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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한첨 전에 써 놓았던 건데..
수정완료후에 올리려다가...
이대로 두면 어디로 날라가버릴지 몰라
자료 보관차 올려놓는 겁니다.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보시고
평을 해주셔도 되지만,
먼저 수정전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길...
아직 미완성이지만..
언젠가 탈고를 마칠 작품입니다.
그럼 무가네 파이팅을 바라면서.....^^
================= 본 문 =============
深情(트라우마)-가제
深情(트라우마)-가제
영혼을 만날 수 있는 장소에 네 사람이 도착한다. 여행 같은 수준으로 왔는데 네 명 모두 서로 초면들이다. 그 장소에서 네 사람은 서로 자신만의 트라우마를 해소하게 된다.
등장인물.
김일환: 냉정하고 냉철한 인물. 부모가 돌아가셨을 때에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사람이다. 일에는 능력이 있으나 사람이 너무 차가워서 정을 나누는 동료들조차 없다. 너무 노력을 하고 너무 신경을 쓰는 바람에 항상 굳어진 인상의 얼굴이다. 그러나 차가운 듯 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는 항상 뜨거운 정을 갈망하고 있다. 죽은 아버지의 영혼과 대화를 하고 싶어 한다. 아버지는 엄하고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식한테 깊은 사랑은 가지고 있으나 표현하지 않았다. 자신의 어려움도 나누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인물이었다. 전형적인 옛날 어른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부자지간의 사랑)
신소미: 쌍둥이의 동생이다. 신소미는 가끔 숨을 크게 들이마신다. 심장병 때문이다. 그녀의 심장은 바로 쌍둥이 언니의 심장이다. 두 사람은 선천적으로 심장이나 장기들이 좋지 않았는데 수술 끝에 둘 중 하나만 살아남게 되었다. 제비뽑기도 아니고 누가 그 둘의 생사를 정할 수 있었을까? (형제자매간의 사랑)
한영주: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려 한다. 그 사람은 본래 외국으로 도망쳐버렸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남자 집 식구들이 한사코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으려 하고, 또 어떻게 해도 연락을 할 수 없자 혹시나 해서 와 본 것이다. 그러나 겉으로는 여기서 만날 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냥 여름을 맞아 공포체험을 해보고 싶어 왔다고. 남자는 실은 여자를 너무 사랑해서 떠난 거였다. 혈액암에 걸려 마지막 수술을 앞두고 떠나겠다고 했던 것이다. 몇 번 수술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괴롭혔던 점들 때문에 오지 않으려 했으나 미안하다는 말을 꼭 하고 싶어서 결국 나타나게 된다. 그가 나타나자 영주는 한 없이 울고 만다. (남녀 간의 사랑)
박동수: 처음엔 대학생이자 아르바이트로 안내를 하는 역할이다. 아울러 공포체험도 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여행사 대표가 이르길 분명 아주 강한 공포를 느낄 수 있으리란 장담도 있고 해서 돈도 벌을 겸 해서 지원했다. 하지만 맨 마지막에 또 비밀이 밝혀지는데 극중 내내 아르바이트 대학생 역할을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또 다른 영혼이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모두 퇴장한 후에 접신이 풀리는데 이 장소에서 정신을 차렸다는 사실에 공포와 스릴을 느낀다. 혼자서 공포를 체험한 보람된 하루였던 것이다.
그 외
박동민, 여자1, 여자2.
1막.
1장. 등장
박동수가 김일환과 신소미를 데리고 등장한다.
박동수:영혼의 처방전, 남겨진 자들의 상처를 치료하는 이곳에 정말 잘 오셨습니다. 이곳은 엑소시스트의 도움 없이도 본인이 직접 원하는 상대를 만날 수 있는 곳입니다. 여기 오실 때 약간의 비용이 드시긴 했지만 굿 같은 걸 하면 얼마나 큰돈이 들어가는지 잘 아시죠? 그에 비하면 여긴 얼마나 저렴합니까?
신소미:그런데 정말 그게 가능하긴 한가요?
박동수:그렇다니까요. 광고 안 보셨어요? 100%환불 보장! 이거 자신감 없이는 불가능하지 않습니까?
김일환:구체적으로 어떻게 된다는 거요?
박동수:그건 저도 잘….
김일환:뭐야? 안내인인 당신이 모르면 어떻게 해?
박동수:그게… 그냥 저도 여기 아르바이트생이라서요.
김일환:아르바이트생이라니?
박동수:제가 좀 잘못 한 게 있어서… 아, 그래도 교육이라면 잘 받았으니까 안심하십쇼.
김일환:어떻게 하는지도 잘 모른다면서?
박동수:그건 제가 다 겪어보지는 못했기 때문에 다른 분들은 어떻게 된다고 확실히 말씀드릴 수가 없다는 거예요.
김일환:당신은 겪어봤다는 거야?
박동수:그게 아니라… 사람들이 여러 명이 있을 땐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로 모아질 때 비로소 원하는 바가 이루어진다고 제가 받은 매뉴얼에 나와 있었거든요.
김일환:뭐야? 이런 사람들하고 마음이 모인다는 게 말이 돼? 거기다 모든 사람이라면 당신도 포함될 거 아냐?
박동수:좀 더 쉽지 않을까요?
김일환:정 반대야! 아예 불가능할 거 같아!
박동수:저기요… 근데 이걸 어쩌죠? 사실은 더 많습니다. 제가 받은 명단에는 여자 분 둘에 남자 둘, 이렇게 네 분이 손님으로 나와 있거든요. 좀 늦나보네요.
김일환:뭐? 허참, 나 이거야 바빠 죽겠는데. 도대체 이 나라 사람들은 말이야 시간관념이 도통 있질 않아. 이래 가지고 무슨 발전을 기대하겠어?(시간을 보다가) 안 되겠군. 난 돌아갈 테니까 환불이나 해주쇼.
박동수:선생님! (명단을 보고)아니 부장님이시죠? 여기 오신지 5분도 안 됐습니다. 벌써 가신다고 하기엔 좀 이르잖습니까?
신소미:맞아요. 여기까지 먼 길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잖아요.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을 한 후에 간다고 해도….
김일환:아가씨는 좀 가만 있어. 내가 그쪽한테 말했어?
신소미:여기 온 사람들 모두 시간이나 자기계발이 문제인 건 아니잖아요. 뭔가 부족하고 모자란 부분을 채우러 온 거 아닌가요?
김일환:난 그런 거 없어!
신소미:그리고 이분 말씀 들었잖아요.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이 뜻을 같이 해야된다던데 아저씨가 그냥 이렇게 가버리면 다른 사람들도 전부 허탕을 쳐야 되잖아요.
김일환:그게 내 탓이야? 내가 잘못했어? 모두 늦게 온 자기들 잘못 아니야.
신소미:저는 아저씨보다 먼저 왔잖아요.
김일환:그건 너무 빨리 온 거지. 누가 일찍 오랬어?
신소미:그건 아니지만, 일찍 온 저도 같이 망치게 되니까….
김일환:아가씨만 일찍 온 거 아니잖아. 나도 5분 전에 도착했어. 그럼 난 뭐야?
신소미:그게 아니고요 사람이 살면서 시간만이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김일환:그게 안 중요하다고? 그럼 뭐가 중요해?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디 있어?
신소미:감정이요! 지금 아저씨가 갖고 있는 분노와 불만도 감정이고요 제가 느끼고 있는 불안도, 인간이라면 모두 느끼는 초조함과 불안함 기쁨과 희망 이런 모든 것들이요.
김일환:그 따위 것들이 뭐가 중요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 아니야? 거추장스럽기만 하지. 사람 화만 돋우는 거야.
신소미:그렇지 않아요. 그렇기 때문에 더 중요한 거예요. 그건 공기와도 같은 거예요. 항상 우리 곁에 있지만 또 없으면 살지도 못하면서 고마움을 느끼기는 커녕 외면하기 일쑤인, 흔하기 때문에 더 소중하단 말이에요.
김일환:그런 소리가 정말 맞는다고 생각해? 우리가 공기 중의 산소를 마시며 산다고는 하지만 그 산소가 또 우리를 늙게도 하고 죽게도 만드는 거야.
신소미:너무 지나친 논리 비약 아니에요?
김일환:왜? 틀린 거 같아? 그럼 우리 인간의 몸은 70%나 물로 돼 있는데 왜 물에 빠져 죽는 걸까?
신소미:(억울하게 울먹인다)지금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요.
김일환:아니긴 뭐가 아냐? 내 말은 시간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거야. 그것만은 절대 그 가치가 변하지 않으니까.
신소미:그건 아닌 것 같은데요?
김일환:뭐야?
신소미:일단은 시간은 돈으로 변하긴 하잖아요. 돈은 항상 가치가 왔다갔다 하니까….
김일환: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박동수:아니, 무엇 보다도요, 최소 한 시간은 넘어야 환불이 돼요. 광고 보셨잖아요. 약관에도 나와 있고… 보여드려요?
김일환:참나… (회사에 전화한다.)나야! 그 일 어떻게 됐어? 나 없다고 어영부영하면 안 돼. 알았어? 미리미리 전화 넣고 확인하란 말이야. 그쪽 부장한텐 내가 다 얘기해 놨으니까 실수 않도록 알아? 그래.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난다.
박동수:이크! 왔나봅니다. 저는 잠시….
잠시 뒤 박동수는 한영주를 데리고 들어온다.
한영주:안녕하세요?
김일환은 쌀쌀맞은 표정을 짓고 신소미는 울고 있다. 한영주는 김일환을 일별하고는 신소미한테 다가간다. 박동수는 벌써 한 사람을 데리러 온다며 나간다.
한영주:왜 그러세요? 혹시 무서운 귀신이라도 나타났어요?
신소미 고개를 젓는다.
한영주:그럼 왜 울어요? 누가 아가씨를 괴롭히기라도 했어요?
김일환:허튼 소리!
한영주:누구한테 한 말이에요?
김일환:여기 우리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나?
한영주:우리 중에 누구한테 한 거냐구요.
