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지난 총선결과를 분석하는 많은 정치 평론가들도 정작 놓친 것은 기껏 박근혜정부의 심판론, 선거지형 중심의 공학적 분석론, 혹은 공천 잘못으로 대변되는 떡수론 등이 재론되었다. 물론 전적으로 틀린 분석은 아니지만, 야당 분열 상태에서도 불구하고 야당 승리로 결판이 난 점은 정작 중요한 분석의 저류를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기존 정치권을 주체로 보는 선거의 해석에서 벗어나 유권자를 선거의 주체로 보는 관점으로 설명이 가능하지 않을까? 국민의 의식 수준은 성숙하는 속도가 늦어 얼핏 정체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진보하고 꾸준히 진전된다는 것. 정보화 사회에서 대중 간에 소통이 다원화하고 다기한 세상에서 전체 국민의 민도의 성숙이라는 관점을 너머 서는 일이다. 연고주의, 지역주의, 정치적 경향성을 훨신 능가하는 민도의 성숙이라는 쾌보로 읽혀지는 이유다.
이로써, 과거의 표면적 인구 거주 중심의 지역주의에 천착한 묻지마식 성향의 투표가 위력을 상실하고, 북풍이니 정부의 선개 개입 시도가 전혀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더불어 민주당의 대구 교두보 마련, 부산 지역권의 약진, 새누리당 자멸이 준 더민주당의 승리와 새누리당 참패와 수도권에서의 더민주당 압승, 그리고 국민의 당 호남석권으로 나타난 총선 결과를 뒤집어 보고 새겨 2017년 야당의 수권능력 향상을 위해 정치인과 정치권을 바라보는 시각의 근저를 겸허히 판가름해야 할 일이다.
야권, 야당은 도대체 뭣인가?
여야를 막론하고 당내 처한 만만치 않은 내부 한계점을 안고 있는 상태다. 특히 여권에 대한 정권 실망의 부동층, 더민주당의 지지 부동층, 국민의당 지지의 호남 부동층의 지지를 얻어서 정권교체를 위해 국민시각으로 시대정신에 충실한 통합과 타협의 정치, 민생 중시의 올바른 정책실행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지난 야당은 애당초 집권권력에서 배제되어 있어 현실 문제를 해결 못하고 정치결정에 책임지는 상황도 못되었다. 그래서 허구한 날 뒷북만 쳐대고 여당의 반대와 투쟁만이 야당다웠고, 이를 위해 투쟁의 선명성, 이념의 진보성에만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권력은 언제라도 교체될 수 있고, 실제로 야당은 두 차례 집권에 성공한 적이 있다. 이 같은 변화된 상황 속에서 야당답다는 것은 과거와 다른 역할 속에서 위치를 재설정해야 할 것이다. 야당이라는 의미가 곧 정권의 준비된 집단, 대안적 세력으로서의 의미 전환하여 새겨야할 것이다. 유권자의 관심은 어느 정치인과 세력이 산재한 국정과제들을 해결해 낼 수 있을까, 보다 나은 역량과 국정리더십을 갖추고 있느냐가 중요한 선택의 요소라 판단하기 때문이다.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말로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허냐고!” 영화 속 상황처럼 ‘답답한 심정’을 표현 할 때, 정보 홍수 속에서 ‘결정 장애’를 겪는 세태를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최근 700만 관객이 찾은 영화 ‘곡성’에서 딸 효진(김환희)이 아빠 중구(곽도원)에게 전라도 사투리로 절규하듯 말하는 대사다. 영화 속에서 일본 외지인(구니무라 준)에게 험한 일을 당했는데도 속도 모르고 이것저것 묻는 아버지를 답답해하는 딸의 심경이 담겨 있다.
2017년 정권창출을 위해 정치권 전체에 대한 대중적 답답함과 깊은 혐오, 정치권의 구태, 대결과 쌈박질 정치에서 야당다운 야당을 넘어 타협과 협력의 정치를 바탕으로 정치다운 정치, 조용한 다수를 위한 생활인의 시각에서 국민에게 봉사하고 서비스하는 정치로 확 판을 바꾸어야 할 것이다.
야당이라 해도 반대를 위한 투쟁, 다수 정파를 사적이익에 활용하는 그들의 눈에는 아예 대중은 안중에도 없어 공허로운 구호나, 성찰없이 무책임하고 신물 나는 이벤트도 주저하지 않는다. 다수파의 수령으로 지위를 이용하여 모로쇠 하고 국민을 기망하는 일로 낮 두꺼운 지도자는 애당초에 권력주변에 발 들일 수 없도록 해야야 할 것이다.
학규마을 류관선 대표일꾼(www.hqtown.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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떡수 百態 (謝銳,體壇周報)
떡수 百態 :常昊古力은 厚德 /이세돌은 역시나 본성 그대로
출처 :謝銳 주간체육계(體壇周報) 2010.09.20 新浪(sina.com)으로 轉載☜
사예 기자 보도 매 판 바둑에서 棋士들이 떡수 없이 두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기서 ‘떡수’란 바둑 중에 나오는 실수 착점이나 어지러운 착수를 말한다. 棋士들의 ‘떡수’ 양상은 百人百色, 각기 특색이 있다.
예전에 聶衛平(섭위평)은 떡수를 두었을 때 귀가 빨개지곤 했다. 현재, 승부 일선을 떠난 지 오래인 그는 이제 승부에 담백해져서, 설사 昏招(혼초)가 나왔다 할지라도, 여전히 목소리 톤의 변화가 없거나 ‘
공감 합니다 그래서 짜깁기가 아니라 새판 짜기라 생각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