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현관을 나서서 정물처럼 붙박이로 서 있는 그에게 인사를 건넨다. 눈인사도 좋고 혼잣말 인사도 한다. 미동 없는 그를 볼 때마다 늘 미안함이 먼저 든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지 않았다.
스무 해도 넘게 동고동락해 온 사이다. 그는 지금도 오로지 나를 향한 해바라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애틋한 그 사랑이 아무리 눈물겨워도 둔한 채 건성으로 대했다. 내가 그를 필요로 할 때만 가까이 다가갔고 그때만큼은 그에게 내 몸과 마음을 온전히 맡겼다. 그는 한 점 불만이라고는 없는 얼굴로 언제나 한 걸음으로 나를 받아 주고 안아 주었다. 이제야 알게 된 올곧은 그 짝사랑에 가슴이 찡하다. 어떤 존재가 이토록 내게 목을 맬까. 이즘 그와 내가 같이 늙어 가는 것조차 사실 눈물겹다.
그는 나와 일심동체 같은, 무기물이라고 구별 지어 부르기는 싫은 내 자동차이다. 이십이 년 지기로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아이 둘을 결혼시키고, 또 몸이 아픈 시기도 있었다. 지난 세월 내 아픔과 슬픔과 기쁨까지도 나눈, 말없이 받아 주고 들어 준 가슴 넓은 동지였다. 작은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러 유아교육기관을 갈 때는 저도 나도 신이 났다. 견디기 힘든 상황에서는 핸들을 잡고 소리 내어 울기도 했고 기쁜 일에는 같이 들떠 경쾌하게 속력도 내었다. 이제는 바퀴의 회색 휠이 벗겨진 곳도, 본체의 바닥에도 군데군데 녹이 두껍게 슬어 있어 안쓰럽다. 거리를 달리다 보면 초록색 번호판이 흔치는 않고 같은 차종은 아예 안 보인다. 그에게 몸을 맡기면 내성적인 성격인데 자신감을 채울 수밖에 없었다. 주차 문제나 가벼운 접촉 사고 같은 난관이 생기더라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맞서야 했다. 그를 보호해야 할 의무와 책임감이 나를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와 나 사이에는 남편이나 자식이라도 끼어들지 못하는 한 몸인 운명 공동체이다. 영원히 같이할 수 없는 시간이 다가오는 게 두렵다.
오래전, 집 마당에서 십육 년을 키우던 반려견과의 이별도 있었다. 난소의 염증 수술 후 퇴원시키러 간 날, 기다렸다는 듯 내 목소리를 듣고 힘들게 꼬리를 몇 번 흔들고는 쓰러지며 호흡이 가빠졌다. 헤어질 일을 예상치 못했고 떠나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어 진료실 밖으로 뛰어나왔다. 제대로 작별 인사도 못 한 채 보냈다. 한동안 그 아이가 있던 빈자리가 커져 마당을 서성이고 어디서 움직임이라도 들릴까 봐 귀를 세우곤 했다. 더러 잘해 주지 못한 순간들이 떠올라 후회스럽기만 했다. 그 후, 다시는 능동적인 생명체는 키우지 않겠다고 맘 다졌다.
멈춰 서 있는 내 자동차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다르지 않다. 당장이라도 차문을 열면 단숨에 호흡과 피돌기를 해서 어디로든 움직인다. 반려견처럼 숨을 쉬는 생명은 제 스스로 생을 마감하지만 자동차는 내 손으로 거두어야 한다. 자동차의 수명과 운전대를 놓고 싶은 마음이 맞아떨어져 이별은 불 보듯 하다. 정든 인연과의 헤어짐은 견디기 힘든 일이다. 살아온 시간의 축적만큼 무딜 법도 한데 웬걸 더하다.
살면서 숱한 이별과 맞닥뜨린다. 스치듯 가볍거나 하늘이 꺼질 듯 무거운 이별도, 예상치 않은 황망한 이별도 있다. 정신을 수습하기 어려운 이별은 다들 피하고 싶어 한다. 반세기를 넘어 사는 동안 내 손에 익고 정이 든 기물들이 어디 한두 개이며 알게 모르게 맺고 헤어진 사람들은 또 오죽 많은가. 내가 아는, 세상 떠난 이들은 물론 대를 이어 키우던 마당의 수목들을 반강제로 버리고 온 일이며, 길을 걷다 눈여겨보았던 작은 풀꽃이 며칠 새에 진 것도 눈물 나고 헛헛한 이별이다. 우리는 시간과 세상의 변화 속도를 이기지 못한다. 아파하며 보내고 낯선 만남을 하며 바람 찬 세상을 산다.
이별이 연습될 수 있을까. 겨우내 차가운 땅을 뚫고 올라온 여린 싹을 보고, 갓 피어난 꽃잎을 보고, 화무십일홍을 먼저 떠올릴 사람은 없을 것이다. 생멸은 한 선상에 있는 점이지만 앞당겨 생각하지는 않는다. 세상 모든 만물은 태어나고 죽는 이치에서 벗어날 수 없어 끝을 향해 나아가더라도 영생할 것처럼 열심히 오늘을 산다. 철학자나 현자가 아닌 이상 종착지를 미리 생각지 않고 사는 것이 행복을 위해 필요하다. 때가 되면 꽃이 지고 열매가 맺듯 또한 열매까지 떨어져 나목으로 겨울을 난다 해도 마침내 봄은 온다. 사계절 만남과 이별이 순환의 고리로 돌고 도는 것이 이별 연습일 수는 있겠다 싶다.
지인의 남편은 은퇴 후에 시골집을 오가며 자신만의 시간을 가졌다. 지인은 남편이 집을 비우는 날들이 많아지자 무책임하고 이기적이라며 불만이었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남편의 병원 출입이 잦아지고 그러다 세상을 떠났다. 지난 일을 돌이켜 본 지인은 이삼 년의 그 시간이 되려 이별 연습을 하게 했다며 슬픔을 묻고 지금은 편안하게 말한다. 크고 작은 이별은 누구에게나 예비되어 있다. 두렵긴 하지만 그 사실을 인지할수록 남은 날들을 허투루 쓰지 않게 된다. 가끔은 살아온 날과 살날들을 점검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질 필요가 있겠다.
이사를 몇 번 하다 보니 짐이 많이 줄었다. 넓은 주택에서 이것저것 펼치고 쌓고 살았나 보다. 가구도, 장독도, 사다리니 삽이니 하는 집안 연장들도 없앴다. 사진도 책들도 반 이상 버렸다. 버리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내 손에서 정리를 단행하는 게 맞을 성싶었다. 훗날 자녀들에게 반갑지 않은 짐 보따리를 물려줄 수는 없지 않은가. 정리를 했다지만 머릿속에 유형무형의 잡동사니도 많이 있어 조금씩 비울 일이다. 나이 들면 버리는, 이별에 길이 들어야 할 테다.
산책을 하고 들어오면서 체념하듯 서 있는 그의 어깨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봄날이라 체온처럼 온기가 전해진다. 사랑은 자주 함께할 때 비로소 증명되는 것인데, 그런데도 내 맘을 안다는 듯 몸을 내어 주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 같다. “저만치 와 있는 이별이 정녕 무섭지 않고 싶다.” 누구의 노랫말처럼…이별이 더 유심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