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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간의 해석
사주 해석을 할 때 지장간의 뜻이나 쓰임새를 알지 못하여 책을 덮어버리는 경우도 많은데 지장간의 해석이야말로 깊이 있고 권위 있는 사주 해석의 열쇠가 되니 잘 이해하여 두어야 된다. 실제 많은 책에서 지장간을 다루고 있지만 제대로 뜻과 의미를 전하지 못하여 읽는 사람마저 더 혼란을 겪게 되는 경우가 많다. 지장간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자연 운동의 왕쇠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하면 된다. 하늘에 뿌려진 기운과 땅에 이루어진 기운의 차이를 보여주고 땅의 기운이 전환되는 단계가 숨은 작용을 보여주는 것이다. 지장간을 공부한 사람들은 子중에 壬癸가 있다고 배우지만 실제 만물은 子宮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子중에는 壬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천지 만물이 자궁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면 옛날 사람들이 무엇을 보고 子중에 壬癸라 하였을까? 천지에 만물이 드러나 모양이 子象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자상이란 무엇이냐? 말 그대로 씨앗의 형태로, 아이의 형태로 웅크려 있는 운동 모양을 子라고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子의 모양을 취하고 있는 것도 시간적인 선후에 의하여 壬의 속성과 癸의 속성이 같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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子의 초기에는 壬의 운동 속성이 남아 있다가 본격적으로 癸의 모습으로 전환되는데, 시간적인 왜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 子중에 壬癸가 있다는 뜻으로 말한 것이다. 그래서 흔히 초기라고 표현하는데 여기(餘氣)는 앞 지지의 정기(正氣)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고, 중기(中氣)는 삼합에 의하여 드러날 수 있는 내부적인 기운이 부분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정기는 지지를 그대로 천간으로 표현한 것인데 이렇게 지지의 순환 과정은 시간적인 왜곡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子중에는 초기, 정기만 표현되어 있는데 중기가 그대로 癸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子,卯,酉는 중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정기와 같기 때문에 중기가 없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午중에는 己土가 들어 있어 子,午,卯,酉 중에 지장간 패턴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데 午중에 己土는 子에서 午까지 양 운동을 마치고 다시 午에서 子로 음 운동을 이룩하는 과정에서 양을 수렴하고 음을 다시 여는 중심적 기운으로서 土用의 기운을 표현한 것이다. 지장간을 이해하려고 애썼던 사람들에게는 이 부분이 유용할 것이나, 처음 이 책을 읽는 사람은 생소한 말로만 들릴 것이다. 지금 지장간의 개념을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본론에서 충실하게 논의와 해석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개의치 말기 바란다. 아무튼 중요한 사주 해석의 논리가 된다는 것을 이해해두고 사주 해석을 할 때 글자들을 보는 순간 바로 해석하는 직독직해의 Key가 된다는 것도 염두에 두기 바란다. 지장간의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고 사용한다면 도사님 소리를 저절로 듣게 된다는 뜻을 알게 될 것이다.
※육친의 융통성
육친의 일반에 관한 해석은 이 책에서도 無字의 해석 편에서 육친의 일반적인 해석이 나오고 이것은 다른 책에도 중복적으로 표현되는 것이 있을 것이다. 필자가 융통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은 육친 자체의 학설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과거 사회와 현대 사회의 엄연한 차이를 알아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과거 사회에 육친이 가족 중심적인 표현이었다면 현대 사회에는 사회적인 활동력 속에서의 육친 관계가 훨씬 더 그 사람의 행동에 강화된 형태로 작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편재라 하더라도 편재의 해석에 있어서 과거 육친설에 의하면 편재를 주로 부친, 남자의 경우 첩으로 해석하였는데 현대 사회에서는 아버지의 별로서만 해석하기보다 사회적으로 자신이 운용해야 될 금전, 타인의 재물로 더 많이 활발히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사회와 현대 사회에서의 적용상의 차이점을 충분히 염두에 두고 해석을 해 나가야 하는데도 과거 사회의 육친설 형태로 고집함으로써 본래의 육친이 갖는 사회적 숨은 이면의 뜻을 져버리는 수가 많은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의 경우를 보자.
