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Summertime - Miles Davis
재즈계의 거인 중의 거인.'철의 입술'이라 불리는 트럼펫주자. 마일스 데이비스...
영혼을 담은 그의 영롱한 트럼펫 선율 때문에 재즈속에서 깊이 빠진채 아직까지도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오늘도 점점 더 늘어만 간다.
본곡은 20세기를 대표하는 위대한 작곡가인 조지 거쉰의 수많은 히트곡들중 가장
유명한 노래로서 뮤지컬 Porgy & Bess에 삽입된 이후, 전세계적으로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으며, 여러 뮤지션의 연주와 노래를 통하여 헤아릴수 없으리만큼
많이 재해석되었지만, 그 중에서 마일즈의 버전은 거쉰이 표현하고자 하였던
summertime의 감상포인트인 차갑고 무거운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하였다는 찬사를
듣고 있다.
재즈를 듣기 시작하고 얼마 안되서 이사람 엘범을 구입해서 들었습니다.
처음듣고 이걸 돈주고사야했나... 내용이 먼지... 이해가 되질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즈모임에가서 도대체 왜 좋은지를 물어봤더니...
더 들어보랍니다. 귀에 딱지가 앉을때까지...
듣고 또 듣다보니 진짜 멋진곡이였더군요.
So what...
우짜라고... 이런뜻이죠. 듣는 사람들도 딱 느끼기좋게 만든곡인거 같았습니다.
섬머타임도 첨 들으면 이사람에 대해서 잘 모르겠죠?
정신줄 탁 놓고 들어보세요. 듣다보면 우아... 이런... 생각이 들지도.. ㅋㅋㅋ
---------------------------------------------------------------------------------------------------절취선
맨해튼 52번가에 있는 클럽들에는 소규모 비밥 그룹이 많았는데, 그 실험정신 투철한 그룹들이
재즈의 혁명을 일으켰다. 당시, 뉴욕은 전위예술의 본거지요, 지적 자극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의
거실들에서는 문학, 연극, 회화를 토론하는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곤 했다.
52번가 옆에 편곡가인 길 에번스가 살고 있었다. 비밥의 대의를 찾아 얼마 전에 뉴욕에 도착한
에번스가 사는 곳은 조그만 방 하나뿐, 거실도 없었다. 그러나 그 방에는 밤낮으로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흑인 음악의 리더들이 방 한구석에 있는 턴테이블 주위에 둘러앉아 레스터 영과 찰리
파커의 색소폰 연주 음반뿐만 아니라 알반 베르크와 모리스 라벨 같은 유럽 작곡가들의 음반을
들었다. 그들은 그방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고, 다른 젊은 음악가들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였다.
1940년대에 들어서자 재즈는 더 이상 미국 흑인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밥은 서구의 클래식 음악보다
더 자유롭고 좀더 구체적인 표현양식을 갈구하던 모든 음악가와 음악애호가에게 재즈를 한층 접근
하기 쉬운 언어로 만들었다.
쿨의 탄생
쿨(cool)은 시원하고 상쾌한 상태를 뜻한다. 물론 긴장도 풀리고, 누군가 흥분해 있을 때 우리는
"침착해(Keep cool)"라고 말하지 않는가. 1940년대 후반에 백인 재즈 음악가들이 찰리 파커의
재즈를 새롭고 '쿨'한 방식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에서 그 이름이 그대로 굳어졌다.
그런데 역설적이긴 하지만, 쿨 재즈의 시작은 흑인 음악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대담함 덕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1949년에 나온 데이비스의 음반은 후일에 재발매되면서 <쿨의 탄생
(Birth of the Cool)>이라는 제목으로 묶일 정도로 대단히 중요하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 시기의 또 다른 스타 트럼펫 연주자인 디지 길레스피와 비교할 때 대가다운
기교라든가 화려한 맛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소박하고 경쾌하며 사려 깊은 스타일을 창조해
냈다. 조용한 울림이 특징이며, 고음을 피해 중간 음역을 선호하는 것이 그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마치 디지 길레스피의 빠른 연주에 "침착해"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레스터 영이 성미 급한 콜맨 호킨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흉내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나 그는
비밥의 특징인 빠른 유니즌 프레이즈와 자유분방한 솔로 연주에 만족하지 않았다. 1948년 앙상블을
조직할 때 데이비스는 새로운 것을 추구하려 했다. 비밥의 5중주단 대신 9중주단을 결성하기로 한
것이다.
이어 그는 편곡가 길 에번스와 제리 멀리건에게 전화했다. 그 밴드는 데이비스의 트럼펫을 전편에
내세웠다. 그밖에 색소폰 두 대와 트롬본, 리듬 섹션 그리고 당시 거의 쓰이지 않던 프렌치 호른과
튜바가 가세헸다. (튜바는 뉴올리언스의 초기 재즈 앙상블에서 리듬 섹션에 더블 베이스를 쓰고
있었다.)
