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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김요셉)
나균용 목사님
베드로전서 1장 3절-4절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후서 두 권의 책을 썼는데 이게 지금 베드로전서 첫 머리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그 앞에 있는 1절 2절은 인사죠.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이렇게 축복을 해주고 나서 바로 첫마디가 이 부활에 대한 얘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원래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신 거고 1장에 우리 성도들이 사도들이 열심히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는데 베드로가 일어나서 <우리가 원래 12명이 사도로 택하심을 받아서 주님을 따라갔는데 그중에 가 유다 한 사람이 배반해서 이 사람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게 되었는데 그러면 우리가 그냥 이대로 갈 것이 아니고 가롯 유다의 그 자리에 다른 사도를 하나 더 뽑아서 채워놓고 가자. 그래야 이게 순서가 맞는 거 아니겠느냐> 이런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도들이 다 좋다 그래가지고 사도를 하나 더 뽑는데 자격이 있죠. 그 사도는 예수님이 가르치시기 시작하신 그때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한 사람을 뽑아야 한다. 둘째 자격은 뭐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증언할 사람이라야 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본 사람이라야 된다는 얘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확신하는 사람이라야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만 전할 수 있는 사람이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몇 가지를 설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첫째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둘째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래서 그 설명이 4절 가죠.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혹을 잊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셋째로 우리는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첫째 거듭나게 하신 것이다. 둘째 산 소망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우리 삶을 변화시키는 새 역사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 예수님 안 믿던 때 사람과 예수님을 믿고 난 다음의 사람이 어떻게 달라졌느냐를 봐야 돼요.
첫째 일어난 변화는 뭡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첫째 너희가 거듭나게 되었다. 거듭나게 되었다. 그런데 우리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거듭날 수 있느냐 하는 거를 세 가지로 설명을 합니다. 첫째 예수님 말씀하신 그대로예요. 첫째는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둘째 물로 거듭나야 된다. 이 두 가지 그리고 하나 더 베드로전서 1장 이제 다음에 조금 더 읽어보면 <우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오. 살아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거듭나는 거는 세 가지입니다. 물로 거듭난다 성령으로 거듭난다. 말씀으로 거듭난다.
물로 거듭났다 이렇게는 말할 수 있는데 무엇으로 거듭난 건 아니에요. 요한은 말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오>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 세례를 받아야 된다 하는 거죠.
사도행전 2장 <오순절 날이 되었더니 하늘로부터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들리고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그들에게 임하더라>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 성령 세례라고 하는 것이 드디어 임했다. 요한이 <너희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받아야 된다> 하고 가르쳤는데 그것이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드디어 이루어진 거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나야 된다.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어야 하겠습니다.
첫째는 이렇게 해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신다. 교회의 건성으로 왔다 갔다 다니지 말고요. 정말 성령 충만함을 받으시게 되기를 축원합니다. 둘째는 또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그렇게 말씀했죠. 산 소망이 있게 하신다.
셋째로는 실제에 있어서 우리가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어떤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가.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어떤 역사를 이루어 주시느냐 우리에게도 부활의 생명을 주신다 하는 거예요. 그게 거듭난 생명 아니냐 물론 그게 그거예요. 그렇지만 부활의 생명을 받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이 세상에서 아까 잠깐 얘기했지만 불평, 불만이 사라져버려요.