자동차의 경우, 비견의 경우는 자동차를 몰고 갈 때, 경쟁적 요소로 발생하는 것이고 식신이나 상관을 낳아 주는 오행적 요소가 되므로 자동차에서는 배기량, 경쟁자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비견은 동일한 방향성을 의미하므로 같은 차선을 운행하고 있는 경쟁자나 자동차 내부의 배기량이나 속도를 가속화시켜주는 기본 장치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겁재는 방향성을 달리 하는 경쟁자가 되므로 반대 방향에서 달려오는 운전의 경쟁자라 생각해도 좋고 식신, 상관을 오행적으로 강화시켜주는 작용을 하므로 식상이 강화된다고 이해해도 좋다. 겁재는 속도의 강화를 상징하는 식상을 도와 주는 기계적 장치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다. 식신은 기본적으로 활동력을 의미하므로 움직임에 관한 구조나 메카니즘(원리)으로 생각하면 되는데 주로 운전자의 입장에 선다면 엑셀레이터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엑셀레이터를 밟으면 차가 움직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상관의 경우는 식신보다는 훨씬 더 큰 속도와 활동력을 의미하고 또한 말 그대로 관성을 해침으로서 법과 규칙을 해치는 것이 되므로 터보라든지 불법적인 튜닝이나 장식 등에 해당한다고 보아도 좋다. 아무튼 속도나 차량의 장식에 관련된 것들이 대체로 상관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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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다음에 정재는 우리가 사회 활동을 할 때에 기본적으로 자신의 활동력을 지켜줄 수 있는 경제적인 재화를 의미하므로 자동차의 기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동차가 운용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화, 즉 기름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편재는 자신이 싣고 가고자 하는 목적물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즉 정재가 너무 많으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워지듯이 자동차 용량에 맞는 짐을 싣고 달려야 하는 것이다. 정,편재 모두 자동차를 굴러가게 하는 여러 가지 재화나 수단이다 라고 보면 될 것이다. 그다음에 관성이라는 것은 기계 내부적으로 자동차의 속도를 조절하거나 제어해 주는 제어기에 해당될 것이고 도로상에서 정관은 신호등, 편관은 경찰관, 강압적 제재에 해당한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래서 정관은 신호등이므로 가끔 무시할 수 있지만 편관은 무시하게 되면 반드시 그에 따른 응징을 당하는 결과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정관, 편관은 기계 내부적으로 자동차 내부에서는 제어 계측 장치 정도로 이해해 두면 될 것이다. 그다음에 인성의 경우에 正印은 적당한 속도 조절을 의미하므로 브레이크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이고 편인은 활동력을 극소로 조절하므로 결국 사이드브레이크 정도로 이해를 하면 될 것이다. 이렇게 자동차 하나에서도 육친적 작용을 적용할 줄 알아야 하고 새롭게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육친을 일반적으로 해석하는데 메이기보다 다양한 문물과 행동 양식을 가진 현대 사회에도 적용해 쓸 줄 알아야 제대로 해석을 가할 수 있는 것이다.
※가수의 경우에 식신, 상관은 공통적으로 자기의 노래나 재능이 될 것이고 상관은 기술적인 것을 인공적으로 가한 것이 될 것이다. 정재는 그 가수가 활동하는 고정 무대 또는 고정 월급 형태의 소득을 의미할 것이고, 또 편재는 전국 무대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정관은 고정적인 팬을 의미한다고 보면 될 것이고 편관은 열광적인 팬이나 일시적인 팬, 구설 등으로 이해해도 좋을 것이다. 그 다음에 정인, 편인은 자신의 행동을 조절해 주는 시간이나 인간관계가 될 것이다. 관성이나 인성은 제어의 작용을 하므로 매니저라든지 스케줄 관리를 해 주는 존재로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 인수는 대체로 활동을 쉬는 휴식기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비견,겁재란 대체로 경쟁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 동시대의 경쟁 가수들로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두 가지의 경우가 아니라 모든 곳에 육친을 융통성 있게 새로이 이해해야 되고 또 육친 자체의 모양을 머리로 그려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사물화된 형태로도 분석되어야 실제 사주 감정에 있어서 그 모양은 둥근 모양일 것이다. 그 모양은 사각일 것이다라고 알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식신의 경우 대체로 원만하게 활동력을 부여하는 것이 둥근 모양의 것이 되고 편관의 경우에는 무언가가 상대방이나 자신이나 모두를 희생시킬 요소가 있으므로 뽀족한 모양을 가지고 있든지, 살벌하게 쪼갤 수 있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무기의 모양, 총칼의 모양도 바로 편관의 모양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각각의 육친에 대해서는 모양새까지도
여러 가지 분석이 가능한데 더 깊이 육친을 쪼개어서 분석, 적용하는 것은 지면 관계상 다음 기회로 넘기기로 하고 해석의 형태나 기초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에서 필자가 간략하게 비유를 든 것이다. 이것 말고도 모든 것에 무한한 확장 및 적용이 가능하다. 선풍기 하나가 돌아간다면 저것은 오행적으로 어떤 작용으로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 것인가, 육친적으로 본다면 어떤 육친을 제어하고 있는가 하는 식으로 생각을 잘하여 보기 바란다. 특히 움직이는 것들은 두세 가지 오행적 요소나 육친적 요소가 섞이어 있음으로서 편리하게 이해하기에 오히려 방해 요소가 많다. 여러 가지 오행이 섞이어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궁리하여 본다면 육친이나 오행은 무한 확장이 가능할 것이다. 또한 지지 자체와 육친 결합도 중요한데, 초심자들이 육친 중심의 공부를 한 경우에는 예를 들어 子가 식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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든 亥가 식신이든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 하겠지만 사주 해석에 있어서 엄청난 차이가 있음을 미리 밝혀 두는 바다. 세세한 적용은 본론에 다루기로 하고 이런 측면에서도 새로운 눈을 뜨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필자가 제시하여 보는 것이다.
※때 맞추어 움직이면 오행이 다 용신?