김일환:좋아! 대답해주지. 바로 아가씨한테 한 거야.
한영주:왜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해요?
김일환:괴롭히기는 누가 괴롭혔다고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냐는 거야.
한영주:내가 무슨 말을 함부로 했다는 거예요? 내가 아저씨한테 말했어요? 아니잖아요? 왜 다른 사람이 말하고 있는데 말을 막 섞으려고 그래요?
김일환:내가 언제 말을 막 섞으려고 했다는 거야?
한영주:그리고, 아저씨 말대로 여기 우리들밖에 없는데 그럼 이 아가씨가 누구 때문에 울었겠어요? 바로 아저씨 때문 아녜요?
김일환:나는 아무 짓도 안 했어.
한영주:그럼 왜 울어요?
김일환: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여자들이 우는 이유가 어디 한두 가지야? 전부 다 알려면 몇 십 년이 걸려도 모자라는 일 아니야? 게다가 난 남자 아냐? 누굴 이상한 사람 만들려고 그래? 분별없이….
한영주:여기 아저씨하고 둘밖에 없었잖아요.
김일환:그래도 나 때문은 아니야.
한영주:그럼 설마 오지도 않은 나 때문이겠어요?
김일환:맞아!
한영주:예?
김일환:맞아! 그러고 보니 바로 당신 때문이군. 또 아직도 오지 않은 어떤 놈 때문이고.
한영주:그런 억지가 어디 있어요?
김일환:억지 아니야! 확실히 당신 때문에 말다툼이 있었다구.
한영주:말다툼 정도로 사람이 왜 울어요?
김일환:그런 사람도 있어. 당신처럼 겁도 없이 함부로 나대지 않고 조심스럽고 마음이 여린 사람이 있다고.
한영주:오~그럼 여태 착하디착한 사람을 데리고 윽박질렀단 말이죠? 어디 나한테 한번 해보시죠.
김일환:무슨 소리야? 내가 언제 윽박질렀다고 그래?
한영주:아무리 착하다 해도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냥 울지는 않았을 거 아녜요. 무슨 말을 했는지 나한테도 해보라고요.
김일환:아무 말도 아니야. 단지 늦게 오는 사람들 때문에 화가 났다는 말을 했을 뿐이라고.
한영주:그 말을 어떻게 했길래 그래요? 어디나한테도 해보라구요. 내가 더 늦었잖아요. 그런데 왜 못해요? 착하고 순한 사람한테는 할 용기가 있고 나 같은 사람한테는 겁나서 못하나요? 그럴 용기도 없어요?
김일환: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정말….
신소미:그만 하세요.
한영주:아니에요. 이런 사람은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 해요. 여자라고 지금 함부로 막말하고 그런 사람은….
김일환:누가 여자라고 막말한다는 거야? 보자 보자하니까….
한영주:보니까 어째요? 뭐가 보이는데요?
신소미:제발… 여기 싸우러 온 게 아니잖아요.
한영주:싸워야 할 땐 싸워야 해요. 자꾸 물러서기만 하니까 당하는 거라구요.
박동수 들어온다.
박동수:아무래도 이 사람 너무 늦는데… 지금 뭣들 하세요?
김일환:이거 봐! 시작 안 할 거야? 이러다 진짜 한시간 지나면 환불할 거야.
한영주:뭐야?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그랬단 말예요?
김일환:하긴 뭘해?
한영주:이 아저씨가 정말 요리조리 빠져나가기만 하고….
박동수:여러분! 또 싸우실 거예요? 정말 왜들 이러세요. 예? 왜 서로 반목만 하고 투쟁만 하세요?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이잖아요? 우리 좀 더 이해하고 서로 너그러워지면 안 되나요? 그리고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여기 있는 사람은 서로 마음이 일치돼야만 그 힘이 발휘돼서 영혼과의 만남의 장이 열릴 거라구요. 이렇게 싸우기만 해서 여기 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 그렇게 한가해요? 헛돈 쓰고 싶냐구요?
신소미:죄송해요. 저 때문에….
박동수:아녜요. 아가씨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고요.
한영주:누구 때문인지 저는 잘 알고 있어요.
김일환:조용….
한영주:흥! 왜 말을 가로막는 건지….
김일환:조용하라고! 조용! (잠시 조용해지자 듣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다)그렇게 에티켓이 없어?
한영주 황당해 한다. 뭐라고 말을 지르려다가 박동수가 입에 손을 대자 참는다.
김일환:그런 것 하나 똑바로 못하고 꼭 휴가를 낸 지금 나한테 전화를 해야 하나? 그런 건 좀 알아서 할 때도 됐잖아!
김일환 통화하면서 얼굴을 돌린다.
박동수:싸움이라는 것도 협상이라는 것도 다 서로 마음이 맞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예요.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에 대한 합의라도 최소한 갖지 않으면 혼자 벽 보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한영주:저도 뭐 굳이 싸우려고까지 한 건 아니에요. 여기 오니까 왠지 초조하고 그런데다가…
신소미:맞아요. 저도 그건 느꼈으니까요.
이때는 김일환도 이들을 쳐다본다. 같은 입장이라는 점을 나타낸다.
신소미:저는 좀 무서웠어요. 정말 여기가 그곳이 맞아요?
박동수:그런 것 같아요. 저도 으슬으슬 하더라고요.
한영주:여기를 안내하는 사람이라면서요?
박동수:오늘이 처음입니다. 사실 여러분들이 아니었으면 벌써 도망쳤을지도 몰라요. 아니면 내일 아침에 여기서 변사체로 발견됐을 수도….
신소미:어마?
박동수:농담입니다. 농담 하하하….
한영주:농담이라도 그런 말 마세요.
박동수:여기가 그래도 좀 알려진 데에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분명 체험에 성공하는 사람이 있으니까 그랬겠지요. 게다가 아직까지 사고가 난 일도 없었어요. 사고 날 일도 없지 않겠어요? 이런 곳에 우리들밖에 없는데, 무슨 사고 날 일이 있겠습니까?
신소미:실패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았나요?
박동수:있긴 있었나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믿지 못하고 마음을 못 맞추다가 밤새도록 서로 수다만 떨고 갔답니다. 물론 사고 난 사람은 없었고요.
신소미:그러면 안 되는데….
박동수:그러니까 제가 다투시지 말라고 하잖아요. 어린애도 아닌데 여기까지 온 목적은 달성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한영주:확률은 어떻게 돼요?
박동수:저도 잘 모르겠는데요.
한영주:그걸 아저씨가 모르면 누가 알아요?
박동수:그건 안 가르쳐주더라고요.
한영주:그럼 우리도 실패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요?
신소미:실패하면 안 돼요…
박동수:저도 안 돼요. 그러면 아르바이트 비를 못 받아요.
한영주:그 사람 어떻게 됐어요?
박동수:그 사람?
한영주:왜 아까…
박동수:아, 그 사람(서류를 살핀다.) 박동수, 나이 32, 박동수… (고개를 갸우뚱) 직업 없이 휴직 중, 아르바이트로 과외 선생을 하다가 맡은 학생의 성적이 오르지 않아서 짤리고 이번에 돌아가신 삼촌과 만나보겠다며 더운 여름을 맞아 담력도 기를 겸 해서 지원했다며 글을 남겼네요. (서류를 덮는다.) 인상착의만 딱 봐도 별로 믿음이 가는 친구가 아닌데요.
김일환:(통화 도중에 끼어든다.)아르바이트 인생이 뭐 다 그렇지.
박동수:왜 이러세요. 저는 여기 있는데. 난 안 늦었습니다.
김일환:누가 뭐래?
신소미:그럼 어떡해요. 그 사람 없으면 성원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한영주:그럼 밤새 여기서 헛수만 해야 하나요?
박동수:글쎄요. 거기까지는 제가 교육을 받지 못해서.
한영주:할 줄 아는 게 아무 것도 없잖아요.
박동수:죄송합니다. 하하…. 하지만 밤새 심심하지 않게는 해 드릴 수 있어요. 제가 웃기는 말을 좀 잘하거든요. 하하하….
신소미:웃기도 잘 하시고요.
박동수:그렇죠 하하하…. 웃는 건 좋은 거니까.
김일환:농담이나 잘 하는 게 그렇게 좋은 거야? 참나~(다시 통화에 열중)
한영주 뭐라 한마디 하려 하지만 김일환 다시 고개를 돌리고 통화를 계속한다. 신소미 밝게 웃는다. 김일환 마침내 전화를 끊고 돌아선다.
김일환:우리끼리 그냥 시작하지.
신소미:그래도 될까요?
김일환:무슨 시작하는 특별한 방법이라도 있어?
박동수:아니요?
김일환:그럼 못 할 것도 없잖아?
박동수:참가자 모두 마음이 맞아야 한다고 아까 제가 말씀 드렸잖아요. 그러면 저절로 시작이 된다는 걸 알게 될 거래요. 하지만 방금 전에 싸우셨던 거 벌써 잊으셨나요?
김일환:싸우기는! 그냥 말을 좀 크게 한 거야.
박동수:제가 그것도 구별 못할까봐 그러십니까?
신소미:정말이에요? 정말 다른 방법은 없어요?
박동수:정말이에요. 여기에도 써 있다고요.
김일환:그래?(사람들을 둘러보고)까짓 거 맞추면 되지.
한영주:아이고 말씀은 참 잘하세요.
김일환: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갈 거야? 돈 많고 시간 남아돌아?
한영주: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와 마음을 맞출 수 있다고요?
김일환:왜 못해! 할 수 있어.
박동수:그럼요 할 수는 있지요. 남북도 대화하는데.
모두들 쳐다본다.
박동수:요즘은 화상통화도 하잖아요 왜….
모두 외면한다.
신소미:아직 안 왔다는 그 사람은 어떡해요?
김일환:우리끼리 그냥 시작하면 돼. 몇 명이 있어야 된다는 조건은 없었잖아. 안 그래?
박동수:예, 그렇긴 한데요.
한영주:맞아요. 인원수 얘긴 없었잖아요. 그렇죠?
