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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가장 잔인한 달/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은 자라나고/ 추억과 욕정이 뒤섞여 잠든 뿌리가 봄비로 깨어나고/ 겨울이 차라리 따스했거니 대지를 망각의 눈으로 덮고/ 마른 뿌리로 가냘픈 생명을 살리면서/ 여름은 우릴 놀라게 했어요/ 슈타른베르크 호수 위로 소나기를 내리면서/ 우리는 기둥이 늘어선 회랑에 머물렀고/ 햇빛이 나자 호프가르텐 공원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며 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했어요/ 난 러시아인이 아니에요/ 리투아니아에서 왔지만, 진짜 독일인이에요/ 어려서 내 사촌의 집인 공작 저택에 머물렀는데/ 그는 썰매 타러 날 데리고 갔어요/ 난 무서웠어요. 그가 말했어요, 마리/ 마리, 꼭 잡아. 그리고 아래로 우리는 달렸어요/ 산속에서는 자유롭게 느껴져요/ 밤에는 대개 책을 읽고, 겨울에는 남쪽으로 가지요
<죽은 자의 매장> “황무지” 중에서
20세기에 발간된 우수하고 의미 있는 책 100권의 그 세 번째 책이 엘리엇의 시집 '황무지'입니다. 엘리엇은 한 권의 백과사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엘리엇이 남긴 문학작품에는 서구의 역사와 신화와 전설 그리고 사상이 폭넓게 유기적으로 녹아들어 있습니다. 시집 '황무지'는 엘리엇의 대표작입니다. "사월은 가장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총 434행으로 구성된 '황무지'의 이 첫 구절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겁니다.
토머스 스턴스 엘리엇(Thomas Sterns Eliot,1888~1965)은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1888년 9월 26일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 서머싯 이스트코커의 구두제조공으로 1670년 미국 보스톤으로 이민 온 앤드루 엘리엇의 후손으로 할아버지인 윌리엄 엘리엇(William Eliot) 목사는 1834년 하버드대학교를 졸업한 뒤, 보스턴에서 세인트루이스로 이주했습니다. 할아버지는 열렬한 연방주의자로 유니테리언교도였으며 노예제도가 허용된 주에서 활동했던 반노예주의자로서, 워싱턴대학교를 창설했습니다. 할아버지가 스스로 반대하지만 않았어도 워싱톤대학교는 할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앤드루 엘리엇 대학교로 명명되었을 겁니다. 1872년 할아버지는 워싱턴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엘리엇의 아버지 헨리 엘리엇(Henry Eliot)은 학자가 되길 바랐던 할아버지의 뜻을 거스르고 성공한 사업가로 세인트루이스에 있는 벽돌제조회사의 사장이었습니다. 엘리엇의 어머니 샬럿 챔프 스턴즈(Charlotte Stearns)는 다작(多作)을 했던 시인이자 사회운동가로 시아버지의 전기를 써서 앤드루 엘리엇의 업적을 알린 분입니다.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종교개혁자인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의 순교를 소재로 한 시극을 짓기도 했는데, 1926년 아들인 T.S. 엘리엇이 이 시극에 서문을 붙였습니다.
엘리엇은 살아남은 형제자매 여섯 명 중 막내였으며, 엘리엇의 부모는 엘리엇이 태어났을 때 모두 44세였습니다. 엘리엇의 네 명의 누나는 11세에서 19세까지였으며, 친구와 가족들에게는 외할아버지 토마스 스턴스의 이름을 따서 톰으로 불렸습니다. 엘리엇이 태어날 무렵, 엘리엇의 가문은 54년 동안이나 미주리 주에만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남부나 서부의 영향을 배제하고 뉴잉글랜드의 정치적이고 신학적 문화를 보존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말년에 자신이 보스턴이나 뉴욕 그리고 런던에서 태어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마지막까지 뉴잉글랜드인이었습니다.