동양 철학의 전반적 이해를 위해서는 음양에 의한 분석적 사고관이 반드시 필요한데 음양의 개념을 제대로 정립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필자 또한 오랜 세월을 두고 고민하였다. 알기도 어렵거니와 문자로서 그 뜻을 전한다는 것은 더욱 힘든 일이다. 흡사 맥주 맛을 보고 난 후 그 맛을 글로 표현하는 식의 난점이 따르기 떄문에 표현 방식이나 논리에 따라 크게 곡해할 수도 있으므로 조심스러움이 따르는 이유이다. 그러나 문자로 맛을 옮길 수 없다 하여 문자를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필자도 그동안 터득한 여러 가지 음양관을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할 것이다. 공(운동할 때 쓰는 공)을 그리다 보니 원을 그린 식의 곡해나 의심나는 사항이 수시 따를 수도 있을 것이다.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읽어
음양을 한마디로 그 속성을 말한다면 밤낮이 교차하면서 이루어지는 여러 가지 변화 양상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밤을 음이라 하고 어두운 것을 음이라 하고, 여인을 음이라 하고, 낮은 것을 음이라 하는 식으로 음양을 터득하면 시간성을 잃어버린 물리적 공간으로 음양을 이해한 것이 된다. 물리적 사물로 이해하는 습성이 강한 현대인들이 범하는 오류이기도 하다. 밤은 음이 아니다. 이 말을 하면 음양 공부를 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미쳤다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무엇이 음이냐? ※밤에 만물이 수축하고 내부적으로 힘을 축적하여 다시 발산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바로 음이다. 음양은 시간성 속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것이며 움직임이나 시간성이 없는 물리적 사물, 공간으로 절대 파악되는 것이 아니다. 논리의 비약이 될 수도 있지만 서양학의 특징이 어떤 사물을 정지시킨 후 쪼개어
관찰하는 학문이라면 동양학의 특성을 모두 연결하여 움직임을 시간 속에 관찰하는 학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달리면서 심한 소음을 낸다고 하자. 소음의 원인을 찾으려고 자동차를 분석할 때 서양적 분석 방법은 모두 분해하여 각각을 관찰해 간다면, 동양적 분석 방법은 조립된 상태로 달리면서 일어나는 변화를 관찰하는 방식이다. 어느 것이 우월하다 할 수는 없으나 동양학에서는 서양적 분석을 최대한 배제하여야 본질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陽은 사물의 뜻이 발산하는 것이요. 陰은 사물의 뜻을 수렴하여 거두어들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꽃나무가 있다고 하자. 양의 속성이 주위에 조성되면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거치고 음의 속성이 주위에 조성되면 꽃이 저물고 열매를 맺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밤이란 음기가 조성되어 이루어진 결과요.
낮이란 양기가 조성되어 이루어진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양을 남자라 하고 음을 여자라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주려는 속성이 강화되어 이루어진 모양이 남자의 형상이요. 끌어당기려는 속성이 강화되어 이루어진 모양이 여자의 형상이 되는 것이다. 위(외부)로 솟아오르려는 성질을 가진 것이 양이고, 밑(내부)으로 끌어당기려는 성질을 가진 것이 음이다. 지상(지구상)에 음양의 수렴, 발산은 주로 일조량에 의하여 조성된다. 일조량이 늘어나는 봄, 여름에는 만물이 성장, 발산, 무성(茂盛)하여지는 과정을 거치고 일조량이 줄어드는 가을, 겨울에는 만물이 결실, 응축, 저장(식물의 경우 씨앗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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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 수 있다. 그래서 子월을 동지에 배치하였고 한약재 이름 중에 子로 끝나는 것들은 주로 씨앗을 말하는 것이다) 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지상의 만물들은 이렇게 음양의 기운 교차에 따라 자신의 생명을 지키고 연속성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인생살이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낮에는 양기의 발산이 이루어지므로 활발히 움직여서 노동을 하는 것이 천지 음양 순환에 어울리고 밤에는 양기의 발산이 줄어들고 음기의 활동이 늘어나므로 쉬면서 수면을 취하여 다시 힘을 기르는 것이 음양 순환에 어울리는 것이다. 사주학에서 개념이 사용되는데 그 대강은 아래와 같다. 음기가 강한 형태로 간지 배열이 되어 있으면 양기가 조성되는 시기에 발달하고 양기가 강한 형태로 간지 배열이 되어 있으면 음기가 조성되는 시기에 발달한다는 것이다.
음양 개념보다는 오행이라는 요소로 더 많이 사용하여 木火 용신이니 金水 용신이니 하는 말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러나 운에서 오고가는 오행적 표현은 계절적이나 시간적 개념을 의미하므로 木火가 용신이라면 활발히 움직임을 이루면서 발달할 것이요. 金水가 용신이라면 차분히 사무적인, 정신적인 일에 가담함으로써 발달할 것이라 분석해야 된다. 신체에 있어서도 오전에는 양기의 영향으로 온몸의 기가 밖으로 펼쳐지게 되니 행동이나 식습관을 양적인 방법을 취해야 좋을 것이요. 오후에는 음기의 영향으로 온몸의 기가 안쪽으로 모여지는 운동 양상을 띄므로 행동이나 식습관도 음적인 방법을 취해야 신체 건강이 조장될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최근에 수분의 시간 조절에 의한 건강법이 지면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아는데, 참으로 바람직한 음양 순환에 적응하는 방법이라 생각한다.
