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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인(高麗人)과 조선인(朝鮮人) 그리고 중화인(中華人)
○ <조선사(朝鮮史)=한국사(韓國史)>는 역사통설(歷史通說)로 보아도, 반만년(半萬年)이요, 신화(神話)시대를 포함(包含)한 단군(檀君)이전(以前)의 역사(歷史)까지를 망라(網羅)한다면, 일만(一萬)년이라고 이야기들을 한다.
심지어 단군(檀君)시대도 신화(神話)시대 또는 전설(傳說)상의 임금… 뭐, 이런 식으로 역사(歷史)를 이야기하는 것이 대한민국(大韓民國)의 현실(現實)이다. 엊그제 ‘사드’ 때문에 기사(記事)를 보니, 현 중국(中國)을 ‘대국(大國)’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영토(領土)가 커서…인구(人口)가 많아서…아니면 사대(事大)의 뜻으로…대국(大國)이라고 한 건지조차 불분명(不分明)하게, 단어(單語)를 선택(選擇), 사용(使用)한다.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누구누구를 떠나, 자존심(自尊心)도 없는 나라라고 여길만한 충분(充分)한 이유(理由)들이 많다.
우리가 말하는 역사시대(歷史時代)라는 것은, 선사시대(先史時代)【선사시대(先史時代) : 기록(記錄)으로 남아 있지 않은 역사시대를 말한다. 인간(人間)이 처음 출현(出現)한 때로부터 글자가 만들어져 역사(歷史)를 기록(記錄)하기 시작한 바로 전(前)까지를 말하는데, 이 기간(期間)은 수백(數百)만 년에 달하는 인류(人類)의 역사에서 95% 이상(以上)을 차지하는 긴 시간(時間)이다.】 이후(以後)의 역사(歷史)를 말하는 것일 게다.
○ 단군(檀君)을 제사장(祭司長)으로, 지중해(地中海) 근방(近方)으로부터 동천(東遷), 또는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가 옛 조선(朝鮮)의 터전인 것처럼 주장(主張)하기도 하며, 그들은 백인종(白人種)이었다고 한다. 참…!
➊ 그렇다면 지중해(地中海) 근방(近方)으로부터 동천(東遷)한 단군(檀君)과 그 무리들은 백인종(白人種)이었는가? 아니면 흑인종(黑人種)이었는가? 아니면 황인종(黃人種)이었는가?
이들의 후대(後代) 왕조(王朝)가, 어떻게 반도왕조(半島王朝)로 전락(轉落)되었는가? 이 반도왕조(半島王朝)는 백인종(白人種)이 아닌 황인종(黃人種)인가? 지중해(地中海)로부터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까지를 섭렵(涉獵)하는 데에, 거기에 따르는 수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이나, 이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理解)를 구(求)하지 않고, 얼버무린다.
➋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의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백인종(白人種)이라고 하는 주장(主張)은 과연(果然) 근거(根據)가 있는가? 또 군주(君主)이하 모든 백성(百姓)들이 백인종(白人種)인가? 아니면 통치자(統治者)들만이 백인종(白人種)이고, 백성들은 황인종(黃人種)이었는가? 하는 문제(問題)에 봉착(逢着)하게 되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해(理解)를 구(求)하지 않는다. 그곳은 지금도 수천(數千)년, 수백(數百)년 전의 생활(生活)을 답습(踏襲)하고 있는 유목민(遊牧民)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이며, 척박(瘠薄)한 환경(環境)속에서 회교(回敎)를 신봉(信奉)하고 있으며, 국지전(局地戰)이나 내전(內戰)등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곳이다.
오늘은 이 문제(問題)를 주제(主題)로, 원전(原典)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자.