에번스와 멀리건과 데이비스
트럼펫과 트롬본, 색소폰을 아주 분명하게 구분하는 밴드도 있지만 길 에번스는 편곡할 때 다양한
음색을 섞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농밀함과 풍부함을 선호했다. 그의 편곡법은 색채의 흔들림과
하늘거리는 옷감의 감촉을 일깨워 주었다. 소리의 유혹이 우위를 차지했고, 그의 는
극적인 무감각 상태로까지 나아갔다.
데이비스는 때로 다른 편곡가들과도 함께 일했다. 모두 에번스의 방에 모여드는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바리톤 색소폰의 제리 멀리건이 특히 창의적이었다. 그는 전통적인 8마디 형식과 결별
하려고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화성구조가 여전히 이 관례에 따라 움직이고 있을 때도 그는
그것을 감추기 위해 편곡법을 바꾸기도 했다. 더욱 중요한 점은, 의 도입부에서 독립된 2/4
박자와 3/4박자의 마디를 사용함으로써 4/4박자의 우월성과 리듬의 통일성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것이다.
데이비스 9중주단은 재즈의 가벼운 측면을 논하는 당시의 평가에 맞서 싸웠다. 그들의 음악은
시끄러운 클럽에서가 아니라 마치 카네기 홀에서 들을 때처럼 주의력을 집중해야 했다.
1949년에 캐피틀 레코드 회사에서 녹음할 때 마일즈 데이비스는 알토 색소폰을 부는 리 코니츠를
솔로 주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초청했다. 코니츠는 그의 중요한 역할에 비추어 볼 때 성공할 것
같지 않은 후보자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비밥 색소폰에서 우디알렌(최근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이
미국 영화사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슷한 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즉 비밥이 다양한 얼굴을 자랑하는
것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코니츠는 얼빠진 학생처럼 창백한 얼굴의 소유자였으며, 그의 연주 또한
얼굴과 아주 흡사했다. 그는 레스터 영과 레니 트리스타노의 프레이즈의 영향을 받아 찰리 파커의
현란함을 약간 다소곳하게 만들었다.
피아노를 연주한 트리스타노는 밥 음악가들의 발견에 이론적인 기반을 제공했고, 발견들을 강의를
통해 전파시켰다. 그는 멜로디와 하모니,리듬의 강조를 통해서 밥의 표현주의적 면모를 합리적으로
만들어 나갔다. 그는 젊은 백인 음악가들과도 어울렸는데, 특히 색소폰의 리 코니츠, 원 마시와
잘 어울렸다. 이들은 비브라토가 없는 음색과 경쾌한 공명으로 밥의 현란한 언어를 순화시켰다.
그리고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푸가와 대위법을 참조하여 2성부의 즉흥연주를 즐겼다. 그럴 때면
레니 트리스타노는 앞부분의 즉흥 연주를 책임졌다(정해진 주제나 하모니에 관한 사전 동의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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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크의 갭
마일즈 데이비스의 영향은 1950년대 내내 계속되었다. 사실 그는 <쿨의 탄생> 이래 끊임없이 자신을
비밥의 중요 연주가로 인식시켜왔다. 그와 대조적으로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이자 즉흥연주의 대가인
셀로니어스 몽크는 제대로 이해받지 못하고 있었다.
1954년 12월 24일에 두 사람이 한 스튜디오에 나타났다. 연주가 시작되고 한동안 몽크의 이상한
하모니에 고전하던 데이비스의 입에서 자신이 솔로를 하는 동안 피아노는 조용히 있으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데이비스는 차라리 더블 베이스 반주로 혼자 연주하는 것이 더 좋았고, 그렇게 하는
편이 훨씬 더 많은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의 두번째 녹음이 있었다. 과연 여기서 몽크의 낭패감이 어떤 작용을 했을까?
전에도 그러했듯이 몽크의 솔로가 시작되었다. 이번에는 조지 거슈윈의 주제를 죽죽 늘어뜨리며
해체해 나갔다. 이윽고 리듬의 변화와 예기치 못한 불협화음이 중첩되면서 듣는 사람은 발 밑의
계단이 꺼지는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오랜 시간 침묵이 흘렀다. 몽크가
연주를 중단한 것이다. 참다 못한 마일즈 데이비스가 트럼펫으로 빈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몽크가 정신을 차린 듯 다시 피아노 건반 위에 몸을 던졌다.
