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24
7월17일 [연중 제15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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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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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Wc0epr95oA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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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과 자비는 그분이 우리에게 선물로 보내신 메시아,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명명백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이제 예수님을 뵌 사람은 곧 하느님 아버지를 뵌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은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한 사람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의 목소리를 통해 당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그리고 동시에 하느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명쾌하게 설명하고 계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오 복음 12장 19~20절)
제 개인적으로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라는 대목에서 참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대대적인 창고 정리에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면서 여차하면 때려 부숴버리고, 산산조각 내버리고, 불태워 버리는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간 살아오면서 기다려주고 인내하기보다, 일벌백계가 최고라고 여기면서 얼마나 많은 여리고 약한 존재들을 단죄하고 기를 꺾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께서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않으신다.”고 하시니, 얼마나 마음이 따뜻해지고 안심이 되는지, 이토록 관대하신 주님을 아버지로 모신 우리는 정말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난 제 인생 여정을 돌아보니, 솔직히 제 자신이 부러진 갈대요, 연기 나는 심지였습니다. 더 이상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저를 좋으신 주님께서 일으켜주시고, 깊은 상처를 정성껏 싸매 주시고. 치유해주셨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 모릅니다.
이토록 크신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수시로 체험하는 우리들에게 주어지는 과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 큰 사랑과 자비에 감사하면서 꺾인 갈대 같은 이웃들, 연기를 내면서 꺼져가는 심지 같은 동료들에게 다가서는 것입니다.
그들 안에 굳건히 자리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고, 그들을 살아계신 하느님으로 여기고. 하느님 대신 큰 인내와 관대함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워주고 치유해주는 것입니다.
주변을 살펴보면 예수님을 닮아 보기만 해도 가슴 설레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만날 때 마다 힘차게 살아갈 강력한 에너지를 공급해주는 사람, 비록 이 시대가 아무리 암울하다할지라도 아직까지 이 세상은 살아볼만한 세상임을 알려주는 사람, 존재 자체로 선물인 사람이 있습니다.
결국 미우나 고우나 사람이 희망입니다. 비록 가까이 몸 붙여 살아가다보니 갖은 상처를 주고받지만, 매일 티격태격 매순간 좌충우돌하는 피붙이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서 희망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 안에서 구원의 길을 찾아야 합니다. 그들과 함께 구원의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바라시는 간절한 바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인간들의 마지막 희망, 최후의 보루로 남고자 노력하셨습니다. 당신 친히 가장 밑바닥으로 내려오셔서 그들의 고통과 절망, 시름과 한숨을 몸소 경험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가장 밑바닥에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죽음만 기다리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는 예언을 당신 생애 전체를 통해서 실현시키셨습니다.
오늘 희망 자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또 다시 선물로 베푸시는 희망의 이 하루, 어떻게 하면 우리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웃들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존재 자체로 그들의 입가에 환한 미소를 짓게 할 선물이 되게 할 수 있는지 고민하고 헌신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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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9Y0iukWi1F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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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이 없으면 케이크 먹으라고 해 라는 말이 희망이 될 수 없듯이>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희망’의 상징으로 나오십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와 연결해서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후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경고하시는 ‘함구령’과 연결합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은 조용하면서도 부러진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표현됩니다. 함구령은 아무래도 예수님께서 다른 이들에게 큰 사람으로 인식되어 그들에게 부담스러운 분이 되지 않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모함이었을 수도 있겠지만, 18세기 빈부격차가 심했던 프랑스 사회에서는 빵을 구할 수 없어 굶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많았을 때, 마리 앙투아네트의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라고 해!”라는 말로 평민들이 분노하였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는 월세가 힘들면 전세를 살면 되고 전세가 힘들면 집을 사면 되지 않느냐는 말과 같습니다.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려거든 같은 처지가 되거나 더 낮은 처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에서도 잘 살아가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희망을 품게 되지만 태생부터 자신들과 다른 사람이라면 그 사람이 무슨 위로의 말을 하더라도 그건 희망이 될 수 없습니다. 성자께서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하나로 태어나신 이유가 이것일 것입니다.
제 유튜브 채널에 이런 댓글이 달렸습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너무 현실의 사람들과 별개의 삶을 살기 때문에 그들이 더는 신자들의 희망이 될 수 없고 그들이 하는 말에 공감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2020년 한국외방선교수녀회 신임 총장이 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나는 더 이상은 정의를 외면한 사랑을 신뢰할 수 없다. 양들이 사지(死地)로 내몰리고 있는 처절한 상황 앞에서도 눈 귀 입을 닫은 목자들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처자식 먹여 살리기 위해서 직장 상사에게 굴욕을 당해 본 적도 없고, 자기 방 청소며, 자신의 옷 빨래며, 자신이 먹을 밥 한번 끓여 먹으려고 물에 손 한 번 담가 본적이라곤 없는 가톨릭의 추기경, 주교, 사제와 수도자들의 고결하고 영성적인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을 리가 없다.
언제부터인지 우리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 보호를 외면하고, 제도교회의 사리사욕에만 몰두하는 목자 아닌 관리자들이 득실거린다. 고급승용차, 고급음식, 골프, 성지순례(해외여행)에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부자들의 친구가 되고, 그들 자신이 부자이며 특권층이 되어버린 그토록 많은 성직자, 수도자들의 모습이 아름다울 리가 없다.
주교문장에 쓰인 멋스러운 모토와 그들의 화려한 복장, 가슴 위의 빛나는 십자가를 수난과 처참한 죽음의 예수님의 십자가와 도무지 연결시킬 재간이 없다. 나날이 늘어나는 뱃살 걱정이며 지나치게 기름진 그들의 미소와 생존의 싸움에 지쳐있는 사람들과는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 것일까?
또한, 가난을 서원한 수도자들 역시 그리 가난하지가 않다. 수도원에서는 아무도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는다. 안정된 공간에서 해주는 밥을 얻어먹으면서 최소한의 노동으로 최대한의 대접을 받고 산다. 어딜 가도 수녀님, 수녀님 하면서 콩나물값이라도 깎아주려는 고마운 분들 속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덥석덥석 받는 일에 전문가가 되어 간다. 말만 복음을 쏟아 놓았지 몸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실천적 무신론자’들이며, 아기를 낳아보고, 남편 자식 때문에 속 썩고, 시댁 친정 식구들에게 시달리며 인내와 희생을 해본 적이라곤 없는 탓에 철딱서니 없는 과년한 유아들이 없지 않다.
