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어놓을 얘기가 너무 많아,
가슴 속에 막힌 것이 너무 많아,
글을 적다 나도 몰래 자판을 내려놓거나
씁쓸한 마음에 혼자 남모를 감상 따위에 젖어 버릴까봐
미루고 미루던 일들에 대해서 정리해야 할 시기가 온 듯 하다.
어린 시절 김재박의 점프 번트에 반해
평생 '7'번과 유격수만이 내 야구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던 시절,
아버지가 처음 사주신 팬북과 함께 마주한 MBC청룡.
기대는 커녕, 단 한번도 당당하고 화려하지 못했던
모래알 MBC청룡을 뒤로 하고,
90년 도깨비처럼 우승을 거머쥔 LG 트윈스.
그 때 만해도, 서울과 LG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는
"이제서야 이뤄냈구나" 하는 해갈과,
옛 향수에 기댄 새로운 서울 신흥팀에 대한
기쁨 같은 것으로 마냥 행복했던 것 같다.
그리고 당시 우리는,
그보다 더 행복한 시절이 다가올지 아무도 몰랐다.
그게 바로 꼬박,
10년 전 일이다.
그래. 10년전이지.
No.6
71년 5월 25일생
충암고 - 한양대를 거친 엘리트 유격수.
팀의 주전 유격수. 영원한 1번타자
통산타율 .280
4050타수 1134안타, 296도루 590볼넷
LG의 작전사령관. LG의 뇌관(Brain)
No.7
75년 10월 2일생
좌재현 우동주의 바로 그 재현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공격형 2번타자.
데뷔 1년차에 주전과 중심타선을 꿰찬 최초의 고졸 선수
통산타율 .297
139홈런 633타점 85도루 556볼넷
LG의 캐넌. LG의 심장(Heart)
No. 62
1971년 1월 2일생.
선린상고 - 단국대 - LG트윈스 2차지명 6순위 입단.
모래알 속에 찾아낸 진주(Pearl)
장훈이 인정한 교타능력. 3할을 칠 수 밖에 없는 스윙궤적.
그리고, 전문가들도 인정하는 국내 최고의 1루 수비력.
데뷔 1년차에 전반기 3할 6푼의 폭풍타와 사이클링 히트로 등장한 바로 그 선수.
통산타율 .295 741안타 980루타 339타점
Mr. LG , LG의 건각(健脚)(Bridge)
그게 바로, 꼬박,
꼬박, 10년 전 일이다 .........
...
물꼬를 제일 먼저 튼 사람은 서용빈.
그 해, 그리 큰 기대도 없이 수비가 좋고 기초가 좋다는 이유등으로
백업 1루요원 쯔음으로 생각하고 2차 6순위로 데려온 이름마저 생소한 서용빈은
동계훈련 부터 유지현, 김재현을 제치고 자꾸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이는 참 기이한 일이였다.
국가대표 유격수와 청소년 4번타자를 제치고
무명 6순위 선수가 자꾸 거론되다니.
하일성, 허구연등
국내 내놓으라 하는 전문가들은 두 말할 것도 없고
일본야구의 장훈 선수마저
알토란 같은 LG신인진 중에서
유독 그의 이름을 지목한다.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서용빈.
특이하다 못해 사뭇 촌스럽기까지한
그의 이름 석 자는 이런 식으로 자꾸 이름이 오르내리고,
그 해 4월 17일 결국 일을 터뜨린다.
"서용빈, 신인최초 사이클링 히트 달성"
94년 LG 팬들에게,
아니 프로야구 팬들에게
처음 이름을 알렸던 신인은
고2때부터 일본을 상대로
홈런을 펑펑 날렸다는 초고교급 공격수도,
야구 평생 엘리트 자리와
국가대표만 지냈다는 뛰어난 유격수도 아닌,
2차 6순위로 입단한 이름도 생소한
바로 그 선수였다.
그 해,
서용빈은 .355까지 치고 나가며 전반기를 마감한다.
작년에 3위를 차지한 LG트윈스는
이미 1- 2- 3번 타순을
유지현 - 김재현 - 서용빈이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었으며
프로야구 20년 역사상
주전 라인업 1-2-3번을 모두 갈아치운
다시는 나올 수 없는 뛰어난 3인방의 활약의 선두는
전반기 내내 서용빈이 차지한다.
그리고 ...