박동수:그런 것 같기는 하네요.
이때 '콰광' 소리와 함께 진동이 인다. 배우들 모두 비틀 댄다. 그와 함께 묘한 분위기의 음향이 바탕에 깔려 지나간다. 모두들 불안을 느끼자 조명과 음향은 영혼이 나타날 때의 징조를 살짝 나타낸다.
박동수:시작인가요.
김일환:뭐가 시작이야? 이러다 여기 무너지는 거 아냐?
박동수:정말 모르시나요.
김일환:모르긴 뭘 몰라? 빨리 대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박동수:아이 참. 들어오면서 보셨잖아요. 무슨 보로꾸 건물입니까? 이런 정도에 무너지게?
김일환:그럼 뭐야?
박동수:폴터가이스트 현상 아닙니까?
김일환:이게?
박동수:여기는 영혼과의 만남으로 최적의 장소다. 알고 오셨잖아요. 영기가 풍부한 이곳에 그런 현상은 당연한 거죠. 말하자면, 지금부터 체험을 시작하게 된 거라는 말씀입니다. 그건 우리가 마음이 맞기 시작했다는 얘긴데….
김일환:맞긴 뭘 맞어. 그냥 박동수를 욕했을 뿐인데?
박동수:속으론 모두 같은 마음이었잖아요.
한영주:뭐 하긴….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 신소미는 나중에 살짝 인정한다.
박동수:그것만이 아니에요. 우리끼리 시작하자는데도 동의했잖아요.
김일환:시작하는데는 뭐 따로 방법이 없다며?
박동수:그러니까 시작된 거라니까요?
김일환:정말이야?
박동수:네. 보셨잖아요.
김일환:그럼 기다려보자구.
박동수:그래요.
김일환:좋아.
한영주는 다리가 아프다며 앉는다. 그러자 한 사람씩 자리에 앉는다. 그러나 김일환만은 앉지 않는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암전이 된다. (암전)
2장. 드디어 뜻이 모이고
박동수:흐아암~심심하지 않아요?
사람들 돌아보지만 말이 없다. 김일환은 뭘 하는지 돌아서 앉아 있다.
박동수:저기 우리 기다리는 동안 얘기나 좀 하면 어떨까요?
신소미:무슨 얘기요?
박동수:아니 그냥 뭐… 여기 와서 만나고자 하는 분과의 관계라든지 사연이라든지….
김일환:(고개를 돌리며)남의 개인사에 무슨 관심이야?
박동수:재밌을 것 같지 않아요? 사람마다 다 특별한 사연이 있고 그래서 여기에 온 목적이 제각각 다 다를 거 아니에요. 여기는 자신이 원하는 사람의 영혼을 만날 수 있는 곳, 그 사람과 하고 싶은 얘기는 뭘까? 이런 거 마치 시청률 높은 주말드라마 같지 않겠어요?
김일환:다른 사람의 사연이 어떤지도 모르면서 그딴 식으로 막 말을 해도 되는 거야?
한영주:막말이라니요? 그냥 시간이 좀 남은 것 같아서 한 말 같은데….
김일환:그게 그냥 한낱 얘깃거리에 불과한 줄 알아? 본인한테는 얼마나 중요하고 힘든 일인데? 버티기 힘들 정도로 괴로워서 잠도 제대로 못 이루고 언제까지나 가슴에 응어리로 남을 것 같은 본인의 목을 조르는 트라우마가 된 사정을 아무렇게나 쉽게 꺼낼 수 있는 줄 알아?
한영주: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그렇잖아요. 아저씨만 특별한 게 아니고….
박동수:그런 얘기들은 사람의 감정을 울리는 거잖아요. 그러다 보면 마음이 하나로 모일 테고… 이렇게 여기 같이 있는 것도 인연이라면 인연 아니겠어요? 그러지 말고 얘기 좀 한 번 해주세요.
김일환:난 그런 거 없어.
한영주:이분 얘기도 틀린 거 아니잖아요. 기왕 이렇게 된 거 말씀 좀 해보세요.
김일환:나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리야? 그런 게 있을 것으로 보여? 내가 그렇게 한가한 줄 알아?
한영주:그럼 여기 왜 왔어요? 그냥 왔어요?
신소미:그만 두세요. 내키지 않으신가 본데.
김일환:(흘겨보며 인상 쓴다)난 그냥… 시간이 남아서 온 거야.
박동수:아까 전화하는 거 보니까 되게 초조해 하시던데… 내가 다 봤는데….
김일환:이거 뭐하는 짓이야?
신소미:그럼 제가 먼저 말할까요?
신소미가 얘기를 시작하는데도 박동수와 김일환의 공방은 계속된다.
김일환:몇 분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봉으로 보여? 왜 나한테만 이러는 거야?
한영주:다른 사람은 가만 있는데 계속 나서잖아요. 그거 할 말이 많아서 그런 거 아니에요?
김일환:아직 한 시간 되려면 멀었어?
박동수:네 조금… 헤헤….
신소미:저는요. 제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맞아요. 너무 일찍 정말 어린 나이에 세상을 등진 제 언니에요. 너무 어릴 때라 함께 한 추억도 별로 없고 그마저도 기억조차 희미한 그래서 더욱 그리운 언니에요. 어떤 언니였는지 아세요?
김일환:(실랑이를 하는 도중에도 대답한다.)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한영주와 박동수는 김일환을 흘긴다.
신소미:제 쌍둥이 언니에요. 열 살도 되기 전에 언니는 제 곁을 떠났죠.
박동수:이야~그거 정말 안타깝네요. 언니가 살아 있었으면 이 세상이 좀 더 밝았을 텐데….
이번에는 박동수를 김일환과 한영주가 흘긴다.
박동수:미인이잖아요. 이런 미인이라면 하나 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어요?
신소미:그때 언니는 제게 한마디의 작별 인사도 없었어요. 하긴 할 수도 알아들을 수도 없는 나이였겠죠. 그땐 저도 언니도 같이 병원에 있었대요. 둘 다 혼수상태로. (울음을 터뜨린다.)정신을 차려보니까 병실에는 저만 있었어요. 언니의 침대는 휑하니 비어 있더라고요. 저는 언니는 어디 갔느냐며 떼를 썼지만 엄마도 아빠도 의사 선생님도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요. (오열하며)저만 살아남았던 거예요. 그걸 나중에야 한참이 지난 후에야 깨달을 수 있었던 제 스스로가 얼마나 미웠는지 몰라요.(결국 감정에 복받쳐 오열하며 쓰러진다.)
모두 감정이 젖어든 분위기다.
박동수:이거 제가 죄 지은 것 같네요.
김일환:그러니까 자꾸 떠들지 마!
박동수:맞아요. 하지만 좀 미안하기는 해도 이런 얘기는 할 필요가 있잖아요.
한영주:네. 담아두기만 하면 오히려 병이 될 뿐이죠. 당장은 슬프겠지만 나중엔 약이 될 수도….
김일환:좀 조용히 못하겠어?
한영주가 대들려 하지만 박동수가 막는다. 사람들 조용해지자 김일환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든다.
김일환:나야. 알아 당신인 거. 그래 사실일 거야. 그렇지 않으면 나 말고도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 왔겠어? 당신도 읽어 봤잖아.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버럭)바꾸긴 뭘 바꿔? 지금 그럴 분위기 아니야! (돌아서며 소리가 작아진다.)
신소미는 고개를 숙인 채 울고 있고 박동수와 한영주는 어이없는 표정. 잠시 정적.
박동수:저렇게 강해 보이는 사람이 더 불쌍한 법이에요.
한영주:흥! 그러면 다행이게요.
박동수:보세요. 평소에도 얼굴 표정이 풍부하지 못하고 딱딱하잖아요. 이런 사람은 마음의 병이 너무 깊어서 중환자실에서 오늘 내일 하는 사람처럼 온 몸이 정상이 아닌 법이에요.
김일환 뒤에서 전화기를 붙잡고 돌아서 쳐다보자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박동수:신경을 너무 많이 쓰니까 눈하고 귀가 특별히 밝긴 하지요.
김일환은 눈을 흘기지만 참고 다시 고개를 돌리고 통화에 열중한다.
김일환:아니 내 말은….
분위기 썰렁해지자 잠시 침묵하는 두 사람.
박동수:우리끼리라도 얘길 계속 할까요?
한영주:무슨 얘기요?
박동수:아가씨는 여기 어떻게 왔냐구요.
한영주:저는 이 사이트에서 대절해주는 버스 타고 왔는데요.
박동수:아니 그거 말고….(신소미를 쳐다본다.)
한영주:(알았다는 듯)아, 저는요. 사실 별 목적은 없었어요.
박동수:그냥 왔다구요? 참가비가 적지도 않은데….
한영주:아니 그게 아니라…. 실은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요. 아, 아니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어서….
박동수:예? 잘 이해가….
한영주:만나고 싶지만 만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잖아요. 만나지 않는 게 더 나은…. 그냥 저는 놀러 왔다고 보시면 돼요. 여기에 대한 소문도 사실인지 알아도 볼 겸 여름 피서 삼아서….
박동수:그건 저하고 비슷하네요. 저는 더위가 정말 죽도록 싫거든요. 그래서 평소에 거의 옷을 안 입다시피 하고 있지요. 아프리카 원시인 수준이 저한테 딱 맞는 정장인 거 같다니까요. 그래서 말인데 그 때문에 진짜 재미있는 일도 많았거든요? 한 번 들어보시지…
한영주:지금 그런 얘기는….
박동수:않으시겠지요. 뭐 이 자리에서 할 얘기도 아니고….
신소미는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듣고 있다.
박동수:요즘은 가뜩이나 봄도 짧아져서인지 이 나라에 더 이상 살고 싶지가 않을 정도예요. 정말 영혼이란 걸 만나게 되면 오싹해져서 더위도 날아갈 것 같고, 또 돈도 벌어야 해서 잽싸게 지원했지요. 그런데 경쟁자는 별로 없었나 봐요.