(1) 남사(南史) : 당(唐) 이연수(李延壽) : 송(宋)·제(齊)·양(梁)·진(陳)의 170年 역사기록(歷史記錄) 【당(唐) 이연수(李延壽) : <송(宋, 420~479)·남제(南齊, 479~502)·양(梁, 502~557)·진(陳, 557~589)>등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420~589) 남조(南朝) 네 왕조의 역사를 기전체(紀傳體)로 서술하였다. 송(宋) 420년(宋 武帝 永初 원년)부터 진(陳)이 수(隋) 문제(文帝)에게 멸망된 589년(陳 後主 禎明 3년)까지 170년 동안의 역사이다.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 등 모두 80권으로 되어 있다. 이연수(李延壽)는 643년부터 659년까지 17년 동안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국가들의 사서(史書)와 기록들을 연구, 정리하여 본기(本紀) 12권, 열전(列傳) 88권의 <북사(北史)>와 본기(本紀) 10권, 열전(列傳) 70권의 <남사(南史)>를 편찬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서력(西曆) 659년 또는 그 이후(以後) 편찬(編纂)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사(南史)열전(列傳) : 《高昌國,其國蓋車師之故地,南接河南,東近敦煌,西次龜茲,北鄰敕勒.中略.面貌類高麗,辮髮垂之於背.中略. : 고창(高昌)국은, 그 나라가 모두 거사(車師)의 옛 땅이며, 남(南)쪽으로는 하남(河南)과 접(接)하고, 동(東)쪽 가까이는 돈황(燉煌)과, 서쪽은 다음 구자(龜玆)와 북(北)쪽은 칙륵(勅勒)과 이웃한다. 중략. 얼굴 생김새가 고려(高麗)의 무리인데, 머리를 땋아 드리워 등(背)쪽으로 한다. 중략.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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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통전(通典) : 당(唐) 장안(長安)출신(出身)으로, 장군(將軍). 재상(宰相)을 역임한 두우(杜佑)가 766년에 시작하여, 801년에 편찬(編纂).
통전(通典)서융(西戎) : 車 師. 高 昌 附 /《文字亦同華夏,兼用胡書.有毛詩,論語,孝經,歷代子史,集學官弟子,以相教授.雖習讀之,而皆為胡語.中略. : 문자(文字)는 또 화하(華夏)와 같고, 오랑캐 글도 겸용(兼用)한다. 모시(毛詩), 논어(論語), 효경(孝經), 역대(歷代)자사(子史)등이 있으며, 관청에 모여 가르침을 받는데, 서로 학문이나 기예를 가르친다. 글을 배우고 익히는데, 이는 모두 오랑캐 말이다. 중략. 其刑法,風俗,婚姻,喪葬與華夏大同.其人面貌類高麗,辮髮施之於背女子頭髮辮而垂. : 그들의 형법(刑法), 풍속(風俗), 혼인(婚姻), 장사지내는 일과 상중에 하는 예식은 화하(華夏)와 비슷비슷하다. 그 사람들의 얼굴 모양은 고려(高麗=高句麗)의 무리(一族)이며, 머리를 땋아 등 뒤로 하고, 여자들은 두발(頭髮)을 땋아 등허리 아래로 드리웠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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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통전(通典)192. 邊防8 西戎5 / 주 구 파 (朱 俱 波)
《朱俱波,後魏時通焉.中略.在于闐國西千餘里,其西至渴槃陀國,南至女國三千里,北至疏勒九百里,南至蔥嶺二百里.: 주구파(朱俱波)는, 후위(後魏)때 통하였다.(왕래하였다.) 중략. 우전(于闐)의 서(西)쪽 천여(千餘)리에 있는데, 그 서(西)쪽으로 갈반타국(渴槃陀國)에 다다르고, 남(南)쪽으로는 여국(女國)이 3천리에 이르며, 북(北)쪽으로는 소륵(疏勒)이 9백리에 이르며, 남(南)쪽으로는 총령(葱嶺)이 2백리이다. 其王本疏勒國人,宣武永平中,朱居槃國遣使朝貢.其人言語與于闐相似,其閒小異. : 그 나라의 왕은 소륵국(疏勒國)사람인데, 선무(宣武) 영평(永平)중에, 주거반국(朱居槃國)에서 사신을 보내어 조공(朝貢)하였다. 그 사람들의 언어(言語)는 우전(于闐)과 서로 닮았으나, 그사이 조금 달라졌다. 