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많은 것을 대신하는 시대다. 그럼에도 새로운 것을 배우거나 마음을 기댈 취미를
찾는다면 서예는 생각보다 좋은 선택일 수 있다.
AI는 이제 붓글씨마저 대신 쓴다. 몇 줄의 명령이면 옛 명필을 닮은 글씨가 화면에 떠오른다.
그런데도 굳이 벼루에 먹을 갈고 붓을 쥐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서예는 흔히 나이 든 사람들이 즐기는 정적인 예술로 여겨진다. 그러나 붓을 쥐고
한 획에 집중하며, 차분히 무언가를 완성해 가는 일은 나이와 관계없이 의미 있는 경험이다.
화면을 넘기는 속도에 익숙한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새로운 감각일 수 있다.
알림도, 되돌리기 버튼도 없이 오직 종이와 붓만 마주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서예인가. 서예는 글씨를 바르게 쓰는 기능에 머물지 않았다.
오랜 세월 동안 정신을 한곳에 모으고 마음을 다스리는 수양의 성격도 함께 지녀 왔다.
그것이 AI 시대에 서예를 다시 돌아보아야 하는 이유다.
글씨가 마음의 예술이 되기까지
한국·중국·일본에서 서예는 회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독립적인 예술 장르로 발전했다.
서양과 이슬람 문화권에도 고유한 서예 전통이 있다.
그러나 글씨의 형태와 획의 움직임, 먹의 농담만으로 작품을 감상하고 비평하며
그 안에서 쓰는 이의 정신과 개성을 읽어 내는 전통은 동아시아에서 꽃피었다.
그 배경에는 한자의 특성이 있다. 한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에서 출발했고,
글자에는 자연과 사물의 흔적이 담겨 있었다.
글씨를 쓰는 일은 뜻을 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선과 형태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일이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이를 두고 ‘서화동원(書畫同源)’, 곧 글씨와 그림은 그 뿌리가 같다고 했다.
그래서 한 획에도 자연의 생명력과 사람의 정신을 담으려 했다. 한글 또한 자음과 모음을 모아
한 글자의 꼴을 이루는 문자로, 판본체에서 궁체에 이르는 고유한 서예 전통을 일구어 왔다.
도구도 특별하다. 부드러운 붓은 손의 작은 움직임에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벼루에 간 먹은 농도를 조절할 수 있으며, 종이는 먹물을 머금어 번진다.
이 도구로 쓴 글씨에는 쓰는 순간이 그대로 담긴다. 붓을 누르는 힘과 속도, 먹의 농담,
번지는 모양에 그때의 호흡이 드러나고, 같은 글자도 쓰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서위심화(書爲心畫)’, 곧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고 했다.
글씨를 잘 쓰는 기술에 그치지 않고, 그 사람의 마음과 성품이 드러나는 자리로 본 것이다.
여기에 홀로 있을 때도 자신을 삼가는 ‘신독(愼獨)’의 태도가 더해졌다.
서예는 대부분 홀로 붓과 마주하며 익혀야 하기 때문이다.
같은 획을 수없이 긋고, 마음에 들지 않는 글씨를 버리며, 그 시간을 성실히 견디는 과정이
결국 글씨에 드러난다고 옛사람들은 믿었다.
이처럼 서예는 단순히 글자를 쓰는 것을 넘어 마음을 표현하고 자신을 닦는 인문 예술로
발전했다. 바로 이러한 성격이 AI 시대에 서예를 다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된다.
AI가 흉내 낼 수 없는 것
오늘날 AI는 전통 서예의 특징을 학습해 붓글씨의 형태와 질감까지 상당히 정교하게 재현한다.
명필의 필체를 본뜬 작품도 순식간에 만들어 낼 수 있다.
하지만 서예의 가치는 아름다운 결과물에만 있지 않다.
서예에는 글씨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마음을 모으고 자신을 다듬는 시간이 함께 담긴다.
바로 그 지점에서 AI가 만들어 내는 글씨와 사람이 직접 쓰는 글씨의 의미는 달라진다.
먼저 서예의 한 획은 되돌릴 수 없다. 붓이 종이에 닿으면 먹물이 스며들고,
획은 그대로 흔적이 된다.
화면 속 이미지처럼 간단히 실행을 취소할 수 없다.
이것이 서예가 지닌 불가역성이다.
또한 서예의 한 획은 매번 다르게 나타난다.
붓에 머금은 먹의 양, 종이의 결, 그날의 습도와 손의 미세한 떨림이 어우러져 하나의 획이 된다.
같은 사람이 같은 글자를 다시 써도 앞의 획과 완전히 같을 수는 없다.
물론 AI도 번짐과 떨림을 흉내 내 이런 흔적을 그럴듯하게 재현할 수 있다.
하지만 서예에서 중요한 것이 단지 눈에 보이는 흔적뿐이라면, ‘서위심화’,
곧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라는 말은 성립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이 가리키는 ‘마음의 그림’이란 과연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한 획 한 획 속에
그 획을 그은 사람의 정신까지 담겨 있다고 여겼다.