한영주:우리 같은 사람은 어떻게 소문이라도 찾게 되지만 여기가 많이 알려져 있는 건 아니잖아요.
박동수:여기 주인장도 그러더군요. 이런 특별한 장소가 있다는 걸 들어도 믿는 사람이 드물고 또 언제 지형이나 영기가 사라질지 모른다면서 영업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대요. 돈벌이가 목적이 아니라 고독하고 외로운 사람들을 위해 공개한 것뿐이라는데 저는 못 믿겠드라고요. 돈이 쪼끔 들잖아요.
한영주:그럼 제대로 된 목적으로 온 사람은 여기 이 분 뿐인가 보네?
박동수:아, 그랬나요?
한영주:그래서 영혼이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는 거 아니에요?
박동수:뭐 그럴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요.
한영주:네?
박동수:여기 온 사람들이 전부 다 제각각이고 연고지도 다 다르잖아요. 영혼들도 쫘 퍼져 있을 텐데 여기에 모이는데 시간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나중에 한꺼번에 몰려들지도 몰라요. 이야~그럼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 히히….
한영주:아니면 아예 오지 않을 수도 있지요. 우리가 사기를 당했을 수도 있는 것처럼….
박동수:악! 그러면 안 되는데. 돈도 못 받고 개고생에다….(김일환을 쳐다보고는 치를 떤다.)
신소미:아니에요. 영혼은 꼭 올 거예요. 난 느낄 수 있어요.
한영주:정말 확신해요?
박동수:그분이 오셨나요.
신소미:다들 아무 일도 없이 왔다고는 했지만 그게 아니란 걸 저는 알 수 있어요. 그저 숨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요. 하지만 아무리 감춰둔다고 해도 저절로 보일 때가 있는 법이에요. 특히 이런 장소에서는.
박동수:(가슴을 손으로 짚고)요기가 보이나요.
신소미:(김일환을 보며)저 분은 겉으로는 얼음처럼 냉정하고 차가운 것처럼 보이죠. 저런 사람은 사회적으로 위상도 높고 일에 있어서도 매사에 적극적이지요. 그런 분이 이 곳에 왜 왔을까요?
박동수:내가 어떻게 아나요.
한영주:제발….
신소미:이제야 알 것 같아요. 아까 제가 언니 얘길 했었죠? 그 얘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한테도 꺼낸 적이 없었어요. 항상 가슴 속에 응어리로 남아서 도저히 떨칠래야 떨칠 수 없는 만성질병처럼 제 영혼을 갉아먹고 있었지요.
박동수:그럼 병원에 가야지요… 아야!
한영주가 팔을 꼬집었다. 박동수는 그제서야 입을 스스로 막는다.
신소미:그런데 말을 하고 나니까 그렇게 편안해질 수가 없었어요. 마치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가슴 속 상처는 꺼내야 된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것도 자기 자신에게가 아닌 다른 이에게.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다고. 저는 다른 분들도 모두 그랬으면 좋겠어요. 분명 여기에 오게 된 사연이 있지요? 저는 다 알아요.
박동수:저기요, 여기 있는 우리 네 명 다요?
신소미:(끄덕)
박동수:나는 정말 아닌데….
김일환:네 명이 적어? 그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왔다 갔다고 했잖아. 그만 좀 해. 알아. 좀 있다 갈 거야. (사이)제발…. 그걸 말이라고 해? 그런다고 해서 내가 여기서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할 것 같아? 이제 끊어. 집에 가서 보자구.
김일환 전화를 끊고 중앙으로 나와 사람들을 훑어보며 숨을 고른다.
2막.
1장. 부자지간의 사랑
김일환:언제 되는 거야?
박동수:네?
김일환:영혼인지 유령인지는 언제 나오고 언제 대화를 할 수 있냐고.
박동수:그게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저도 잘….
김일환:미치겠군. 시간이 아까워서 미치겠어.
한영주:사실 저희도 좀 지치기는 해요.
신소미:언니를 꼭 만나야 하는데….
박동수:저기요. 십 분만 더 기다려 보면 안 될까요?
김일환:좋아! 십 분이야. 단 일초도 에누리 없는 거야.
박동수:예.
한영주:좋아요. 그렇게 해요.
신소미:언니….
김일환:안 되면 환불이야.
김일환 구석으로 찾아가 앉는다. 박동수와 나머지도 허탈한 듯 앉는다. 그런데 그들이 앉자마자 김일환이 벌떡 일어난다.
김일환:완전 사기군. 소문도 가짜고 사이트에 있던 후기도 전부 구라였어. 10분이 넘었는데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잖아.
박동수:저기요.
김일환:내놔. 환불해달란 말이야.
박동수:방금 앉으셨잖아요.
김일환 박동수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김일환:그래서 못주겠단 말이야? 나가서 신고해?
박동수가 숨을 막혀 하는 이때 영혼이 들어오는 징조가 울린다. 김일환 멱살을 놓고 돌아서며 아가씨들을 종용한다.
김일환:가자구. 계속 있을 거야? 이런 뻔한 사기에 당할 거냐구.
한영주:아직 시간이….
김일환:시간낭비라니까.
박동수:여기가 어디냐. 누가 날…(김일환을 보고) 일환이냐?
김일환은 돌아보지 않는다.
김일환:이게 누구 이름을 막 부르는 거야?
박동수:여기가 어디냐?
한영주:저기요. 아르바이트 아저씨 아니세요?
신소미:아닌가 봐요. 누군가 오신 게 틀림없어요.
박동수:(쳐다본다)
한영주:(박동수의 눈길을 받고)저희는요 인터넷을 통해서 만났는데요.
신소미:여기는 영혼이 잘 나타나는 장소래요.
한영주:그래서 오늘 처음 본 사이거든요. 우리 모두 다.
신소미:만나고 싶은 사람의 영혼을 만날 수 있어요.
한영주:잘 이해가 안 되실 것 같긴 하지만….
박동수:네가 날 불렀냐?
김일환:아버지?
모두들 침을 꿀꺽 삼킨다. 물론 아버지의 영혼이 들어간 박동수는 예외다.
김일환:정말 아버지세요?
박동수:네가 날 모르냐?
김일환:어떻게 오셨어요? 여긴 어떻게 알고 오셨냐구요?
박동수 말없이 쳐다보다가 그냥 돌아선다.
김일환:가시게요? 왜 오셨는지 이유는 말해 주셔야죠. 아니 최소한 묻는 말에는 대답을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한영주:저기… 혹시 잘 못 아신 거 아닐까요? 다른 분이라거나….
김일환:아니, 맞아! 이런 사람이 이 세상에 또 있을 거 같아? 영원히 단 한 사람뿐이야. 차돌처럼 단단하고 무서울 정도로 냉정한, 이런 사람이 여긴 왜 왔는지, 어떻게 올 수 있었는지 난 알아야겠어. 당신들도 궁금할 거 아냐?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돌아가신지가 얼마나 오래됐는데 어떻게 아직 이 세상에 남아서 여기 올 수 있는 거죠?
박동수:(말을 자르며)그게 그렇게 중요하냐?
김일환:중요하냐구요? 그게 중요하냐구요? 그럼 중요하지 않은 건 전혀 하지 않나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만 살 수 있나요? 최소한 왜 중요한지만이라도 얘기는 해 주실 수 있잖아요?
박동수:(콧방귀!) 못된 버릇은 여전하구나.
김일환:내가 왜 이런 사람이 됐는지 아세요? 주변 사람들에게 왜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됐는지 아시냐구요? 동료들도 친구들도 마누라에 심지어 자식들까지 저보고 냉혈한이래요. 이게 누구 때문인지 아세요?
박동수:알고 싶지 않다!(돌아선다. 김일환은 돌아서는 박동수를 잡아 돌려세운다. 말을 하다가 격해져서는 멱살을 잡고 흔든다.)
김일환:전부 아버지 때문이에요. 전부터 오직 한 말씀만 해오셨잖아요. 살아남아라. 무조건 이겨내야 한다. 제가 얼마나 괴롭게 살았는지 아세요? 전 아버지가 싫었어요. 그런데 그렇게 싫었는데도 언제부턴가 내가 그렇게 살고 있더라구요. 왜 제가 이렇게 살아야 하죠? 난 감정도 없고 사랑도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그런 사람이 돼 버렸다고요. 말씀 좀 해보세요. 뭐라고 말 좀 해보시라고요.
김일환이 멱살을 흔드는 가운데 박동수 정신차린다.
박동수:어 아저씨 왜 이러세요.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요?
김일환:가신 거예요? 아무 말도… 그냥 가셨나고요.
박동수:(멱살을 풀며)저는 계속 여기에 있었는데요….
김일환:(다시 멱살을 잡고)너 이 자식! 도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누구 허락받고 다른 사람 흉내를 내고 그런 거야?
박동수:아이고… 제발….
한영주:기억 안 나세요?
박동수:네? 뭐가요? 켁켁….
신소미:그만 하세요. 이분은 정말 모르나 본데….
김일환:정말이야? 정말 아무 것도 모르냐구!
박동수: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한영주:아저씨가 이분 아버님처럼 행동하셨었어요. 말투도 그랬고….
박동수:예? 제가요?
신소미:그분의 영혼이 아저씨한테 씌었었나 봐요.
박동수:예? (울상을 지으며)하필이면 왜 저한테….
한영주:같은 남자라서 그러지 않았을까요?
김일환:(참던 분통을 터뜨리며)항상 이런 식이야. 자기 얘기만 주사기로 꽂듯이 주입하려고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은 절대로 듣지 않지. 이런 게 가족이야? 이런 게 무슨 부모 자식 사이냐구!
박동수:예, 잘 알겠습니다….
김일환:(잠시 진정)아가씨들. 여기 말이 사실인가 보네. 좀 더 기다려 봐요. 아마 다른 영혼도 올 거 같아. 난 먼저 갈 테니. 도저히 더는….
박동수:근데요. 이건 좀 놓고….
김일환:(손을 풀며)아 미안. 내가 지나치게 흥분했었나 보네.