때를 맞추어 움직인다는 木火金水(春夏秋冬) 모두 잘 선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무가 계절에 따라 몸을 바꾸면서 적응하는 것은 목화금수를 다 선용하는 것과 같다. 나무 하나가 살아가는데도 봄의 성장, 여름의 꽃피움, 수정, 가을의 결실, 겨울의 휴식, 내부 성장(나이테)이라는 것을 통하여 목화금수 모두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용신 개념이란 적응, 부적응의 문제이지 절대적 개념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의 운명을 사주학은 왜곡되게 분석하고 있다. 나무가 겨울을 만났을 때를 운이 없다 하고 나무가 여름을 만났을 때 운이 있다고 한다면 운이 없을 때에도 나무가 존재하는 양식이 있다. “운이 없으므로 죽는다.” 라는 식의 표현은 함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겨울나무는 죽은 것이 아니라 내부적으로 힘의 축적을 이루고 있는 것이요. 인간에 비유하면 수면을 취하거나
학문적 성취나 정신적 성숙을 이룩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주학적 표현을 빌린다면 용신의 반대 개념인 기신(忌神)이 오더라도 운의 형태에 따른 변신을 한다면 얼마든지 발전과 성숙의 계기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운의 형태에 따라 굴신(屈伸)의 자세를 제시해 주어야 인생에 효율성을 극대화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태어나서 성장하고 왕성한 활동을 한 후 노쇠의 과정을 거쳐 죽음까지 가는 것이 숙명적 운명이다. 그것을 전술한 바와 같이 간지학 표현으로 나타낸다면 乙,丁,辛,癸라고 표현할 수 있다. 각 개인의 사주상 어떤 간지가 드러나 있다 하더라도 乙이 지배하는 시기인 소년의 성장기에는 학습적 행위를 할 때 가장 순조롭게, 丁이 지배하는 청,장년기
에는 사회적으로 뜻을 세우고 직장에 참여하고 가정을 이루는 행위를 할 때 가장 순조로운 것처럼 무엇이든 때맞추어 한다면 다 쓸 수 있는 것이다. 癸의 시기가 되는 노년기에 재물이 왕성한 형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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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지가 조성되어 있다면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재물이 도리어 화의 근원이 되기 쉬우니 재성이 용신이라 해도 수명을 삭감하거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으로 보면 될 것이다. 사주 해석에 있어서 크게 불리한 운이 오더라도 이것을 무조건 나쁘다. 죽는다라는 식의 해석을 가하는 것은 오행의 큰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고 운명학을 연구하는 목적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나쁜 운을 만났을 때 밤을 만난 것과 같다고 하자. 밤에 잘 자는 것은 오히려 아침에 큰 도약을 위한 과정이 되는 것으로 오히려 선용의 방법이 되는 것이다. 밤에 잠을 자지 않고 무언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아침이 되어 좋은 운이 올 때 오히려 효율성이 크게 떨어지는 과정이 올 것이다. 낮에 일하고 밤에 잔다면 밤낮이 모두 생명력을 키워나가는 희신(喜神)이 되는 것이다. 어떤 계절이나 기운도 선용의 방법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운명을 바꾸는 열쇠도 있는 것이다.
分을 따름이란?
사주 해석에 있어서 격국 용신설이 갖는 여러 가지 폐해 중에 하나는 지나치게 운에 의한 변화를 강조, 부각시킴으로써 운만 오면 만사형통 하고 운이 나쁘면 죽는다 식의 해석을 가하여 문점자(問占者)에게 실망감을 주는 것이다. 음양오행의 기본적 논리만 터득하여도 만사형통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봄에 가을 바람이 불지 않고 가을이 오면 아무리 날씨가 봄과 비슷하여도 낙엽이 지듯이 봄이 숨어서 보이지 않는 것이다. 어떻게 모든 것이 좋을 수가 있겠는가? 하나가 얻어지면 하나를 잃는 법이다. 이것은 자연의 섭리다. 운이 와도 되는 것이 있고, 안 되는 것이 있다.
가을 바람이 불어도 코스모스는 국화가 되지는 않는다. 또 사자가 이빨이 없어도 개에게 물려 죽지는 않는다. 이것은 무엇을 말함인가? ※운의 흐름과 상관없이 기본적 그릇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릇이 크면 비록 운이 부족하여도 체면 유지를 하면서 살아갈 수 있고, 그릇이 작으면 비록 운이 왔다 하더라도 작은 성공에 그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그릇의 分인 것이다.
격국 용신설에서 격국의 문제보다 용신의 문제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면 용신 운만 오면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 같은 착각에 쌓이게 되는데, 이것이 이 학문에 대한 신뢰를 크게 떨어뜨리는 이유도 된다. 용신보다는 격국, 즉 그릇을 잘 분석하여야 “가을 바람이 불 때 코스모스는 꽃을 피울 것이다” 라는 식의 구체적 답안, 대안으로써 문점자에게 신뢰성 있는 답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격국을 자세히 분석하다 보면 파격이 많이 보이는데, 특히 역학의 문을 크게 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은 파격에 다시 파격이 거듭되는 격국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여기에 이론과 실천의 벽이 있는 것이다. 역학 공부를 할 때, 교과서로 삼는 책에는 모범적 모델이 될 만한 양질의 사주를 보여준다.