망설이다 그은 획, 서두르다 흔들린 획, 오랜 연습 끝에 비로소 자리를 잡은 획에는
쓰는 사람의 노력과 마음이 배어 있다.
AI가 만든 글씨도 사람의 마음을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는
글씨를 쓰기까지의 과정이 담겨있지 않다. 순간의 망설임도 실패의 좌절과 성취의 기쁨도.
서예는 어깨와 팔, 손목을 거쳐 붓끝에 힘을 전하는 몸의 예술이다.
호흡을 고르고 손의 감각을 새롭게하면서 눈앞의 한 획에 정신을 모은다.
생각만으로 되는 일이 아니어서 몸이 익힐 때까지 되풀이해야 한다.
이 익힘의 과정은 단순한 기술 연마에 그치지 않는다.
한 획을 제대로 긋기 위해 마음을 가다듬고, 실수를 받아들이며, 다시 시도하는 과정 자체가
자신을 다스리는 수양의 성격이 있다.
AI는 완성된 글씨를 건네줄 수 있다. 그러나 서툰 획을 긋고 실수를 거듭하며 조금씩 나아지는
과정을 우리 대신 해 줄 수는 없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긋는 한 획
인간은 일하는 존재다.
생계를 위해 일하지만, 일의 의미가 생계에만 있지는 않다.
무언가를 만들고, 어려운 일을 해내고,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신의 능력과 쓸모, 삶의 보람을 확인한다.
그런데 AI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며 복잡한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간의 일을 대신하는 영역이
빠르게 넓어지고 있다. 이 변화가 더욱 커지면 우리는 낯선 질문과 마주하게 된다.
기계가 나보다 일을 더 잘한다면, 나는 어디에서 삶의 보람을 찾아야 하는가.
노동이 줄고 여가가 늘어나는 것이 마냥 반가운 일만은 아니다.
하루를 채우던 일과가 사라지고 자신이 필요한 존재라는 감각이 희미해지면,
늘어난 시간은 선물이 아니라 견뎌야 할 무게가 될 수도 있다.
일은 소득을 얻는 수단인 동시에 삶의 리듬을 만들고 자신의 존재 의미를 확인하는
통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일이 줄어드는 것을 모두가 문제로 여기지는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기회와
여유로 반기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일하며 자신의 역할과 정체성을 만들어 온 사람에게는
그 빈자리가 생각보다 클 수 있다.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할지 알기 어려워지면 허무와 무력감에 빠지거나
정신적으로 취약해질 가능성도 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것은 단순히 남는 시간을 소비할 오락만이 아니다. 스스로 무언가를 하고,
그 과정에서 집중과 성취를 경험하며, 자신의 삶을 능동적으로 꾸려 갈 수 있는 활동도 필요하다.
서예는 바로 그런 활동이 될 수 있다. 처음에는 뜻대로 되지 않는다.
힘을 조금만 잘못 주어도 획이 흔들리고, 먹의 양을 맞추지 못하면 글씨가 흐트러진다.
직접 연습하고,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며 조금씩 자신의 글씨를 만들어 가야 한다.
이 과정에서는 AI와 경쟁할 필요가 없다. AI보다 글씨를 잘 써야 할 이유도 없다.
남에게 인정받거나 경제적 가치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직접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고 온전히 몰입하는 경험이다.
여기서 ‘신독’의 정신이 새롭게 다가온다.
신독은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신을 돌아보고 삼가는 태도다.
서예는 이러한 태도를 몸소 실천하는 일이다.
벼루에 물을 붓고 천천히 먹을 간다. 붓을 들어 한 획을 긋는다.
잘못 그은 획은 되돌릴 수 없지만 다음 획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그 작은 반복 속에서 우리는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다.
그리고, 실수를 받아들이며, 정성을 들이는 법을 배운다.
서예가 모든 사람의 허무를 해결해 줄 수는 없다. 그러나 삶의 방향을 찾기 어려운 시대에
마음을 하나로 모으며 스스로 하루를 의미 있게 보내게 해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는 있다.
마치며
AI가 많은 일을 대신하는 시대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기계보다 일을 더 잘하는 능력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배우고, 무언가에 몰입하며, 그 과정에서 의미를 찾는 능력이다.
서예는 그 가능성을 보여 준다. 남과 비교하거나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지 않아도, 한 가지 일에
정성을 들이는 것만으로 삶은 넉넉히 채워질 수 있다.
삶의 의미는 반드시 남보다 뛰어난 일을 해내는 데서만 오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정성껏 해 나가는 가운데서도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
첫댓글 <오늘의 팝송> Self Control / Laura Branigan
Self Control은 1984년 미국 여가수 Laura Branigan이 발표한 3번째 앨범의 타이틀 곡이다. 빌 보드 차트 4위, 독일, 캐나다
팝 차트 1위에 올랐던 히트곡이다. Laura Branigan은 1952년 생으로 'Gloria','Power of Love' , 'Self control' 등 3곡이 크게
히트해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린 미녀 배우 겸 가수다.