박동수:(숨을 가다듬고)그런데 정말 이 아가씨들 얘기가 사실이에요?
김일환:자넨 기억 못하나?
박동수:전혀요.
김일환:다른 사람의 영혼이 들어오면 본인의 의식은 잠시 물러나는 모양이군. 아주 잠깐이지만 말이야.
박동수:맞아요. 그런가 봐요. 머릿속이 텅 비었던 거 같아요.
김일환:어쨌든 자네 말대로 시작되긴 한 모양이군.
한영주:그러게요. 거짓은 아니었군요.
신소미:그럼 저도 금방 언니를 만날 수 있겠네요? 아… 빨리 왔으면….
한영주:그렇겠죠.
김일환:그렇겠지.
영혼이 나타나는 징조가 울린다. 갑자기 김일환의 말투가 바뀐다.
김일환:자 아무튼 수고했어요. 그리고 그동안 미안했습니다.
박동수:제가요?
김일환:다른 건 해 줄 게 없고… 자, 수고빕니다.
박동수:네? 제가 이런 걸 받아도 될지….
2장. 자매지간의 사랑
신소미:이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뭔지 아세요? 그건 사랑하는 사람이 점점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한영주:(끄덕)
신소미:벌써 시간이 많이 흘렀어요. 얼굴도 거의 잊어버린 것 같아요. 그래서 점점 더 그리워지는데… 보고 싶으면 싶은 만큼 점점 더 멀어지기만 하는 거예요. 언니….
한영주:…응?
신소미:언니가 빨리 왔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영주:예쁜 아가씨 이제 그만….
신소미:언니?
한영주:예쁜 우리 소미….
신소미:정말 언니야? 언니 맞아?
한영주:(끄덕)
신소미:언니, 언니가 맞는 거지? 거짓말 아니지?
한영주:우리 둘 다 잠꾸러기였잖아. 맨날 학교에 지각했고….
신소미:맞구나! 언니 맞구나! 언니….(붙잡고 오열한다.) 왜 그렇게 날 떠났어… 우리 사이 좋았었잖아… 나 혼자만 그렇게 안 거야? 응? 그런 거야?
한영주:아니야….
신소미:그런데 왜 말도 없이 그냥 떠났어? 내가 미워서 그랬어? 응? 갑자기 왜 미워진 거야. 얘기해 줘. 용서를 빌 수 있게 해줘….
한영주:그게 아니래도…. 엄마 아빠가 말 안 해줬어?
신소미:응?
한영주:언젠가 아빠가 인형 하나를 사 오신 적이 있었지?
신소미:응. 그거 나 혼자 가지겠다고 떼를 많이 썼었잖아. 내가 정말 미운 짓 많이 했지? 그래서 미워졌구나?
한영주:아니야…. 그땐 나도 그랬었잖아. 그런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았어. 인형은 하나밖에 필요가 없었던 거야.
신소미:그게 무슨 말이야?
한영주:우리가 매일 늦잠을 자고, 지각을 하고, 학교에서는 친구도 없고 그랬던 게 무엇 때문인지 기억 안 나니?
신소미:난 언니가 매일 날 깨우던 거밖에 기억이 안 나. 그때 내가 언니를 너무 힘들게 했어.
한영주: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몸이 많이 아팠대. 잠이 많았던 거도 아파서 그랬대.
신소미:그랬었나…? 그럼 언니는 아파서… 너무 아파서….
한영주:너도 그랬어. 어느 날 우리는 잠에서 깨지도 못했던 거야. 엄마 아빠는 우리 둘 중 하나만 살 수밖에 없다는 걸 알았어.
신소미 충격을 받는다.
한영주:사실 난 항상 너와 함께 있었어. 네 심장이 바로 나니까.
신소미:이 심장이…?
한영주:난 어차피 살 수 없었어. 그래도 그것만은 쓸모 있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신소미:그럼 그 인형은 바로 언니한테 사 준 거였구나? 아빠는 언니가 이렇게 될 줄 알고, 난 그것도 모르고…. 언니 미안해. 정말 미안해.
한영주:그 인형 아직 갖고 있지?
신소미:응. 잘 보관하고 있어. 그걸 보면 언니가 떠올라서 얼마나 소중히 간직했는데.
한영주:이젠 나한테 보내줄 수 있지?
신소미:보내줄게. 언니가 원하면 그렇게 할게.
한영주:나보다 너를 위해서야. 이제 너도 네 인생을 살아야지. 인형 같은 거에 집착해서 우울하게 살면 안 돼.
신소미:난 왜 이걸 몰랐을까? 엄마 아빠는 왜 얘길 안 해준 거지? 집에 돌아가면 따질 거야. 언니가 이렇게… 내가 이렇게 슬퍼하는 걸 잘 알면서 왜 그랬는지….
한영주:내가 말했잖아. 나는 항상 같이 있었다고. 그러니까 슬퍼하지 마.
신소미:그래도 너무하잖아. 언니한테 너무 미안하잖아.
한영주:그러지 마. 그래서 내가 이승을 떠나지 않았던 거야. 바로 이 얘길 해주려고. 그동안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이 오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신소미:언니….
한영주:잘 알겠지? 이제 오해 풀렸지?
신소미:응.
한영주:정말 다행이다.(일어서려 한다.)
신소미:가려고…?
한영주:그래야지. 이제는 정말 가야지.
신소미:그러지마. 가지 마 언니….
한영주:가야 돼. 벌써 옛날에 가야했어.
신소미:안 가면 안 돼? 이렇게 계속 만나고 그러면 안 돼?
한영주:나도 너랑 더 놀고 싶어. 우리 옛날에 손놀이 많이 하고 놀았잖아. 너무 재밌었는데…. 푸른 하늘 은~하수….
신소미:그래 우리 쎄쎄쎄하자. 조금만 더 놀다 가자.
손잡고 쎄쎄쎄를 한다.
신소미: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하~안 나무 토끼 한 마리….
한영주가 박동수를 쳐다본다. 박동수 손가락을 약간 흔들어준다. 고개를 돌리자 한영주는 이미 제자리로 돌아와 있다. 그러나 차마 손을 놓지 못한다. 하지만 어느 새부턴가 신소미도 알아차린다. 그런데도 계속 하고 있다. 안타깝고 아쉬워서이다. 노래를 마친 신소미는 그 자리에 엎드려 소리 없이 오열한다.
신소미: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한영주:(끄덕)
3장. 남녀 간의 사랑
김일환:여전하구나.
한영주 깜짝 놀란다.
김일환:겉으로는 차가워보여도 끝없이 베풀 줄 아는 지구상에 유일한 여자.
한영주:사… 상호씨? 정말 상호씨야?
김일환:영주야….
한영주:그,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어. 외국으로 떠났었잖아. 그러니까 여기에 오면 안 되는 거잖아.
김일환:그래….
한영주:그러면 잘 살아야지. 평생 나타나지 말았어야지.
김일환:미안하다….
한영주:그런 말 하지 마. 상호씨는 나한테 맨날 그 말만 했지. 할 말이 그것밖에 없어? 미안할 짓은 애초부터 하지 말았어야지.
김일환:….
한영주:돈이 좀 없으면 어때? 미래가 좀 불투명하면 어때? 그런 건 미안해 할 일이 아니잖아.
김일환:나한텐 너무나 큰일이었다.
한영주:상호씨한테만 그렇지 나한텐 아니었어. 온 집안 식구가 반대해도 난 상관없었어. 우리 둘만 함께라면 월셋방에 넝마주이라도 견뎌낼 자신이 있었어. 우리 그렇게 다짐했었잖아.
김일환:그래. 난 그보다 더한 일이라도 감당할 생각이었다. 너와 함께라면 무인도나 아프리카 오지라도 상관없었어.
한영주:그러면 왜 떠난 거야?
김일환:난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너만은… 차마 그런 고생을 시킬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더 낳은 환경을 갖추고 시작하고 싶었어.
한영주:그래서? 우리가 시작이나 했어? 이런 게, 겨우 여기서 몇 년이나 지나서 만나게 된 게 상호씨가 바라던 대로 잘 된 거야?
김일환:….
한영주:이렇게 되길 바란 건 아니잖아. 그런데 왜 그런 일을 혼자서만 결정해? 사랑이든 뭐든 둘이서 같이 하는 거잖아. 뭐든지 자기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거잖아.(울음을 터뜨린다.)
박동수:저기요. 그게… 남자한텐 굉장히 큰 일일 수가 있거든요.
박동수. 한영주가 째려보자 ‘이크’ 하면서 신소미를 보지만 동정을 살피다가 혼자 빠진다.
김일환:미안하구나….
한영주:자꾸 그러지 말라니까. 이제는 그러지 마. 앞으론 이제 다시는 영원히 잘못할 일이 없게 됐잖아.
김일환:그래서 더 미안해. 계속 네 옆에서 잘못을 해야 되는데….
두 사람은 서로 다가가 얼싸 안는다. 잠시 뜨거운 포옹이 흐른다.
한영주:외국 생활이 외롭고 힘들었을 텐데 어떻게 지냈어? 상호씬 외국어도 못하잖아.
김일환:한국 사람들하고 일해서 그런 건 불편 없었어. 나 같은 사람이 많더라.
한영주:무슨 일인데?
김일환:건물 짓는 거. 엄청 높은 걸 엄청 많이 짓더라.
한영주:그거 굉장히 위험할 텐데…. 사고도 많이 나잖아.
김일환:응. 그래서 이렇게 만났잖아.
한영주:돈은 많이 벌었어?
김일환:꽤 괜찮았어. 한 삼년만 고생하면 될 것 같았는데….
한영주:그까짓 돈… 그거 없어도 되는데…. 갑자기 그딴 생각은 왜 해 가지고….
김일환:(멋쩍다)갑자기는 아니야. 항상 마음에 걸렸던 거였어.
한영주:언젠가 우리 오빠가 한 번 만났었다면서? 오빠가 상호씨 고아출신이라고 막 몰아부쳤지? 그렇지?
김일환:아니야.