주머니의 속의 날카로운 송곳은
아무리 감추려 해도
어김없이 하나, 하나 치고 올라온다.
20-20을 최초로 달성한 선수는 김성한이였다.
89년이였으며, 상대선수는 '터미네이터'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던 MBC 청룡의 쿠바 김상호 선수.
당시까지만 해도
프로야구 태동기에서 오래지나지 않아,
20 - 20이라는 고지는 신천지였고,
그들의 경쟁은 네임밸류와 경륜에서
이미 우위를 점할대로 점한 김성한 선수의 싱거운 승리로 끝난다.
애시당초 계명대 졸업 데뷔 2년차 쿠바에게는
대선배와의 20 - 20 경쟁이란 버거운 일이였다.
데뷔 5개월도 안 된 선수가
그 일을 혼자 준비하고 있었다.
9월이 넘어가기 전에
이미 김재현이 때려낸 홈런은 15개 남짓.
잠실을 홈구장으로 쓰며,
30홈런도 귀하던 시절에
9월도 가기전에 때려댄 김재현의 15홈런의
체감지수는 거의 요즘의 25-30 홈런급이라 해도 무방하다.
그는 6월 이후 내내 홈런 Best 5안에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MBC청룡시절부터 홈런 Top 5안에
이름을 시즌 내내 꽂아놓은 사람이 게 누구더냐!!
정말로 연세대 가려는 걸 일본까지 가서 그리 데려올만 하구나!
그는 정말 LG가 기다리던 Cannon이 아니였던가..!!
"고등학생이 그래봤자지..."
고등학교 때 부터 초고교급이라는 말은 듣고 또 들었지만,
이 정도 괴물일 줄은 아마도 상상들 못 했을 것이다.
서용빈이 94년 전반기 3할5푼의 화려함을 뒤로 하고
조금 활약이 뒤쳐져 3할 2푼대로 내려앉고
타율과 타격에 관한 모든 촛점이
이종범의 4할타와 200안타에 몰려있었을 그 시점,
그 몰려있던 촛점을 조금 한 쪽으로 당겨준 게 김재현이였다.
왜냐? 그에겐 고졸 선수 최초의 20 - 20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20 - 20의 경쟁자는 바로 천재 이종범이였다.
시간의 추를 다시 돌려보자.
89년으로 돌아갔을 당시 김성한과 김상호의 Case를 염두에 두어도
20-20 페이스를 이종범과 대등하게 끌어당긴 것이였으니 대단하다 할 수 있다.
(4할타 종범선수는 그 해 19홈런으로 게임을 마감한다.)
이런 타자가 2번타자라는 사실은
라루사가 즐겨썼다는 2번타자 배치를
기자들에게 소재거리로 제공할 정도로 신선한 배치였다.
3번타자보다 무서운 2번타자라니.
그는 19홈런을 이미
시즌마감 한 달 전에 일찌감치 때려놓고
20 - 20카운트 다운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서용빈과 김재현이 신선함과 젊음으로
한참 LG의 신바람야구를 휘어잡고 있을 즈음,
절대로 "신인같지 않은"
노련한 엘리트 유격수가
이미 10홈런 3할타에 50도루를 준비하고 있었으니 ...
그가 바로 내 마음속에 평생 지울 수 없는
나만의 영구결번 6번 유.지.현이다.
(참고로 내 마음속의 영구결번은 6번과 7번이다. 7번은 김재박이다.)
대부분 유지현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동시대에 뛴 천재유격수 이종범이나,
도루왕 정수근과 자주 비교하며 유지현을 바라본다.
하물며 기자들도 자주 비교한다.
그러나 해설자들은
유지현을 그들과의 범주에 잘 끼어넣지 않는다.
유지현과 유지현만이 이끄는
잠실야구의 속성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뉴욕양키즈의 데릭지터를 모르고
에이로드나 노마가르시아파라랑 비교하는 사람들이랑 비슷하다.
유격수란 점에서, 1번타자란 점에서,
도루를 잘한다는 점에서 종종 그들과 비교되며,
그들이 흔히 내리는 결론은
'최고는 아니지만 준수한, 훌륭한 플레이어다'라는 정도이다.
나는 이를, 가장 전형적으로 잘못된 평가 중 하나라 말하고 싶다.
유지현은, 잠실을 지킨 천재였다.
김재박과 유지현을 모르면
잠실야구를 말하지 말라고 할 정도다.
