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서, 특별히 신약성경에서 “영광”은 다양한 의미를 가집니다. 요한복음 12장을 보면 핵심 키워드가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2:23절을 보면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뿐만 아니라 이방인 전체가 구원되는 사건을 말합니다. 헬라인 몇이 예수님을 찾아왔고,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회복이 된, 그 구원의 사건을 언약의 성취로 본 것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을 보면 죽음, 부활, 승천을 같은 단어로 표현합니다. “들어 올림을 받는다”(lifted up, 요한복음 3:14, 6:62, 12:32~33), 즉, 영광의 사건입니다. 올려짐, 영광 받음을 십자가, 부활, 승천으로 이해합니다. 왜 이 사건이 영광 받음입니까? 요한복음 17:4절을 보면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라고 말씀합니다.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주신 일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입니다. 이 일, 즉 계획을 예수님이 이루어 드렸을 때, 그것이 이 세상에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한 사건으로 말씀합니다.
로마서 8:29, 30절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 얻음은 하나님의 아들 형상을 같은 형상으로 되어 감, 이미지로 같이 씁니다(고린도후서 3:18). 하나님과 같이 됨, 하나님의 신성 충만함에 참여한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극치입니다. 우리의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된다는 “칭의”, 하나님과 원수 노릇하지 않고 하나님과 “화해”, 입양하여 하나님의 “아들”, 상속자가 됨, 아담적 숙명을 극복하고 새 인류, 새 아담이 되었다는“새 창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영광의 사건입니다. 구원의 다른 그림 언어들인 “칭의”, “화해”, “아들”, “새 창조”가 모두 하나님 영광의 사건입니다.
오늘 본문은 “영광”을 “통치권”이라는 견지에서 개념을 설명합니다. 히브리서 2:10절에 나타난 “많은 아들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의 개념이 성소 진입의 권면에 대한 하나의 패턴을 제공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천상 성소에 진입하신 것처럼(그리스도의 승천), 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의 패턴을 따라 찬성 성소에 진입합니다(우리의 승귀). 그리스도께서 천상 성소에 진입하여 영광을 받으신 것처럼, 그 패턴을 따라 오늘 우리도 천상 성소에 진입하여 동일한 영광을 공유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형제들과 그리스도께서 공유하시는 “영광”은 무엇입니까? 영광(히브리서 2:10)은 히브리서 2:7절에서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에 복종하게 하심”이라는 주제를 회상합니다. 히브리서 2:10절은 히브리서 1:6절의 패턴을 회상합니다. 히브리서 1:6절은 맏아들을 이끌어 오는 세상으로 인도함을 받았지만, 히브리서 2:10절에서는 많은 아들들이 인도함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2:7절을 보면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라고 말씀합니다.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셨다는 것을 히브리서 2:8절은 “만물을 관 씌우셨다”라고 말씀합니다.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하게 함은 통치권인데, 영광과 통치권이 동의어입니다.
그 영광은 누가 받습니까? 히브리서 2:10절을 보면 그리스도만 영광에 들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많은 아들들, 하나님의 아들, 딸들인데, 그들이 여호수아가 그 백성들과 약속의 땅에 들어간 것처럼 새로운 여호수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끄십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영광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문맥 가운데에서 맏아들(그리스도)이 천상의 “오이코메네”에 진입하는 것과 많은 아들이 영광에 진입하는 것(히브리서 12:22~23)이 병행되는 것을 볼 때, 많은 아들들도 동일한 오이코메네로 인도함을 받고 이것이 영광의 개념과 유비적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은 단지 오이코메네 들어가실 뿐 아니라 오이코메네를 지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히브리서 2:10절에서 많은 아들들을 영광으로 이끈다고 할 때, “영광”이 “영광과 존귀의 관 씌우심”과 “만물에 대한 통치”를 지칭합니다.
메시아는 단순히 구원자 의미가 아니고, 메시아는 예수님의 패턴이 성도의 삶의 패턴이 됩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패턴이 성도들의 죽음과 부활과 승귀의 패턴 관계입니다. 고대의 메시아즘의 특징 중의 하나는, 고대 메시아는 단순히 리더가 아닙니다. 그 백성과 함께 패턴을 공유하는 존재입니다. 다윗에게만 주어진 하나님의 통치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전체에게 주어집니다. 다윗 계열 메시아는 어떤 존재입니까? 시편 2:8절을 보면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라고 말씀합니다. 온 땅에 대한 약속을 상속받는 것을 약속받은 사람은 다윗 계열 왕입니다.
그런데 다윗 계열만 상속받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유대 문헌 보면 온 땅을 상속받는 것은 다윗 계열 메시아와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그렇다면 메시아는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유업을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입니다.
그렇다면 히브리서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받으시는 상속과 영광이 성도들의 것과 다르다고 여길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히브리서에서 그리스도는 성도들의 운명 원형(archetype, 아키타입, 이미 완성되어 있는 원형 의미, prototype, 프로토타입은 시험 단계인 시제품을 의미합니다)입니다. 이러한 운명 공유의 주제가 히브리서 2:11절에서 한 근원이라는 주제를 통해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유를 상속받을 때 우리도 만유를 상속받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와 성도들이 같은 레벨에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와 성도들이 지위 적으로 동일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에게 주어지는 영광이 성도들에게도 주어집니다. 그 정도 영광으로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형제 기독론입니다. 그리스도와 우리가 형제라는 것은 단지 친밀함 그 정도가 아닙니다. 운명의 공동소유자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은 성도의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혼자 영화로워지는 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와 같은 영화로, 영광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만유의 상속자(히브리서 1:3)이신 그리스도는 자기의 형제들이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받도록 하십니다(히브리서 12:28). 히브리서 3:14절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는 한 근원에서 난 자기의 형제들이 자신과 공동소유자(메토코이)가 되게 하십니다. 이것은 히브리서 2:5~9절에서 만물에 대한 그리스도의 통치권이 그리스도의 형제들과 공유되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왕으로서, 대리 통치자로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뜻이 되어서 그것을 이루는,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게 되는 영광의 사건이요 하나님을 영화롭게 만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