그래서 책을 볼 때에는 천하의 도사가 된 듯한 느낌을 가지지만 실전에 임하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답답한 경우가 더 많이 생기는 것이다. 이럴 경우 비빔밥 사주의 분석이라는 새로운 논리가 있어야 비빔밥은 섞여 있는 밥이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는 사주팔자의 대부분은 한정식처럼 잘 분류된 모양새가 아니라 비빔밥처럼 뒤섞이고 엉키어 있다. 이때 당황해서는 안 된다. 다소 뒤섞여 있더라도 재료는 한정식과 비슷한 것이므로 침착하게 고추장 중심 비빔밥인지. 나물 중심 비빔밥인지, 참기름 중심 비빔밥인지 관찰하면 뚜렷한 경향성이 드러난다. 이 경향성을 바탕에 두고 비빔밥 팔자를 분석해야 문점자의 가려운 곳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것이다.
비빔법 사주는 격국용신이 달리 없다. 단지 팔자 내에 차지하고 있는 인자가 어떻게 작용하고 그것으로 인하여 왜곡된 모양대로 分을 지키도록 지도해 주어야 되는 것이다. 흔히 분수(分數)밖의 일이라는 표현을 하는데 그것은 인생에 철리(哲理)이기도 하다. 재다신약이나 관다신약의 경우를 보자. 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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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좋은 것인데 너무 많아서 감당하기 힘들면 먹을 것을 두고도 끌고 가지 못하는 모양이 되니 여러 가지 고충이 따르는데 가장 구체적인 대안을 주어야 한다. 몸과 재물이라는 것은 행성과 위성의 관계처럼 서로의 인력에 의하여 서로의 존재를 의미있게 하여 주는 것이다. 재물이란 세상살이에서 제2의 심장과 같은 것이다. 격국 용신설에서 재다신약의 사주는 재성을 도리어 나쁜 것으로 취급하여 신왕의 운이 오면 좋은 것으로 처리하거나 종재격으로 처리하여 희신으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필자의 견해는 다르다. 재성은 기신, 희신으로 나눌 성격의 것은 아니고, 제2의 심장과 같으므로(재화가 없으면 세속적인 생활 활동력을 가질 수 없다) 잘 융화하여 쓰는 방법을 구하는 것이 좋다.
일주 중심으로 사주 해석을 하기 보다 재성을 중심으로 융화하는 방법을 구하는 것이 좋은데 일주가 도리어 위성이 되고 재성이 행성이나 항성이 되는 식의 삶의 양식을 이룩하면 둘 다 공존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처와 동업하여 장사 사업을 구하는 것이 조건이 되는 것이다. 남자의 경우, 처와 동업하여 장사 사업을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고 여자의 경우, 시가나 남편의 뜻을 따라 사회 활동을 구하면 무난히 성공한다고 보는 것이다. 자기가 중심이 되어, 즉 행성이나 항성이 되려 하면 도리어 고통이 따르는 것이다. 이 경우는 일주(日主)가 아니라 일빈(日賓)이 되는데 조화력만 있다면 어정쩡한 일주보다 안정적인 일빈이 훨씬 좋은 운명이 되는 것이다. 재다의 모양을 소나무에 비유한다면 논두렁, 밭두렁에 홀로 서 있는 소나무와 산골에 빽빽이 서 있는 소나무에 비교할 수 있다.
논두렁, 밭두렁에 홀로 서 있는 나무는 土多木弱의 모양으로 身弱이요. 산골에 빽빽이 서 있는 소나무는 木旺으로 身旺이 된다. 그러나 사는 모습을 잘 생각해 보라. 신약, 신강은 이처럼 부귀빈천의 조건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官多身弱의 경우를 보자. 官이 많다는 것은 대적해야 할 대상이 많거나 피곤한 관계가 조성됨을 의미하므로 조직사회에서 감투가 높아지면 도리어 더 많은 일을 맡아야 되니 감투 발전이 많은 조직사회에 참여하거나 직장 轉變을 도모함으로써 해소하면 무난한 인생살이가 펼쳐지는 것이다. 감투에 대하여 지나치게 집착하면 감투를 이루고 오히려 몸이 고통을 당하는 형상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官이 많더라도 세력이 좋으면 궁궐을 지키는 문지기가 되니 상당 세월 실력자로 군림하는 것이다. 궁궐 문지기와 촌집 주인을 바꾸지 않는 것처럼 조화력에 따라 차이가 나는 것이다.
이렇게 팔자의 특성이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 있다 하더라도 현실 사회에 分에 어울리는 직업이나 생활 양상을 가짐으로써 안락한 인생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대운의 분석과 육친의 분석에 있어서도 육친의 글자 뜻에 적당히 타협하여 살면 큰 고통은 이르지 않는 법이다. 예를 들어 재물을 다투고 재물이 쪼개어지는 별을 의미하는 겁재(劫財)의 별이 운에서 왔을 때 사업을 하면 흔히 경쟁 상대가 생기고 배신자가 생겨 금전적 고통을 당하기 쉬운데 차라리 이 시기에 형제나 가족을 위하여 금전적 봉사나 희생을 치르면 수월하게 넘길 수 있는 것이다. 형제나 가족에게 금전적 봉사가 필요 없으면 사회복지에 유익한 희사(喜捨)를 통하면 도리어 명예까지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전설(前說)하였거니와 운의 흐름에서도 낮에 땀 흘리고 밤에 잠자는 시간적 分을 지키면 인생살이가 크게 곤란함에 처할 일은 없을 것이다.