엘리엇의 가정 배경은 시인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엘리엇은 아버지 보다는 할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사업에 투신하지 않은 채 당시 가능했던 가장 광범위한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엘리엇은 1898년에서 1905년까지 세인트루이스의 스미스 아카데미를 다니며 라틴어와 고대 그리스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배웠습니다. 엘리엇은 14세 때 이미 시를 쓰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가 오마르 하이얌의 작품을 번역한 루바이야트의 영향이 컸습니다. 엘리엇의 최초의 시는 15세 때 수업시간에 연습으로 쓴 것이며, 이 시는 후에 하버드 대학교의 학생 잡지인 "The Harvard Advocate"에 실렸습니다.
엘리엇은 스미스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매사추세츠주의 밀턴 아카데미에 입학하고, 그곳에서 후에 그의 작품 "황무지"를 출판하게 될 스코필드 세이어를 만났습니다. 밀턴 아카데미를 졸업한 뒤 1906년 하버드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보통 대학 수학 기간이 4년이었지만 엘리엇은 3년 만인 1909년에 철학과에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졸업했습니다. 후에 비평가 프랭크 커모드는 엘리엇이 하버드 대학 재학 중 아서 시몬스의 "시에서의 상징주의 운동(The Symbolist Movement in Poetry, 1899)"을 발견한 1908년이 엘리엇에게 가장 중요한 시기였다고 썼습니다. 이 책은 그에게 쥘 라포르그, 아르튀르 랭보, 폴 발레리를 소개했으며, 실제로 엘리엇 자신도 발레리가 없었다면 트리스탄 꼬르비에를 접하지 못했을 것이라 쓰기도 했습니다.
또한, 하버드대학교 재학 당시 엘리엇에게 깊은 감화를 준 사람은 철학가이자 시인인 조지 산타야나와 비평가인 어빙 배빗이었습니다. 엘리엇은 배빗으로부터 반낭만주의적 태도를 흡수했는데, 훗날 영국 철학자들인 프랜시스 허버트 브래들리와 토머스 어니스트 흄의 사상을 전공함으로써 반낭만주의적 태도가 더욱 심화되어 엘리엇의 일생동안 지속되었습니다. 졸업 후인 1909~10년에 엘리엇은 하바드대학교 대학원생으로 철학과 조교를 지냈습니다. 1910~11년은 20세기 초반의 위대한 시인인 엘리엇에게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해였습니다.
엘리엇은 프랑스에서 그 해를 보내면서 파리 대학교, 마르부르크 대학교, 옥스포드 대학교 등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특히, 소르본대학교에서 앙리 베르그송의 철학 강의를 들었고, 알랭 푸르니에와 함께 시를 읽었는데, 그의 가르침으로 프랑스어를 완전히 익히게 되었을 뿐 아니라 샤를 보들레르에서 쥘 라포르그를 거쳐 스테판 말라르메에 이르는 상징주의 시에도 정통하게 되었습니다. 1914년 처음으로 에즈라 파운드를 만났습니다. 1946년 "포이트리(Poetry):A Magazine of Verse"에 파운드의 정치성을 무시한 채 파운드의 문학 경력을 옹호하는 글을 기고했는데, 그 글에서 엘리엇은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 10년 동안 젊은 미국 시인들이 처했던 무미건조한 문학적 환경을 묘사했습니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모두 외국 시인들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파운드는 중세 남프랑스의 음유시인인 투르바두르와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시인들을 사숙(私淑)했고, 엘리엇은 라포르그와 단테 알리기에리를 사숙했는데, 이들은 엘리엇이 자신의 문체를 발견하는 데 있어서 존 웹스터와 존 던 이상으로 영향을 주었습니다. 1911~14년에 엘리엇은 하버드대학교로 돌아와 인도 철학을 전공하고, 탁월한 학자인 찰스 랜먼으로부터 산스크리트어를 배웠습니다. 1913년 엘리엇은 브래들리의 "현상과 실재 (Appearance and Reality?)"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1916년 엘리엇은 유럽에서 "F.H. 브래들리의 철학 지식과 체험 (Knowledge and Experience in the Philosophy of F.H. Bradley)"이라는 표제의 논문을 완성했습니다. 이 논문은 1964년에야 출판되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엘리엇은 박사학위 취득에 필요한 최종 구두시험을 포기하고 하버드대학교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엘리엇은 편집인이자 극작가이자 문학비평가이며 철학적 시인이라는 4가지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습니다. 엘리엇은 당시 영어권 시인들 중 가장 해박한 시인이었습니다. 대학 재학시절에 쓴 엘리엇의 시들은 문학적이고 관습적이었습니다.