수도복 입었다고 행세할 무엇이 있었던가? 본인이 원해서 하는 독신생활에 자랑할 무엇이 있었던가?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겸손하게 봉사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지 않는다면 수도복과 수도 생활, 독신생활조차 그 의미가 희석된다.
교구, 본당, 수도회의 일이 너무 바쁜 나머지 세상일에 눈을 돌릴 수 없다고 변명하고 책임 회피할 수가 있는 것일까? 인간의 생명이 함부로 훼손되고, 사회적 약자들이 실의와 도탄에 빠진 이 나라 정치사회의 불의를 향해 단호하게 저항해야 마땅한 일이 아닌가? 수도자들이라도 결집하여 그래서는 안 된다고 외쳐야 하지 않을까? 수도자들이라도 용기 있는 발걸음을 내딛고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종교계가 소름 끼치도록 조용하다. 이것은 무얼 뜻하는 걸까? 나 역시 작은 수녀에 불과하고 비겁하며 합리화하고 회피하고도 싶다. 내가 비판한 사람들 못지않게 비판 받을 행동을 하고 있다는 뼈아픈 자의식으로 인해 차라리 그 모든 것에서 물러나서 침묵을 택하고도 싶다. 그러나, 그러나 시간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처럼 보인다. ‘다만 공정을 물처럼 흐르게 하고 정의를 강물처럼 흐르게 하여라.’라는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이 내 심장에서 불꽃처럼 뜨겁게 일어서고 있다.”
정말 가난하게 그리스도와 성모님을 닮은 모습으로 살아가시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인선 수녀님의 글은 좀 지나치다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분들처럼 살지 못하는 저 자신으로서는 이분이 비판하는 모습이 저일 수밖에 없어서 또한 머리가 숙여지고 반성이 됩니다. 제가 예수님처럼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까 싶습니다. 당연히 지금 모습으로는 그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말레이시아도 코로나로 인해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많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부에 기대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먹을 것이 없으면 집에 흰 깃발을 내거는 운동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위에서 먹을 것이 남은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는 운동입니다. 그들에게 희망은 자신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인선 수녀님의 글이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만 그래도 제가 흰 깃발을 내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의 희망이 되지 못하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조금씩이라도 더 가난해지고 더 낮아져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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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12,14-21 : 하느님께서 택하신 종 예수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신다. 바리사이들은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의 손을 다른 손처럼 건강하게 해 주신 것을 보고 어떻게 예수님을 없앨까 모의를 했다고 한다. 악한 일을 모의하는 사람들은 빛을, 바른 길을, 생명을, 보물을, 진주를, 사랑 그 자체와 평화를 없앨 모의를 한다. 이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물러가셨다고 한다.
그분이 물러가신 것은 그들의 모의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악을 없애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권능을 보여주셨다. 그러면서 이 모든 것은 당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자랑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그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셨다. 즉 당신을 자랑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하신 것이다.
이어서 이사 42,1-4의 말씀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예수께서는 어리석은 지도자들로부터 조용히 물러나신다. 그들 안에 있는 “부러진 갈대”나 “연기 나는 심지”와 같은 연약한 모습이라도 파멸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뜻이다. 그들이 언제나 당신께로 회개할 수 있도록 끈기 있게 참아주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밀과 가라지를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도록 하라고 하신 분이다. 우리 자신도 그렇게 참아주시는 분이다. 이로써 모든 민족이 믿음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이사 42,3) 이 말씀은 이것들을 쉽게 하실 수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온유함을 뜻한다. 그러나 언제까지 이렇게 참아주실 수 있는가? 이는 밀과 가라지가 추수 때까지 참아주셨듯이, 그분의 구원업적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이것을 “그는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이사 42,3)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
“정의를 승리로 이끌리라.”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구원업적을 다 이루시면, 믿지 않는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때에는 터무니없고 모순되는 논리를 그대로 두지 않으시고 그들이 하느님의 영광을 알게 될 것이다. 이제 하느님의 섭리는 믿지 않는 이들을 심판하는 데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것이므로 “다른 민족들이 그의 이름을 신뢰하게 되리라.”(이사 42,4)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18절)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는 분은 당신을 사랑하시는 분의 뜻에 따라서 이 모든 것을 이루실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아버지의 뜻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언제나 우리도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도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선언을 주님께로부터 들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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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광주대교구 최종훈 토마스 신부님]
우리는 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고 자신의 상황과 삶의 경험치에 따라 누군가의 행동을 판단하고 평가합니다. 그러한 판단이 반드시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그 기준이 무엇인지 고민해 보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워 주는지가 기준이라면 그러한 판단은 보류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오랜 친구나 사랑하는 이를 쉽게 판단하지 않습니다.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그 사람의 처지에서 왜 그런 행동을 하였는지 고민해 볼 것입니다. 함부로 내린 판단이 우리를 미움과 오해의 길로 이끌어 갈 수 있으니까요.