옛사람들이 安分自足의 미덕을 말하였는데 이때 分이란 무조건 적은 욕심을 버림으로써 인생의 안락을 구하라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낮에는 땀 흘리고 밤에는 잠자라는 뜻이다. 시간적인 分을 잘 분석하여 제시해야 가장 효율적인 인생살이가 되는 것이다. 역학 상담을 주로 하는 전문가들은 이렇게 그릇의 分과 시간적인 分을 잘 분석하여 그 사람에게 가장 잘 맞는 역학적 자료를 제시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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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말하면 몸에 맞는 맞춤 서비스를 하자는 뜻이다. 역학 상담을 하는 사람들이여! 제발 알고 거짓말합시다(필자포함). 모르면 모른다고 말합시다.
12운성의 중요함
12운성이야 말로 자연 운동을 정밀하게 분석하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 기존의 텍스트에서는 가벼이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 때문에 사주 해석을 정밀하게 하지 못하여 고객의 웃음거리가 되는 경우가 많다. 12운성이란 생로병사(生老病死)를 정밀하게 쪼개어 열두 단계로 모양을 표현한 것이고 천간의 기운이 자연 속에 실현되는 모양을 열 두 지지에 배속한 것이다. 甲子라는 글자를 보면 흔히 水生木을 생각하는데, 이것이 도리어 사주 해석에서 오류를 만드는 것이다. 甲이 子를 만나면 12운성으로 보아 목욕지(沐浴地)에 해당하는데 水生木의 오행적인 보조를 받는 것이 아니고 성장 속에 소모나 지출 과정을 의미하는 것이다. 진정한 성장을 위한 오물 제거나 희생 요소가 따르게 되니 오행적인 세력 요소와 상관없이 상기의 운명적 특성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甲이 亥를 만난 경우는 장생지(長生地)를 만나 실제로 모양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오행적인 세력을 동시에 얻는 것이다. 甲이 亥를 만났을 때는 新出의 기운을 가지고 子를 만났을 때는 목욕의 희생 요소가 동반하는 것이다. 또한 양간, 음간의 12운성 해석 차이도 의견이 분분한데 이것은 자연의 원리로 간지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양간, 음간의 12운성은 완벽하게 다른 순환성을 가지고 있다. 간단히 예를 듣다면 甲木은 乙木의 순환 과정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甲木은 巨木에 비유되는데 압력을 뚫고 솟아오르려는 기운이 되는 것이다. 亥水에 長生하여 未에 墓하는데 음의 압력을 뚫고 위로 솟아오르는 성질을 가진 기운이다. 이것은 초가을에 결실 압력이 약해지면서 서서히 밖으로 뚫고 나오려는 기운이 생기는 것이요
늦여름에 더 이상 위로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어 버리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여기에 반하여 乙木은 초목이나 등라(藤蘿)에 비유되는데 亥子丑에 도리어 잎이 메마르고 떨어져 버리는 과정을 보이고 巳午未에 크게 펼쳐지는 모양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자연에서는 甲과 乙의 운동이 크게 다른 모양을 취하고 있는 데 이것이 12운성에 의하여 표현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 해석에 이를 때 甲을 남편으로 쓰는 팔자와 乙을 남편으로 쓰고 있는 경우, 亥子丑 운을 지난다고 하자. 水生木하여 남편의 활동력이 좋아지고 번영할 것이라 해석한다면 이것이 결국 상대방에게 큰 실망을 주는 감정이 되는 것이다. 실제로는 乙木의 활동력이 亥子丑에 크게 갇히어 있는 것이라 남편의 실제 모양은 변화가 지극히 없는 조직사회 중심으로 활동하거나 위축된 금전 활동, 건강 불안 등을 거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후일 이런 차이를 많이 연습하여 실관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다루어 볼 것인데 여기서는 매우 중요하고 양간과 음간의 적용법이 다르다는 정도만 머리에 잘 새겨두기 바란다.