몽크의 이 '갭gap'에 관해서 많은 말들이 있지만 아무도 두 사람 사이에 일어난 일을 정확하게는
알지 못한다. 어쨌든 그 사건은 두 비밥 거물의 기본적인 성격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현대의 은둔자 셀로니어스 몽크는 마치 폭발물 속에 성냥을 던지듯 피아노에 자신의
하모니를 내던졌다. 각각의 새로운 화성적 조합이 그를 깊은 사색 속으로 몰아넣는 듯했고, 마치
거기서 깨어나듯 다음 화성이 솟아 나왔다. 한동안 아무 활동도 보이지 않던 몽크는 1982년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 가장 많이 연주되는 목록 속에 들어가 있다. 몽크의 연주의
기발함은 새로운 세대가 당대의 관례와 결별하려고 할 때마다 하나의 준거로서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셀로니어스 몽크가, 마일즈 데이비스의 솔로때 침묵을 지키도록 명령을 받은 첫번째 피아노 주자는
아니었다. 데이비스가 각 주자의 역할과 도입 순서를 정하는 방식은 극장에서 연주할 때 극명하게
드러났다. 또 그가 LP레코드의 시간 제한을 관리하는 모습은 영락없는 진짜 지휘자였다. 자신이
연주하지 않을 때는 다른 악기 부분을 증가시키거나 분위기를 바꿨다. 또 특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
싶으면 서슴없이 스튜디오의 불도 꺼버렸다. <쿨의 탄생> 편곡자들이나 자신의 5중주단과 일할 때
데이비스는 언제나 위대한 극작가였다.
1955년에 찰리 파커가 죽었다. 그러나 그 상실에도 불구하고 흑인이든 백인이든 재즈 음악가들에게
기본 요소들이 풍요로워지면서 밥에는 일정한 미래가 보장되어 있었다. 즉, 하드 밥(Hard bop)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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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녀사냥'(매카시 의원에 의한 공산당 시비)은 반동의 물결에 휩싸인 미국 사회 구석구석으로
파고들었다. 얼마 후에 매카시즘은 퇴조했지만 흑인에 대한 대우는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1959년
8월 26일, 마일즈 데이비스는 그가 일하던 버드랜드 앞에서 "지나가라"는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찰에 난폭하게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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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소폰 주자인 존 콜트레인은 차분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음악에 완전히 빠져 있었다.
그러나 그가 더욱 깊이 파고든 문제는 자신의 음악을 통해서 풀고자 했던 철학적, 음악적 숙제였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콜트레인의 끝없는 질문에 화가 나기는 했지만 콜트레인에게 자신의 5중주단에
합류해 달라고 요청했다. 아마 데이비스는 콜트레인이 쏟아내는 질문을 통해 그가 위대한 재즈
음악가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데이비스와 함께 시작한 후 콜트레인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예술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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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데이비스의 끝없는 노력
마일즈 데이비스가 한창 날리던 1950년대말 짧은 기간(1958~1959년)동안 빌 에번스와 존 콜트레인이
데이비스 그룹에 있었다. 데이비스는 빌 에번스 이후 피아노 주자를 두 번 바꾸었는데 처음에는
윈턴 켈리, 두번째는 허비 행콕이었다. 행콕은 빌 에번스의 세련미에다 펑크 피아노의 좀더 격렬한
연주를 결합시켰다. 그에 비해 데이비스는 존 콜트레인을 대신할 만한 웨인 쇼터를 찾기까지 몇년을
보내야 했다.
웨인 쇼터를 찾은 뒤로 데이비스 앞에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 오늘날 소규모 그룹을 위한 모던
재즈의 걸작으로 평가받고 있는 레코드들이 속속 탄생한 것이다. 가 일련의 음악적 의문에 스스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이듬해에 해답을 던지는
식으로 나왔다. 당시, 데이비스 5중주단은 진정으로 실험적인 그룹이었다. 녹음하러 갈 때마다
새로운 발전을 보인 것이다.
여기서, 리듬 섹션은 빌 에번스 트리오의 유산을 이어받았다. 허비 행콕(피아노)은 암시적이었고,
론 카터(베이스)는 더 이상 템포를 기계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약동감을 자아냈다.
토니 윌리엄스(드럼)는 정교하고도 과감하게 반주자의 역할에서 탈출했다. 위리엄스는 2박자로
쪼개진 리들들을 중첩시킴으로써 엘빈 존스의 폴리리듬을 전파, 다양화했다. 녹음을 거듭할수록
데이비스 5중주단은 웨인 쇼터의 혁신적인 아이디어에 의존한 레퍼토리들을 탐구해 들어갔다.
즉흥연주의 대가인 쇼터는 데이비스에게 심화된 모들 연주를 통해 더욱 자유스럽게 연주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었다. 무대에 섰을 때 데이비스는 전통적인 프로그램에 머물렀다. 그러나 스튜디오에
들어갔을 때는 대중의 귀에 다르게 들렸다.
20년전 찰리 파커가 그랬던 것처럼 데이비스의 방법은 당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지금까지
소규모 재즈 그룹의 관례가 되고 있다.