오늘 복음에서도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판단합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기고 하느님의 율법을 무시하며, 그동안 율법을 통하여 얻었던 자신들의 부와 명예를 빼앗아 가려는 사람으로 판단하고 ‘없앨 모의’를 합니다. 군중들 또한 자신의 기준으로 예수님을 ‘좋은 사람’ 또는 ‘필요한 사람’으로 판단합니다.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릅니다. 그렇게 그들은 쉽게 열광하지만,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 그들의 마음은 순식간에 돌아설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저자는 쉽게 판단하고 결정하지 말 것을 ‘함구령’을 통해서 이야기합니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이사야 예언서에 기록된 ‘주님의 종’에 대한 말씀을 들려줌으로써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 줍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어떻게 판단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원망해 본 적이 있습니다. 내 기도만 들어주시지 않는 것 같고, 행복보다는 불행과 아픔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신앙생활이 무거운 짐으로 다가올 때, 절망과 함께 예수님에 대한 원망만이 남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때일수록 쉽게 판단해 버리는 나의 생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합니다. 예수님의 뜻과 가치, 사랑이 무엇인지 고민합니다. 원망이 아닌 희망으로 그 시련과 아픔을 받아들이고자 노력합니다. 오늘도 그렇게 주님 안에서 고민하고 아파하고 노력하며 하루를 살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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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후배 신부님과 알라스카에서 바다낚시를 다녀왔습니다. 다행이 우리가 먹을 수 있을 만큼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바다낚시는 좋은데 파도가 심하면 배 멀미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어른들은 다들 조금씩 멀미로 고생 했습니다. 그런데 선장님의 아들 마이클은 전혀 멀미를 하지 않았습니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는 6살가량 되었습니다. 능숙한 솜씨로 고기도 잡았고, 잡은 고기는 수족관에 넣었습니다. 마이클에게 바다는 마치 엄마의 품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기를 많이 잡겠다는 욕심도 없었습니다. 고기를 못 잡을 수 있다는 초초함도 없었습니다. 그저 바다와 한 몸을 이루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히 저는 한 마리를 잡았고, 마이클은 두 마리나 잡았습니다. 마이클이 청청한 알라스카 바다에서 아빠의 뒤를 이어 선장이 될 수도 있고, 다른 꿈을 이룰 수도 있을 겁니다. 마이클에게 바다는 고향이자, 친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릴 때입니다. 저는 태어난 지 2달 만에 유아세례를 받았습니다. 마이클에게 바다는 엄마의 품과 같았다면 신앙은 저에게 엄마의 품과 같았습니다. 학교는 가지 않아도 성당에 가지 않으면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았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기일이 되면 시골에서도 어르신들이 오셨습니다. 저녁식사 전에 모두 모여서 조상을 위한 연도를 바쳤습니다. 그리고 저녁을 먹을 수 있었고, 오랜만에 친척들과 회포를 풀었습니다. 늦게 잠자리에 들었어도 다음 날 새벽미사에 모두가 참례하였습니다. 어머니는 한 달 전에 조상을 위한 연미사를 신청하였습니다. 친척들은 모두 학교에서 부르는 이름 대신에 세례명을 불렀습니다. 할아버지는 손자들 중에 한 명은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셨습니다. 자연스럽게 성직자가 되려는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 가고, 사제가 되면 집안의 어르신들도 자연스럽게 말씀을 높이셨습니다.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요즘의 신앙을 생각합니다. 요즘의 가정을 생각합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성당에 가지 않아도 야단치지 않습니다. 대학에 가면 성당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학원에 가지 않고, 공부하지 않으면 야단치지만 기도하지 않고, 성경을 읽지 않아도 말하지 않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기일이 되어도 가족들이 함께 모이지 않습니다. 모두가 바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작은 연못’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연못에 물고기가 살았습니다. 서로 싸우면서 한 마리가 죽었습니다. 물이 썩으니 살았던 물고기도 죽었습니다. 신앙이라는 연못이 상하면 그곳에서 살아야 하는 신앙인도 죽기 마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바벨탑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를 떠나야 했습니다.
오늘 제1독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참된 행복은 세상의 것을 추구해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니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십자가를 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에게도 함께 기도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잠이 들고 말았습니다. 교회는 해 마다 성목요일에 밤을 새워 기도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진리는 세상의 것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세상의 것에서는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세상의 것에서는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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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왜 다른 사람에게 자신에 대해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
“예수님께서는 그들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복음을 선포하려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분의 업적을 널리 알리는 것이 당연할 텐데 왜 하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미사를 봉헌하기에 앞서 우리는 진정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 제대로 알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아는 예수님이 전부인양 떠들고 다니며 그분을 왜곡되게 전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며 주님의 자비를 청하도록 합시다.
오늘은 산수 문제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5-3은? 2죠.
2+2는? 4죠.
이것을 다르게 풀면, 5-3=2는 오해에서 세 걸음 물러나 생각하면 2 이해가 됩니다. 2+2=4는 이해하고 또 이해하면 4 사랑이 됩니다.
그럼 4+4는 뭘까요? 8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8 팔자를 고친다. 한번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혹은 남편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팔자가 고쳐집니다. 따뜻하고 변함없는 항구한 사랑은 사람을 분명 변화시킵니다.
나아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또 사랑하면 팔자가 고쳐 집니다. 이 지상에서는 평민에서 하느님의 아들 딸이 되어 팔자가 고쳐집니다. 임금이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 딸들이기에 우리는 왕자요 공주들입니다. 완전 팔자 고쳤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느님과 함께 영원한 삶을 살게 되니 팔자를 고쳐도 제대로 고치게 되는 것이지요.
자매 형제 여러분, 오늘 왜 팔자 타령을 하는고 하니, 팔자를 고치려면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고 또 사랑하기 위해서는 오해에서 물러나 기다림의 시간을 통해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해했습니다. 자신이 생각하는 틀 안에서 하느님에게 아들이 있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합니다.
많은 군중들도 예수님을 오해하였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을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무슨 오해를 하였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오해하였던 것입니다. 병을 고쳐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에서 구해 줄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군중들이 생각하는 그런 분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고 또 사랑하시기에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셨고 당신 영을 주셨습니다. 다툼도 없이, 소리침도 없이, 겸손과 순종으로 그 사랑을 우리에게 전해 주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희생을 통해 우리 모두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하느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또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하느님께 사랑을 드리고 또 사랑을 드리며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사랑은 세속적인 거창하고 화려한 방법이 아니라 겸손과 순종, 인내와 기다림의 사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사랑을 통해 우리의 팔자가 고쳐졌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제 여기에서 나아가 우리 역시 사람들과의 관계 안에서 진정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사랑해야 함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럼 예수님의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으며 어떻게 사랑하는 것일까요?
