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희정 기자, 사진=구혜정 기자 기자
본지 김희정 기자가 서울 광화문 일민미술관을 찾아 김은진 작가의 개인전인 '나쁜 아이콘(The Wicked Icon)'을 둘러보고 있다.
[재테크, 희정이도 한다] 미술품 투자 현주소
40대 중반의 전문직 종사자 S씨의 취미는 미술품 감상. 주말이면 딱딱한 업무에서 벗어나 그림 보는 재미에 푹 빠져 산다. 재테크에도 관심이 많아 주식, 부동산에 골고루 투자하고 있지만 돈 그 자체보다 부(富)를 늘려가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처음엔 머리를 식힐겸 그림 감상에서 출발했다가 이제는 미술품으로 돈을 버는 일에까지 관심을 넓히게 됐다. 지난해 여름에는 휴가까지 반납하고 경매시장을 돌아다녔다는데..
"아시아 작가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얘기를 듣고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 친지들과 함께 갔죠. 동양미술을 특히 선호하는 건 아닌데 베트남 작가 응우옌 탄빈(Nguyen Thanh Binh,1954년~)의 작품을 보고 이거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어요." S씨는 붓을 눌러 윤곽선만 남기는 독특한 화법의 그림에 매료돼 응우옌 탄빈의 작품 3점을 구입했다. 아오자이를 입은 여인의 자태가 볼 때마다 새롭다.
"투자금이 많지는 않았어요. 친지들까지 가세해 중국 작가의 작품까지 총 8점의 작품을 샀는데 1000만원 이내였으니까요." 응우옌 탄빈은 아시아권에서 지명도가 높은 작가다. 세계 각국에서 전시회가 상시로 열리고 98년에는 국내에서도 전시회가 열렸다. 그의 지명도는 나날이 높아져 가격이 치솟고 있다. S씨는 그림에 이끌려 구입한 만큼 당분간 작품들을 계속 보유할 생각이다.
그림으로 재테크를? 그런건 재벌가 안주인들이 고급스런 갤러리를 열어 하는 것 아닌가.
학창시절 기자는 미술과목 성적이 형편없었다. 주렁주렁 스케치북을 들고 다니는 것도 질색이었지만 손에 묻는 크레파스며 물감도 달갑지 않았다. 재능이 없는데다 의지마저 없으니 점수가 제대로 나올 리 만무했다. 실기시험은 바닥을 기었고 그나마 필기시험으로 간신히 체면을 유지하곤 했다. 가끔씩 마음좋고 그림 잘 그리는 벗을 떡볶이 한 접시로 매수하고 대신 그려달라 사정도 해봤고 다른 벗이 그리다 망친 그림을 운좋게 수집해 예상 외의 점수를 얻으면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러니 기자같은 이에게 미술 투자는 말그대로 그림의 떡이다. 그리지를 못하면 S씨처럼 미술품을 보는 심미안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이도저도 해당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여행을 하다 우연히 들른 벼룩시장에서 눈이 가는 미술품을 저가에 수집해 고이 모셔뒀더니 몇 년 후 감정가가 얼마가 나왔다더라는 식의 얘기는 로또 당첨의 다른 버전일 뿐. 하지만 주식 전문가인 펀드 매니저가 종목을 선정해서 투자를 대신해주는 간접투자가 미술품에도 적용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어떤 그림이 돈이 될 것인가라는 잣대로 예술품을 보는 것에 탐탁치 않아 할 사람들이 많겠지만 최근 미술시장에 부는 바람은 미술의 대중화, 투자로서의 미술품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하나은행은 지난 8일 아트펀드(Art fund) 컨퍼런스를 주최했다. 해외뮤추얼펀드에 투자하고 있는 PB고객 200여명을 초청한 이 행사는 기대 이상의 호응을 얻었다. 영국의 필립 호프만씨가 ABN 암로 은행,미술, 경제 전문가와 손잡고 만든 '파인 아트펀드(Fine Art Fund)'가 소개된 것이다. 이 펀드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펀드를 통해 자금력을 동원, 블루칩 작품을 중심으로 집중투자하면 더 높은 수익을 낼 수 있다는 전제 아래 만들어졌다.