록의 폭발
1960년대가 끝나갈 무렵, 자신의 5중주단의 실험에 고무된 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신을 록과 그
엄청난 관중 앞에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록은 컨트리 뮤직과, 부기로부터 유래한 흑인 로큰롤의 혼합물인데 1950년대 중반 백인 음악가들에
의해 태어났다. 그후 10년 동안 록은 리듬 앤드 블루스의 효과적인 리듬 섹션을 채택했으며 솔과
다른 미국음악 형식의 진보에서 혜택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녹음시설과 생산시설이 뒷받침
되었고, 어번 블루스와 함께 등장한 전자악기를 이용했다.
록-'기타 영웅'의 출현으로 이어진다-뿐만 아니라 음악 형식의 변모에서도 악기 연주실력이 갈수록
중요해졌다. 1960년대 후반에 들어서자, '로커'들은 클래식, 재즈, 비유럽 전통음악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갔다. 이 시점 이후, 록은 거대한 사운드 시스템의 설치와 함께 대규모 야외공연도
가능해졌다.
히피의 시대
결국 음악계에서는 록과 재즈가 종이 한 장 차이였다. 두 형식 모두 블루스의 부활뿐만 아니라
리듬 앤드 블루스에도 아주 근접해 갔다. 미래의 재즈 연주가들과 록 스타들이 알렉시스 코너나
그레이엄 본드 그룹에서 훈련을 쌓았다.
1960년대 후반에는 '프로그레시브 록'과 아방가르드 재즈가 나란히 달렸다. 그리고 '소프트 머신'
같은 그룹들이 모든 세대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미국에서는 '블러드,스웻 앤드 티어스''시카고'
같은 백인 록 그룹이 리듬 앤드 블루스의 브라스 섹션을 특징으로 내세웠다.
많은 재즈 음악가들이 록의 상승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찰스 로이드는 키스 자렛의 반주로
콜트레인 류의 감정을 '포크의 부활'과 비틀즈의 멜로디의 정교함에 적용하는 데 성공했다. 리듬
앤드 블루스의 흑인 음악 뿌리 쪽으로 훨씬 더 나아간 캐논볼 애덜리와 함께, 일부 음악가들은
헤럴드 로즈와 레오 펜더가 발명한 전자 피아노로 실험에 나섰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트럼펫에 전기를 꽂았다
이제 프리 재즈의 엘리트주의와 록(그의 표현을 따르면 록은 리듬 앤드 블루스를 약화시켰다)에
싫증을 느낀 마일즈 데이비스는 관심을 완전히 흑인 대중음악으로 돌려 버렸다. 특히 '슬라이 앤드
더 패밀리 스톤'의 펑크에 흠뻑 빠졌다. 슬라이 스톤은 제임스 브라운에게서 불려받은 격렬하고
노골적인 미학을 실천에 옮기고 있었다.
1968년, 데이비스는 록 기타의 영웅 지미 핸드릭스를 만났다. 핸드릭스는 블루스의 힘을 팝의
보편성에 결합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데이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중요시되지 않던 기타가 재즈의 진보를 이끌 악기라는 점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키보드,베이스는 물론 관악기까지 기타의 뒤를 이어 전자화되기 시작했다. 음량이 커지고,
새로운 유형의 소리가 나타났다. 1969년에 영국 무대에서 건너온 젊은 기타리스트 존 매클러플린과
함께 를 녹음한 후, 데이비스의 세계에서는 전자악기가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후 몇 개의 암시적인 소절로만 작품을 쓰고, 트럼펫에 와우와우 페달을 단 데이비스는 이어 나올
음반들에서 진정한 전자악기의 향연을 벌이게 된다. 그 음반들에서는 일렉트릭 기타, 베이스 기타,
다양한 키보드, 세계 각지의 퍼커션 악기가 새롭게 조합되고, 토니 윌리엄스로부터 물려받은 2박자
해머링이 나타난다.
마일즈 데이비스 사단의 재즈록
마일즈 데이비스 밴드에서 일했던 수많은 음악가들은 밴드에 있을 때의 경험을 살려 작업하려 했고,
또 거기서 얻은 팬을 그대로 붙잡고싶어했다. 그들은 록의 에너지를 자신들 밴드에 전이시킴으로써
재즈 음악가로서의 기술을 재즈록의 연주에 이용했다. 예를들어, 존 매클러플린은 1971년에 시작한
'마하비시누 오케스트라'를 이끌면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매클러플린은 존 콜트레인에게서 물려받은
거장다운 연주법과 마법들을 록의 청중들을 열과시키는 기교적인 연주와 결합시켰다.
콜트레인처럼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면서 인도에 심취해 있던 그는 인도 음악의 운율적이고 선법
위주의 정교함을 리듬 앤드 블루스의 하모니와 리듬의 효율성과 혼합시켰다.
피아노의 얀 해머는 초기의 전자 키보드가 제공하는 프레이징의 가능성을 탐구한 선구자였다.