人貌多同華夏,亦類疏勒.大唐武德以後,亦頻遣使朝貢矣. : 사람들의 모습은 화하(華夏)와 같은데, 또한 소륵(疏勒)의 종류이다. 대당(大唐) 무덕(武德)이후, 빈번히 또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➊ 주구파(朱俱波)는, 오늘날의 지도로 보면 : <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카자흐스탄>등지에 있었던 옛 나라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곧 파미르(총령)고원의 바로 북(北)쪽 및 그 서(西)쪽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➋ 이곳 나라의 백성(百姓)들의 생김새가 화하(華夏)와 같았고, 소륵국(疏勒國) 백성(百姓)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설명(說明)한다. 이는 곧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코는 높은 인종(人種)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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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통전(通典)192. 邊防8 西戎4 / 소륵(疏勒)
《疏勒,漢時通焉.王理疏勒城,去長安九千三百里.戶千五百.都白山南百餘里. : 소륵(疏勒)은, 한(漢)나라 때 왕래하였다. 왕(王)은 소륵성(疏勒城)에서 다스렸는데, 장안(長安)으로부터 9천3백리 떨어져 있으며, 일천5백호가 있고, 서울은 백산(白山) 남쪽 백여(百餘)리에 있다. 東至都尉理所二千二百里.南有河,西帶蔥嶺,亦名雪山,在國西北百餘里,河所出. : 동(東)쪽으로 도위(都尉)치소(治所)까지 2천2백리이고, 남(南)쪽에는 하(河)가 있으며, 서(西)족으로는 총령(葱嶺)이 띠를 두르고 있는데, 또한 설산(雪山)이라고 이름하며, 나라의 서북(西北)쪽 백여(百餘)리에 있는데, 하(河)가 이곳에서 나온다. 東去龜茲千五百里,西去撥汗國千里,當大月氏,大宛,康居道.南去莎車五六百里,北去朱俱波八九百里. : 동(東)쪽으로 구차(龜茲)가 일천(一千) 5백리(百里)요, 서(西)쪽은 발한국(發汗國)이 천리(千里) 떨어져 있는데, 대월(大月)씨·대완(大宛)·강거(康居)로 가는 길이다. 남(南)쪽은 사거(莎車)가 5, 6백리요, 북(北)쪽은 주구파(朱俱波)가 8, 9백리 떨어져 있다. 【注 / 隋史云:東北去突厥牙帳千餘里,東南去瓜州四千六百里. :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동북(東北)으로 돌궐(突厥)아장(牙帳)이 일천(一千)여리 떨어져 있고, 동남(東南)쪽으로는 과주(瓜州)가 4천 6백리 떨어져 있다.】在于闐國北千五百里.土多稻,粟,蔗,麥,銅,鐵,綿,錦,雌黃. : 우전(于闐) 서북(西北) 일천(一千) 5백리(百里)에 있다. 땅에서는 벼(稻)·조(粟)·사탕수수(蔗)·보리(麥)·구리(銅)·철(鐵)·면(綿)·비단(錦)·자황(雌黃)이 많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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➊ 남사(南史)와 통전(通典)에서 말하는 내용(內容)은 거의 같다. 통전(通典)192. 邊防8 西戎4 / 于闐(우전) 편을 보면 : 《自高昌以西,諸國人多深目高鼻,惟此一國,貌不甚胡,頗類華夏 : 고창(高昌)의 서(西)쪽, 여러 나라 사람들은 눈은 깊고, 코는 높다. 유일하게 그 한 나라【우전 (于闐)국을 칭하는 것임】는 얼굴모양이 호(胡 : 오랑캐)와 같지 않은데, 화하(華夏) 무리와 같다.》라고 하였는데,
➋ 이로 미뤄보면 : 당시(當時)의 인종(人種)분포(分布)를, 대략(大略) 추정(推定)해 볼 수 있는데, 대략(大略) 총령(葱嶺)을 중심(中心)으로, 그 서(西)쪽과 동(東)족이 달랐다는 이야기다.
⒜ 동(東)쪽은 황인종(黃人種)들이 살았으며,
⒝ 서(西)쪽은 <深 目 高 鼻 : 눈은 깊고, 코는 높은 자(者)> 들이 살았다는 것이다.
➌ <고려인(高麗人) 또는 중국인(中國人), 화하인(華夏人)>은, 「눈은 움푹 들어가 있고, 코가 높은 인종(人種)이 아니었다.」는 뜻이다.
