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 그래프 지표 방식대로 따르면
1591년 쇼쿠호 정권 일본의 당시 인구는 1,800 - 2,000만
1591년 만력제 치하 명조의 당시 인구는 8,200 - 9,000만
- 조선 조정이 파악한 호수 기준 -
중종 38년(1543) - 84만호(戶), 416여만 구(口)
인조 17년(1639) - 52만호(戶), 170여만 구(口)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5』, 1994
마지막 지표가 된 1639년은 양대호란(정묘-병자호란) 직후라는 점도 고려를 해야 하지만
호란 피해는 북방선 일부(평안-황해-경기)에서 그쳤기 때문에 전역적 피해를 입은 임진왜란보다는 덜했다.
그런데 전란의 이후로 약간의 회복기가 있었다는 점도 생각해 본다면 실제 피해는 저것보다 더 클 수 있다.
(단순 인명피해가 아닌 호적안의 다량분실도 중앙 행정력의 실현 측면에서는 엄청난 손실이다.)
[1591년 당시의 파악 농지 결수] 약 170만여 결
[1611년 당시의 파악 농지 결수] 약 54만여 결
참고로 저건 그나마 전란 이후 광해군대까지의 양전사업 결과로 그나마 농지 결수가 '증가' 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란 직후 실질적인 피해는 어떠했는가? 다음은 경연 도중에 나온 영의정 이항복의 발언이다.
http://sillok.history.go.kr/id/knb_13408001_002
"전결의 수는 전라도가 40여 만 결이고 경상도가 30여 만 결이며 충청도가 27만 결인데, 근세 이래로 잇달아 하하등(下下等)으로 세금을 거두었기 때문에 비록 평시에도 세입은 겨우 20여 만 석이니, 국초에 비하면 반감된 것입니다. 난리 뒤에는 팔도의 전결이 겨우 30여 만 결이니, 이는 평상시의 전라도 한 도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양전이 비록 폐단이 있더라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조수정실록』 35권, 선조 34년 8월 1일 병인 2번째기사, 1601년 명 만력(萬曆) 29년
전란 직후 파악된 게 반토막도 아니다... 1/3토막도 아니다... 무려...
5분의 1이다. 5분의 1...
파악되지 않은 것도 고려하면 실질적 피해는 이것보다 더 컸을 것...
즉 실질적인 인구만 해도 200-300만 이상의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고
전국의 농지도 전란 이전에 비해 1/5 이상으로 엄청나게 줄어버린 것
이런 심각한 때 궁궐공사 시켰던 광해군, 당신은 뭐지...?
어쨌든 최고의 ㅆ1발놈이다.
한국사에서 절대로 잊어선 안될 ㅆ1발놈...
첫댓글 반토막도 아니다... 1/3토막도 아니다... 무려...
5분의 1이다. 5분의 1..
이라는 부분 말이 좀 이상하군요
20%만 살아남았다는 이야기 인것 같습니다
@iceman호호맨 일단 사람이야기는 아닌 것같고 농지이야기인데 전쟁후 남은 농지가 (1/2, 1/3보다 적은) 전쟁전 농지의 1/5 밖에 남지않았고 하면 맞는 말인데 1/2, 1/3, 1/5를 이야기하면서 피해의 크기가 1/5인 것처럼 써놓으면서 1/2나 1/3보다 크다고 써서 맞지않다는 말입니다. 피해의 크기를 기준으로 쓰려면 4/5로 써야맞겠죠. 워딩이 좀 이상하다는 의미..
ㅜㅜ
국사배울때 팩트는 못배운듯
쪽빨이 시키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