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의 월요시편지_476호]
던킨도너츠
이영춘
던킨도너츠 집에 앉아 도너츠 같은 사랑을 생각한다
층층으로 이어진 긴 유리창에
우울 같은 가을비 내리고
젊은 입술들의 꽃잎 같은 언어들이
유리창에 길게 누워 흐른다
던킨도너츠 입술 위에 그림자 같은 얼굴 하나 겹친다
축축한 반죽으로 발효시켰던 회灰가루 같은 사랑,
내 사랑도 거기 둥둥 떠 긴 창을 타고 흐른다
둥근 던킨도너츠처럼 환하게 부풀었다가
허리 뒤틀린 꽈배기처럼 떠난 그림자, 그 그림자
하루 종일 유리창엔 비가 내리고
꽃잎 언어들은 지칠 줄 모른 채
도너츠 같이 둥근 사랑을 구워내고 있다.
- 『신들의 발자국을 따라』(시와표현, 2015)
*
이영춘 시인의 시집 출판기념회 때, 초대를 받고 갔더랬습니다. 그때 제가 낭송했던 시가 바로 「던킨도너츠」입니다. 원래 제목은 "던킨도너츠 집에 앉아"인데 제가 "던킨도너츠"로 하는 게 좋겠다 했더니 이영춘 선생님께서 흔쾌히 그러시라고!^^
그날 무슨 시를 낭송할까 시집을 무심히 넘기다가 눈이 멎은 게 바로 던킨도너츠인데요... 가을비 내리는 어느 날, 던킨도너츠 집에서, 십대 이십대 청춘 남녀들의 수다 사이에 끼어앉아서, 도너츠 같은 사랑을 생각하고 있는, 이제 칠십을 훌쩍 넘긴 老시인의 모습을 생각하니, 공연히 마음이 짠해졌다는...
노시인에게도 '젋은 입술들의 꽃잎 같은 언어들'이 있었겠지요... 꽃잎 같은 입술을 둥글게 말아 꽃잎 같은 사랑을 고백하던 꽃잎 같은 언어들이 있었겠지요... 이제는 던킨도너츠 집에 앉아 그저 '둥근 던킨도너츠처럼 환하게 부풀었다가/ 허리 뒤틀린 꽈배기처럼 떠난 그림자, 그 그림자'를 그리워할 따름이지만... 엄마, 엄마 생각이 납니다. 이제는 다 늙어 쭈그렁 할머니가 된 엄마... 우리 엄마도 어느날 꽃잎 같은 입술을 둥글게 말아 마침내 도너츠 같은 나를 낳았을까요?
이십 년 쯤 뒤에 어쩌면 나도 던킨도너츠 집에 앉아 이 시를 다시 꺼내 읽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달콤한 던킨도너츠와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이 생각나는 아침입니다.
지난 주말에는 이십여 년만에 대학 동아리 선후배들을 만났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 했네요... 옛사람들, 옛추억들... 둥근 던킨도너츠처럼 환하게 부풀었던... 내 스무살의 꽃잎 같던 문장들...
2015. 11. 30.
박제영 올림
첫댓글 2015. 12월24일 코리언 뉴스에 발표합니다.
학봉님이 소개해 주셨네요.
아, 감사할 따름입니다....
어, 이 시도 있군요. 카페에 자주 안 들어왔더니 많이 올라 있네요.
늦게 인사해서 미안합니다. 소교님, 학봉님, 두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