사실 유지현이야말로 "7번"이 잘 어울리는 선수였다.
유지현은 김재박의 뒤를 이어 10년동안
LG를 지킨 LG의 Brain, "뇌관"이였다.
그에 대한 설명은
자세하고 장황할 정도로
조목조목 찬사를 늘어놓을 수 있지만
이광환 감독님이 해설위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스포츠서울의 칼럼 하나로 설명을 대신하고자 한다.
군더더기 없이 이 해설에 유지현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지난 19일 대구에서 열린 LG-삼성전에서다. 3-3 동점인 4회 무사서 1루주자
유지현이 김재현의 3루와 유격수 사이를 빠지는 강한 좌전안타 때 3루까
지 멈춤 없이 달려 성공한 플레이는 팀의 성패를 떠나 돋보이는 장면이었다.
발이 빠르다고 누구나 할 수 있는 플레이가 아니라 고도의 판단력이 요구
되는 보기 힘든 주루플레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조잔디 구장에서 말이다.
간혹 LG가 야구를 얄밉게 한다는 말을 듣는 것도 꾀돌이 유지현을 두고 하
는 말인지는 몰라도 LG로서는 팀에 없어서는 안될 절대적인 선수인 것만은
분명하다. 93년 가을 스카우트 보고서는 어깨가 나쁜 유지현보다 좌완투수 U
선수(지금은 트레이드에 의해 LG선수임)에 더 비중을 두고 있었다. 당시 감
독이었던 필자의 생각은 달랐다.
유지현의 실제 플레이를 본 적은 없었지만 그래도 늘 국가대표로 발탁되는
것을 보면 분명히 무언가 가진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세인
트루이스 카디널스 코치 시절 아지 스미스라는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도
어깨가 좋지 않았음에도 빠른 송구 동작으로 약점을 보완했던 기억도 있었다.
한편 자율야구라는 간판 아래 메이저리그의 선진야구를 추구하던 LG로서는
재치있는 선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두의 예처럼 어떤 타구라도 전방위 판단을 스스로 할 수 있는 토털플랙
티스(종래와 달리 정규위치에서 타격,수비, 주루를 병행) 제도를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유지현 같은 선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아무튼 유지현이 기대에 부응해 94년 LG 우승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
번타자로서 적잖은 홈런과 3할타율, 도루 등으로 팀을 이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출루의 내용이 알찼다. 안타로서 출루한 것 못지 않게
많은 볼넷으로 나간 출루는 결과적으로 상대투수를 지겹게 만드는 것과 경기
초 상대 선발투수의 구위를 관찰할 수 있는 기회를 동료선수들에게 많이 제
공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명실상부하게 국내최고의 1번타자감이라고 해도 과
언이 아닌 것이다. 지금도 공수양면에 걸쳐 LG에서 유지현 만큼 부지런히 뛰
어다니는 선수가 없다. 특정선수에 지나친 과찬인지는 몰라도 사실 있는 그
대로 볼 것은 봐야한다.
시드니올림픽 선발에서 누락되어서가 아니다. 간혹 볼 수 있는 3루와 유격
수 사이의 타구처리 때 어깨가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많은 장점을 가진
유지현 선수를 과소평가하는 점이 여기 저기서 눈에 띄어 하는 말이다.
덧붙이자면,
3루 - 유격수간의 플레이에 관해 약점을 커버하기 위해 유지현은
정말 부지런하게 뛰어다니고 최고의 쉬프트를 보여줬다.
당시 2루는 박종호였다. LG는 최강의 키스톤 플레이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LG가 벼락같이 8연승 같은 것으로 도깨비처럼
우승을 확정짓던 90년이 아니라, 시즌 내내 4월부터
단 한번도 우위를 내주지 않고 최강의 플레이를 선보이며
94년 9월까지 내달리며, 우승을 확정짓던 그 순간에도 유지현이 있었다.
...
..........
시간의 추를 잠시,
94년을 기점으로 잠시 뒤로 돌려보자.
아래 사진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유지현의 사진이다.
.
.
2002년 4위의 LG를
우승직전까지 끌고갔던 시절의 캡틴,
유지현의 빨간 장갑과 그 표정이다.
이 표정이였다.
바로 이 표정.
그는 늘,
이렇게 상대를 괴롭히고,
이렇게 웃었다.
