조상신 ‘단군’에게 승전의 제를 올린 것 또한 그들이 ‘부여족’이라는 명확한 증거의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시베리아에 전해지는 우리 민족의 기원과 관련된 여러 가지 주장의 진위를 살피기 전에 비교 문화적 차원에서 고대 우리 민족의 역사를 새롭게 탐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통해 폄훼되고 퇴색된 우리 고대사의 정통성의 단초가 이 시베리아 땅에 아직도 많이 남아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정오 햇살에 어느덧 에메랄드 빛으로 변한 바이칼호가 신비롭게 보였습니다. 유구한 만년 역사를 가진 우리 민족은 본래 초원에서 말을 달리는 역동적인 민족이었으며 광활한 미지의 땅을 개척한 위대한 민족이라는 증거가 살아 있는 화석으로 유라시아의 젖줄인 바이칼호 심연 깊은 곳에 감춰져 있는 것만 같기 때문입니다.
에메랄드 빛의 한가한 낮의 표정과 우주의 블랙홀마저 빨아드릴 기세로 심연 깊숙이 태양을 빨아들이는 석양, 바이칼의 두 얼굴을 감상해보십시오.
[ 2019-01-06, 17:4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