엘리엇이 처음으로 출판한 모더니즘의 첫 작품은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 (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였습니다. "자 우리는 가세, 그대와 나,/저녁은 마취되어 수술대 위에 있는 환자처럼/하늘에 몸을 뻗어 누워있는 이때……" 엘리엇은 이 시의 복사본을 그의 친구인 콘래드 에이컨에게 주었고, 콘드래 에이콘은 이 시를 에즈라 파운드에게 전했으며, 파운드는 다시 이 시를 "포이트리"지의 편집장인 헤리엇 먼로에게 보냈습니다. 먼로가 그것이 시의 장르에 속한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1년 이상이나 발표가 늦어지게 되었습니다. 비록 파운드가 1908년에 개인적으로 소책자 "불이 꺼진 게로 (아두메스뺀또A lume spento)"를 이미 출간했었지만, "J. 앨프레드 프러프록의 연가"는 이 문학적 개혁가들이 실험단계를 넘어 완성한 첫 시였습니다.
이 시는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서정 민요집 (Lyrical Ballads)" (1798)과 같이 과거와 철저한 단절을 이루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20세기 시의 혁명은 엘리엇의 첫 시집 "프러프록 외 Prufrock and Other Observations"를 출간한 1917년에 성숙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표제시 "프러프록" 이외에도, 이 책에는 "서시 (Prelude)" "어느 여인의 초상(Portrait of a Lady)“ 등의 원숙한 작품이 수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시의 혁명은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 시 혁명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새뮤얼 콜리지와 윌리엄 워즈워스의 낭만주의 혁명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엘리엇과 파운드는 이 18세기 시인들인 콜리지와 워즈워스처럼 시어를 개혁하면서 혁명을 시작했습니다. 윌리엄 워즈워스는 '사람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언어'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한 반면, 엘리엇은 교육받은 사람이 쓰는 '현학적이지도 않고 천박하지도 않은' 시어를 추구했습니다. 엘리엇은 리차드 스윈번에 대해 "그렇듯 탁월한 시에서 최초로 의미 없는 소리가 존재한다"고 말했습니다. 1년 동안 엘리엇은 하이게이트 학교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가르쳤습니다. 1917년 그는 잠시 로이드은행의 은행원으로 근무하면서 시집 "프루프록 및 그 밖의 관찰"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에도 엘리엇은 문학비평과 전문적인 철학분야에서 많은 평론을 썼습니다.
1919년 "시집(Poems)"을 발표했는데, 무운시 형식으로 씌어 진 명상적 내적 독백시 "제론션(Gerontion)"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는 영미시 사상 유례 없는 것이었습니다. 1922년에는 문예지 "크라이키어리언(Criterion)"을 창간했고 엘리엇의 대표 시집 "황무지"를 발표하여 젊은 시인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처럼, 엘리엇의 초기의 시는 영국의 형이상학적인 시와 프랑스의 상징주의적인 시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현대 문명의 퇴폐성을 그리고 있습니다. 1925년 페이버 출판사 편집장이자 작가로서 화려한 문단 활동을 하던 중 심각한 공황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앵글로 가톨릭 노선의 영국 성공회에 귀의해 신앙을 통해 정신적 위기를 극복하며 본격적으로 기독교 지식인 및 문인으로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에 미국 국적을 버리고 영국으로 귀화했습니다. 영어로 쓴 최고 수준의 철학적 시로 평가받는 「사중주 네 편」 등 시 창작은 물론, 운문 희곡을 발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운문 희곡인 「칵테일 파티」는 토니 상을 받았으며, 『늙은 주머니쥐의 실용적 고양이 안내서』는 사후에 뮤지컬 「캣츠」로 재탄생되어 현재까지 사랑받고 있습니다. 1948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영국의 메리트 훈장, 프랑스의 레종도뇌르 훈장, 미국의 대통령 자유 훈장 등을 받으며 영미 문학과 문화에 대한 기여를 인정받았습니다. 엘리엇은 1965년 1월 4일 런던에서 폐질환으로 77세를 일기로 사망했습니다.