➍ 여기서 또 하나 주목(注目)해야 할 것은 :【隋史云:東北去突厥牙帳千餘里,東南去瓜州四千六百里. : 수서(隋書)에서 이르기를 : 동북(東北)으로 돌궐(突厥)아장(牙帳)이 일천(一千)여리 떨어져 있고, 동남(東南)쪽으로는 과주(瓜州)가 4천 6백리 떨어져 있다.】고 한 주석(註釋)의 설명(說明)부분(部分)이다.
➠ 수(隋) 또는 당(唐)때, 돌궐(突厥)과 고구려(高句驪)는 긴밀(緊密)한 관계(關係)를 맺고 있었다. 이러한 돌궐(突厥)은 수(隋)나라 때에 : 「소륵(疏勒)에서 동북(東北)쪽 일천(一千)여리 떨어져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곳에는 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한텡그리산=천산(天山) 6,995m】이 있으며, 이 산 아래에 돌궐(突厥)가한(可汗)의 아장(牙帳)이 있었다는 것이다.
➠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에서는 : 『하북성(河北省) 북방(北方) 또는 서북(西北)에 돌궐(突厥)족들이 있었고, 고구려(高句驪)와 관계(關係)를 맺고 있었다.』고 해설(解說)하고 있는데,
원전(原典)에서는 : 수(隋)나라 때도 하북성(河北省) 북방(北方)으로부터 일만(一萬)리도 넘게 떨어져 있는 <백산(白山)=설산(雪山)=한등격리봉(汗騰格里峰)=한텡그리산:6,995m> 아래에, 돌궐(突厥)가한(可汗)의 아장(牙帳)이 있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잖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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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당회요(唐會要) : 송(宋)의 왕부(王溥)가 961년에 편찬(編纂)한 것이다.
당회요(唐會要) 95 고창(高昌) :《高昌即漢車師前王之廷.後漢戊巳校尉之故地.漢時興師西討.軍中羸憊者留居焉. : 고창(高昌)은 곧 한(漢)의 거사(車師)전왕(前王)의 왕조(王朝)이다. 후한(後漢)의 무기교위가 있던 땅이다. 한(漢)나라가 흥성할 시 군대가 서쪽을 토벌할 때, 군중(軍中)에서 피곤하고 지친 자들이 머무르며 살던 곳이다. 地形高敞.故因名高昌.壘有八城.本皆中國人也. : 지세(地勢)는 높고 평평하여, 이로 인해 고창(高昌)이라 하였는데, 여덟 개의 성채가 있었다. 본시 모두 중국인이다.》
➊ 당회요(唐會要)에서는 모두 중국인(中國人)이라고 하였다. 남사(南史)는 대략 659년 이후요, 통전(通典)은 대략 801년이라고 하였으니, 당회요(唐會要)는 남사(南史) 또는 통전(通典)의 기록(記錄)을 보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역사서(歷史書)를 편찬(編纂)하려면 과거(過去)의 많은 것들을 참고(參考)하기 때문이다.
➋ 당회요(唐會要)에서 《고창(高昌)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은, 중국인(中國人)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이전(以前)에는 《고창(高昌)에 살고 있는 모든 백성들은, 고려인(高麗人)이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뤄보면, 고려인(高麗人)과 중국인(中國人)은 같다. 곧 고려인(高麗人)이 중국인(中國人)이라는 얘기다.
➌ 만약 고려인(高麗人)과 중국인(中國人)이 달랐다고 한다면 : 당회요(唐會要)에서는 《과거(過去) 고창(高昌)은, 고려인(高麗人)들이 살았으나, 중국(中國)이 이들을 몰아내고, 중국인(中國人)들을 이주(移住)시켜, 고창(高昌)은 모두 중국인(中國人)들로 채워졌다.》고 해야 옳은 말이다.