하나님 아버지! 우리에게 고난이 와도 어려움이 와도 로마서 8장 28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는 말씀을 붙들고 주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가게 인도하옵소서.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기도에 더욱 힘쓰고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함으로 주님께서 이루신 부활의 은혜가 오늘도 주님 앞에 예배하는 주님의 백성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누구신가? 서론
나균용 목사님
요한복음 5장 39절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로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바로 나에 대해서 증언하는 것이라
예수님은 이 성경 전체의 주제가 되는 것입니다. 물론 신약성경은 말할 것도 없이 전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신약만이 아니라 구약성경도 전부가 예수님 이야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5절에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또 하나 더 꼽으라고 하면 마태복음 27장 22절에 빌라도가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성경은 전부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아브라함의 이야기, 모세의 이야기, 다윗의 이야기 이런 데에서 그냥 아브라함이 옛날에 어떻게 어떻게 살았다더라,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라, 아브라함의 순종을 본받아라 뭐 이렇게 설명만 하는 것으로 끝날 게 아니라 아브라함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내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다 하는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일들이 이루어져야 드디어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야곱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삭의 이야기 속에서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언제 만났습니까?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했을 때 그때 하나님을 만나보지 않습니까? 물론 그 전에도 만나요. 하나님께서 <너는 네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서 내가 너에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라고 명령하실 때부터 그분을 만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데 그때는 아직 예수님인지 잘 몰랐어요. 그리고 구체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이 창세기 22장의 이삭을 번제로 드리게 될 때 거기서 두 번 만나죠. 하나는 하나님의 사자가 나타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라고 급하게 부르시면서 <네 독자 이삭에게 손을 대지 마라> 죽이지 말라는 말씀이죠. 자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셨다. 그다음 놀라서 뒤를 돌아보니까 어린 양 하나가 숲에 걸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 하나님이 이 어린양으로 이삭 대신에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시는구나 하고 이삭은 제단에서 내려놓고 이 어린 양을 잡아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그 양이 바로 예수님이시지 않았습니까? 자 이렇게 예수님을 만났다.
이삭은 언제 만나요? 그 이야기가 바로 이삭이 예수님 만나는 이야기가 되는 거죠. 이렇게 하면서 물론 하나님의 사자로서 이렇게 찾아와서 이삭을 만나시고 명령하시고 축복하시고 하는 이런 일들에도 여러 차례 나타나지만 여하간 예수님의 결국 아브라함의 이야기도 예수님 얘기요 이삭의 이야기도 예수님 얘기더라 야곱은 언제 만나죠? 야곱은 많이 다른 때도 있겠지만, 특별히 창세기 32장에 얍복 나루, 얍복은 개울입니다. 나루가 아니고 사실은 얍복이라고 하는 그 개울에서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서 밤새워 씨름을 했다고 그랬어요. 야곱이 얼마나 끈질기게 간절히 매달려서 이길려고 막 몸부림을 쳤는지 그분이 야야 내가 졌다 나 빨리 가야 되겠다. 그랬더니, 붙잡고 늘어지잖아요. 나에게 축복해 주시지 않으면 당신은 못 갑니다. 그분이 능력으로 탁 쳐버리고 갈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지만 그의 간절함을 받으시고 그래 너 이름이 뭐냐 내 이름은 야곱입니다. 네 이름을 이제부터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고 사람과 겨루어서도 이겼다 이런 뜻이란 말이죠. 너는 승리자가 되었다. 너는 나에게 이겼으니까 내가 바로 하나님도 되고 사람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이죠. 이렇게 예수님을 만나야지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런 말씀들 속에 다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세의 이야기에서 다윗의 이야기, 여호수아의 이야기, 엘리야의 이야기 할 것 없이 구약성경 구절 구절 속에 숨어 있는 그 예수님을 만나고 그 예수님 만난 기쁨과 확신과 감사와 찬양이 이어져 나갈 때에 우리의 믿음도 놀랍게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우리가 신약 성경에서 또는 성경 전체에서도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질문 첫째는 아까 얘기했습니다.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물으시는 말씀, 베드로의 놀라운 신앙 고백이 나오게 된 이 질문 그래서 마태복음 16장에 두 번이나 물으시죠.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둘째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사람들이 누구라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더러는 엘리야라고도 하고 이사야라고도 하고 세례 요한이라고도 하고 이렇게 선지자들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다시 물으신 것이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때에 베드로가 얼른 나서서 놀라운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말씀은 우리가 다 외우고 사랑하는 말씀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말로 번역했으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그랬죠. 영어로 보거나 원문으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렇게 고백을 하지 않습니까? 거기에서 예수님이 물으신 말씀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바로 이 질문이 우리를 천국이냐 지옥이냐로 갈라놓는 것입니다. 이 질문 앞에 우리가 정직해져야 합니다. 아마 평화로울 때, 이렇게 보통 때에는 누가 나에게 그렇게 묻는다면 다 베드로처럼 고백을 할지 몰라요. 그러나 총칼을 들이대고 나를 죽이겠다고 협박을 해 가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죽인다 예수 안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겠다. 뭐 이런 식으로 나올 때에는 그때는 또 달라지는 거죠.