바이올린 주자 제리 굿맨은 대중의 관심을 끌었고, 드럼의 빌리 코햄은 박자가 일정치 않은
음악에서도 테크닉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증명해 보였다.
드럼 주자들은 박력과 빠른 연주솜씨, 그리고 인상적인 장비로 엄청난 흥분을 자아냈다. 이제, 토니
윌리엄스나 빌리 코햄 같은 리더들은 밴드 앞에 나서서 다른 연주자들의 명성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칙 코리아의 그룹 '리턴 투 포에버'에서 연주한 레니 화이트(드럼)와 스탠리 클라크(최초의
위대한 전자 베이스 독주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았다. 칙 코리아 자신은 마일즈 데이비스의 첫번째
전자악기 실험에 동참한 바 있었고, 그의 키보드를 다루는 놀라운 기교와 뛰어난 작품은 자못
매력적이었다. 기타 주자인 알 디메올라의 반주로 스페인 음악으로 다가간 칙 코리아의 강력한
라틴 음악적 감동은 청중을 열광시켰다.
역시 마일즈 데이비스의 세계에서 나타난 허비 행콕은 미국 흑인 대중음악의 전통에 훨씬 더 깊이
뿌리를 내린 그룹을 만들었다. 드럼의 하비 메이슨의 깊은 타법에 의존한 행콕의 음악은 데이비스의
음악보다 더 펑키해졌다. 일반대중이 더욱 접근하기쉬운 그의 음악은 성공을 거두었고, 특히 그룹의
이름을 그대로딴 앨범 는 엄청난 성공작이었다. 이제 어쿠스틱과 전자음악 사이에서
오락가락하고 있는 칙 코리아와 마찬가지로 행콕은 1960년대의 마일즈 데이비스 5중주단의 정신에
근접한 형식으로 돌아감으로써 성공적으로 '일렉트로 펑크'의 길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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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은퇴한 지 6년만에 마일즈 데이비스가 무대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단순히 위대한 트럼펫
주자가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우아한 사람의 하나, 바로 재즈의 상징었다. 그는 히트하고 있는
팝 작품들(토토, 카메오)을 들었고 그들의 음악(신디 로퍼, 스크리티 폴리티)을 빌었다. 1987년
를 내면서 그는 컬럼비아사를 떠나 워너사로 옮겼다. 최근의 펑크 작품들을 효율적으로 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프린스의 테마를 차용하고, 퍼블릭 에너미의 랩 음악가 플레이버 플라브와 함께
작품을 내는 등 1991년 그가 죽을 때까지 그 방향을 계속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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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나는 길 에번스의 집에 들르곤 했다. 그가 그 음악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지 들을 생각이었다.
길과 나는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의 음악 아이디어를, 그는 나의 것을 설명할 수 있었다.
길과 함께 있으면 인종이 전혀 문제가 되지않았다. 우리의 이야기는 언제나 음악에 관한 것뿐이었다.
그는 피부색에 개의치않았다. 내가 만난 백인 가운데 그런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가 캐나다출신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쿨의 탄생>을 만들면서 길과 나는 진정한 친구가 되었다. 길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그런
친구였다. 그는 아무도 못 보는 것을 볼줄 아는 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그림을 좋아해서 본적도
없는 것을 보여 주곤 했다. 또 어떤 때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다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마일즈
여기 첼로를 들어 봐. 저 부분을 다르게 연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그는 언제나 음악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는 언제나 음악 안으로 성큼 들어가 다른 사람들이 미처 듣지 못한
것들을 끄집어 내곤 했다. 새벽 3시에 전화를 해서는 "마일즈, 기분이 울적하면 스프링빌을 듣게."
하고는 전화를 끊는 사람이 그였다. (그 곡은 <마일즈 어헤드>에 들어 있었다) 길은 사색가였고,
나는 그런 점을 사랑했다.
그를 처음으로 만났을 때였다. 그는 내가 연주를 하고 있을 때 버드를 들으러 오곤 했다. 그는
양고추냉이를 한 봉투 가득 들고 들어와서는 소금을 쳐서 먹었다. 키 크고, 여윈 백인 남자인 그는
캐나다 출신으로 멋있는 친구였다. 나는 그 같은 백인을 본 적이 없다. 나는 이스트 세인트루이스의
흑인들에 익숙했다. 바비큐한 돼지코 샌드위치를 한아름 들고와서는 그곳이 어디든 신경쓰지 않고
그 자리에서 먹어 치우는 사람들만 보아 왔다.
그런데 나이트클럽에 양고추냉이를 들고 들어와서는 소금을 쳐서 먹는 사람? 그것도 백인이? 이스트
52번가에 길이 있었다. 한창 유행하던 구두와 신사복을 입은 흑인 멋쟁이 음악가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모자를 눌러쓴 길이 있었다. 정말, 그는 뭔가 다른 사람이었다.