따라서 당회요(唐會要)에서 말하는 중국인(中國人)은, 고려인(高麗人)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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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해국도지(海國圖志) : 청(淸) 위원(魏源:1794∼1856)이 지은 세계(世界)지리서(地理書)
海國圖志 / 卷022 / 北印度各國《瀛環誌略曰:阿富汗,波斯東境.明時裂波斯數城,自立為國.前此固統於波斯,別無名號也. : 영환지략(瀛環誌略)에서 이르기를 : 아부한(阿富汗)은, 파사(波斯)동쪽지경이다. 명(明)나라 때 파사(波斯)의 몇 성(城)이 무너졌는데, 자립하여 나라가 되었다. 이 나라는 전(前)에 파사(波斯)에 늘 통치를 받아서, 이름이 없었다. 世多傳其兼並溫都斯坦,今考溫都斯坦,乃五印度總名. : 대대로 전해지기를 그 나라를 온도사탄이 겸병(兼倂)하였는데, 고찰해보면 온도사탄인데, 다섯 인도(印度)의 총칭(總稱)이다. 又聞見錄雲,敖罕之人,種類不一,有與內地回子相似者,有與安集延相似者,有與土爾扈特相似者,有毛發拳曲,與峨羅斯相似者. : 또 문견록(聞見錄)에서 전하기를 : 오한(敖罕)인은, 한 종류가 아니다. 내지(內地)의 회자(回者)와 서로 같은 자가 있고, 안집연(安集延)과 서로 같은 자가 있고, 토이호특(土爾扈特)과 같은 자가 있는데, 손과 팔다리에도 털이 있고, 아라사(峨羅斯)와 서로 같은 자도 있다. 又一種人亦回子衣帽,須繞頰如蝟,而赤染以茜,其人多力善用木矛,西域人多畏之.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회자(回者)의 의모(衣帽)를 하고, 수염이 뺨을 두르고 있어 고슴도치와 같다. 꼭두서니(풀)로 붉은 색으로 물들이는데, 그 사람들은 힘이 세고 나무로 만든 창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때문에, 서역(西域)인들이 다 두려워한다. 又一種人圓領大袖,衣冠類漢唐,貌清奇似朝鮮,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 류(類)이고, 얼굴(貌)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닮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한(漢)의 후예 또는 한인(漢人)】의 유종(遺種)인가하였다. 又雲敖罕西域之大國,亦西域之亂邦 : 또 전하기를, 오한(敖罕)은 서역(西域)의 대국(大國)인데, 또한 서역(西域)의 어지러운 나라(亂邦)이다. 》라고 하였다.
※ 북인도(北印度) : 오늘날의 인도(印度) 북부(北部)지방으로, <인도(印度) 북부(北部)·파키스탄 동북(東北)·아프가니스탄 카불 동부(東部)·타지키스탄>등지로 광활(廣闊)한 땅을 말한다.
➊ 북인도(北印度)가 어딘가? 『현(現) 인도(印度) 서울인 ‘뉴델리’의 북방(北方)지대(地帶)로, 파키스탄 북부(北部)지방과 아프가니스탄, 파미르고원지대와 중앙(中央)아세아(亞細亞), 타클라마칸사막지대(沙漠地帶)와 서장(西藏)의 최 서(西)쪽 지방이다.』 이 주변(周邊)에 “오한(敖罕)인”들이 있었다고 해국도지(海國圖志)는, 영환지략(瀛環誌略)을 인용(引用)하여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
➋❲又一種人圓領大袖,衣冠類漢唐,貌清奇似朝鮮,人或謂是後漢之遺種雲. : 또 한 종류의 사람들은 옷깃은 둥글고 소매는 넓고 크며,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고, 얼굴(貌)이 맑고 선명하고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닮았는데, 사람들은 혹 본시 후한(後漢)【한(漢)의 후예 또는 한인(漢人)】의 유종(遺種)인가하였다.〕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➌ 의관(衣冠)은 한당(漢唐)과 유사(類似)하고, 얼굴은 맑고 선명하여 뛰어난 것이 조선(朝鮮)과 같다(닮았다).
➍ 이러한 사람들이 혹(或), 한(漢)의 후예(後裔), 또는 한인(漢人)인가 하였다면, 이러한 설명(說明)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난감(難堪)한 이야기다. 조선왕조(朝鮮王朝)와 한(漢)왕조(王朝)는 같다는 뜻일까?
