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국지 [列國誌] 718 ■ 3부 일통 천하
제11권 또 다른 난세
제5장 개혁(改革) (5)
제위왕은 재상 추기와 의논하여 수시로 어진 인재를 뽑고, 각 고을 수령을 대폭 경질했다. 용맹스럽고 무예에 능한 장수들은 변방으로 내보내 국경을 튼튼히 했으며, 그들이 피로하지 않도록 철저히 삼교대를 준수하게 했다. 이로써 제나라는 일약 강대국의 반열에 올라서 전국시대에 칠웅으로 활약하게 된다.
제위왕의 업적은 눈부시다. 그는 모두 36년간을 재위하게 되는데, 처음 9년을 제외하곤 단 한 차례도 다른 나라의 침공을 허용하지 않았다. 당시 제나라 도성 임치성은 기원전(紀元前)의 도시답지 않게 크고 번화했다고 한다. 이 모든 게 제위왕 때 이루어졌음을 볼 때 그의 치적이 어떠했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사기>를 보면 전국시대의 유명한 유세가 소진(蘇秦)이 제선왕(齊宣王)에게 합종(合縱)을 역설하는 중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임치에는 7만호가 있습니다. 신이 몰래 헤아려보니, 집집마다 최소한 세 명의 장정이 있더이다. 이를 계산하면 21만 명이 됩니다. 먼 곳의 현이나 읍으로부터 징병하지 않아도 임치의 병사만으로 21만 군대를 보유하는 것입니다.
임치는 매우 풍족하고 튼실합니다. 이 곳의 백성들은 큰 생황을 불고 비파를 뜯고 거문고를 타고 아쟁을 켜며, 투계(鬪鷄)와 경견(競犬: 개경주), 육박(六博:윷놀이 혹은 주사위놀이), 답국(蹋鞠: 축구) 등을 즐기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임치의 도로는 수레바퀴가 서로 부딪치고, 사람 어깨가 서로 스치며, 옷깃과 옷소매가 어우려져 장막을 이루며, 사람들이 땀을 흘리면 비가 될 정도입니다.
임치의 거리는 춘추시대 때 이미 수레 6대가 동시에 왕래할 수 있는 '장(莊)'이라는 도로를 갖추었을 정도로 크고 넓었다. 그런데도 수레가 부딪치고 사람들의 어깨가 맞닿을 정도로 북적거렸다고 하니 상당히 많은 인구가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인상 깊은 것은,
- 사람들이 땀을 흘리면 비가 된다.
라는 표현이다. 말재간 좋은 직업 유세가 소진의 과장된 표현이긴 하지만, 오늘날의 도시 중심가를 연상케 할 만큼 복잡하고 번성했음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임치성 거리의 목격담을 제선왕에게 낱낱이 고했다.
제선왕은 제위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는 사람이다. 따라서 제선왕 이전인 제위왕 때 이미 임치성은 이 정도로 번창했다고 볼 수 있다.
제위왕의 업적 중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있다. 다름아닌 '직하학사(稷下學士)'다.
임치성의 성문은 모두 13개였다. 그 중 서쪽으로 나 있는 문중에 직문(稷門)이라는 성문이 있었다.
제위왕은 이 직문 가까이에 여러 채의 커다란 저택을 지었다. 그리고는 그곳에 천하의 유명한 학자들을 초빙해 거주케 했다. 오늘날의 학술원(學術院)인 셈이다. 이 곳에 초빙된 학자들은 관직에 제수되지는 않았다. 오로지 학문과 사상에 관하여 연구하고 토론할 뿐이었다. 물론 먹 고 사는데 지장이 없을 정도로 대우는 해주었다. 상대부(上大夫)에 해당하는 대우였다. 상대부라면 꽤 높다. 경(卿) 다음이다. 오늘날로 치면 차관급이다.
그들은 관직을 맡지 않았으므로 늘 자유로웠다. 학문 연구에 관해 간섭도 받지 않았다. 오로지 자신들이 좋아하는 것에 몰두할 수 있었다. 어느덧 사람들은 그들을 일러,
-직하학사
라고 불렀다. 직문 아래에 사는 학사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제위왕은 어째서 이런 직하학사를 두었던 것일까? 물론 그들에게서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다. 그들의 학문 연구와 토론 가운데서 부국강병에 관한 아이디어를 뽑아내고자 했던 것이다.
또 있다. 인재 배출이다. 그 곳의 학사들은 한결같이 일가견이 있는 사람들이다. 젊은 제자를 둔 사람도 있었고, 학사 자신이 정계에 입문할 뜻을 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인재가 필요할 때 그들에게 자문을 구하면 손쉽게 적절한 관리를 뽑을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러한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은 순우곤이 아니었을까? 이 직하학사는 제위왕 때에 만들어졌지만 그 꽃을 피운 것은 그 아들 대인 제선왕 때에 가서다.
《사기》에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제선왕은 문학 유세하는 선비들을 좋아했다. 추연(騶行), 순우곤, 전병(田騈), 접여(接予), 신도(愼到), 환연(環淵) 같은 학사 76인에게 모두 저택을 하사하고 상대부로 삼았다. 관직에 얽매이지 않고 토론만 하게 했다. 이리하여 제나라직하(稷下)에는 학사들이 다시 많아져. 그 수가 수백에서 어떤 때는 천명을 넘어서는 때도 있었다.
이 학사들은 각기 다른 학파를 형성했다. 당시 유행인 도가(道家)를 비롯하여 유가(儒家), 묵가(墨家), 병가(兵家), 법가(法家), 음양가(陰陽家) 등 각양각색이었다. 우리가 잘 아는 맹자(孟子) 또한 나중에 이 직하를 드나들며 제선왕의 정책 고문 역할을 맡는다.
이들은 만날 때마다 서로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며 논쟁했다. 때로는 몇 날 며칠에 걸쳐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리하여 생겨난 말이 ‘백가쟁명(百家爭鳴)'이다.
제자백가(諸子百家)로 불리는 이 여러 성향의 학자들은 제나라의 자유분방한 분위기 속에서 자신들의 학설을 크게 발전시켰다. 전국시대가 정치와 군사적으로는 크게 혼란기를 맞이했으면서도 학문과 사상적 인면에서 '황금기'라 불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흔 히 말하는 동양사상의 대부분은 바로 이 시기에 전성기를 이루며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 다음에 계속.........
< 출처 - 평설열국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