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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성탄 메시지 – 진주, 순천 연합예배
경배받으실 왕, 예수님
말씀 / 마태복음 2:1-12
요절 / 마태복음 2:11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Merry Christmas! ‘경배 Worship’라는 단어는 기독교인들에게 친숙합니다. 복음성가에는 경배라는 단어가 빠지지 않고 등장하고 [경배와 찬양] 프로그램이 거의 모든 교회에서 활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익숙해진 만큼 경배의 의미는 흐릿해졌습니다. 본문에는 예수님께 가장 먼저 경배를 드린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들은 유대인도, 종교지도자도 아닌 동방에서 온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별만 보고 먼 길을 찾아 왔고 아기 예수님께 경배와 예물을 드렸습니다. 그들의 여정과 예물이 경배의 진정한 뜻을 잘 보여줍니다. 말씀을 통해 경배의 의미를 새롭게 하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 동방박사 (1)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탄생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은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를(눅2:1 “그 때에 가이사 아구스도가 영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 하였으니”), 마태복음은 유대 왕 헤롯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태어난 시대 배경을 잘 보여줍니다. 누가복음은 로마의 식민 통치라는 상황을, 마태복음은 폭군 헤롯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들의 고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헤롯은 BC 37년 로마 황제의 임명을 받아 유대 왕이 되어 예수님 탄생 당시까지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정통유대인이 아닌 에돔(이두매) 출신이었고, 왕권에 대한 집착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의심되는 자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했습니다. 심지어 첫째 아내가 낳은 두 아들과 둘째 아내와 그녀가 낳은 두 아들도 죽였습니다. 이런 헤롯의 통치 아래 있는 백성들의 삶은 팍팍하고 어두웠습니다. 당시 귀신들린 자들이 많았는데, 어두운 시대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이에 하나님은 어둡고 절망적인 시대를 밝힐 빛, 약속된 메시아를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알릴 사람들을 동쪽에서 부르셨습니다.
동방박사들의 출신에 대해서는 페르시아나 아라비아가 지목되고 있습니다. 박사로 번역된 ‘Magi(magician)’는 페르시아 조로아스터교 제사장을 가리키는 단어였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페르시아 출신이라는 견해가 강하지만, 당시 magi는 점성술(astrology)이나 비밀스런 지식(esoteric knowledge)에 정통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단어였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AD 160년경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책에서 “현자들은 아라비아에서” 왔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럼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첫째, 진리를 찾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은 독립국가가 되지 못했습니다(페르시아->그리스->잠시 독립->로마). 그러자 백성들 사이에 메시아에 대한 소망이 퍼져나갔습니다. 독립에 대한 소망이 강력한 정치적 메시아에 대한 기대로 변한 것입니다. 당시 근동지역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았는데(디아스포라), 이들을 통해 이방인들에게도 메시아사상이 전파되었습니다. 동방박사들도 이런 경로로 메시아에 대해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시 랍비문서에는 민수기 24:17절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라는 구절을 기반으로 메시아 탄생별에 대한 추측이 있었습니다. 박사들은 여기에 관심을 가졌고 마침내 예수님 탄생 2년 전(BC 6년) 그 별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마2:7,16). 이 별이 자연적인지 초자연적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박사들은 자신들의 분야에서 메시아를 찾으려는 노력을 기울였고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특별한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찾으려는 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둘째, 행동하는 지성인이었습니다.