황무지(The Waste Land) 줄거리
T. S. 엘리엇이 1922년 출간한 434 줄의 시입니다. 황무지는 20세기를 대표하는 시로, '황무지'는 현대인을 조롱 속의 무녀 시빌과 동일시합니다. 황무지에서 죽음과 다름없이 살아가는 것이 현대인의 삶이라고 본 것이지요. 시가 쓰인 1922년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였습니다. 엘리엇은 전후 유럽의 정신적 황폐를 상징적인 시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또 1922년은 엘리엇에게 개인적 불행이 겹치던 시기였습니다. 부친의 작고, 아내 비비안 헤이우드(Vivien Heigh-Wood)와의 불행한 결혼생활 등이 연이어 겹치게 되었습니다. 훗날 엘리엇 본인이 밝혔듯 자기 자신의 무의미한 삶에 대한 개인적 회의도 동시에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비평가는 이 시를 개인적인 자서전으로, 혹은 붕괴하는 사회적 그림자에 대한 비판과 영적 재탄생의 종교적 알레고리 등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이 시의 바탕에는 성배(聖杯)의 전설이 깔려있습니다. 성배의 전설은 이렇습니다. 저주를 받은 어부 왕(‘사람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이 성(性) 불구자가 됩니다. 그가 다스리는 나라에 기근이 들고 강은 메말라갑니다. 저주를 풀기 위해선 마음이 순결한 기사(騎士)가 황무지 한복판에 있는 성당으로 가서 위험을 무릅쓰고 성배(최후의 만찬 때 쓰였고, 후에 예수가 십자가에서 창에 찔렸을 때 흘린 피를 받았다는)를 찾아야 합니다. 만일 성배를 찾게 되면, 어부 왕은 건강을 되찾고 황무지는 다시 풍요로워진다는 전설입니다.
황무지는 모두 다섯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제 1부는 『죽은 자의 매장(The Burial of the Dead)』으로 새벽안개가 잔뜩 낀 런던브리지를 건너 출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엘리엇은 이 모습을 단테의 '신곡'에 나오는 죽은 자들의 행렬로 묘사합니다. 2부는 『체스 게임(A Game of Chess)』으로 체스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통해 무의미한 일상을 보여줍니다. 3부는 『불의 설교(The Fire Sermon)』로 욕망에 젖어 신음하는 런던의 종말론적 풍경이 펼쳐집니다. 4부는 『익사(Death by Water)』로 물에 던져져 재생 없는 죽음을 맞는 페니키아인 플레버스의 이야기를 통해 무한한 자유를 이야기하고, 5부는 『천둥이 한 말(What the Thunder Said)』로 드디어 비를 몰고 오는 먹구름이 등장하면서 시는 끝을 맺습니다.
이 작품은 정신적 메마름과 인간의 일상적 행위에 가치를 주는 믿음의 부재와 생산이 없는 성(性)과 그리고 재생이 거부된 죽음에 대한 시입니다. 그 유명한 시구들 중에 첫 행의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 “손안에 든 먼지만큼이나 공포를 보여주마”(I will show you fear in a handful of dust), 그리고 마지막 줄에 산스크리트어로 된 주문인 “샨티 샨티 샨티”(Shantih shantih shantih)는 유명한 구절들입니다. 샨티는 산스크리트어로 '평화'를 의미하는 말이지요.
엘리엇은 이 시에서 페트로니우스의 『사티리콘』(Satyricon)에서 온 신화적·종교적 맥락의 라틴어와 그리스어 묘비명을 인용하여 창작에 활용해 근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허기와 갈망, 외로움, 무분별한 성(性)적 남용을 고대 황무지에 빗대어 그려냈습니다. 시 원문을 보면 제목 '황무지' 밑에 라틴어로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나는 쿠마에(Cumae, 나폴리 북서부)의 무녀(巫女)가 조롱 속에 매달려 있는 것을 내 눈으로 보았다. 아이들이 무녀에게 '무엇을 원하냐'고 묻자 그녀는 '죽고 싶다'고 말했다."