한영주:나도 아빠 없이 자랐잖아. 그래서 그랬을 거야. 내가 걱정이 돼서…. 너무 마음 상해하지 마.
김일환:괜찮아. 내가 어린앤가 뭐?
한영주:그것 때문에 외국에 가게 된 거지? 정말 미안해. 이렇게 된 게 다 나 때문인가 봐. 나를 만나지만 않았다면 우리 서로 사랑하지 않았으면 상호씨가 더 오래 세상에 살 수 있었을 텐데….
김일환:오빠는 어떻게 하는 게 너를 더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길인지 잘 생각해보라고 했을 뿐이야. 나머지는 내가 결정한 거야. 사실 안 그래도 고민중이었어 그랬는데 마침 그 일자리가 나타나는 바람에….
한영주:그래도 가지 말았으면, 차라리 그 전에 우리 그냥 헤어지기라도 했으면 더 좋았을걸. 그랬으면 자기가 이렇게 죽지도 않았을 거 아니야.
김일환:건설 현장이 그렇지 뭐. 늘 사고 위험에 노출된 곳이잖아.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한영주:사고가 났구나?
김일환:응. 20톤쯤 되는 상판이 머리 위로 뚝 떨어지더라고.
한영주:어떡해…. (울음을 터뜨린다.)많이 아팠지?
김일환:괜찮아. 전혀 기억이 안 나.
한영주:장례는?
김일환:응. 현장에 남은 게 하나도 없더라. 나도 나를 못 찾았어.
박동수:하하. 이야~이거 농담 한마디 챤슨데… 그만두께요.
모두 박동수를 째려본다.
김일환:이제 갈게.
한영주:가야지… 가야겠지…. 그런데… 나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어.
김일환:그게 뭔데?
한영주:(눈물)….
김일환:괜찮아. 해봐.
한영주:나 요즘… 만나는 남자 있다. 조그만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데 정말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야.
김일환:좋은 사람이라니 다행이네.
한영주:그런데 그동안 그 사람한테 마음을 못 열었어. 자기가 걸려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 그런데 지금은 내가 변하고 있는 거 같아. 그 사람 노력하는 게 너무 안쓰럽기도 하고… 나 이제 외면하지 못할 것 같아서. 그 말이 하고 싶었어. 정말 미안해.
김일환:(미소)알고 있었어. 옆에서 계속 보고 있었으니까. 잘 살아. 더 이상 내 생각은 하지 말고. 나도 이 말을 꼭 하고 싶었어. 그래야 홀가분하게 떠날 수 있을 것 같았어.
두 사람은 뜨겁게 포옹한다.
김일환:아…. 이렇게 있으면 좋은 걸… 그토록 간절히 원한 건 다른 게 아니라 바로 이거였는데… 그런데 왜 그때는 준비가 부족했다고 느꼈을까? 단지 이걸로도 충분한데. 다른 건 정말 하찮은 건데….
한영주:잘 가. 그리고 이번엔 좋은 가정에 다시 태어나. 다시는 고아 같은 걸로 태어나지 말고, 평범하고 따스한 사랑이 있는 가족한테 태어나. 다음 생엔 상호씨도 행복하게 살아봐야지.
김일환:응. 그럴게….
한영주:미안해… 정말 미안해….
김일환 박동수를 바라본다. 박동수 고개를 끄덕인다. 어느새 남자는 떠나고 김일환은 비틀거리다가 다시 제정신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한영주를 확 밀쳐낸다.
4장. 못다 얘기한 사랑
김일환:뭐야? 이 여자 왜 이래? 누구 가정생활 파탄낼 일 있어?
신소미:저기요. 꼭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필요는….
김일환:(째려본다)내가 그 말을 내 의지로 한 줄 알아? 상혼지 뭔지 이상한 사람이 들어와서는 멋대로 지껄인 거지. 아 어지러워.
김일환 부축하러 온 박동수의 손에 든 돈을 발견한다.
김일환:그 돈 이리 내.
박동수:네? 안 되요.
김일환:안 되긴 뭐가 안 돼? 그거 내 돈 아냐?
박동수:아저씨가 직접 준 거잖아요.
김일환:내가 왜 너한테 피 같은 돈을 줘? 그건 다 상혼지 뭔지 하는 그 사람이 한 짓이야.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김일환 박동수에게 달려들어 돈을 뺏으려 하며 두 사람 사이에 실갱이가 벌어진다. 그 사이 신소미한테 한 여자의 영혼이 깃든다.
신소미:박동철! 이자식 어딨어? 박동철 몰라?
신소미 여러 사람을 돌아보며 캐묻는데 다들 의아해 하기만 한다. 그 중 박동수의 얼굴에 유난히 관심을 보이지만 특별한 혐의를 찾지 못한 듯 얼굴을 돌린다.
신소미:이상하네… 내가 잘 못 왔나? 아는 얼굴이 없어….
박동수의 얼굴은 거의 사색이다. 김일환의 몸에 은근히 얼굴을 숨긴다.
신소미:이 새끼! 어디 잡히기만 해 봐라. 내가 가만 두나….
신소미 갑자기 영혼이 빠져나간 듯 쓰러진다. 한영주 박동수가 부축하려 하는데 김일환이 박동수를 놓지 않는다.
한영주:이게 무슨 일이죠?
박동수:아, 아마… 잘 못 온 영혼인가 봐요. 연고자가 없으면 그냥 이렇게 빠져나가는 거죠.
한영주:그럴 수도 있는 거예요?
박동수:예. 그런가 봐요. 매뉴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박동수 떨어진 서류뭉치를 들려고 하지만 김일환이 놓지 않는다.
김일환:어딜 빠져나가려고 그래? 돈이나 내놔!
박동수:아저씨는 아까 있었던 일 다 기억이 나요?
김일환:당연하지! 내가 바보야?
한영주:어떻게 그럴 수 있죠? 다른 사람은 다 잊어버리던데.
김일환:내가 보통 사람인줄 알아? 내가 어떻게 살아온 줄 아냐고? 고아여서 사랑을 못 받아서 불행하다고? 흥! 난 차라리 고아였으면 하고 기도라도 하고 싶었던 사람이야. 그 사람은 죽어서 잘 가라고 배웅도 받고 동정도 받았지. 나는 지금도 악착 같이 살고 있는 사람이야.
김일환의 서슬에 놀라 박동수는 돈을 뺏는 걸 제지하지 못하고 만다.
한영주:너무 하시네요. 우리들을 위해서 고생하신 분인데 아무리 직접 준 건 아니라지만 기왕에 준 걸 다시 뺏을 필요는 없잖아요.
김일환:무슨 소리야? 당신들은 다 여기 온 목적을 이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잖아. 내가 수고비를 줄 이유가 어디 있어?
한영주:아저씨도 아까 아버님을 만났잖아요.
김일환:(허탈한 듯 웃는다)흐흥 그게 만난 거야? 겨우 그게?
한영주:그럼 만난 거 아니에요?
김일환:우리가 몇 마디 대화나 했어?
한영주:그래도 만난 건 사실이잖아요.
김일환:가슴 속에 가득 찬 얘기는 하나도 못 했어. 조심해. 불처럼, 활화산처럼 가득차서 언제 폭발할지 모르니까.
한영주:그렇게 불만이 많으면 얘기해야죠. 심지어는 싸울 줄도 알아야 하는 거예요. 이렇게 뒤에서 원망만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김일환:내가 안 그랬는줄 알아? 다 해봤어. 예전부터 나만 얘기하고, 나만 원망하고 그랬어. 오늘도 그래. 내가 싸우려고 하면 먼저 혼자 멋대로 그만둬 버리는 거야.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싸움도 둘이 해야 되는 거 아냐? (감정이 격해진다.)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았는지 알아? 아버지가 싫어서, 그 사람이 싫어서 죽어라고 하지 말라는 일만 하고 살았어. 알아? 공고를 가라고 해서 일부러 인문계 고등학교로 갔고, 일부러 지방대로 지원했어. 장학금 받아가면서 악착 같이 졸업을 하고 나니 뭐라는 줄 알아? 장사나 하라는 거야.
신소미 눈물을 흘린다.
신소미:어떡해….
한영주:왜 그래요?
신소미:너무 슬픈 얘기잖아요.
김일환:그래서 이 악물고 대 기업에 들어갔어. 다 때려치우고 시골로 내려오라고 해서 악착 같이 노력해서 부하직원이 500명에 달하는 부장까지 승진했어. 이렇게 보란 듯이 성공하고 나니까 어땠는지 알아? 내가 가서 자랑도 하기 전에 그냥 돌아가시더라. 이제 당당하게 맞설 만 한 사람이 되니까 도망치듯 가버렸더라구. (진정)한 사람을 오랫동안 미워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아? 난 지금까지 줄곧 그렇게 살아왔단 말이야.
한영주:저기요. 그래도 싸울 상대라도 있었잖아요. 저는 7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어요. 아예 싸울 상대도 없었죠. 그래서 저도 아버지를 참 많이 원망했었어요. 그런데 저하고 성격이 좀 다르죠? 이런 것이 바로 가족이고 인생이지요.
김일환 잠시 감정을 가다듬는다. 불끈 뭔가 말을 할까 하다가 결국 그만두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다. 그러는 사이 박동수에게 다시 아버지의 영혼이 씌워진다.
김일환:아무튼 이제 가자구. 볼 일 다 본 것 같으니까.
박동수:대기업 부장까지 올라가는 거 정말 쉽지 않은 일이지.
김일환:그럼! 저절로 진급해서 되는 줄 알아? 아무나 올라가는 자리가 아니라고!
김일환 평소처럼 얘기를 했다가 깜짝 놀란다. 다시 박동수를 돌아본다. 그리고 잠시 침묵.
김일환:아, 아버지?
박동수:내가 너에게 무조건 생존만을 강요했었지. 하지만 난 그걸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이 바로 내가 알고 있는 살아가는 방법의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주변이 없다. 그래서 고스란히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김일환:그래도 제가 살아가는 걸 옆에서 봐 주실 수는 있었잖아요. 때로는 채찍질도, 때로는 칭찬도 해 주실 수 있었잖아요. 그런 게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아세요? 혼자서 외롭게 자기 자신을 분발시키는 게 얼마나 괴로운 건지 아시냐고요.
