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lNLsLwflVuQ?si=Tu70JRn5PiC__lrF
Richard Strauss: Also sprach Zarathustra /Herbert von Karajan · Berliner Philharmoniker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Richard Georg Strauss, 1864 ~1949]
뮌헨 출생. 아버지 F.슈트라우스도 뛰어난 음악가로서 뮌헨 궁정관현악단의 제1호른 주자 겸 왕립음악학교 교사를 지냈다. 부모로부터 음악적 재능을 이어받은 그는 11~16세 때까지 그곳 궁정악장(宮廷樂長) 마이어에게 사사하여 12세 때 《축제행진곡》(작품 1)을 작곡하고 13세 때는 멘델스존의 협주곡과 바흐의 평균율(平均律)을 연주하였다 한다.
1882년~83년 뮌헨대학에서 철학과 미학을 공부하고, 쇼펜하우어에 심취하였다. 또 그 사이 자기의 작품을 가지고 빈 ·베를린 등지로 연주여행을 하면서 뷰로와 사귀는 등 그의 재능을 알리기 시작하였다. 84년 《교향곡》(작품번호 12)이 뉴욕필하모니에서 초연되고, 같은해 뷰로의 뒤를 이어 마이닌겐관현악단의 악장에 취임, 지휘자로서도 활동하게 되었다. 브람스에게 재능을 인정받은 것도 이 무렵이다.
슈트라우스는 철저한 반(反)바그너주의자였던 아버지의 감화로 바그너를 좋아하지 않았으나 그 후 점차 리스트와 바그너에 심취, 마침내는 열렬한 바그너 신봉자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페라에서는 바그너보다 감미로우면서도 관능적인 선율로, 교향시(交響詩)에서는 리스트보다 자유로우면서도 광범한 내용 속에서 자신의 음악을 발전시켜 나갔다. 87년에는 소프라노가수이자 자신의 가곡에 대한 가장 뛰어난 해석자가 된 파울리네와 결혼하였다.
그 후 그는 뮌헨 ·바이마르 ·베를린 ·빈 등지의 각 오페라극장 지휘자를 역임하였으며, 또 베를린필하모니와 빈필하모니의 지휘도 맡고, 잘츠부르크음악제를 비롯한 유명한 음악제에서도 지휘를 맡았다. 1908년 뮌헨 근교에 산장을 짓고 때때로 연주여행을 하는 이외에는 주로 그곳에서 음악 창작에 몰두하였다.
슈트라우스의 생애에 오점이라 할 수 있는 비극은, 만년에 그가 나치스정권에 협력한 결과가 된 몇몇 사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으로부터 주의 ·사상을 가지지 못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독일 후기낭만파의 마지막을 대표하는 대작곡가로서의 공적은 부인할 수 없다.
주요작품으로는 《살로메:Salome》(1905) 《엘렉트라:Elektra》(1909) 《장미의 기사(騎士):Der Rosenkavalier》(11) 등 15개의 오페라, 《돈 후안 Don Juan》(1889) 《틸 오일렌슈피겔의 유쾌한 장난》 《돈키호테 Don Quixote》(98) 《영웅의 생애:Ein Heldenleben》(99) 등을 비롯한 10곡의 교향시, 그리고 수많은 가곡과 약간의 실내악곡 등이 있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음악 인생은 기름 램프의 시대에서 원자력의 시대로, 신생 제국에서 분단 독일로 이르는 근현대 독일사의 질풍노도와 궤를 같이 했습니다. 간단치 않은 시대를 살아갔던 적지 않은 예술가들이 그렇기는 하지만, 사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만큼 평가가 엇갈리는 작곡가도 드문 것 같습니다. 생전에도 그러했고 1949년에 세상을 떠난 뒤 수십 년이 흐르면서도 그러했습니다. 한 때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음악을 하는 위험스런 인물로 낙인찍히기도 했던(그의 초기 작품 '살로메'는 요즘말로 하면 X등급에 가까운 평가를 받았다고 합니다.) 슈트라우스는 무척이나 다작의 작곡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만년에는 더 이상 가망 없어 보이는 불꺼진 화산 정도의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특히 히틀러의 제3제국과의 관계는 그의 만년에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습니다. (슈트라우스는 반유태인 정서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유태계 손부가 낳은 손자를 무척이나 귀여워하게 되어 결국 그러한 정서를 극복하게 되었다고 하는군요.) 하지만 지난 20여 년 동안 그에 대한 재평가가 서서히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한 재평가는 특히 지금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그의 후기 작품들을 새롭게 조명하면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슈트라우스의 음악적 성취를 평가하는데 빠질 수 없는 측면으로 부각되어 온 셈입니다.
"지휘를 할떄는 당신이 땀을 흘리면 안된다. 다만 청중들만이 감동의 뜨거움을 맛보아야 한다". 1925년, 작곡가이자 지휘자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젊은 지휘자를 위한 황금율 가운데 하나로 이런 말을 남기고 있다. 슈트라우스는 말러, 니키쉬와 더불어 19세기 지휘법의 한 전형을 만들어냈던 독일의 대표적인 지휘자이다.
지휘에 대한 그의 이상은 앞서 인용한 그의 말에서도 엿볼수 있듯 객관적이고 지적인 시선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개성적인 행보는 많은 지지파와 적지 않은 반대파를 만들어내는데 공헌하기도 했다. 클레멘스 크라우스나 카를 뵘은 그의 제자였으며, 죠지 셸이나 토머스 비첨은 그의 연주가 둔하기 짝이 없다는 식으로 깎아내리기도 했다.
슈트라우스의 지휘이력은 1883년, 19세의 나이로 시작된다. 당시의 중요한 포스트였던 마이닝엔에 머무르고 있던 한스 폰 뷜로는 보조 지휘자로 그를 채용했는데, 슈트라우스는 불과 2년 만에 정지휘자의 자리를 따내는 행운을 차지한다. 이후 뮌헨 궁정 오케스트라, 베를린 필하모닉(1894∼1895), 베를린 오페라, 그리고 나치의 점령으로 지휘대에서 내려와야 했던 브루노 발터의 후임으로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지휘대를 차지하는 등 순탄한 항진을 계속했다.
슈트라우스가 나치의 치하에서 음악국 총재를 지내는 등 부도덕한 행동을 했다는 지적은 반드시 옳은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슈테판 츠바이크와 같은 뛰어난 유태인 작가를 보호하기 위하여 고초를 겪기도 했다. 츠바이크의 대본에 의한 오페라 <말없는 여인>이 끝내 말썽을 일으키자 압박이 덜한 빈으로 무대를 옮겨 지휘를 계속했다.
이 선구자적인 지휘자에 대한 음악적 평가는 보다 면밀하게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많지 않은 그의 레코딩을 통하여 우리는 한 낭만주의 신봉자의 잣대에 의한 19세기 오케스트라의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자료출처: 웹사이트
https://youtu.be/I8X64WJq6qc?si=DTwQaGiyt-1uc0Un
Richard Strauss - Der Rosenkavalier - Herbert von Karajan, Elizabeth Schwarzkop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