그는 상대의 허점과 빈틈을 끈질기게 노려
LG의 총구를 마련해주었고,
그 선봉에서 임무를 완성해내고선
탐크루즈가 미션임파서블을 수행해 냈을 때 처럼
저 유쾌한 웃음을 우리에게 내질렀다.
바로 저 웃음은
94년 우승 매직넘버를 0으로 만들던 날,
우승을 확정짓던, 신인왕을 확정짓던 홈런을 치던 순간의 표정과도 똑같다.
그 날은 무적 LG가
태평양을 무려 8게임차로 누르며
완승으로 우승을 확정짓던 경기였다.
그 날 스포츠 하이라이트에는
두 선수가 자꾸 클로즈업 되었다.
한 명은,
얼마전 비거리 145M짜리 비공식 장외홈런으로
기어이 20-20을 완성해낸 초고교급 괴물 김재현,
또 한 명은,
꾸준히 LG를 이끌어오던
LG의 1번타자 유지현이였다.
김재현이 먼저 승부의 중요한 시점에서
적시타를 때려내 처음 하일라이트 필름을 장식했다.
그 당시 신인왕 경쟁은 이미 점입가경이라,
승부에서도 이 두 1-2번타자들은 무섭게 집중했다.
그러나, 그 경기에서
승부를 결정짓는 '유지현표'홈런을
유지현 존으로 때려버린 건 바로 No.6였다.
그는 홈런을 치고 카메라를 향해 바로 저 포즈를 짓는다.
얌전한 줄만 알았던 꾀돌이 유지현의 액션을 처음 본 순간이였다.
그리고 그 환한 미소를 나는 10년동안 팬들과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는 나이로는 동생인 동기 고졸신인과의 경쟁에서
그 홈런 한 방으로 기자들에게 유지현에 대한 존재 역시 강하게 각인시키며,
그 해, LG의 신인상을 거머쥔다.
사실 그들에게 경쟁이 있을 수는 있지만,
그들은 프로야구 20년동안 단 한 번도 나오지 못한
우승팀의 1-2-3번이라는 화려한 스트라이프 멤버들이다.
그 끈끈한 스타의식과 연대감 때문에,
그들은 전혀 불화설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늘 있을 때 해주는
LG의 Brain, 캐논, 3할타자들이였다 ....
화려했다. 그들의 3-4년은,
최소한 LG에는 그들이 있어서 늘 신이 났고
그들이 잘해야 LG는 힘을 냈다.
그 와중에 서용빈은 천보성 감독이 자신을 대타로 내세우려는 것을
끝끝내 우겨 보란듯이 성준의 4구째를 통타하여 삼성의 플레이오프를 좌절시키고,
3할을 3번을 때려냈으며,
김재현은 2년차 징크스와 신장염을 통한 1년 결장을 뒤로하고
출루율 4할을 거뜬히 넘기는 OPS형 타자로 발돋움한다.
그리고 유지현은 방위생활 동안에도 알토란 같은 선수생활을 하고,
일본과의 국제경기의 이종범과의 뛰어난활약을 보이며
6년간 3할 3번 2할 8푼대 두번에 평균 40개가 넘는 도루로,
김재박의 뒤를 이어 잠실의 뇌관이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참, 깊고도 기나긴, 참, 운명이란 것은 어찌나 가혹한지,
누구 하나 불공평하다 할 것 없이 그들 셋에게 똑같이 내려진 잔인한 운명이였다 ...
예술은 결국 비극(悲劇)이라는 고대 그리스의 문법을 빌리지 않더라도,
그들에게는 짜맞추더라도 맞추기 힘든 각본이 시작되고 있었다 ..
그 비극의 서막은 서용빈으로부터 시작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신인 3인방 중에 처음 그 이름을 알린 사람이
비극의 서막도 첫 Title Role을 맡게 된다.
2000년 6월, 깨끗한 매너와 신인 3인방 중 가장
조용한 이미지를 가진 서용빈은 "무단이탈"이란 기사로 신문지상에 처음 등장한다.
LG 잠실야구의 미학을 모르고
홍현우 양준혁 최동수 안재만 스미스등으로 미련스럽게도
1루와 장거리타자 위주의 야구를 펼치려던 천하의 둔장 이광은 감독하에서
이루어진 용병술의 첫 폐해자로, Mr.LG의 자존심이던 서용빈은 신문지상에
위와같은 얼굴로 등장한다.