별을 발견했지만 그것을 따라나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먼저 저 별이 진짜 메시아의 별일까? 하는 의심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적인 문제들도 넘어야 합니다. 그들이 페르시아 출신이라면 1000km가 넘는 여행을 해야 했습니다. 짐도 많고 강도의 위험도 있었을 것입니다. 때로는 노숙을 하고 풍토병도 견뎌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의심과 실제적인 문제 모두 극복했습니다. 진리를 발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기꺼이 감당한 ‘실천하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을 가졌습니다(약 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실천이 없는 믿음, 순종이 없는 신앙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면 무너져 내립니다. 하지만 순종하는 자는 견고하며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믿음에 따른 열매도 거두게 됩니다. 행동하는 믿음으로 열매를 거두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II. 이스라엘의 목자 (2-6)
동방에서 처음 나타났던 별은 메시아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박사들은 예루살렘을 방문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신지 물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냐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유대인의 왕이니 당연히 예루살렘에서 태어난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박사들은 순수했지만 헤롯과 이스라엘은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헤롯은 새롭게 등장한 경쟁자 때문에 불안했고, 백성들은 헤롯이 어떤 짓을 할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헤롯은 당장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을 불러 모았고, 그들은 미가서 5:2 말씀을 읽어 주었습니다. 6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 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미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서 마태는 미가의 예언을 다시 번역하여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경을 읽는 방식이었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히브리어가 아닌 아람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전문연사가 히브리어 성경을 읽으면 통역자가 아람어로 의역(liberal translation)해서 알려주었습니다. 신약성경의 저자들도 구약을 인용할 때 의역을 했는데, 여기에는 번역자의 의도가 들어가 있습니다. 마태의 번역의 정점은 “목자”라는 단어에 있습니다. 마태는 다스리는 자와 목자를 동일하게 보았는데, 여기에는 시편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의 이미지가 들어가 있습니다.
누가 다스리느냐는 문제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가장, 공동체 지도자, 왕, 대통령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감정적이거나 무능력한 아버지, 폭력적인 아버지로 인해 많은 자녀들이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국가도 마찬가지입니다. 캄보디아의 독재자 폴 포트는 2백만 명의 국민을 살해했고, 옛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천만 명이 넘는 국민을 수용소로 몰아넣어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를 시끄럽게 만든 사람도 한 나라의 대통령입니다. 반면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넬슨 만델라는 27년간의 감옥생활에도 불구하고 화해와 관용으로 나라를 하나로 만들었습니다(‘진실과 화해 위원회’). 그가 서거하자 수많은 인파가 모였습니다. 흑인과 백인이 뒤섞여 그가 일생을 바쳐 헌신한 정신과 업적을 기리며 춤을 추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통치자가 누구냐에 따라 이렇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불행하다고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왕 아닌 것을 왕으로 잘못 섬기기 때문입니다. 돈, 명예, 권력은 있으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을 지배할 때 자유를 잃고 그것만 좇아 살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그보다 더 소중한 것들, 가족, 친구, 믿음, 소망, 사랑을 잃게 되고 마침내는 돈과 권력도 떠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삶을 통해 경험할 수 있습니다(유명인, 연예인들의 자살). 그래도 우리는 여전히 어리석고 불행한 삶을 향해 부지런히 달음질하고 있습니다.
마태도 동일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는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죄인, 반역자 소리를 참아가며 세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망했습니다. 돈은 많았을지 몰라도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이런 그가 우두커니 세관에 앉아있을 때 예수님이 찾아와 그를 불러 주셨습니다(눅5:27). 돈에 매여 살던 그와 3년간 함께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모든 죄까지 감당해 주셨습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린 선한 목자이심을 알게 되었습니다(요10:14,15 “나는 선한 목자라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예수님은 마태의 선한 목자일 뿐 아니라 우리의 선한 목자도 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의 목자가 되시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목자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 각 사람을 인격적으로 잘 이해하십니다(요10:14). 나도 나를 잘 모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지으신 예수님은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고 도우십니다. 예수님은 놀라운 상담자(Wonderful Counselor)가 되셔서 우리의 고민을 들어주시고,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verlasting Father)로서 우리가 한계를 극복하도록 도우십니다. 그리고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으로서 험한 세상에서도 하늘의 평안을 누리게 하십니다(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이 예수님이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목자가 되어주시면 시편 23편의 고백처럼 부족할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우리의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깊이 만나기를 기도합니다.