➎ 이게 무슨 말인가? 『얼굴생김새가, 맑고 선명하고 뛰어나 조선(朝鮮)인을 닮았다면서, 혹시 한(漢)의 유종(遺種)인가』하였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한인(漢人)【전한(前漢) 또는 후한(後漢) 또는 화인(華人)】은 조선인(朝鮮人)이었다』는 말과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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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논자(論者)’들은, 이러한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說明)할 것인가? 그들의 답(答)은, 듣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당(唐)에 끌려간, 고구려(高句驪) 유민(遺民)들이라고 할 테니 말이다. 통전(通典)에서도 :「고창(高昌)인들이 고려(高麗)인과 같다」고 하였는데, 이 자(者)들의 변명(辨明)이나 해설(解說)은 듣지 않아도 뻔하다. 당(唐)에 끌려간 고구려(高句麗) 유민(遺民)들이라고 할 것이니 말이다.
그렇다면 : 『얼굴생김새가, 맑고 선명하고 뛰어나 조선(朝鮮)인을 닮았다면서, 혹시 한(漢)의 유종(遺種)인가』하였는데, 이것은 또 어떻게 이야기(說明)할 건가?
○ 당회요(唐會要)보다 휠 씬 이전(以前) 기록(記錄)에서는, “고려와 같은 무리(其 人 面 貌 類 高 麗)”라고 하였는데, 당회요(唐會要)는,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중국인(中國人)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중국인(中國人)은 곧 고려인(高麗人)이다》라는 말과 같다.
○《面 貌 類 高 麗 !》 이 구절(句節)의 뜻은 무엇일까? 이리 재보고, 저리 재 봐도, 뜻은 「얼굴 모양이 고려(高麗)무리, 또는 일족(一族), 동류(同類), 닮다. 비슷하다」는 뜻일 뿐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소위(所謂), ‘한족(漢族)’이나, 현(現) 몽골의 주류(主流)를 이루고 있는 ‘몽골인’ 정도의 모습이 우리와 닮은꼴이 된다. 【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驪)를 뜻함】
대륙(大陸)의 남방(南方)과 서남(西南)아세아(亞細亞)등지의 국민(國民)들과는 다르고, 또한 총령(蔥嶺)의 서(西)쪽과 서북(西北)쪽, 남(南)쪽 역시(亦是), 그 면모(面貌)가 다르다. 고구려(高句驪) 인(人)과 얼굴 생김새가 같다는 말은, 그곳에서 주류(主流)를 이루고 살고 있는 대부분(大部分)의 백성(百姓)들의 얼굴생김새가 고구려(高句驪)인(人)과 같았다는 뜻일 게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面 貌 類 高 麗” 라고 기록(記錄)할 수 있었겠는가!
○ 여기서 한 가지 덧붙일 말은, “面 貌 類 高 麗” 라고 해 놓고는, 모든 것이 “화하(華夏)와 같다”고 했는데, 이것은 《고려인(高麗人)은, 화하인(華夏人)이다》라는 것으로 밖에 볼 수 없다.
➊ <고창(高昌)의 옛 땅>은 : 박격달산맥(博格達山脈) 남(南)쪽의 토노번(吐魯番)과 오노목제(烏魯木齊)사이의 땅이다. 서북(西北)에는 박격달산(博格達山 : 5445m)과 오노목제(烏魯木齊)가 있고, 서남(西南)에는 언기(焉耆)와 박사등호(포류해)가 있으며, 동(東)쪽 1천리에는 합밀(哈密)이 있고, 남(南)쪽에는 누란(樓欄). 나포박(포창해). 백용퇴(白龍堆)가 있고 동남(東南)으로는 돈황(燉煌)과 옥문관(玉門關)이 있다. 박격달산맥(博格達山脈)을 넘으면 곧바로 준갈이(準噶爾)분지(盆地)다.
➋ <우전(于闐)>은 화전(和闐)이며, 호탄(khotan)이며,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의 서남부에 있고, <소륵(疏勒)>은 카슈가르(kashgar)라고도 하는데, 타클라마칸 사막(沙漠)의 최 서(西)쪽에 있다.
➌ <북인도(北印度)>는 바로 <힌두쿠시산맥과 카라코람산맥사이의 파키스탄 동북부(東北部)와 캐시미르(罽賓)지방(地方)>을 말하는 것이다.