1970년대 말 캐나다의 노래 하는 음유시인 Leonard Cohen의 백 보컬로 잠시 활동하다 자질이 없다고 백 보컬에서 쫓겨났다.
이러한 아픔을 딛고 일어선 대단한 가수다. 2004년 8월 '뇌 동맥류'로 먼길을 떠났다.
https://youtu.be/3dyof5msDd4
PLAY
제가 다녔던 중학교에는
서예실과 서예복이 따로
있어서 (매주 한시간씩)
묵향이 가득한 교실의
돗자리 방석에 차분하게
앉아서 한획 한획 집중
그려 나가던 글자의
추억이 있답니다.
더불어,
옛 붓만들기 장인이
비법을 전수 받고자
수발을 들던 제자에게
끝내 미루다가 나중에
숨을 놓는 순간이 되서야
제자의 귀에 대고
부웃터얼~~ 하시곤
돌아가셨다는 웃픈 전설이
( 서예쌤이 들려주신 고사)
문득, 생각났네요^^
의미있고 좋은글
잘 보았어요~~꾸벅^^
지는해님의 댓글을 읽으니
서예수업시간의 교실풍경이 그대로 떠오릅니다.
선생님이 들려준 얘기를 아직까지 기억하시는 걸 보니
착실한 학생이셨던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서위심화.
마음의 그림이라 하시는데 악필인 저에겐 흠칫 위축되는 말씀입니다.
묵을 갈 때의 마음 가짐은 AI의 답을 기다리는 조급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리라 생각듭니다.
자기만의 글씨를 정갈하게 써 내려가는 마음. 학교 때 말고는 접해 본 적없는 글 쓰기.
그 준비 과정부터 마음을 정갈히 해 줄듯 합니다.
절반 이해하고 읽었습니다.ㅎ
마음이 너무 앞서가면 손이 따라가지 못해
글씨가 잘 않써집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커쇼님. 평안한 밤되세요...
네 맞아요. 오늘 도 한 수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자연이다2님.
평안한 밤 되세요.
서예는 마음과 정신의 요가라고 저는 생각하지요
만호제력을 통한 중봉으로
빠르고 느림의 지속.먹물의 농담 크기의 대소 균형 등등에
집중하다보면 시간도 세상도 잊게 되더라구요. 옛 선현의 시귀에도 생의 지혜가 들어있어서 붓을 잡고 쓰다보면 그냥 좋답니다.
오후부터 또 붓잡으러 가려구요. 백낙천의 대주와 장자의 시를 요즘 계속 행서로 쓰는 중인데 ㅡ내 인생 잘한거 하나가 서예와 평생 동행하는것ㅡㅡ좋은 글 감사합니다 ~^^
공감합니다.
정신건강에 서예만한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늘 평화님은 이미 경지에 오른 서예가이신데
그 앞에서 주름 잡은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평안한 밤 되세요...
@비온뒤 아닙니다.
서예는 외줄타기라 맨날
금새 또 바닥입니다.
맨날 초보나 같지요
서예 글 써주셔서
무지 반갑고 고맙답니다 ㅎ
@늘 평화 겸손하신 말씀입니다.
감사합니다.
서예를 석달 해봤지요 ㅎㅎ 줄만 긋다가 마쳤습니다
제 성정이 워낙 진득하지 못해서 석달만에 걷어 치웠지요
서예는 할 사람이 따로 있다고 여깁니다 그림도 그렇고요
마음에 욕심과 욕망이 가득하면 붓을 잡으면 안되겠더군요
서예는 그 사람 마음의 흔적입니다 재능이고요 인내의 결과물이고요
맞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르니
자기에게 맞는 것을 찾아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운선님. 평안한 밤 되세요...
한석봉은 조선의 명필이긴 하지만
그의 작품을 예술적으로 높이 평가하진 않는 걸로 압니다.
마치 사진 찍어 놓은 듯 정교한 활자와 같기 때문이라는 이유입니다.
그래서인 추사 김정희가 한석봉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합니다.
AI가 서예 작품을 만든다면 한석봉 같은 서체가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제가 견문이 적어 추사가 그런 평가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서위심화(書爲心畫), 글씨는 마음의 그림이다"라는 동양 서예의 관점에서 보면,
한석봉의 글씨를 예술이 아니라고 보는 것은 아무리 추사라 하더라도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주장처럼 느껴집니다.
서예는 단순히 글자를 쓰는 기술이 아니라, 필력과 정신, 수양과 개성을 표현하는 예술로
수천 년 동안 인정받아 왔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선을 대표하는 명필인 한석봉의 글씨 역시 예술작품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일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현대미술에서 앤디 워홀이나 마르셀 뒤샹의 작품을 예술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논쟁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결국 예술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느냐의 문제이니까요.
고견주셔서 감사합니다. 곡선배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