모친과 배우자, 터 인연에 따른 운명의 왜곡
기본적으로 이룩할 수 있는 분야와 운의 흐름에 따른 변화등은 개인적인 팔자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사람의 현실이 개인적인 팔자로만 드러나는 것은 아니다. 실제 운명 감정을 하여본 사람들은 팔자가 비교적 분석하기 쉬운 모양을 가지고 있더라도 일어나는 일에 있어서 현실과 팔자 사이의 왜곡을 많이 관찰하였을 것이다. 동일 간지를 타고난 팔자라 하더라도 모친에 의하여 영고성쇠(榮枯盛衰)가 다른 형태로 드러날 수 있는 것이고 배우자에 의하여 새로운 그림자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사건이나 일도 여기에 연유하여 발생하는 것도 무수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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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나이가 어린 사람은 모친의 흐름에서 그 간섭이 심하게 드러나는데 타고난 간지(干支) 모양에서 나쁜 모양이 아닌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모친의 운명을 동시에 감정하여 해석의 기초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결혼에 의해서 많은 운명적 왜곡이 이루어지는데 생애에 5~6회의 배우자 선택의 기회를 만난다. 이 선택에 의해서 지속적으로 배우자의 그림자와 기운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게 된다. 소위 궁합이 필요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동일 간지의 운명이라 하더라도 배우자에 의하여 자식 인연, 영고성쇠가 달라지는 것이다. 어떤 띠의 자식을 얻었는가도 번영의 인자에 큰 영향을 주게 되는데 자식은 배우자를 통하여 얻어지게 되므로 절대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배우자 선택에 따른 인생 양상은 큰 차이를 가져다 줄 수 있으므로 종합적으로 결론을 구하여야 될 때는 꼭 참작하여 운명 감정을 임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또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터의 문제이다. 터는 물리적 공간만으로서 의미가 아니라 어떤 국가와 풍수적 환경, 문화적 환경 속에 놓여 있는가를 전제하고 팔자 해석에 임하는 것이다. 작은 땅을 소유할 수밖에 없는 그릇이라 하더라도 시골 땅과 도시 땅의 차이는 당연히 발생하는 것이고 국가적인 차이에 의하여 왜곡이 발생하는 것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문화적인 환경도 터의 문제에서 재고하여 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운명이란 한 개인의 간지 운동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협의적인 삶의 양상이 아니라 국가, 사회, 가족, 가문의 숙명적인 궤도와도 맞물려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개인의 운명을 관찰한다면 인생의 일희일비(一喜一悲)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정밀하게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가족 중에서 배우자나 모친의 기운을 같이 운명 해석의 수단으로 삼는 학문적 움직임이 있는데 정밀한 운명을 위한 학술로서 바람직한 방향이라 생각한다.
정해진 것은 없다. 다만 정해진 것처럼 보일 뿐
흔히 운명을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이 견해에 대해서 반박을 많이 가하는 사람도 논쟁을 오랫동안 벌리다 보면 개인적인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도 많고 여러 가지 어쩔 수 없는 상황도 많이 만나게 된다. 인생살이에 일어나는 일들이 이러하다보니 누구도 운명이 있다 없다 자신감 있게 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운명은 정해진 것도 아니고 완벽한 우연도 아니다. 흔히 운명이라는 말은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어떤 숙명처럼 생각하는데, 근본적으로 운명이란 天命을 운전한다는 선택의 요소가 충분히 있다는 뜻을 가진 단어다. 숙명이 인간이 태어나서 겪을 수밖에 없는 생로병사의 과정처럼 피할 수 없는 길이라면, 운명은 선택에 의하여 취길피흉(取吉避凶)이 가능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운명이라는 단어의 뜻 자체가 그러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명학이라고 하면 삶의 숙명성에 근거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는 원리를 보여주는 학문으로 오해하고 있다.
소위 ‘팔자소관이다’라는 식으로 어쩔 수 없는 인생 항로로만 곡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일한 날과 시에 태어났다는 것은 동일한 삶의 모양이나 양상을 가진다는 말인데, 결코 그렇지 않다. 첫째, 모친에 의한 왜곡이 발생한다. 어떤 어머니를 만나느냐가 기운적으로 다른 흐름을 주게 되는 것이다. 어머니가 자애로우냐, 엄하냐의 일반적인 특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운명적으로 자식에게 뿌려주는 기운이 다르다는 뜻이다. 둘째, 배우자에 의하여 다시 운명은 왜곡된다. 어떤 배우자를 만나느냐에 따라 삶의 양상이나 모양이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배우자의 운명에 나타나는 모양이 멀리 남편을 두고 지내야 덕을 볼 수 있는 운명이라면 본인 운명이 특별히 부부 이별의 인자가 없더라도 직업이나 일로 인하여 떨어져 지내는 세월이 오든지 부득이한 이별 세월이 동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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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느냐 하는 문제인데 국가나 정치 체제, 경제 환경에 따라 살아가는 삶의 모양이 여러 형태로 뒤바뀔 수 있는 것이다. 모친은 본인의 선택에 의하여 바뀔 수 없는 것이지만 배우자나 큰 환경은 선택에 의하여 크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비유를 들어본다면 똑같은 땅콩 씨앗으로 태어났다고 하자. 모래밭에 심은 땅콩과 논에 심은 땅콩은 그 결과가 어떻게 달라지겠는가? 모래밭에 심은 땅콩이 온전하게 성장을 이루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큰 환경이나 배우자에 의하여 운명은 여러 가지로 왜곡되고 또한 세상살이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정신적인 해법의 차이 등으로 운명은 심하게 왜곡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이다. 차에 비유한다면 고속도로를 오를 때 이미 다음 톨게이트는 정해져 있지만 1차선, 2차선이나 갓길을 선택하는 것은 자신의
몫에 해당하고 어떤 방식으로 운전하고 어떤 속도로 달려갈 것이냐는 개별적인 선택에 의하여 큰 차이가 올 수 있는 것이다. 타고난 날과 시가 같다 하더라도 이런 인생의 선택 차이로 같은 날 같은 시에 죽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이다. 쌍둥이도 살아가는 운명적인 과정은 각각 다른 것이다. 여기에 운명학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릇을 차에 비유하고 운을 도로에 비유한다면 어떤 도로를 선택하고 어떻게 운전할 것이냐는 충분히 선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운명학이란 그릇과 도로의 모양을 보고 최상의 선택이 무엇인지를 따지는 학문이요. 삶의 효율성을 극대화시키는 방법을 연구하는 성공학인 것이다. 운명의 원리를 잘 터득하여 삶의 주인공이 되기를 기원한다.
