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설 / 오탁번

[섬초롱]

폭설 / 오탁번

삼동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렀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 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의 미아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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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에서 웃음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절망과 고뇌, 엄숙함이 대신 그 자리를 채우고 있지요.

웃음이 있다 하더라도 냉소나 조소인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

​무거운 역사의 중압감에 짓눌려 살아오는 동안 시와 소설이

​웃음을 잃고 지나치게 근엄한 모습만 띄게 된 것이지요.

​조선 후기만 하더라도 우리 문학에는 해학과 골계가 있었지요.

​그러나 요즈음엔 웃음을 만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시에서는 더욱 그러하지요.

다행히 오탁번 시인과 신현정 시인의 시에서 웃음을 ​발견할 ​

​수 있는 것은 큰 기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웃음의 미학이

​생금처럼 반짝이는 두 사람의 시는 우리 시단의 소중한

보물입니다.

폭설이 내린 외진 동네의 이장은 깜짝 놀라 소리칩니다.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

눈이 좆나게 내려부렀당께!”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눈을 치웠으나 이튿날 다시 폭설이

​내려 이장은 다시 주민들을 불러 모읍니다. 이틀 연속

눈 치우는 일로 녹초가 된 주민들은 삼겹살과 ​소주로 피로를

씻습니다. 그 날 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여인네들의

실루엣이 ​비치구요. ​다음 날 “하느님이 행성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마을 전체가 눈에 파묻힙니다. 생계 수단인 축사도

폭삭 무너지구요. 이 상황에서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울부짖습니다.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독자는 웃음을 참지 못합니다.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가 매 연마다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게

​하지요. 한 순간, 우리 사회를 뻣뻣하게 하는 근엄과 엄숙을

​통쾌하게 날려 버립니다. 웃음은 본래 기존의 사고 체계가

​붕괴되면서 나타나는 것이지요. 오탁번 시인은 현실 접근 방법이

​대단히 유연하고 여유롭습니다. 경직되지 않은 현실 인식의

​자세가 시를 재미있고 넉넉하게 만듭니다.

오탁번 못지않은 시인 중에 신현정이 있습니다.

『자전거 도둑』『바보 사막』『화창한 날』등의 뛰어난

시집을 남긴 작고시인이지요. ​그의 시에도 웃음의 미학이 활짝

꽃피어 있습니다. ​신현정의 <하나님 놀다 가세요>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시인은 저 높은 곳에서 잔뜩 부어 있는 하나님을 향해 염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는 아름다운 지상으로 내려오라고 손짓합니다.

​엄숙한 종교적 권위와 이미지를 희극적 장면으로 슬쩍 바꿔

놓는 ​시인의 상상력이 재미있습니다. 근대적 사유의 경계선을

​뛰어넘은 ​니체는 웃음이 없는 진리는 진리가 아니라고 했지요.

​우리 시에서 <폭설>같은 경쾌한 웃음이 ​흘러넘치기를,

​그리하여 ​새해에는 모두의 가슴에 맑고 환한 웃음이 옹달샘 같이

​샘솟기를 기대해 봅니다.

/ 홍일표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