아주 극단적인 예가 아니래도 우리가 평소에는 교회 잘 다니고 믿음 좋고 예수님 잘 섬기는 것 같이 하다가도 갑자기 어려운 일이 생기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든지 건강에 어려움을 당하든지 또는 남들에게 모욕을 받는다든지 심지어는 박해를 받아서 감옥에 갇히게 된다든지 우리 인생살이의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금방 회의에 빠집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의심합니다. <하나님 왜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내가 뭐가 잘못했다고 이렇게 나를 시험하십니까?> 해 가면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고 원망하고 대적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그래서 우리가 일상 생활하면서도 이 믿음을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이 신앙 고백을 바르게 해야 합니다. 환경이 어떻게 변하든지 나는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은 나의 구주이십니다.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주님만이 나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 주님을 내가 더욱더 의지합니다. 이렇게 하면서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야지 하겠습니다.
첫째 질문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건 심각한 질문입니다. 평화로울 때 하는 거 아닙니다. 우리가 역경을 만났을 때 낙심할 수밖에 없는 어려운 일 당했을 때 심지어는 나를 죽이겠다고 하는 총칼 앞에서도 우리가 담대히 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느냐 하는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마지막 질문 더 있죠. 그것은 빌라도가 재판을 하는 가운데서 예수님을 심문하고 그 다음에는 백성들에게 묻지 않습니까? <너희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이것도 얼마나 심각하고 중요한 질문입니까? 이 귀한 질문을 우리가 마음에 잘 새기고 내가 빌라도의 자리에 앉아서 지금 재판을 한다면, 어떤 재판을 할 것인가? 이거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재판을 내리겠습니까? <나는 빌라도가 아니니까 관심 없고, 그거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이렇게 이야기하겠습니까? 아니에요. 언젠간 우리가 다 주님의 심판대 앞에 섭니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서 내가 예수님을 어떻게 심판했느냐 이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지금도 이 땅에는 마귀의 자식들이 가득하게 있어서 예수님을 이렇게 심판합니다. 하나님의 종들을 박해합니다. 그들은 자기에게 달콤한 소리하는 자들은 환영하고 칭찬해 주지만, 바른 말을 하고 죄를 책망해주는 사람은 대적하고 이렇게 박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헤롯 왕도 세례 요한의 책망을 받고 화가 나서 요한을 죽이지 않았습니까? 목 베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오늘날도 이 위정자들을 향해서 또는 세상의 죄인들을 향해서 쓴소리를 하고 회개하라고 외치고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하고 회개하지 않으면 큰 심판이 온다는 얘기를 하고 이 땅에 무서운 환란이 일어난다고 가르치고 이렇게 양심에 찔리는 소리를 자꾸 하는 의로운 백성들이 많이 있단 말이에요. 이런 사람들의 말을 들을 때 세상의 악인들은 듣기 싫어합니다. 한 목사님이 바른 말을 하면 다른 목사들이 벌떼같이 일어나서 막 그 목사님은 공격을 하는 것도 세상에는 너무너무 많아요. 누가 과연 진짜입니까?