자고로 LG야구에서 장거리야구를 논하는 것은 참으로 미련스러운 일이다.
최동수 안재만 스미스 양준혁등을 두고 서용빈을 플래툰으로 기용했던 순간부터
LG의 뒤뚱대던 야구는 태동했다. 서용빈은 효과적인 선수배치를 못한 감독의 용병에 의해
꾸준한 기회를 보장받지 못하고, (마치 주니치의 이종범 선수가 호시노에게 휘둘린 것과
비슷한 사례다. 뛰어난 스타적 재질을 가진 선수는 놓아두면 자연스레 감을 찾는 법이다)
바보같은 선수 수급과 기용, 그리고 99년 이후 병역비리 때문에 끊임없이 진행되는 법원과의
소송 속에 일궈낸 무려! 무려! "2할7푼"밖에 안되는 단거리 타자라는 이유로,
플래툰과 백업에 놓이게 된다.
조용한 서용빈이 택한 극단적인 방법은 겨우 그것이였다.
그 후로 팬 여론이 들끓고, 서용빈은 그 후 터진 곳 꿰메듯 주섬주섬
그 시즌을 마쳤으나, 그 시즌 후 그에게 닥친 일은 더 커다란 일이였다.
서태하.
혹시 추억의 LG팬이라면 그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난 99년 병역비리 사건에 연루되고, 감옥에서 눈물의 결혼을 치루기로 했던
서혜정 - 서용빈 부부가 더 이상 그런 일이 없길 위해 성명학자를 통해 개명한 이름이다.
어색하다 못해 촌스럽기까지 한 서태하. 우리는 서용빈을 원했지 서태하를 원한게 아니였다.
하지만 그가 이름까지 바꾸어가면서 자신의 운명을 바꿔보려 노력했던 건 혹시,
다가올 시간에 그가 닥쳐야할 비극을 예감했기 때문이 아닐까.
.. 그는 그로부터 해를 건너 입대가 확정된다.
2002년 여름 대한민국이 한참 월드컵에 미쳐있을 시절이다.
우리는 그를 보며 생각했다.
2005년이 올까? 과연 2005년이 올까?
그리고 2005년에 서용빈을 볼 수 있을까?
우리가 2002년 여름 그를 보내며
그가 선수들에 둘러싸여 헹가레에 쌓여있을 무렵
우리는 그런 때이른 걱정을 했다.
때이른 걱정이였다.
우리는 2005년에 "서용빈만" 보게 되었다
젠장, 정말 써거 문드러질 때이른 걱정이였다.
그 해 엘지는 서용빈을 보낸 것도 슬퍼 죽겠는데
또 다른 일로 큰 충격에 휩싸이게 된다.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
이름도 특이한 괴기하고 잔혹한 병명이였다.
엉덩이에 피가 돌지 않아 뼈가 썩어들어가
나중엔 걷기도 힘들어진다는 이름도 무서운 대퇴골두 무혈성 괴사증
괴사증(壞死症)
죽을 死 괴사증.
김재박의 뒤를 이은 스타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물려준
Lucky 7. 서울의 번호, 넘버 세븐.
그 행운은 결국 이런 저주로 돌아오는겐가?
많은 팬들이 마음아파했다.
그 해, 그저 짧은 부상일 줄 알았던 김재현이
돌아오고 나서 판정받은 병명은 우리가 듣도보도 못한 병명이였다.
그 해 김재현은 3할 4푼의 타율과 4할6푼이 넘는 출루율로
타격, 출루율에서 모두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젠장, 모두 1위였단 말이다.
잠실이라는 큰 구장에 들어와서 이승엽보다도 뱃스피드가 뛰어나고
홈런을 많이 때려낼 것이라 기대를 모았던 고졸 신인이, 더 이상 빛나지 못하고
힘든 시간을 보내다, 드디어 팀을 위해 출루하고 기다리고 때려내는 선수가 되었는데,
2001년부터 꾸준히 출루형 선수로 변신해서 결국 그 꽃을 피웠는데,
피땀어린 그에게 신이 고작 준 선물이 "장외 타격왕"과 그 듣도보도 못한 병이란 말이냐?
그게 정녕 비극의 Code란 말이냐? ..
그리고 기억들 할 것이다.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김성근 감독을 찾아가고 찾아가
한국시리즈 엔트리 발표 아침날 허락을 받아낸 그의 남자다움을.