55번가에 있는 길의 지하실 방은 음악가들이 빈둥거리는 곳이었다. 너무나 어두워 밤낮이 따로 없는
그곳에 가면 맥스, 버드, 제리 멀리건, 조지 러셀, 블라섬 디어리, 존 루이스, 리 코니츠, 조
카라시를 언제나 만날 수 있었다. 엄청나게 큰 침대 위에는 언제나 모든 것에 끼여드는 고양이가
있었다. 우리는 둘러앉아 음악에 대해서, 아니면 뭔가에 대해서 토론했다.
...
길은 우리 모두에게 어미닭이었다. 그는 침착하게 언제나 모든 것을 진정시켰다. 그는 그냥
음악가들 옆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옆에 있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사람을 배려하는 법과 음악에 대해서, 특히 음악을 편곡하는 법에 관해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마일즈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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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데이비스와 프로듀서 밥 와인스톡이 <쿨의 탄생>에 관해 이야기하다
길과 나는 이미 같이 일하고 있었고,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나는 내가 듣고 있던 것보다 더 많은
솔로를 할 수 있는 수단을 찾고 있었다. 내 음악은 조금 느리고 버드의 것보다 긴장도도 덜했다.
길과 좀더 미묘한 보이싱을 실험해 보자는 이야기를 할 때는 정말 흥분되었다. 제리 멀리건, 길과
함께 그룹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9중주단이 알맞을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길과 제리는 내가 미처 토론에 참여하기도 전에 어떤 악기들을 넣을 것인지
결정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론, 음악 해석, 곡 선정은 내 아이디어였다.
나는 리허설 홀들을 계약하고, 연락하고, 필요한 것들을 준비했다. 1948년 여름부터 길, 제리와
함께 나는 이 일을 하고 있었다. 1949년 1월과 4월에 녹음을 했고, 1950년 3월에 다시 녹음을 했다.
나는 일거리를 물어 왔고, 캐피틀 레코드사와 계약했다. 그러나 길과 같이 일하려면 작곡에 신경을
써야 했고, 또 길의 아파트에서 피아노로 연주해 주어야 했다.
9중주단을 시작하려고 할 때 나는 일토 색소폰으로 소니 스팃을 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소니의 소리는 버드와 매우 비슷했다. 그래서 그를 제외했다. 제리 멀리건은 리 코니츠의 소리가
하드 비밥의 소리보다 경쾌하다며 그를 넣자고 했다. 그는 코니츠의 소리가 우리의 앨범과 밴드를
뭔가 다르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리는 나나 알 맥키번, 맥스 로치, 존 루이스 등
구성원 모두가 비밥 출신이라 아무래도 옛날의 빅 밴드를 흉내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 충고를 받아들여 리 코니츠를 채용했다.
...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연주하는 방식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메트로놈>지의 배리 울라노프가 우리
음악에 대해서 약간 어리둥절해하던 것이 생각난다. 카운트 베이시는 매일 저녁, 우리 음악을
들으러왔는데, 아주 좋아했다. 그는 내게 "느리고 이상하기는 하지만 좋아. 아주 좋아."라고 말했다.
버드를 비롯해서 많은 음악가들이 우리 음악을 들으러왔고, 다들 좋아했다. 특히 캐피틀 레코드사의
피트 루골로는 아주 좋아했고, 자기 회사에서 녹음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왔다.
...
<쿨의 탄생>은 흑인 음악의 뿌리에서 나왔다. 듀크 엘링턴의 음악이 그 뿌리이다. 우리는 클로드
손힐처럼 소리를 내려고 노력했다. 그는 자신의 스타일을 듀크 엘링턴과 플레처 헨더슨으로부터
가져온 사람이었다. 길 에번스는 듀크 엘링턴과 빌리 스트레이혼의 열렬한 팬으로 <쿨의 탄생>을
편곡했다.
---<마일즈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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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데이비스는 자신이 모들 재즈를 택하는데 영향을 미친 두 음악가(빌에번스와 존콜트레인)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트레인은 내가 들어 본 색소폰 주자 가운데 소리가 가장 크고 빨랐다. 그렇게 동시에 큰소리로
바르게 연주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연주가가 큰소리를 낼 때는 스스로 자제하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하려다가 낭패를 당하는 색소폰 주자를 많이 봐 왔다. 그러나 트레인은
정말 굉장했다. 악기를 입에 문 그는 마치 신들린 것 같았다. 연주할 때는 한없이 정열적-격렬한-
이지만 평상시에는 너무나 조용하고, 부드러웠다. 멋진 친구였다.
캘리포니아에 같이 있을 때였다. 트레인이 치과에 가서 이를 넣어야겠다고 했다. 나는 그가 한번에
두 음을 연주할 수 있었던 것은 이가 하나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겁에 질렸다. 이제 막
리허설을 할 참인데다 모두 연락해 둔 터였다. 나는 치과 약속을 미룰 수 없느냐고 물었다, "안돼요.