첫째,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의 “보아라 내가 선택한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라는 말씀은 우리 각자에게도 해당됩니다. 주님께서 예수님을 선택하듯이 우리를 선택하셨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당신 사랑의 영을 부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기다림의 사랑을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라.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는 말씀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서로를 오해하여 다투지 않고 이해하며, 조용히 기도하며, 묵묵히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우리는 부러진 갈대가 바람에 저절로 꺾여 지고 연기나는 심지가 저절로 꺼지듯이 억지로 뭔가를 하려 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사람들에게 희망을 심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오해하지 않고, 오해할 일이 생기더라도 세 걸음 물러나 이해하려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조급하게 달려들지 말고 잠시 멈추어 주님께 말씀드리며 기다림의 시간을 갖도록 합시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해하고 또 이해하다 보면 참된 사랑의 길이 보일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하고 또 사랑해 진정 예수님의 마음이 되어 가도록 합시다.
조용히 사랑하며
고요히 기도하며
예수님과 함께
우리 주변에 평화와 희망을
삶으로 나누는
우리가 모두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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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배상희 마르첼리노 신부님]
언젠가 투병중인 한 젊은 환자를 방문하러 갔을 때의 일입니다. 환자는 안타깝게도 이제 한창 꽃피어야 할 스물다섯 먹은 처녀였습니다. 동행했던 자매님의 설명에 따르면 그렇게 부유한 가정은 아니었지만 남부럽지 않게 단란했던 가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갓 스물에 교통사고를 당해 식물인간이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딸의 교통사고로 온 가족들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집단 우울 증세에 빠진 가족들은 모두 넋 나간 사람들처럼 몇 년을 살아왔다고 합니다.
의식불명 상태가 길어지면서 식물인간이 된 딸을 두고 동네 사람들도 말들이 많았습니다.
"딸도 딸이지만 이러다 식구들 다 죽겠으니, 이쯤에서 그만 포기해라."
"이만큼 노력했으니 저도 서운하지 않을 것이다."
"이 상황에서 교리나 윤리적으로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쉽지만 생각을 바꾸자."
그러나 딸을 향한 어머니의 집념은 대단했습니다. 조금이라도 호전기미만 보이면 뛸 듯이 기뻐하며 "저것 보세요. 이제 점점 좋아지고 있다구요. 반드시 의식이 돌아올 겁니다"
어머니는 딸을 위해 자신의 사생활을 완전히 포기하면서 지극정성으로 간병에 매달렸습니다. 오늘 복음에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해 봅니다. 무모해 보일 정도로 극진했던 어머니의 사랑과 정성을 기억해 봅니다.
물론 그 뒤로 딸의 병세가 어떻게 진행되었는지에 대한 소식은 전해 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딸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을 생각해보면 아마도 지금쯤 그 딸은 의식이 완전히 회복되었으리라 확신합니다. 지금은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의 예수님은 연민 가득한 사랑의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우리 삶의 모습이 아무리 당신 마음에 안 들고 비참해 보일지라도 그저 참아주십니다.
늘 속으면서도 "이번 한번만 딱!"하면서 인내하십니다. 제 인생도 뒤돌아보니 마치도 살얼음판 위를 걸어온 아슬아슬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기억하기 싫을 정도로 아찔했던 순간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측량할 길 없는 하느님의 인내와 자비가 제 삶의 구비 구비에 깃들여져 있었음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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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합니다. 누룩을 넣어 반죽을 부풀릴 시간조차 없이 황급히 이집트를 떠나야 하였습니다. 머뭇거릴 수 없어 양식도 장만하지 못한 채 그들은 이집트 땅을 빠져나와야 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뒤로 돌아설 수 없습니다. 오직 약속된 땅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 앞에 펼쳐진 것은 광야였습니다. 그리고 이집트는 끊임없이 그들이 나아가는 길을 방해할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방해하는 파라오도 있지만, 이스라엘 스스로 이집트에서 먹던 고기를 잊지 못하며 끊임없이 하느님께 한탄을 쏟아 낼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모든 방해물을 제거하시고 이스라엘을 결국 젖과 꿀이 흐르는 곳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에게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없애려고 모의합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종 메시아가 백성에게 올바름, 곧 하느님의 정의를 선포하리라고 예언한 바 있습니다.
하느님의 정의, 곧 하느님의 의로움이란 하느님께서 당신 약속을 지키시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보니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통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음을, 드디어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에게 영원한 나라, 곧 젖과 꿀이 영원히 흐르는 하느님 나라를 선사하셨음을 선포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문설주 상인방에 발라 이스라엘의 첫째 아들만 살려 주던 그 어린양의 피가 아니라, 모든 이를 구원할 어린양의 피가 필요합니다. 그 피는 바로 예수님의 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흘리게 할 예수님의 피가 결국 온 세상을 구원하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이렇게 보니 바리사이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시는 데 쓰이는 도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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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김권일 도나도 신부님]
<측은지심>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시자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하여 시비를 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선행을 해도 된다는 설명을 하시며 안식일에 대한 그릇된 인식을 바로잡아 주신다.
이와 같은 내용 다음에 오늘 복음이 위치하고 있다.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사람들을 고쳐주시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예수님을 없앨 모의를 한다. 그래서 그들을 피해 다른 곳으로 가셨지만 많은 병자들이 예수님을 따라오자 예수님은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라고 말한 이사야 예언처럼, 사람들을 섬기러 오신 예수님은 버림받은 이들을 안아주시고,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고 사랑으로 감싸주셨으며 치유가 필요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셨다.
바리사이들에게 반대를 받으면서도 그리고 심지어 바리사이들에게서 살해 위협을 받으면서도 이를 무릅쓰고 사람들을 모두 고쳐주시는 예수님 모습을 통해 측은지심을 생각해 본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자기 보존성의 욕구가 있다. 이 욕구에 비추어 볼 때 인간은 누구나 이기적이다. 배고프면 내가 먼저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어하고, 추우면 내가 먼저 몸을 따뜻이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자연스런 모습이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자기 보존성의 욕구 외에도 타인의 고통이나 어려움을 받아들일 수 있는 측은지심이 있다. 측은지심이 있기에 인간은 자기 보존성의 욕구를 지녔음에도 동물들과는 달리 자신의 자연적 욕구를 넘어설 수 있는 위대함을 지닌다.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의 발휘는 인간으로 하여금 동물성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자기 보존성의 욕구에 눈이 가려 자기만의 만족에 함닉된 삶을 살 것인가? 아니면 자신 안에 있는 측은지심을 무한히 발휘하여 예수님께서 초대하시는 자비와 사랑의 삶을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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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손 오그라든 병자를 낫게 하신 일에 대한 바리사이들과 군중들의 반응에 대하여 취하신 두 가지 처신을 들려줍니다.