시 전체의 분위기를 전달하는 이 라틴어 문장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마신화에 보면 이탈리아 남부 도시 쿠마에에는 유명한 무녀 시빌(Sibyl)이 있었습니다. 이 무녀 시빌을 총애한 아폴로신은 그의 청을 받아들여 한 주먹의 모래알 숫자만큼이나 긴 인생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었습니다. 영생을 준 것이지요. 그러나 무녀 시빌은 깜빡하고 젊음을 달라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을 얻기는 했지만 끊임없이 늙어갔기 때문에 그는 점점 몸이 쪼그라들었고 조롱 속에 들어갈 정도가 되어버렸습니다. 살아 있는 게 죽음보다도 못한 상황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무녀 시빌은 "제발 죽게 해 달라"고 읍소했던 것입니다.
또 만물이 소생하는 봄의 계절인 4월이 ‘잔인한’ 이유는 뭘까요? 엘리엇은 얼어붙은 땅을 뚫고 가녀린 새싹이 돋아나는 4월을 오히려 잔인한 고통의 달로 묘사했습니다. 시 전체를 통해 엘리엇은 탄생 속에 죽음이 있고, 그 죽음 속에 탄생이 있다는 생명윤회를 이야기합니다. 겨울 언 땅을 뚫어야 어린 싹이 꽃을 피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지난한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어쩌면 추억이나 욕망이 거세된 한겨울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지 모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시인은 행복했던 과거의 독일의 생활을 회상합니다.
내용은 리투아니아 출신 여인이 일방적으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했던 시간도 잠시, 시인의 의식은 다시 황무지로 이어지고 황무지의 구체적 이미지가 제시됩니다. 여기에서 시인은 구약(舊約)성경 ‘에스겔’의 구절, “인자(人者)여, 너는 말하기는커녕 짐작도 못 하리라”를 인용, 나라 잃은 유대인이 겪었을 고난을 시 읽는 독자에게 상기시킵니다. 이후 행에서 시인의 명상은 행복한 사랑의 노래로 이어지고, 사랑이 생의 절정 순간임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황량하고 쓸쓸합니다, 바다는’이라는 절망적인 마무리로 이를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그너의 가곡 ‘트란스탄과 이졸데’의 3막 24절을 인용한 것입니다. 황량한 바다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만들어, 잠시나마 느꼈던 사랑의 꿈이 깨어지고 다시 황무지의 현실로 돌아오는 절망감을 안깁니다.
비밀문서를 연상시킬 만큼 어려운 이 시는 읽으면 읽을수록 그 뜻이 새롭게 다가옵니다. 흡사 현대의 묵시록 같습니다. '황무지'는 35명에 달하는 작가의 작품과 신화ㆍ전설을 뒤섞어 막 싹트기 시작한 현대의 절망을 노래했습니다. 미국 출신으로 영국에 귀화한 엘리엇은 지적인 세련미와 시대를 넘나드는 박식함으로 영미시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난해하고 수줍은 거인이었습니다.
황무지(The Waste Land)는 1921년 초고를 썼고, 에즈라 파운드의 조언에 의해 에피그라프를 변경하거나 에피소드를 제거했습니다.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의 "황금가지"의 고대 성배(聖杯)의 전설을 기반으로 성경, 단테, 세익스피어 같은 작품을 인용하였고, "의식의 흐름"과 제1차 세계 대전 후의 황폐한 세계와 구원에 대한 전조를 묘사해 냈습니다. 산스크리트어도 사용하여 인도 사상의 영향도 나타납니다. 1922년에 문예지에 발표를 하였습니다. 이 시는 433행의 난해한 시이며,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1930년대가 되어 프랭크 레이먼드 레비스 등에 의해 평가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에서 황무지는 생명이 깃들 수 없는 문명을 뜻합니다. 1922년에 서구에서 느낀 절망감을 이제 2022년의 대한민국에서 느끼게 됩니다. 희망과 포부도 없이 인터넷 게임에 몰입하며 반사회적인 일베같은 것에 몰입하는 젊음들이 황무지를 반증하는 그 증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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