리허설에 빠지겠어요." 나는 어떤 종류로 끼워 넣을 거냐고 물었다. "이왕 박는 거, 죽을 때까지
가는 걸로 해야지요." 그래서 나는 연주하기 전에 뺐다가 다시 낄 수 있는 걸로 하라고 설득했다.
그는 나를 미친 사람 구경하듯 쳐다보았다. 그는 치과에 갔다 오더니 표정이 피아노 같아졌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었다.
그날 밤의 연주회-블랙호크에서였던 것 같다-에서 나는 먼저 내 솔로를 불고 피릴 조의 뒤로 들어가
트레인이 불기를 기다렸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트레인의 이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가 여느 때처럼 부는 게 아닌가. 아이고, 살았구나!
레드 갈런드가 나간 후 빌 에번스를 발견했다. 모들을 아는 피아노 주자가 필요하던 때에 빌은
적임자였다. 빌과 함께 공부했던 조지 러셀이 소개했다. 나는 55번가 길의 집에서 세월을 보내던
때부터 러셀을 알고 있었다. 모들에 깊이 빠져 들면서 조지에게 내가 원하는 연주를 할 수 있는
피아노 연주자를 아느냐고 물었고, 조지는 빌을 추천했다.
빌은 라흐마니노프나 라벨 같은 클래식 음악가에 관해서 굉장히 많이 알았다.
...
빌은 내가 피아노에 대해서 바라던 차분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접근하는 방식, 그가 가진
소리는 수정의 소리, 아니 깨끗한 폭포에서 포말을 일으키며 떨어지는 물소리 같았다. 나는 빌의
스타일에 맞추어 밴드의 소리를 바꾸어야 했다. 빌은 리듬을 받고 연주했고, 나는 그가 밴드와
함께 음계를 연주하는 방식이 좋았다. 레드의 연주는 리듬을 지탱했으나 빌은 리듬을 깔고 연주
했다. 그것은 바로 모들에서 내가 바라던 것이었다. 빌이 훨씬 더 잘하고 있다는 점이 흡족했다.
---<마일즈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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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 데이비스를 연주하는 웨인 쇼터
공연 때는 들린다. (마일즈는 자유롭게 연주한다) 레코드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뭔가 자유를
찾아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느낌은 들지만... 그러나 공연 때 우리는 정말 자유롭게 연주하곤 했다.
특히 잭 디조넷과 칙 코리아가 있는 그룹과 함께 연주할 때나, 토니 윌리엄스와 허비 행콕과 함께
할 때는.
--웨인 쇼터 <재즈 매거진> 1971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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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이 가미된 소리
1969년 2월, 마일즈 데이비스는 <인 어 사일런트 웨이>와 함께 방향을 전환한다.
내가 지미 핸드릭스를 만난 것은 그의 매니저가 전화로 내 연주방식을 그에게 소개하고, 나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을 때였다. 지미는 내가 <카인드 오브 블루>에서 시도한 것을 좋아했고, 자신의
연주에 재즈 요소를 더 넣고 싶어했다. 그는 모든 소리를 이용해 연주하는 콜트레인의 방식을
좋아했고, 기타를 그와 비슷하게 연주했다. 게다가 내가 트럼펫으로 연주할 때 이용하는 기타
보이싱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우리는 같이 일하기 시작했다.
그는 정말 멋진 친구였다. 조용하지만 열정적이고, 남들이 보는 것하고는 전혀 달랐다. 무대에서
보여 주는 야성적이고 열광적인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같이 일하기로 하고 음악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나는 그가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존경하고 같이 연주한 음악가 가운데
악보를 읽을 줄 모르지만 뛰어난 음악가-흑인이든 백인이든-는 많다. 그러므로 지미가 악보를 읽을
줄 모른다고 해서 업신여기지는 않았다. 지미는 능숙하고, 타고난 음악가였다--스스로 깨우친.
(후일, 어떤 녹음 때) 우리는 조 자비눌이 <인 어 사일런트 웨이> 위에 쓴 것을 바꾸었다. 코드를
전부 삭제하고, 멜로디만 살려서 연주한 것이다. 나는 좀더 록에 가까운 소리를 내고 싶었다.
연습 때 조가 쓴 것과 비슷하게 연주했지만 코드가 전부 엉켜서 나에게는 맞지 않았다. 조가 작곡한
멜로디를 들을 수는 있었다. 녹음을 시작할 때 나는 악보를 내던지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멜로디만
연주하라고 말했다.
세 대의 피아노를 위해 몇 개의 간단한 코드 체인지를 작곡하는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작곡할 때 스트라빈스키가 어떻게 단순한 형식으로 돌아갔는지 생각하고 있던 터라
흥미로웠다. 그래서 하나의 비트 코드에 하나의 베이스 라인 식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연주하면
할수록 언제나 다르다는 점을 발견했다. 하나의 코드,하나의 휴지부,또 다른 코드, 이런 식이었다.