한편으로는 당신을 죽이려고 모의를 꾸미는 바리사이들을 피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신을 따르는 군중들을 고쳐 주시면서 남에게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곧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과 측은히 여기며 자비롭고 신실하신 모습입니다.
이 사실에서, 마태오복음사가는 예언자 이사야의 말씀이 이루어졌음을 봅니다.
곧 예언자 이사야는 “야훼의 종의 첫째 노래”에서, 위의 두 가지를 메시아의 특징으로 말해줍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마태 12,19-20)
이 말씀을 들으면,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주님의 돌보심과 신실하심과 측은히 여기시는 마음이 전해져 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저 자신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사실, 저는 죄 있는 형제들에게 손을 뻗어 위로하기보다, 돌팔매질하기를 자주 했습니다.
형제의 짐을 져주기보다, 오히려 더 큰 짐을 얹어 짓눌렀습니다. 약한 형제를 못 본 척 홀로 두고서, 제 길을 가기에 바빴습니다. 형제를 존중하기보다 하찮게 여기며, 마치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고 업신여겼습니다.
그렇게 저는 기 꺾인 이들을 짓밟고, 부러진 갈대는 꺾어버리고, 연기 나는 심지는 꺼버리기를 거리낌 없이 하였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저를 구해 주셨습니다. 당신께서는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제가 넘어지고 부러져 있을 때도, 저를 꺾어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당신을 배신하고 거부할 때마저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여,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당신의 영을 부으시고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습니다.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제게서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아니,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셨습니다.
참으로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으로 돌보아주셨습니다.
참으로 선하시고 자비하신 모습으로 신실하셨습니다.
그토록 신실하신 사랑, 그 지치지 않는 사랑과 연민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진정, 주님께서는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결코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결코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저를 따라다니며 뒤를 처리해주시고, 신실하심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 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하오니, 주님!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당신께서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신 까닭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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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그는 상한 갈대도 꺾지 않고, 꺼져 가는 심지도 끄지 않으리라.”(마태 12,20)
주님!
당신은 제가 무너지고 또 무너져도 저에 대한 신뢰를 저버리지 않으시고,
당신을 배신하고 또 배신하며 거부할 때에도 저에게서 희망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음모를 꾸미고 악의를 품고 있을 때도 부러진 갈대를 꺾어버리지 않으시고,
성소를 내팽개치고 달아날 때도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셨습니다.
제가 도망질쳐도 언제나 동행하시고 제 영혼이 병들어 말라갈 때,
오히려 저를 택하시어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사랑을 쏟으셨습니다.
이제는 제 갈 길을 가느라 약한 이를 홀로 두지 않게 하소서.
넘어진 이를 일으켜 세우고 짐 진 이를 위로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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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12,2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과 영원한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완전한 계시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 곧 나를 살리시는 '구세주'라는 이름에 희망을 건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세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많은 이들을 살리는 일에 땀 흘리시고, 또 많은 군중이 예수님을 따랐는데, 이상하게도 구세주를 애타게 기다려온 유다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들이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안식일 규정, 곧 율법을 어겼다고 해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했습니다.
'안식일'은 단순히 아무 움직임도 하지 않으면서 쉬는 날이 아닙니다. 안식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그러니 이 날은 내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을 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드러난 주님의 일은, '너를 살리는 일', 곧 '좋은 일'입니다.
"안식일에 좋은 일은 해도 된다."(마태12,12)고 말씀하신 예수님, 알파요 오메가이신 예수님께서는 시작부터 마침까지 너를 살리는 좋은 일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를 위해 하신 좋은 일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희생 제물이 되신 '십자가 죽음'입니다.
결정적인 구원의 표지인 이 십자가 죽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주님의 종이신 예수님께서는 기적체험을 한 이들에게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함구령'을 내리셨다고 생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구약의 '출애굽 사건'과 신약의 '예수님 십자가 죽음 사건'을 통해 우리를 살리시려는 큰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려고 밤을 새우셨으므로,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도 대대로 주님을 위하여 이 밤을 새우게 되었다."(탈출12,42)
우리도 이런 주님을 본받아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법에 얽매이지 말고, 법의 근본인 너를 살리는 일에 더 힘쓰는 하느님의 자녀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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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희망>
마태오 12,14-21 (주님의 종 예수님)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나가서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 그런데도 많은 군중이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고쳐 주시면서도, 당신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셨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선포하리라.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그는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희망>
제때에
꽃은 피고
막아도
물은 흐르고
쉬지 않고
바람은 불고
어김없이
해는 뜨고
오늘도
나는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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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신부님! 정말 억울해요. 왜 저만 희생해야 하고, 제 것을 양보해야 할까요?” 억울하다는 생각에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분만이 아닙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이 억울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연히 국어사전에 ‘억울병’ 또는 ‘억울증’이라는 단어가 등록되어 있음을 발견했습니다.
그 뜻은 이렇습니다. ‘기분이 우울하고 신체에 피로감을 느끼며 불안을 느끼는 증상’ 현재 이런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이 증상에서 더 나아가면 우울증이 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신세 한탄을 하며 억울함을 호소하는 증상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억울함을 느끼게 되면 더 큰 병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이 증세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억울함이라는 의미보다 지금 자리의 가치를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 가치를 찾으려고 집중을 하면 어디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똥도 약에 쓴다’라는 속담도 있지 않습니까? 억울함이 어디서 왔는지를 생각해보면 주로 내가 만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내가 어떤 생각으로 지금을 바라보고 있느냐에 따라 억울함의 크기가 결정됩니다.