다시는 못뛰는 한이 있더라도
이 순간 자신은 꼭 뛰고 싶다고 말한 그의 마음에서
우리는 한때 우리의 마음 속에 들어가있던
몸이 부서지더라도 지금 이 순간이 자신에게 영광스러운 순간이라고 말하던
강백호의 그 마음과 데자부를 어렵지 않게 현상해 낼 수 있지 않았을까.
멋진놈!
그는 정말 멋진 놈이였다.
그리고 그는 결국 해냈지 ...
그는 해냈지.
아마 프로야구를 통틀어 걷지 못하는데 선수가 한국시리즈에 나와서
중요한 순간에 대타로 나와가지고 절뚝절뚝 타석으로 걸어와서
역전 2루타를 때려내고 1루로 절뚝 - 절뚝 걸어가는 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김재현을 빼고 말이야.
그때 얼마나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을까.
그 때 얼마나 많은 팬들이 눈물을 흘렸을까.
삼성의 심장을 완전히 뚫어버릴 수 있었는데,
완전히 뚫어버릴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쉬운 한 판이였지 ..
그리고 그런 김재현을 아는 사람들이라면,
김재현에게 그래선 안되지..
그 잘나고 잘생겼던 얼굴은 순식간에 변해버렸지..
그는 어느순간 쾌남보다 더 진짜 남자가 되어있었지만,
신은 그 수련이 부족했다고 판단한 모냥이지? ..
그리고 그런 김재현에게 주어진 선물 "각서"
고맙다 LG.
너희는 그 때부터 이순철의 뻘짓까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사해주었고,
신인3총사로부터 태동한 우리 LG의 애정을 그렇게 앗아가주었지. 정말 고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묻혀졌지만 가장 슬픈 사연이 하나 있지.
..
"유지현 사상 최초, 구단 상대 연봉신청 승리"
그렇게, 열심히 이기려 하지 않아도 되었을텐데.
김성근을 자르고 김재현에게 각서를 요구하는 LG라는 걸 알면서
유지현이 그런 일을 벌린 건 유지현 야구 인생의 처음이자 마지막 에러였겠지.
그는 이 일을 발단으로 끝끝내 구단에게 괴롭힘을 당하다,
그의 커리어 마지막 해에는 사상 초유의 최악의 감독에 의해
"야구경기 출전 방해"를 받지. 2군에 등록되고도 2군 경기에 출전하지 않고
1군에 데리고 다니며 펌볼과 배팅볼을 던지고 야구장비들을 들고 다니게 한,
사상 최악의 감독에게 걸려서 말이야... 참 Tragidy도 이런 Tragidy가 없지 ..
아니 Tragidy라 하기엔 너무 잔인한 풍경이잖아.
.. 꼭 그래야만 했니?
.. 꼭 그래야만 했나요? ...
내가 제일 사랑했던 LG의 Brain, LG의 캡틴.
꼭 그래야만 했나요? 그렇게 LG가 좋은가요? ..
이런 감독과 이런 구단 밑에서 LG에 남아야만 했나요? ...
웃고있습니까?
저런 ... 이름도 부르기 싫은 인간 옆에서
정녕 당신은 웃고 있는겁니까? ..
미련한 사람..
당신은 꾀돌이가 아니였어요 ...
당신은 꾀돌이가 아니였어요 ...
그리고 ...
김재현은 바로 저 순간이
LG를 떠나야 겠다고 생각한 마지막 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바로 저 순간입니다.
신인왕 경쟁자로서, 10년간 LG를 지켜온 파트너로서
Brain을 잃은 캐논은 저 순간 아마도 LG를 떠나 다른 곳으로 갈 것을 마음 먹었을 겁니다.
마음 먹고도 남습니다.
그리고 .....
20분만에 계약해버립니다.
자유 FA계약 허가시한 20분만에 말이죠 ...
쌍마에는, 이 행위를 두고 비열하다고 하는 쓰레기도 보이더군요.
뭐, 그들이야 원래, 알바도 아닌데, 구단도 안알아주는데 구단 편 들며
욕먹는 바보들이라 할지라도, 김재현은 바보를 택하지 않았죠.
이제 다시 또 혼자 남았군요.
그리고 또 2005년 서두의 첫 머리를 여는군요.
홀로 남아서 말이죠 ...
힘들겁니다.