역학의 사회적 책임
역학이 오랫동안 생명력을 가지고 이 땅에 살아남은 이유는 기본적으로 필요성에 근거한 것이다. 미래를 알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은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이것을 잘 연구한다는 것은 결국 하나의 과학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매달려 연구를 거듭하고 있지만 상기의 전제를 머릿속에 두지 않는다면 의미가 없는 것이다. 피할 수 없는 영역을 찾으려고 애쓰는 것은 당연히 연구 과제이지만 이것을 사회적 가치로 바꾸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이것이 과학이든 통계학이든 상대방의 필요성을 충족시켜주고 효율을 주기 위해서 사회적 가치로 재생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스갯소리로 비디오 한편이 운명을 바꾼다고 말하지만 역학자의 말 한마디는 인생을 크게 바꿀 수 있는 것이다. 개인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은 사회의 운명과도 맞물려 있는 것이므로 항상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운명 감정에 임하여야 될 것이다. 자신이 없는 내용은 본인의 견해 정도로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선택에 의하여 진정한 발전을 이룩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생의 길을 찾지 못하여 방황하는 많은 사람들을 희망과 발전의 세계로 이끄는 일은 사회적으로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여기에 역학의 임무와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일할 때 사회적으로 역학이 대접받고 자리매김을 새롭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타(Star)를 위하여
어느 세계에나 대가나 실력자 그리고 스타가 있다. 이 학문에도 많은 실력자나 대가가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어느 세계에도 스타가 유독 이 분야에서 나오지 않음은 무슨 까닭인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과거 사회로부터 이 학문에 대한 경시나 천시가 주된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된다. 이 학문에 뜻을 붙여 세월을 보내온 사람들의 대부분이 벼슬에 나서지 못한 학자였고, 학자 자신도 이 학문을 벼슬을 위한 학문보다 못하다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학문적 단절을 조장하였고 더 많은 발전을 막았던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단절이 심한 상황이 스타가 나오기 어렵도록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간혹 그 이름이 전하는 역학 명인들에게는 보통 사람이 접근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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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운 神格을 부여함으로써 더 어렵게 만든 것이다. 과연 스타는 신격을 지녀야 하는가? 필자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현대적인 스타는 완성자가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그가 완성자가 아니라 누구도 인정할 수 있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스타를 만들 것인가? 그것은 학문적 정립이 선결되어야 함은 물론 대중에게 나아갈 수 있게 시스템을 갖추어 주는 일이다. 그런데 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에는 스타를 기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다. 하나를 가르쳐 주면서 대단한 비전(秘傳)을 준 것처럼 여기고 아까워하는 것은 동업자를 기르면 자신의 밥그릇(?)이 줄어든다고 생각하는 졸속함에서 비롯된 것은 혹시 아닐까?
비인부전(非人不傳, 인간 됨됨이가 사람의 지도적인 위치에 이르지 못하면 학문을 함부로 전해서 안된다)의 뜻을 훼손하자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말 한마디에 인간의 길을 잘못 인도할 수 있는 중요한 일이요 사심(私心)을 가지고 이 일을 구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올 수 있다는 사실은 주지의 사실이다. 하지만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근다는 식으로만 일관한다면 도리어 스타는 고사하고 학문의 발전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축구 스타가 축구에 붐을 일으킴으로써 관련된 운동용품 대리점까지 다 밥을 먹여 살리는 것이다. 약 10여년 전에 장애인이었던 노벨상 수상 물리학자가 물리 세계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갖도록 만들었다. 수정과와 식혜가 서로 열심히 자극을 주면서 성장한다면 오히려 콜라에게 빼앗긴 음료시장을 전통 음료 중심으로 크게 전환시키는 계기가 될 것인데
이것도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렇게 스타가 나오고 학문적으로 서로 자극을 주면 전체가 대우받고 속된 말로 밥그릇이 커지는 것이다. 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도 스타를 기르는데 아까워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좀 더 많은 정보를 세상을 위하여 던져야 할 것이다. 바야흐로 스승보다 못한 것을 미덕으로 삼던 시대는 끝이 나고 있다. 스승보다 못하면 살아남기 힘이 든 세상에 살고 있다. 언제까지 우리 스승은 도통(道通)하였고 자신은 그 반도 미치지 못한다는 식으로 부족함을 두둔할 것인가? 더 이상 이 학문은 야인(野人)의 학문으로 남아 있을 수는 없는 세월이 되었다. 언젠가는 현대 과학이라는 이름 아래 이 분야에도 매스가 가해질 것이다. 도대체 얼마짜리 학문인가를 타 학문에 의해서 규정 당하는 세월이 올 것이다. 이때 우리의 선택은 무엇이 되겠는가?
앞으로 피할 수 없는 타 학문과의 충돌 내지 가려놓아야 될 것이다. 이 일은 만고천추(萬古千秋)의 학문을 물려준 대 선배들에 대한 후학들의 임무이기도 한 것이다. 이상으로 필자(筆者)가 미리 일러두고 싶은 논리나 이해를 대강 정리하여 보았다. 처음 접하는 사람은 무슨 말인가 하고 어리둥절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마음으로 세세한 내용은 후일 내용에서 학습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필자의 여러 뜻이 조금이라도 전해졌으면 좋겠다. <머리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