따라서 관점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지금 자리의 가치를 먼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사실 억울한 사람을 따지고 보면, 예수님보다 억울한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싶습니다. 한없는 사랑을 주었음에도 사람들의 반대를 받아야 했고, 그 결과 아무런 죄도 없으면서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신데, 그리고 그 힘으로 편하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음에도 당신의 힘을 드러내지 않으십니다. 오늘 복음에도 나오듯이, 사람들을 고쳐주신 것을 널리 알려서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예수님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말라는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왜 그랬을까요?당신 자신을 알리는 것보다 사람들의 구원이 더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놀라운 기적을 행하는 마술사 예수님이 아닌, 진정한 구원자 예수님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때 비로소 진정한 희망으로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억울함 그 자체를 바라봐서는 안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셨던 모습처럼,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가치를 향해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를 묵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관점의 전환이 사랑이신 주님을 느끼고, 그분과 함께 하는 결정적인 역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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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꼰대>
아래의 항목에서 자신이 세 가지 이상 속한다면 ‘꼰대’라고 합니다.
자신이 꼰대인지 스스로 평가해보세요.
1) 듣는 시간보다 말하는 시간이 길어진다.
2) 한번 이야기할 때 같은 내용을 세 번 이상 반복한다.
3) 상대방의 말이 끝나지 않았는데 하고 싶은 말이 떠오른다.
4) 나의 경험을 일반적인 것으로 포장한 뒤, 상대방도 동의하기를 원한다.
5) 상대방이 나와 대화하는 것을 피한다.
6) 위의 사실을 본인만 모른다.
어떠세요? 저도 꼰대인 것 같습니다. 최하 세 가지가 저의 모습에서 발견됩니다. 솔직히 저는 꼰대가 아니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러나 이렇게 따져보니 꼰대가 맞습니다.
스스로를 반성합니다. 경청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그리고 무엇보다 중심에 내가 서 있어서는 안 됩니다. 즉, 상대방이 중심에 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꼰대에서 탈출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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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복을 받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복을 받기 때문에 좋은 일을 끊임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을 한다고 해서 반드시 환영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고 미움을 사기도 합니다. 아무리 어진 사람도 미워하는 무리가 있는 법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데도 선망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견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봄비가 기름 같지만, 행인은 그 진창길을 싫어하고 가을 달은 밝고 아름답지만, 도둑은 그 밝게 비추는 것을 싫어합니다.” 자기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싫어하고 시기 질투하며 심지어 미워합니다. 봄비처럼 꼭 필요한 것일지라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은 언제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시고 병을 고쳐주시며 당신의 소명에 충실하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를 모의하였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를 봐주면 좋으련마는 눈엣가시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 사촌이 땅을 사면 배를 앓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반대에 대응하지 않으시고 한발 물러서는 지혜와 인내를 보여주셨습니다. 막무가내로 대드는 사람에게는 한숨 쉬게 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도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며 모두를 품을 수 있는 넉넉함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용수철을 누르듯 참는 것은 참는 것이 아니라 벼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의 다양한 생각들을 품으셨습니다. 다투거나 큰 소리를 내지 않으시고 자비로운 손길로 버림을 받은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해 주시고 낙담한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시며 구원해 주셨습니다. 병을 고쳐주면서도 스스로 내세우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공을 감추시고 결코 기적을 위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이 아님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철저히 아버지 하느님의 뜻 안에서 구원사업을 이루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슨 좋은 일을 해 놓고는 생색을 내다가 그 공을 다 잃고 맙니다. 선한 지향을 갖다가도 이내 시기와 질투심에 그 좋은 뜻을 놓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너희는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로운 일을 하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에게서 상을 받지 못한다”(마태6,1).고 하셨건만 그 말씀을 잊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숨은 일도 보시는 아버지께서 갚아주실 것을 믿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갈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서로 기도해 주시길 희망합니다. 나의 능력을 자랑하고 싶을 때 침묵의 가치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올바름을 승리로 이끌 때까지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어딘가 상하고 깨져서 할 일을 하지 못한다 생각하는 이들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공에로 부름을 받은 것이 아니라 최선에로 부름을 받았습니다"(마더 데레사).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셔서 시작한 하느님의 나라는 사람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 세상, 무엇을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았는지를 더 소중하게 여기는 세상입니다. 하느님의 소리는 영혼의 울림으로 들려옵니다. 그래서 거리에서는 하느님의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는 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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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 어떤 일을 하는 데 시간이 걸리면 게을러서이고, 내가 시간이 걸리면 철두철미하기 때문이다. 남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을러서이고, 나는 바뻐서이다. 누가 하라 하지 않는데 하면 월권이고, 나는 진취의 기상이 있어서이다. 남이 강력한 주장을 하면 그 사람은 고집스러운 것이고, 나의 경우는 단호한 의견발표이다.” 그야말로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스캔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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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늘 새로운 하루>
-참으로 절실한 관상적 삶-
“주여, 거룩한 하늘에서 지혜를 보내 주소서,
영광의 옥좌에서 그를 내려 주옵소서.
지혜가 나의 곁에 나와 함께 있게 하시고,
당신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지혜9,10).
한 밤중에도 열대야로 덥습니다. 잠깨어 휴게실에 불이 환히 켜져 있어 살며시 문을 열어보니 더위 탓에 잠을 설친 탓인 듯 한 수도형제가 쉬고 있었습니다. 기후변화 위기가 실감있게 마음에 와 닿고 있는 작금의 현실입니다. 게시판에 붙어 있는 연합회 소식지 77호의 첫째 제목이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World in Turmoil”(대혼란 속의 세상)
이란 제하에 ‘남아공화국 폭동으로 70명이상 사망, 쿠바 시위로 오후 1시부터 통행금지, 베네즈웰라 수도 시가전 25명 이상 살해됨’이란 기사 내용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온 세계가 기후변화로 ‘몸살’- 서유럽, 물폭탄에 100명 이상 숨져, ‘16일 국내 코로나19 확진 확진자 1563명 발생, 일단 1600명 아래로 내려옴’, 국내외가 공통적으로 겪는 대혼란입니다.
“과학은 이것(홍수)를 기후변화의 명확한 징후라고 말한다. 정말로 정말로 행동해야 할 긴급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결연한 싸움에 참가해야 우리는 기상 상황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유럽의 폭우 피해에 대한 두 정치지도자의 절박한 고백입니다.