어쩌면 당신마저 감독이 내칠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늘 플레이가 영리했고 꾸준했으니, 잘해내겠죠.
이젠 기대하지도 않습니다만 그래도 기대한다면,
내가 내년에 잠실야구장을 찾는다면 그건 90%
당신이 플레이 하는 모습을 보고 싶은 마음이오.
유일하게 살아남았구료 ...
...
유지현 선수,
이 글을 통해 나는 편향적이다 싶을만큼 당신에게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당신은 제발 LG에 남아주십시오. 이왕 이렇게 코치를 시작했으니
이순철보다 더 비열하게 라인을 타서라도 LG에 남아주십시오.
감독에게 껄끄럽고 나이가 많아 불편하다는 소리듣고 묵묵히 팀을 떠난 노송처럼
고와지지 마시고 차라리 닳고 닳아주십시오. 그래서라도 LG감독이 되어준다면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당신의 빨간장갑과 그 웃음이 LG야구의 가장 찬란한 순간입니다.
...
김재현 선수,
유일하게 올해 가능성을 여전히 보여주며
SK로 이적한 선수. 이순철이 남아있는 동안 이순철의 심장을 향해
펑펑 홈런을 날려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당신이 SK에 있는 동안,
당신이 타석에 들어서서 물러나는 그 순간까지 나는 언제나 SK의 팬입니다.
....
길고 긴 글이 종착역에 다 와갑니다.
나는 어떤 마음의 빚을 갚은 느낌입니다.
내가 청룡과 트윈스를 좋아하던 프로야구 20년동안 가장 찬란했던 순간에
있어줬던 그 신성들을(新星) 내 마음속에 선명히 아로새기고
나와 더불어 호흡하고 LG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마음앞에 그들을 박아두기 위해,
준비했던 이 2시간의 기인 글을 마감하는 순간,
참, 당신들 때문에
너무나 행복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타이거즈 팬들에게 김봉연과 김성한이 향수이듯이,
라이온즈 팬들에게 이만수와 장효조가 향수이듯이,
본문 내용에 조금 사실과는 다른게 유지현과 김재현은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였습니다. 서용빈 김재현은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울쌍둥이님 말처럼 그들이 다 떠난다 하더라도 결국 엘지 트윈스를 응원하게 될겁니다. 그들 때문에 엘지를 응원한게 아니라 그들이 엘지소속 이였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거니까요.
첫댓글 전 이글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네요
정말 안타까운 일들이 너무 많았던거 같네요ㅠㅠ....진짜 프런트및 전감독 참 진짜 할말이 읍네요...ㅡㅡ^
감동적.......10년........ㅜㅜ
미안해요 그래도 주유소 팬은 못하겠네 ㅡㅡ;
아 진짜 눈물나는글이다............................................................. 에휴
멋진글 잘 읽고 갑니다. 울컥 하네요. LG도 이제 일을 낼 때가 분명 옵니다 ^^ LG 화이팅 ~~ !!
이순철때문이져 저도 너무 아쉽네요
이상훈선수도 표면에 내보인것이 이순철과의 마찰이지 이상훈 트레이드는 이미 수순을 밟고있었답니다 다 지금 부산에서 구청장하고있는 어씨와 유성민단장 작품이죠
주유소 팬하자는게 아니라 ㅋ 김재현선수만 영원히 가슴속에 담자 이거죠 ㅋ
이제와서 그거 모르는분들있나요??아직까정 남아있는분들은 모질라서 남아있는건가요?설령 유지현코치든,,시용빈선수든 모두를 내보낸다해도 더이상 트윈스가 아닌 트윈스로 전락한다해도 남아계실분들이 아직은 많이 계실겁니다
제가보기엔 자기합리화로밖엔 보이질 않네요..누군 바보라서 질거뻔히 알면서도 매일같이 구장찾아가 조용히보다나오는줄아십니까?...외면하는건 어려운일이 아닙니다..끝까지 지켜보고있는게 정말 힘든일이죠..
본문 내용에 조금 사실과는 다른게 유지현과 김재현은 그다지 좋은 관계는 아니였습니다. 서용빈 김재현은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서울쌍둥이님 말처럼 그들이 다 떠난다 하더라도 결국 엘지 트윈스를 응원하게 될겁니다. 그들 때문에 엘지를 응원한게 아니라 그들이 엘지소속 이였기 때문에 좋아하게 된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