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피어르는 즐기에 따라 시에서는 지금 가로수 가지치기의 전지 작업을 하고
있군요, 가만히 길을 걸어가면서 전지작업 하는 장면을 지켜보노라니 예전 군
생활이 생각납니다.
그러니까 1976년 8월 18일 판문점에서 전지작업 하고 있던 우리 아군에게 북괴
가 내려와서 미군장교 2명을 죽이는 큰 사건이 발생하고, 전쟁준비인 데포콘3가
발령 되었던 무렵 나는 마침 휴가를 나와 있었습니다.
원래 웅변을 중학교 시절부터 시작해서 여기저기에서 크고작은 상도 타곤했었는데
군대에서도 반공웅변대회에 나가 우리부대의 명예를 세우준 일이 있었지요 처음에
중대대회에서 1등 다음에는 대대 대회에서 1등 그리고 연대 대회에서 1등. 그리고사
단대회에서 1등 그런다음에 군단대회에 가서는 1등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우리 대대장님은 <임복진>이라는 대령님이셨는데, 훗날 전라도의 국회의원을
하셨던 아주 멋진분으로써 저의 웅변을 매우 좋아하시며 저를 개인적으로 아껴주
신분이 셨습니다. 그 당시의 웅변 한 토막은 이러했습니다.
(자유 대한으로 탈출할 것을 결심한 열사람의 북한 동포가 임진강에 고무보우트를
띄우는 순간 그만 괴뢰경비정에 걸리고 말았는데, 불행히 부인 한 사람이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등에 업고있었습니다. 어린아이가 울음 소리를 내자 열사람이 생죽음
을 당하느냐 아니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내손으로 죽여야 하는가를 생각한 어머니
는 차마 누를 수 없는 아들의 목을 누르기 시작했습니다. 안죽겠다고 안죽겠다고, 발
버둥치는 어린자식의 목을 누르는 어머니의 눈에서는 피눈물이 흘렀고 이 광경을 보
고있던 아홉사람도 말없이눈물을 흘렸으니하늘도 울었고 흐르는 임진강물도 소리없
이 울었습니다 ) 이렇게 내가 웅변을 할 때마다 우뢰와 같은 박수속에 1등의 영광을
받았고 포상휴가를 나왔던 것입니다. 그때 터진 판문점 도끼미류나무 사건때문에
동네 방송에서 휴가장병은 즉시 귀대하라 해서 부대에 왔는데 그것이 또 공로가 되
어 전우신문에 내이름이 나오고 또 포상휴가가 내려왔지만 취소하고 안나왔습니다.
첫댓글 아 ~ 마음 아파라 ~
저런 슬픈 스토리를
웅변으로 어떻게 묘사를 하셨을까요
낭독을 하시면서도
마음이 울컥 하셨을것 같네요
그래요
그 긴세월동안에 지금 이순간까지
저의 머리속에 남아 있는 것 보면
그 당시에는 마음에 큰 울림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뒤어어 외친 마지막 소절이
생각납니다
(315초소 나의 경계구역으로는 단 한놈의
적도 침투하지 못하도록 강철같이 지키겠습니다
놈이 만약 한 발의 총탄을 쏜다면 나는 열발의
폭탄을 던질 용기가 있다는 것은 여러분과 굳게
약속 드리며 이만 하단 하겠습니다 ....충성!)
찾아주신 발걸음 감사 드립니다.
오랫만에 충성 소리를 듣습니다.
66년 월남전에서 적탄에 부상당한 병사가,
군 병원으로 후송 코저 헬기에 오르면서 중대장님 완치되어 곧 귀대 하겠습니다.
하면서 마지막으로 " 충성" 하면서 거수 경례를 하고 떠난 김 병장이 그립도다.
좋은 하루 되소서.
월남전을 다녀 오셨군요
그러면 국가유공자시군요
우리 이종사촌 형님도 월남을
다녀 오셨지요
감사합니다
아직도 잊지 못하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북한이 저지른 일들이지요
미군 장교 두명을 도끼로
살해한 사건은 큰 충격이었지요
참으로 오래전의 추억을
담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당시에 제가 막 제대무렵입니다
참으로 큰 사건이 였습니다
늘로리를 가니까 그 우중에도
급매물 집팝니다라고 써붙인
집도 있더라구요 참 웃기는일
였어요
감사합니다
너무도 가슴아픈 사건을
상기시켜주는 글 이네요
아는 지인께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그날이
자신의 생일날 이라고 해서
그분을 뵐때면 그날을 가끔
떠올리곤 했는데...
앞으로는 더욱 자주
떠오를것 같습니다 ㅠ
차마두님...
그래요 정말 가슴절절한 내용
입니다. 다시는 그런 만행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아시는분 생신이 8월 18일인가
보네요 공연히 마음이 아프시겠어요
이땅의 비극은 언제 끝나려는
정말 마음 아픕니다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