강건너 불이 아니라 언젠가 우리에게 닥칠 현실일지도 모릅니다. 참으로 덜먹고 덜쓰는 무공해의 관상적 삶이 절실합니다. 늘 새롭게 회개하는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부화뇌동, 경거망동, 일희일비의 삶이 아니라 제 삶의 자리에서 말 그대로 파스카 신비의 삶을, 늘 조용히 새롭게 시작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수도자들에게 아마 가장 행복한 시간은 하루의 영적전투가 끝나고 끝기도후 잠자리에 들 때일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무덤에서 편히 쉬신 아드님과 같이 저희도 편히 쉬게 되었으니, 내일도 잠에서 깨어나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 생활을 시작하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영원히 살아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금요일 끝기도후 마침기도).
참 아름답고 깊은 위로를 주는 기도입니다. 부활하신 그분과 함께 새벽에 다시 일어나 하루를 새롭게 시작하는 것 또한 수도자에겐 큰 기쁨입니다. 정말 믿는 이에겐 하루하루 날마다의 밤이 유일무이한 ‘파스카의 밤’입니다. 매일매일이 부활성야의 파스카의 밤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탈출기(12,37-42) 밤동안 내내 이스라엘 백성이 주님의 인도에 따라 이집트를 탈출하여 행군하는 장면은 그대로 부활성야 파스카의 밤을 상징합니다. 우리 주님께서 밤새 이집트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을 끌어내셨듯이, 똑같은 주님께서 부활성야뿐 아니라 매일 밤, 전세대 신자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새롭게 이끌어 내십니다. 그러니 날마다 파스카의 밤을 지내고 새롭게 맞이하는 새벽이 참으로 소중하고 고맙습니다. 지금도 선명한 언젠가 인용했던 ‘새벽’이란 시입니다.
“새벽 숲
온갖 새들 맑은 소리
임의 찬미에
밝아오는 아침
물러나는 어둠
잠깨는 숲
새로 시작되는 하루
새벽을 잃으면
하루 전부를 잃는다”-2001.5.29.
2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새롭게 마음에 와닿는 시입니다. 며칠전 읽은 글 역시 새벽의 중요성을 상기시킵니다.
-김종철 선생은 2013년 7월17일, 한 특강에서 존 버저를 인용했다. “새벽 4시,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사람들은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알고 있다. 어느 날 이 시스템이 붕괴될 것이라는 것을.” 선생은 이 글귀를 보고 무릎을 탁쳤다고 한다. “실제로 그래요. 사람이 잠에서 막 깨어나는 순간이 직관력이 가장 정확한 시간입니다. 그때 머릿속에 솟구치는 생각이 진리예요. 대낮에 이래저래 머리 굴려 생각한 것은 틀리기 쉬워요.”-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새삼 영적 삶에 새벽의 영감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날마다 새벽 동틀 때까지 외딴곳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시작하는 새벽 관상기도 시간이 하루 삶을 받쳐주는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새벽뿐이 아니라 관상적 삶은 하루로 확산되어야 합니다. 한 수도형제와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한주간 평일 강론을 미리 써놓는다는 어느 사제에 대한 제 의견이었습니다.
“날마다 새벽마다 새롭게 짓는 ‘따뜻한 밥’같은 강론이 아니라, ‘식은 밥’같은 강론이 될지도 모르겠네요. 식은 밥, 식은 국을 덥힌다 해도 새로 짓는 밥이나 국같지는 않겠지요.”
그러니 잘 준비해 뒀다가 새벽마다 따뜻한 밥짓듯이 쓰는 강론이 참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관상가 예수님 역시 새벽을 사랑하셨고 새벽 아버지와 만나는 관상기도로 하루를 여셨습니다. 바로 오늘 복음에서도 우리는 예수님의 관상적 면모를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적대자들과의 정면 대결을 피하시고 조용히 물러납니다. 바로 지혜롭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모습입니다. 인용된 이사야서 내용은 그대로 예수님의 관상적 면모요, 우리의 관상적 삶을 위한 좋은 가르침이 됩니다. 다음 이사야서가 말하는 주님의 종인 예수님은 물론 세례받아 주님의 자녀가, 종이 된 우리 모두에게 해당됩니다.
“보아라, 내가 선택한 나의 종, 내가 사랑하는 이, 내 마음에 드는 이다. 내가 그에게 내 영을 주리니, 그는 민족들에게 올바름을 펴리라.”
어떻게 하면 주님이 선택한 종답게, 주님의 사랑하는, 마음에 드는 종답게 올바름을 펴면서 살 수 있겠는지요? 바로 다음 예수님처럼 관상가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참 관상가로서의 면모는 그의 한곁같은 자비행으로 입증됩니다.
첫째, 예수님은 온유하고 겸손하십니다.
“그는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거리에서 아무도 그의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이런 예수님이시기에 싸우기 보다는 물러 나시고 당신을 홍보하지 않도록 함구령을 내리십니다.
둘째, 예수님은 어질고 자애롭습니다.
“그는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라.” 참으로 어질고 자비로운 예수님이십니다. 치유이적, 구마이적을 통해 잘 드러나는 예수님의 어지시고 자비로운 관상가의 면모입니다.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화답송 후렴처럼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자애로운 하느님입니다.
셋째, 예수님은 희망의 빛입니다.
“민족들이 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입니다. 우리의 평화입니다. 우리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힘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우리의 모두라는 고백입니다. 참 희망은 그리스도뿐입니다. 그리스도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희망의 빛이 우리를 밝힙니다. 절망의 어둠, 절망의 늪에 빠지지 않습니다. 우리 또한 예수님처럼 희망의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참으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우리 또한 관상가 예수님처럼 1.온유하고 겸손한, 2.어질고 자애로운 관상가로, 또 3.희망의 빛이 되어 살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모두에 대한 주님의 간절한 바램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참 관상가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주님 사랑 우리 위에 꿋꿋하셔라, 주님의 진실하심 영원하셔라.”(시편117,2).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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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은 온유하신 예수님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을 어떻게 없앨까 모의를 하였다."(마태 12,14)
바리사이들이 말씀과 지혜로는 예수님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고 그분을 없애려 모의합니다. 그들이 사사건건 예수님의 트집을 잡을 때마다 오히려 그들의 오류와 숨은 욕망까지 드러나 버리니 백성들 앞에서 영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된 겁니다. 그리고 율법과 더불어 자기들의 위상까지 위태해질 것 같아 불안합니다.