➠ 이러한 곳 【➊+➋+➌】에 고려인(高麗人) 또는 조선인(朝鮮人)이 살았으며, 그들은 화하인(華夏人)이었다고 하였다. 결국(結局) 「고려인(高麗人)은 조선인(朝鮮人)이고, 중국인(中國人)이며, 화하인(華夏人)이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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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朝鮮)【고조선(古朝鮮)을 포함한 옛 봉건왕조(封建王朝)를 총칭(總稱)】인(人)은 그 주류(主流)가 황인종(黃人種)이었다. 조선(朝鮮)의 영토(領土) 안(內)에는 많은 종류(種類)의 다양(多樣)한 색목인(色目人)들도 조선인(朝鮮人)으로 당당한 삶을 이었을 것이며, 관리(官吏)로 등용되기도 했다.
단일민족(單一民族)이야기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전유물(專有物)일 뿐이다. 언뜻 본 기사(記事)에서, 「대륙(大陸)과 반도(半島)등지에서, 한글을 언어(言語)로 채택(採擇)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고 하였는데,
【세종대왕(世宗大王)은 봉건왕조(封建王朝) 주군(主君)의 아들로 태어난 99.99%의 금수저 출생(出生)으로, 그 분이 일반(一般)백성(百姓)들이 중국(中國)사람과 말이 통하지 않는 것을 불쌍히 여겨, 한글을 창제(創製)했다? 이 말은 믿는 다면 세뇌(洗腦)의 함정(陷穽)에 빠진 정말 순진무구(純眞無垢)한 사람 일게다. 세종대왕(世宗大王)께서는 말과 글을 통일(統一)시켜 왕권(王權)을 강화(强化)하기 위한 목적(目的)으로 한 것이다. 시황제(始皇帝)가 목에 힘주고, 폼 잡기 위해 글자와 도량형(度量衡)등을 통일(統一)시킨 것이 아니다. 왕권(王權)을 강화(强化)하고, 친정(親政)하기 위해서다. 】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해 보자. 이는 뜻글자인 한자(漢字)를 없애고, 소리글자인 한글을 보급(普及)하려했던 것이다. 이것의 목적(目的)은 조선사(朝鮮史)를 말살(抹殺)시키려는 음모(陰謀)였다. 한자(漢字)를 모르면 조선사(朝鮮史)를 제대로 알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일제(日帝)가 식민지(植民地) 백성(百姓)들이 글을 몰라 안타깝고, 불쌍하여 한글을 체계적(體系的)으로 보급(普及)하려 했을까? 대한민국(大韓民國) 백성(百姓)님 네들은 순진(純眞)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 모르고 있는 것일까?
지들이 엉터리로 만들어 놓은 조선사(朝鮮史)를 일반(一般) 백성(百姓)들이 안다면 저항운동(抵抗運動)을 어떻게 할 건가? 한글을 보급(普及)시키면 한자(漢字)를 공부(工夫)한 자(者)들만을 회유(懷柔)하거나 친일파(親日派)로 만들면 그만인 것을!
고전(古典)은 한자(漢字)로 되어 있다. 한자(漢字)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글로 된 왜곡(歪曲)된 조선사(朝鮮史)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공교육(公敎育)이란 미명하(美名下)에 왜곡(歪曲)된 역사(歷史)이야기를 공식적(公式的)으로 세뇌(洗腦)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면, 왜 한자(漢字)를 없애고, 한글을 보급(普及)시키려 했는지를, 미뤄 짐작(斟酌)할 수 있는 것이다.
2016년 07월 28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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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세종황제가 있는 직할지는 중국인데 이곳은 말과 글이 일치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경기지역을 벗어나면 말소리가 서로다르니 이것을 통하기위해 훈민정음을 만든것인데 즉 "眞油" 이것를 중국에서는 " 진유 " 라고 발음하는데 어느지방에서는 " 참기름 " 이라발음하면 모른다는겁니다. 과연 " 진유 " 와 " 참기름 " 중 어떻게 말해야 옳았던 것이었을까요? 옛날에는 중앙과 지방이 말소리가 다르니 중앙에서 지방으로 길을 떠날때는 항상 선비들은 지필묵을 가지고 다녔다고 합니다. 문헌에서도 간혹 확인이 되는 상황인데 한글보다는 한자야말고 최상의 문자라고 봅니다. 한자는 간결하게 축약해서 짭게 쓸수있는데 한글과영어는 아닙니다.