III. 아기께 경배하고 (7-12)
7절을 보십시오. 헤롯은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물었습니다. 그리고 “아기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와서 말해달라”며 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베들레헴은 약 10km정도 떨어져 있었고, 박사들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진 상태였습니다. 그들이 머물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때 동방에서의 그 별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인도하여 아기 있는 곳에 머물러 섰습니다. 이때 박사들의 반응이 어떠했습니까? 10절을 보십시오.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overjoyed)” 그들이 왜 이렇게 기뻐했을까요? 당연히 메시아를 곧 만난다는 기쁨이 가장 컸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동안의 믿음과 노력이 헛되지 않았다는 기쁨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통해 메시아의 존재를 알았고 그의 별도 발견했습니다. 문제는 2년이라는 기다림의 시간입니다. 별이 날마다 나타나서 비춰주면 좋았겠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별을 보고 크게 기뻐한 걸 보면 처음 발견한 후로 다시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같습니다. 진리의 별이 항상 우리를 비추는 것이 아닙니다. 날씨가 맑을 때도 있지만 비가 올 때도 있고 흐릴 때도 있습니다. 현실의 삶이 팍팍해서 날마다 하늘을 쳐다보기도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가려질 뿐입니다. 상황이 흐려서, 내 마음이 흐려서 별을 보기 힘들 뿐입니다. 그렇기에 별이 우리 마음에 다시 나타날 때까지, 또 예수님을 만나기까지 인내로서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 믿음이 있을 때 진리의 별로 인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11절 ‘경배하고’ 까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경배(헬–프로스퀴네오 προσκυνέω)’란 땅에 엎드려 경의를 표하는 것인데, 주로 신에 대한 행위에 사용합니다. 경배는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경외심과 겸손, 내적 지향성까지 포함한 개념입니다. 로마는 황제 숭배에 이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로마는 무력으로 다른 나라들의 무릎을 꿇게 하고 황제 앞에 고개를 숙이게 했습니다. 그에 비하면 이제 두 돌도 안 된 아기 예수님은 연약하다 못해 무기력해 보입니다. 하지만 박사들은 아기께 경배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능력을 본 것도 아니고 무슨 환상을 본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순수한 경배를 드렸습니다. 박사들에게서 배워야 할 점은 이런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을 무슨 도깨비방망이 보듯 합니다. 열심히 소원을 빌면 무언가를 내려주는 존재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임마누엘)을 보여주십니다. 그 육체로 인간의 모든 죄를 짊어지고 십자가를 감당하심이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실 모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절박한 문제에 응답하심이 감사 제목이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만으로도 경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11절 하반절을 보십시오.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이 장면은 이사야 60장 말씀이 실현된 것입니다(사60: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둠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의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나라들은 네 빛으로, 왕들은 비치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방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먼 곳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어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 6 허다한 낙타, 미디안과 에바(아라비아 남부 지역)의 어린 낙타가 네 가운데에 가득할 것이며 스바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이사야는 장차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놀라운 일들을 꿈꿨지만 환상은 현실이 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마태는 그 예언이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이루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큰 빛과 함께 주의 영광이 나타났으며(눅2:9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아랍인 현자들이 아기에게 오면서 황금과 유향을 낙타에 싣고 가져왔습니다. 박사들이 드린 보배합은 각각 상징하는 것이 있습니다. 황금은 왕에게 드린 예물로서 그리스도의 변치 않는 신성을, 유향은 그리스도의 제사장 되심을, 몰약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예물들은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신 하나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사하는 대속의 주님인 것을 나타냅니다. 그렇게 본다면 세 가지 예물은 박사들의 신앙 고백인 셈입니다. 신앙고백은 속마음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사람 사이에도 사랑을 표현할수록 사랑이 깊어집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며 사랑을 고백할 때 신앙고백의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결론 : 우리가 삶 속에서 빛을 만나고 예배의 감격을 누리는 시간은 극히 짧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예배는 큰 감흥 없이 흘러갑니다. 어떤 분들은 삶 전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정말 좋겠지만 짧은 예배시간에도 깊이 예수님을 경배하지 못한다면 의미 없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삶 대부분은 낙타를 타고 걷는 시간입니다. 이렇게 반복되는 매일에 짧게 빛이 비추는 시간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이 시간에 집중하고 만남을 사모할 때 동방박사의 기쁨이 바로 우리의 기쁨이 될 것입니다. 이 시간 모든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나에게 찾아오신 왕이요 목자이신 아기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쁨이 충만한 성탄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