이미 바리사이들은 예수님께 사형선고를 내린 것과 다름없습니다. 이제는 "어떻게 없앨까" 그 방법을 모색하는 단계지요. 율법에서 명분을 찾은 뒤 이민족의 손을 빌리면 자기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가능할 것이니, 신성 모독과 로마제국에 대한 저항의 단초를 동시에 잡으면 됩니다. 이제부터는 눈에 불을 켜고 예수님과 그 추종자들을 몰아세울 기세지요.
"예수님께서 그 일을 아시고 그곳에서 물러가셨다."(마태 12,14)
그에 대한 예수님의 반응은 물러섬입니다. 그들과 대적해 맞서 싸우거나, 억울함을 토로하며 오해를 풀려 하거나, 그들 편이 되려 돌아서거나 하지 않으십니다. 이해 받지 못한다면 아직 때가 아닌 겁니다. 역사상 하느님의 참 예언자 중 누구도 제대로 이해받은 일이 없다는 걸 그분은 너무도 잘 아시지요. 군중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반드시 하느님 사람이라는 표지는 아니니 예수님은 조금도 조급하지 않으십니다.
"다투지도 않고 소리치지도 않으리니 ... 부러진 갈대를 꺾지 않고, 연기 나는 심지를 끄지 않으리니"(마태 12,19-20)
앞서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하신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양선하시어 당신을 미워하는 이를 적대하지 않으시고, 가난한 죄인을 무시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어찌 보면 참 약하디 약한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존중하고 기다리고 인내하는 주님의 종이십니다. 그렇다고 마냥 허약하신 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랑 때문에 목숨을 바칠 수 있는 강인한 의지와 실천력의 소유자십니다.
그분처럼 온유하고 양선함을 지향하는 이들은 그런 예수님을 알아보고 사랑하고 따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악은 약해 보이는 사람일수록 조롱하고 무시하며 함부로 대하지요. 사랑을 알아볼 눈도 없거니와 자기들의 이익에 솜털 하나라도 건드리면 적으로 간주해 짓밟고 제거하려 합니다.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예레 11,20)
예언자의 기도처럼,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은 악에 악으로 맞서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모든 걸 넘겨드리고 물러나 기다리지요. 자기 손을 떠났으니 분노하거나 저주할 일도 없습니다. 이제는 자기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하느님께서 손수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는 장면입니다.
"그날 밤, 주님께서 그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려고 밤을 세우셨으므로"(탈출 12,42)
파라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내보내도록 하시기 위해 하느님은 열 가지 재앙으로 혹독히 이집트를 치십니다. 이미 노예살이의 억압과 착취로 지친 이스라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믿고 따라나서지요. 모든 싸움은 하느님께서 해 주십니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현존으로 한껏 고무됩니다. 사백삼십 년만에 자기들을 찾아오신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선조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쓰라리고 서러웠던 압제에서 자기들을 구출해 내셨으니까요.
이스라엘은 이집트에 맞서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우상의 땅에서 물러나오면 됩니다. "밤을 새워" 함께하시는 모습은 흡사 어리고 약하고 아픈 자식을 돌보는 아버지 어머니의 심상입니다. 긴 세월을 거쳐 다시 하느님과 연결된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은 그런 분이십니다. 그러니 이제 자기들을 대신해 싸워 주시는 하느님께서 바다에 막히면 바닷길을 열어 주실 것이고 광야에서 헤매면 새로운 길을 안내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같이 맞받아치고 공격하지 않으면 손해 보는 세상입니다. 손해 정도가 아니라 온갖 모욕과 공격을 감수해야 하고 선의조차 폄훼되고 조롱받는 걸 참아내야 합니다. 선함을 무능과 동일시하기도 하지요. 그러면도 끝까지 자신을 해하려는 이들을 존중하고 돌봐 주어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몫입니다. 스승이 그러셨듯이 말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면서 이 세상을 헤쳐나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과제인 것 같습니다.
물러남은 패배나 포기가 아니라 믿음과 기다림의 결단입니다. 맞서고 싸우는 것보다 훨씬 강력한 표현이기도 하지요. 공정하고 진실하신 사랑의 하느님께 모든 걸 맡긴 영혼의 온전한 의탁이고 신앙입니다. 그분이 바다를 열어 주시리라는 것, 길을 내며 이끄시리라는 것을 아는 이의 힘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물러나 아버지 앞에 머무르시며 아버지의 뜻에 집중하시는 예수님과 함께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분노, 서운함, 억울함, 두려움, 후회, 자책... 이 모든 걸 우리 대신 재판을 이끄시는 아버지께 넘겨 드리고, 지금 여기 우리에게 허락하신 각자의 파스카를 경축하고 감사하기를 기도합니다. 몰이해와 저평가, 불신 가운데서도 묵묵히 아버지의 뜻을 추구하는 여러분을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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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MGMmEZKuQco&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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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07.17.토."그의 이름에 희망을 걸리라."(마태 12, 21)
희망은
간절하다.
끝까지
간직해야 할
희망이 있다.
헛된 희망을
내려놓을 때
참된 희망을
만나게 된다.
서로에게
희망이
되어주는 삶이
참된 복음이다.
우리의
희망이란
예수님을
되찾는 것이다.
희망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린다.
예수님께서는
희망의
살과 뼈가
되신다.
사랑하기 때문에
희망은 절망을
이겨낸다.
예수님과
함께하는 것이
희망이다.
그래서
희망은
만남이며
나눔이다.
그래서
희망은
나누는 삶이다.
희망이
우리를
이끌고간다.
오늘을
살게하는
간절한
희망의 이름을
부른다.
예수라는
이름에
삶을 건
우리들이다.
간절함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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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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