한글과 영어는 너무 길게 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한자를 문자로 글을 쓸때도 이런 것을 발견하고는 다섯자, 또는 일곱자 로 축약해서 쓰는법을 만든것이 있다고 합니다. 실제로 한글로된서적을 읽을 때보다는 한자로 된서적을 읽을때가 더 두뇌가 활성화된답니다.
안녕하세요. 대부여님!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세종대왕께서는 통치구역의 모든 관인들과 백성들에게 왕권이 빠르게 전달, 이해, 실행되게끔 하여, 왕권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 거라는 이야기는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무엇때문에 미국이나 러시아 및 일제등은 대륙이나 반도 신생국가들에게 한자를 버리고 한글로 통일시키려 하였을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미국이나 러시아, 일제등의 당시의 열강들이 진짜 불쌍한 대륙의 백성들과 반도의 백성들을 위해, 그리 하려 했다면, 정말 눈물겹게 고마운 분들이죠. 허나 그 자들의 목적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죠. 해체한 조선사를 조선의 후손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최대한 막으려는 심보였죠
대륙의 어문정책은 20세기 초반여러 번에 걸쳐 바뀌여, 지금에 이르렀는데, 지금 교육을 받는 자들은 고전의 한자를 알지 못해 또 별도로 고전을 공부, 연구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이보다 더 심해, 대부분의 학생들은 자신들이나 부모님의 이름도 쓰지 못할 뿐 아니라 고전은........이러다보니 왜곡되고, 조작된 한글로 써진 해설서를 외우는 공부밖에 할 일이 없게 됐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세뇌일 뿐입니다. 이러니 99% 개, 돼지라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풍토가 만들어지게 되는 겁니다. 교육 정책의 획기적인 변환이 없는 한, 이러한 자들은 여기 저기서 99% 백성들을 향해 지배자와도 같은 말을 쏟아낼겁니다.
밀실에서 몇 사람이 적당히 만든 국가정책을 반대하는 국민들을 외부세력이라고 하는 정신빠진 자들이 1% 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국민들의 안위보다는 자신들의 권력을 위해서죠. 이러한 자들을 국민들이 선별해야 함은 '국민들의 의무'라고 봄니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잃은 국가나 무리는 곧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교훈은 과거 예를 보면 수없이 많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린 잊지 말아야 합니다. 대한민국은 영원해야 하며, 그 주인은 곧 대한민국의 1%가 아닌 99%의 국민들이기 때문입니다.
현재 우리는 스마트폰, 컴퓨터자판에 한글 자모음으로된것을 가지고 한글을 문자로 쓰고 있습니다. 물론 한자로 변환하여 쓸수도 있는데 좀 많이 불편하죠. 그런데 조금만 바꾸면 혁신적인 한자를 문자로 쓸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천운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컴이나 폰의 한글자판은 바로 한자를 위하여 태어난것처럼 보입니다. 예를들어 자판에서 " 금 "을 치면 금 이라고 화면에뜨지요. 그런데 이것을 " 금 "을 치면 바로 " 금 " 에 해당하는 음의 한자가 모두다 화면에 뜬다면 이때 금에대한 뜻의 한자를 선택하면 바로 한자가 입력이 되는방식으로 전환하면 어렵지 않게 쓸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면 한글도 살리면서 한자도 바로 쓸수있죠.
현재도 '금'자를 입력하고 '한자키'를 누르면 관련된 한자가 리스팅됩니다. ㅎ
뜻글자와 음글자 모두 우리 것이니 모두 배워야 마땅합니다.
문무 선생님께서 중요한 내용들을 많이 발견하시는데 이를 쉽게 풀어서 대중화시키는 것도 중요한 일인 듯 합니다. 어떤 글들은 해석해놓으신 글을 읽어봐도 개인적으로 잘 이해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는데 그래서, 읽는 이의 입장에서 쉽게 이해될 수 있도록 하는 작업도 필요하며 이는 분업되야 할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