검증된 금융 전문가와 미술 전문가가 운용진으로 포진해 작품 선택의 수고(?)를 대신하므로 미술의 문외한이라도 걱정이 없다. 거대 자금으로 구매에 나서기 때문에 시장성은 있지만 투자금에 대한 부담 때문에 사지 못하는 최상급 작품에 투자할 수 있다. 개인투자자에게는 부담되는 보험, 매매비용, 세금까지 일률적으로 처리되고 펀드 포트폴리오 내에 있는 작품을 적극적으로 홍보해 가격 상승의 기회를 만들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파인아트펀드는 1000억원 규모의 1차 펀드 모집을 마치고 현재 2차 펀드를 모집하고 있다. 문제는 투자 규모와 기간. 이 펀드의 최소 투자금은 25만달러다. 한화로 2억원이 넘는 금액이니 VIP급 투자자가 아니라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투자 기간도 만만치 않다. 펀드 설립 후 3년간 수익이 기대되는 미술작품의 매입을 마치고 4년차부터 매매를 시작해 10년째 되는 해에 수익을 회수하게 되는데 실시간 거래시장이 없는 미술품의 특성상 중간 환매가 여의치 않다. 그러니 10년이상 펀드에 가입하고 있어야 한다.
영국 파인아트펀드를 벤치 마킹해 국내에서도 아트 펀드를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우리은행과 충청남도 천안의 아라리오 갤러리가 사모 아트펀드를 기획하고 있고 하나은행과 K옥션 역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최소영, 김동유 등 국내 작가의 작품이 국내 거래가를 훨씬 뛰어넘는 가격에 낙찰된 것도 한 몫했다. 국내에서 외면당한 작품들이 해외에서 빛을 본 것이다.
2002년 개관한 아라리오 갤러리는 시의 적절한 해외미술품 투자로 대박을 터뜨리기도 했다. 2001년부터 영국 출신 마크 퀸의 설치 작품 '셀프'와 영국 젊은작가의 대표주자인 데미안 허스트의 '찬가', '채리티' 등 3점에 투자해 120억원 이상의 시세차익이 기대되고 있다. 소더비와 크리스티가 추정한 감정가에 따르면 2003년 20만파운드에 매입한 '셀프'는 150만파운드로 올랐고 '찬가' 역시 2001년 250만달러에 사들인 것이 3배로 올랐다. '채리티'는 2003년 당시 200만달러에서 800만달러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국내 아트펀드는 현재 어느 정도 진전되고 있을까. 기대와는 달리 아직은 기획 단계다. 미술품 경매 역사가 짧아 기존 거래된 작품들의 거래내역이 축적돼 있지 못한 데다 미술품 유통 물량이 많지 않다. 미술과 금융을 동시에 섭렵한 전문가도 드물다. 우리은행과 사모펀드를 준비 중인 아라리오 갤러리는 "세금 문제로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라며 말을 아꼈다. 아트펀드 컨퍼런스를 개최한 하나은행과 K옥션 관계자 역시 "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이제 막 첫 발을 딛고 있는 상황"이라고 전했다.
펀드가 아니라도 개인이 소액으로 투자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500만원 이하의 미술품을 다루는 중저가 미술품도 수천만원에서 수억원에 달하는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지난해 11월 서울옥션이 서울 인사동 인사아트센터에서 개최한 제6차 열린 경매는 출품된 166점 중 115점이 낙찰돼 낙찰률 69%를 기록했고 낙찰가 총액도 경매시작가 총액의 1.5배인 3억7220만원에 달했다.
특히 개인 소장가들이 수집한 작품이 선보여 작가와 연대가 불명확한 산수인물도(비단에 수묵채색 98×195㎝)가 20만원 정도의 예정가로 출품돼 예정가의 165배에 달하는 3천300만원(수수료 별도)에 낙찰됐다. 또 30만원으로 시작한 신상호씨의 도자기 20여점이 모두 수백만원에 낙찰됐고 250만원에 출발한 박영선씨의 정물화는 900만원에 낙찰됐다.
이쯤 되면 미술품에 관심있는 개인들도 한 번쯤 귀를 세울 만하다. 수천, 수억원이 아니라도 미술품 애호가에게 미술을 통한 투자의 길은 열려있다는 얘기다. 꼭 소장하고 싶은 미술품이 있지만 자금이 부족해 대출을 이용하고 싶다면 미술품 경매회사를 통해 1000만원이상의 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대출금리는 연 12%로 상당히 높다. 낙찰 미술품을 담보로 제공해야 한다는 것도 치명적이다. 아트펀드가 대중화 될 때까지는 아쉽지만 중저가 미술품 경매를 눈여겨 보는 게 대안이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미술시장은 1975년부터 1980년대 말 투기거품이 일었던 시기를 제외하면 장기적인 상승 추세를 보이고 있다"며 "미술품 역시 시장의 흐름을 잘 파악하면 투자 수익을 올릴 수 있는 분야지만 환금성이 떨어지는 만큼 미술품에 대한 관심과 애정 없이 투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혹여 팔 수 없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보고 즐기며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족하다는 생각으로 매입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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