박동수:난 모른다.
김일환:조금만, 아주 조금만이라도 저한테 관심을 가져주셨으면 제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은 해봤자라구요.
박동수:이해한다.
김일환:이해? 아버지 같은 분이 이해할 수 있다고요?
박동수:나도 똑 같았다. 네 할아버지는 나보다 훨씬 더 했어. 나는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농사를 시작해야 했고 그때부터 오직 살아남는 것밖에는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다른 것은 배우기도 전에 일찍 돌아가셨지.
김일환:(충격을 받은 모습.)그럼 왜 진작에 그런 말씀을 해 주지 않았어요.
박동수:그냥 갈까 하다가 다시 왔다.
김일환:아버지…?
박동수:(끄덕)수고했다.
김일환:아버지! 아버지? 가셨어요? 가신거예요? 예?
김일환 박동수의 멱살을 잡고 흔든다. 그 서슬에 박동수 깨어난다.
김일환:그냥 이렇게 가실 바에야 뭐 하러 오신 거예요.
박동수:저, 저기요 아저씨 이 손 좀 제발….
김일환은 손을 놓고 박동수 앞에 무릎을 꿇고 소리 없이 오열한다. 잠시 모두 숙연해진다.
신소미:이제 좀 풀리셨나요?
박동수:그래요. 이젠 원망 좀 그만하고 사세요. 그게 불행의 시초라구요.
김일환 얼굴을 들고 고개를 끄덕인다. 이제는 많이 밝아진 모습이다.
한영주:지금까지 아저씨가 해낸 일 모두가 그만큼 노력해서라고는 하지만 사실 다 아버님이 원인인 것도 있잖아요. 그건 아버님께 받은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김일환:(끄덕)그래 맞아….
신소미:그러지 말고 웃어 봐요. 오늘은 정말 좋은 날이잖아요.
김일환:난 웃을 줄 몰라. 배운 적도 없고.
박동수:제가 가르쳐 드리지요. 그냥 입술을 좌우로 쫙 찢으세요. 이렇게. 그리고 기쁜 마음으로 그냥 하하하 하고 웃으면 되는 거예요.
김일환:이렇게? 하하하….
박동수:에이~진짜로 안 웃어본 사람 같잖아요.
김일환:(진짜로 웃는다)갑자기 좀 어색해서 그래. 평소에도 웃을 일이 거의 없거든. 한 이삼년에 한번?
박동수:그럴 리가요.
모두 웃는다.
신소미:지금이야 좀 어색할지 몰라도 앞으론 좋아질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앞으로는 웃는 날이 더 많아졌을 테니까요.
김일환:그렇겠지….
박동수:그럼요.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니까요.
신소미:우리 여기 온 기념으로 모임 하나 만들면 어떨까요? 까페도 만들어서 서로 연락도 주고받고 번개도 하고….
모두 서로를 쳐다보지만 결국 김일환에게 시선이 모인다.
김일환:좋아! 하지만 이 모임 그다지 오래가지는 않을 거야.
한영주:상관없잖아요. 어차피 우리는 우리 삶의 한구석만 공유하면 되니까요. 서로에게 짐이 되지 않을 만큼만.
김일환:좋아! 그래도 일단 한잔 해야겠지? 이상하게 목이 너무 마르는데.
박동수:아저씨가 쏘는 거예요?
김일환:아니! 자네가. (돈을 흔든다.)자네가 이 돈으로 쏘란 말이야.
김일환 다시 박동수에게 돈을 쥐어 준다.
박동수:오케 땡큐 베리마치죠.
한영주:그럼 갈까요?
신소미:그래요 가요. 모두 같이 가요.
왁자지껄 퇴장한다. 그러나 박동수는 리포트 서류를 가져가야 한다면서 갑자기 다시 무대로 들어온다. 서류를 들고는 나가려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한사람씩 이름과 이력을 읽는다.
박동수:김일환. 38세. 대기업 부장. 부친한테 쌓인 원망으로 건강에 이상이 왔을 정도로 집착이 심함. 신소미는… 쌍둥인데 어려서 둘 다 허약했었구만. 서로 다 장기가 약해서 시한부 삶이나 다름없었는데 결국 언니의 심장과 콩팥을 이식해서 동생만 살아남았군. 한영주 나이 28세. 고아인 남자친구가 사라지자 방황… 살아 있다고 믿고는 있지만 혹시나 해서 참가. 혹시나라니. 육감이 땡긴 거지. 여기 왔다는 자체가 바로 죽었다는 감을 잡았다는 거 아니겠어? 그리고 박동수… 이놈 참 어리버리한 놈이야. 이것저것 실패한 인생. 뭐? 삼촌이 그리워서? 흥! 웃기고 앉았네. 사기꾼 삼촌한테 비법을 전수받으려는 꿍꿍이가 훤히 보인다 임마. 몰라서 그런 모양인데, 네 삼촌은 그런 짓 하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손으로 목을 싹 긋는다) 당한 몸이야. 이거 뭘 알고나 그러는지 원…. 그리고 이놈은 지가 벌써 삼촌을 만났다는 걸 꿈에도 모를 거야. 멍청한 놈 같으니….
그러다 박동수는 고개를 팍 돌리고 한쪽을 보더니 찔끔한다.
박동수:벌써 끝났나요? 아 예. 죄송합니다…. 옙! 지금 갑니다.
박동수 일어나는 듯 하다가 픽 쓰러진다. 잠시 후 밖에서 차 경적 소리가 들린다. 김일환과 두 아가씨 목소리도 들린다. ‘빨리 안 와?’ 하는 소리다. 그러는 사이 박동수 악몽에서 깬 것처럼 소리지르며 일어난다. 밖에서는 대답인 줄 알고 ‘알았어 빨리 와’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박동수 세차게 숨을 고른다.
박동수:이야~ 진짜 무섭다. 여기 소름 돋은 거 봐. 진짜 피서 하나론 짱인데? 귀신 네다섯 개는 본 거 같네. 내 동생보고도 꼭 왔다 가라고 해야겠다. 가만, 그 중에 삼촌이 있었던 거 같은데. 이건 또 뭐야?
박동수 손에 들고 있던 서류를 읽으려 하는데 밖에서 또 재촉을 한다.
박동수:다 끝났다고 나오라는 건가? (밖에다가) 예~가요.
박동수 서류뭉치 들고 퇴장.
(암전.)
3막. 되풀이 되는 사랑.
조명이 들어오면 두 여자가 어리둥절한 채 서 있다. 잠시 후 한 남자가 들어온다.
박동민:안녕하세요? 오늘 안내를 맡게 된 아르바이트생입니다. 두 분 처음이시죠? 서로 인사라도 나누시지….
두 여자 서로 목례를 한다.
박동민:저기요. 명단을 보니까 한 사람이 아직 안 온 것 같아서요. 잠깐 나갔다 올게요. 남잔데 이름이… 박동민… 이라네요. 아직 영혼이 오려면 시간이 좀 있을 거예요. 그리고 잘 알아두셔야 할 게 있는데 영혼은 함부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마음이 맞아야 하죠. 뭐 이따가 시간되면 자연히 알게 될 테니까 여기까지만 하죠. 그럼….
남자 나간다. 여자 둘은 한동안 어색해 한다. 그러다 한 여자가 마침내 용기를 낸다.
여자1:저기… 어디서 오셨어요?
여자2:예? 저요? 서울이요.
여자1:저도 서울인데. 서울 어디세요?
여자2:신사동이요.
여자1:아~ 강남이요?
여자2:아니요. 강북이에요.
여자1:그러세요? 저도 은평구민이에요.
여자2:그래요?
여자1:예. 저는 구산동이거든요.
여자2:반갑네요.
여자1:그러게요. 세상은 참 넓고도 좁은가 봐요.
여자2:그러나 할 얘기가 많지는 않기 때문에 잠시 또 어색이 흐른다.
여자1:여기 어떻게 알고 오시게 됐어요? 전 인터넷으로 신청해서 오게 됐는데….
여자2:저도 아는 사람한테 까페를 소개받아서 거기에 신청했어요. 그런데 그렇게 많이 알려진 건 아닌가 봐요.
여자1:그러게요. 저도 우연히 알게 됐으니까요. 까페 주인장도 그러더군요. 이 장소에 그런 현상이 나타나는 건 일시적일 수도 있어서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그래서 홍보 같은 건 신경 쓰지 않는데요.
여자2:혹시 오늘 사라지는 건 아니겠죠? 그러면 안 되는데, 어렵게 시간 냈는데….
여자1:100% 환불 해준다잖아요. 물론 그게 중요한 건 아니지만… 안 되면 피서 왔다간 셈 치면 되죠 뭐.
여자2:네.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바닥에 앉는다.
여자2:저기, 여기엔 누구 만나러 오셨어요?
여자1:(잠시 망설인다.)사실 죽은 언니를 만나러 왔어요.
여자2:언니요? 아직 젊으실 거 같은데….
여자1:네. 자살했거든요.
여자2:죄송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여자1:아니 괜찮아요. 그보다 그쪽은요?
여자2:저는 이모를 만나러 왔어요. 우리 이모도 똑같이 자살했어요.
여자1:아니? 왜 그러셨대요?
여자2:그게… 남자 때문에….
여자1:네? 연세가 어떻게 되시는 데요?
여자2:이모긴 하지만 나이차이는 별로 안 나요. 언니나 다름없는 정말 착한 이모였어요….
여자1:우린 참 공통점이 많네요.
여자2:네?
여자1:우리 언니도 남자 때문에 자살했거든요. 처음에는 정말 말쑥하고 매너 좋은 남자인 것 같았죠. 그런데 알고 보니 아주 나쁜 사기꾼이었어요.
여자2:네? 정말… 우리 이모도 그런 남자 때문에 전 재산을 다 날리고 말았는데….