연주할수록 더욱더 달라진다는 점이 증명되었다. 1968년 칙, 조, 허비와 함께 연주를 할때부터였다.
<인 어 사일런트 웨이>를 위해 연주를 하면 할수록 그 점이 더욱 분명해졌다. 그때 나는 뭔가 좀더
큰 것, 한 작품의 뼈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두 박자에 하나의 코드를 작곡하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두 박자를 그대로 연주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하나, 둘, 셋, 다-덤
(da-dum)으로 할까? 나는 네번째 박자에 강세를 주었다. 첫 마디에는 세 개의 코드를 넣었던 것
같다. 어쨌든,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대로, 들은 대로 연주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나
나 자신은 단 하나의 코드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깨닫고 그렇게 했다. 앞서 생략했던 코드를 다시 연주하고 나니 마치 전체의 소리처럼 들렸다.
리허설 때 나는 사람들에게 그 말을 했고, 아무도 본 적이 없는 악상들을 실천에 옮겼다. 그것이
바로 <카인드 오브 블루>와 <인 어 사일런트 웨이>에서 시도한 방법이다. 8월의 그날, 우리는
52번가의 컬럼비아 스튜디오에서 일찍 작업에 들어가 꼬박 사흘을 일했다. 나는 레코드 제작을
하고 있던 테오 마체로에게 테이프를 그대로 돌리고 우리가 연주한 것을 전부 담으라고 말했다.
'모든 것'을 담되 중단하지도, 질문하지도 말라고...
일단 연주를 시작하면 나는 지휘자처럼 지휘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몇 가지 쓰기도 하고, 음악이
고조됨에 따라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와 다른 소리를 내라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들 그 음악속에서
나타나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때로는 테이프가 그냥 돌아가게 놔두는 대신 나는 테오에게 우리 작업 결과를 들을 수 있게 복사
하라고 말하기도 했다. 만약 어떤 지점에서 뭔가 다른 것을 넣고 싶으면 그 음악가를 집어 넣기만
하면 되었다. 간단했다.
---<마일즈 자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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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와 허비 행콕이 자신들의 음악에 펜더 피아노를 도입할 때를 이야기한다
내 머릿속에는 길 에번스가 빅 밴드에서 이용하던 보이싱이 베이스 라인과 함께 들어 있었다.
많은 이들이 이야기하듯이 내 그룹 속에 전자악기를 다루는 사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전자
음악을 넣고 싶어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피아노가 아니라 펜더 로즈가 줄 수 있는 보이싱을
찾고 있었다. 베이스도 마찬가지였다. 음악가는 자신의 시대를 가장 잘 반영하는 악기, 듣고자
하는 것을 들려줄 수 있는 기술을 이용해야 한다.
---마일즈 데이비스 <재즈 핫> 198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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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즈와 같이 연주를 할 때 키보드는 펜더 로즈 한 대뿐이었다. 나는 마일즈에게 물었다. "나보고
뭘 연주하라는 거요?" 그러자 쉰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 "저걸로 연주하라고."
나는 그걸 한번도 연주해 본 적이 없었다. 어쨌든 해보는 수밖에. 나는 하나의 코드를 연주해봤다.
와! 너무나 부드럽고 조화로우며 풍부해서 그 즉시 내 것으로 만들었다.
와우와우 페달에도 익숙해졌고, 플러그를 꽂을 자리를 찾기 위해 펜더의 뚜껑을 벗겨 에코플렉스
에코 체임버를 이용할 정도가 되었다. 당시는 아직 그렇게 만들어지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가 만들던 음악은 아방가르드였다. 그러나 여러 가지 스타일을 조합한 것이어서 훨씬 넓은
분야의 음악을 포괄하고 있었다. 나는 더 많은 소리를 내기 위해, 가끔은 드럼 스틱으로 로즈의
공명기를 두드리곤 했다. 헤럴드 로즈가 몇 번인가 우리를 보러 왔다. 그는 기묘한 연결선들을
보고는 이렇게 물었다. "아니, 도대체 무슨 장치를 단 거요?"
그 이후 로즈 피아노에 그런 효과들을 내는 잭들이 붙어 나오기 시작했다.
---허비 행콕 <재즈 핫> 1983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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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재국의 시공사책
책 내용 중, 마일즈 데이비스와 관련된 것만 뽑음.
Summertime - Miles Davis
첫댓글 재즈의 상징~!! 맨위에 사진..카리스마..오우,,완전 대단한 사람이네요...색소폰만큼이나 매력있는 악기군요~아..좋다....
매력하면 캣비 아니근나? ㅋㅋㅋㅋ
어
음.. 집에가서 천천히 읽어보고.. 음악부터 들어얒.. ㅋ
오 트럼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