여자1:(감정에 복받친다.)우리 언니는 남한테 조그마한 잔소리마저 못하는 순둥이였어요. 그런데 그만 그런 나쁜 놈을 만나서…. 남자는 다 나쁜 놈들이에요.
여자2:맞아요.
두 여자는 서로 공감을 느끼고 손을 잡는다. 그리고 각자 감정을 추스른다.
여자1:이모한테 그 짓을 한 남자 이름을 알아요?
여자2:아뇨 잘… 왜요?
여자1:왜라니요? 잘 알고 있다가 복수해야지요. 그럼 이대로 당하고 말 거예요?
여자2:전 이모가 만날 때 멀리서 한번 보기만 했지 잘은 몰라요. 성은 박씨라고만….
여자1:어떻게 저랑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죠? 저는 이름까지 알아요. 박씨에다가 이름은 동철….
이름이 거의 불러질 때쯤 갑자기 커다란 진동이 일어난다. 두 여자는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쓰러져 정신을 잃는다. 잠시 후 한 여자가 먼저 일어난다.
여자1:여기가 어디지? (옷을 만진다.)옷이 이게 뭐야? 이걸 옷이라고 입는 거야? 참나… 내가 어쩌다가 이런 여자한테 와가지고…(쓰러진 나머지 여자를 발견한다.) 어? 미영이 아니야? 미영아! 어떻게 된 거야? 정신차려…. 네가 불러서 내가 여기에 왔나보다. 미영아…. 얼른 정신 차려…!
나머지 여자 정신 차린다.
여자2:응… 여기가…? (다른 여자를 보고)정숙아!
여자1:정숙이라니… 누굴 보고 그러는 거야. 정신 차려 미영아….
여자2:당신 누구야? 왜 내 조카 정숙이한테 들어가 있는 거야?
여자1:(알아채고)넌 누구야? 왜 내 동생 미영이한테 들어 있는 거야?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대치 상태에 들어간다.
여자1:이거 봐! 좋은 소리로 말할 때 들어. 당장 조용히 나가. 알았어?
여자2:어쭈구리? 누가 할 소릴? 나 조카한테 꼭 할 말이 있거든? 말로 할 때 가라.
여자1:이게 정말 뺨따꾸리 제대로 한번 들어가야 정신을 차릴려고 그러나….
여자2:오~그래? 한 번 쳐 보시지. 그래봐야. 내가 아프냐? 네 동생만 아프지. 쳐봐!
여자1:이게 정말… 진짜 그냥 확 해뿐다?
여자21:얼마든지 하시라니까.
여자1:이걸 그냥… 이걸….
여자1:해! 해! 아 왜 못 해?
여자1:이런 썩을 년이! 너 정말 안 나갈래?
여자2:뭐? 이런 싸가지를 봤나? 웬만하면 조카 얼굴 봐서 참을려고 했더니 욕을 해? 너 정말 죽어볼래?
여자1:흥! 벌써 죽은 몸이시다. 어쩔래?
여자2:이년이 정말?!
여자1:그래! 너 오늘 잘 걸렸다.
두 사람은 정확히 동시에 서로의 머리끄댕이를 잡는다. 그리고는 터프한 실랭이를 벌인다. 서로 욕을 하는 건 예사이다. 이때 한 남자 들어선다. 아까의 그 아르바이트생이다. 들어와서는 사태를 보고 고개를 흔들고야 만다.
박동민:도대체가…. 여러분! 제가 나간 지 얼마나 됐습니까? 5분이 됐습니까? 10분이 됐습니까?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라고 했더니 이렇게 싸움질이나 하고 있습니다. 시간만 나면 싸움질이에요. 이런 시간이 우리네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정말 다시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싸우는 방법도 그래요. 여러분! 여자들이 싸움을 할 때를 잘 생각해 보십시오. 처음에 말로 시작할 때는 다양한 전술과 어휘력이 필요합니다. 뭐 이건 잘 아실 겁니다. 그런데 일단 머리를 잡으면 그때부터는 체면이고 뭐고 없는 거죠. 주변 사람도 절대 게의치 않습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그건 여자들이 평소에 가장 중요시 하는 게 바로 ‘미(美)’이기 때문입니다. 그 중에서도 여자들의 미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머리 즉, 헤어스타일이죠. 그러니까 상대방의 머리를 흐트러뜨림으로 해서 미모를 망가뜨리는 게 가장 통쾌한 상대방에 대한 복수가 된다 이말입니다. 너무 한 거 아닙니까? 상대가 가장 중요시 하는 걸 망가뜨리려 하다니요. 조금 덜 중요한 걸 망가뜨리면 안 되나요? 이를테면 남자처럼 코피를 낸다거나 팔 다리를 부러뜨린다거나 뭐 이런 거요. 아니 제 말은 좀 더 상대에게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지금 당신이 싸우고 있는 상대는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인생을 동시대에 같이 영위하고 있는 친구이자 이웃이고 동반자입니다. 우리 좀 더 잘 해 줍시다. 좀 더 덮어주고 좀 더 사랑해주고…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일단 가서 좀 말려야겠습니다.
남자는 두 여자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곳으로 다가간다.
박동민:(착잡해 한다)또 시작인가요….
그러자 두 여자들의 실랑이 양상이 급변하고 갑자기 조용해진다.
여자1:이 말투는….
여자2:뭐야? 너 누구야? 혹시….
여자1:틀림없어. 박동철… 박동철 맞지?
박동민:저기요, 아니걸랑요.
여자1:저기요! 맞잖아. 박똥철!
남자 당황한다. 주먹이 입에 다 들어갈 정도다.
여자1:야! 너 이 손 못 놔?
여자2:너부터 놔. 나도 이놈한테 볼 일 있어.
여자1:나도 마찬가지야! 난 이놈 때문에 자살까지 한 사람이야.
여자2:너만 자살했냐? 너만 했어?
여자1:좋아! 동시에 놓는 거야.
여자2:좋아! 하나, 둘, 셋!
두 여자 서로 반대방향으로 떨어져 자빠진다. 그렇지만 곧 일어나 남자에게 달려들어 멱살을 잡고 뒤흔든다. 그러나 남자는 이미 넋을 잃은 듯 꼼짝도 않는다. 그러다가 흔드는 서슬에 바닥에 쓰러져 버리고 만다.
여자1:뭐야? 이 새끼 벌써 도망친 거야?
여자2:너 때문에 늦어서 놓쳤잖아?
여자1:이게 왜 나 때문이야.
여자2:그런데 이년이 정말….
여자 다시 머리끄댕이를 잡으려 하는데 다른 여자 쓰러져 버린다.
여자2:이것들이…. 야! 거기 안 서?
여자 일어서 뛰려는 동작과 함께 쓰러져 버린다. 그와 함께 조명 서서히 암전으로 들어간다. 이때 무대 밖에서 여자와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여자목소리1: 야! 박동철 거기 안 서?
여자목소리2: 너 잡히기만 해 봐! 아주 죽여 버릴 거야.
남자목소리: 야! 이년들아. 죽어서까지 이럴래? 벌 받느라고 여기서 영혼 안내를 하고 있잖아.
그들의 목소리 점점 멀어질 때, 무대 위의 쓰러졌던 사람들 하나 둘 씩 깨어난다. 서로 자신의 머리가 헝클어지는 등 모양새가 흐트러진 모습을 보고 의아해 한다. 그 사이 완전히 암전이 된다. 바탕에는 경쾌한 음악이 흐른다.
끝.
작가의 말.
이 극은 영혼을 나타나기 쉬운 즉, 음기가 왕성한 특별한 장소를 배경으로 좀 색다른 형식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싶어 쓴 것이다. 다른 사람의 영혼이 씌인 것을 흔히 ‘빙의’라고 하는 것 같던데, 한 배우가 이런 식으로 둘 혹은 셋의 역할을 하게 되면 어떨까 하는 조금은 엉뚱한 발상이 떠올랐던 게 이번 작업의 시작이었다. 배우들에게 좋은 훈련의 기회가 되지 않을까 하는 일석이조의 노림도 있었고.
이 이야기의 중심엔 역시 사람과 사람 간의 ‘사랑과 이해’가 있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고, 저마다의 사연과 사정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것들은 살아가면서 서로에게 당연히 영향을 미치는 법이고 혹자에겐 상처가, 혹자에겐 후회가, 그리고 미련이나 추억이 되어 가슴 속 깊은 곳에 남게 되는데 사람이 여기에 집착하게 되면 그것들은 트라우마로 불리는 병으로 발전해 버린다. 그 병을 치유하는 방법은 약물이나 정신과 상담이 아니다. 유일하다고 할 만 한 건 바로 앞서 말한 ‘사랑과 이해’라고 본 저자는 줄곧 생각해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내용을 상기해 보면 마지막에 이모와 언니의 모습에서 인간의 본 모습에 대해 잠깐 나온다. 착하고 참하다고 했던 언니와 이모의 이미지는 온데간데없고 남에게 보이지 않는 부분, 즉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 본연의 참 모습이 나타난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그렇다. 자신이 잘 보이고 싶은 점만 다른 사람에게 보이는 것이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본래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아니, 사실은 이보다 더 심하지는 않을까? 그런 자신이 다른 누구를 욕하고 손가락질 할 수 있을까? 이런 반성이 있다면 좀더 다른 사람에게 잘해줄 수 있지 않을까?
사람들은 ‘이해와 사랑’을 평소에 잘 주고받지 않는다. ‘이것’들은 주로 어떤 일이 터져야 만이 비로소 화두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상처를 주기 전에 먼저, 상대에게 말할 수 없게 되기 전에 먼저, 그 사람을 잃기 전에 먼저 쏟아내고 건네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역설하고자 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이런 장소가 실재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한다. 그래서 얘기에 나온 바 같이 상처를 안고 사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치유될 기회를 가질 수 있으면 얼마나 보람될까? 마지막으로 이 극을 읽고, 보는 사람에게도 이와 같은 생각이 잘 전달됐으면 하고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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