이 마지막 때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 거는 목숨 걸고 하는 그런 큰 결단입니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이렇게 교회 왔다 갔다 다니는 자가 되지 말고 그냥 왔다 갔다만 해도 다 천국 간다고 착각하고 살지 말고, 착각이 아니라 이거는 망상입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다 순교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그 이후 이천 년을 내려오면서 신실한 성도들은 사자 밥이 되기도 하고요. 이렇게 목배임을 당하기도 하고요. 얼마나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습니까? 여러분 우리가 정말 믿음으로 더욱 새로워져야 되겠습니다. 예수님 사랑하는 마음이 속에서 막 타올라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주님 더욱 잘 섬기는 귀한 성도들 되어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아버지! 십자가에서 흘리신 독생자 예수님의 보혈로 우리의 죄를 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 성령님의 능력이 우리에게도 임하여 세상을 이겨나가는 주님의 자녀되게 하옵소서. 오직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의지하고 나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변화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나균용 목사님
오늘 3과는 이 고백의 둘째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하는 이 고백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가 이 말씀을 마음에 깊이 새기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생각해야 됩니다. 먼저 우리는 이 유태인들에게 있어서 히브리 사람들이 아들을 아버지와의 관계에 있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가 하는 거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아버지와 아들은 엄연히 다른 존재예요. 또 오늘날 이 세상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은 분명히 다릅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시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 말씀은 이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여자하고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 게 아니잖아요. 하나님은 홀로 완전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 말은 100% 하나님 그대로의 품성, 능력, 이것을 다 가지시고 태어나신 분인데 단지 아들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육체를 입고 오셨다고 하는 면에서 우리가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는 것이지, 그분이 하나님을 절반 담고 어머니를 절반 담고 그런 이야기는 전혀 아닌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라는 개념이 어떻게 다른가 하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넘어가야 하겠습니다.
그 다음에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단어가 나오면 다 찾아서 이것이 무슨 뜻인가? 하고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연구하는 방법 가운데 이건 매우 중요한 방법입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이 나오면 역사적으로 그리스도가 언어학적으로 무슨 뜻이다, 역사적으로 무슨 뜻이다, 유대인들의 생각에 어떤 뜻이다, 이렇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성경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느냐? 하는 것을 가지고 이렇게 설명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특징은 <예수님을 향해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이렇게 말했던 사람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사람들을 보면 다 병자들이었습니다.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예수님 찾아왔어요. 그러면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여 이렇게 부르짖었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냐? 첫째는 귀신 들린 사람들이 이야기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을 향하여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님의 사도들입니다. 이 사도들이 예수님 만난 후에 변화되고 새롭게 된 후에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걸 깨닫고 고백한 것입니다.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고백은 너무도 놀라운 고백인 것입니다.
이사야 9장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아들을 주셨는데 이 아들이 누구냐를 설명하면서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이렇게 설명하고 있어요. 예수님은 아들이시면서 동시에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동등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건 요한복음에서도 예수님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씀하시니까 유태인들이 막 공격을 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거는 하나님과 자기가 동등되다고 얘기하는 거다.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거다. 그래서 막 예수님을 공격을 하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러면 누구의 말이 더 정확한 거겠습니까? 병자들이 다윗의 자손이오라고 한 말과, 예수님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또는 귀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고 고백하는 말과 어느 것이 더 정확한 말일까? 물론 두 가지가 다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고 하는 말은 예수님께서 사실은 다윗의 자손이 아니고 다윗의 주인이시다. 다윗의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고쳐주시기도 했어요.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훨씬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정말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렇게 말씀할 때는 예수님에게는 어떠한 권세가 있는가 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아들에게는 5가지의 특권이 있습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나면 이 아기는 아버지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어요. 아버지와 동거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면 하나님과 동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거예요. 예수님이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는 이 동거권을 몰랐어요. 하나님과 함께할 수가 없었어요.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마귀한테 끌려갈 수밖에 없죠.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예수님은 임마누엘로 오셨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 이렇게 안아주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둘째 아들의 권한은 청구권입니다.
셋째로 우리에게 찾아오는 권한은 통치권입니다.
넷째는 대행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로는 상속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 아버지는 죽은 다음에 그 유산을 물려받는 것인데 하나님은 죽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존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유산을 물려준다 하는 말은 어떻게 보면 그 단어가 안 맞는 이야기지만, 그런데 유산이라고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서 필요한 재산을 물려주신다. 나를 위해서 필요한 하늘의 보물을 나에게 내려주신다. 하나님께는 무궁무진한 보물이 있습니다. 이 세상 것이 다 하나님의 것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에게 내가 청구하지 않아도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모든 좋은 것을 내려주시고 하신다고 하는 거죠.
야고보서 1장 17절에는 모든 좋은 것이 위로부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모든 좋은 것이 내려온다 말씀하고 있어요. 그분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내려주시기를 기뻐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받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그분의 은혜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시느냐? 로마서 8장 13절 14절, 15절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영을 부어주셨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내 속에 들어오니까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르느니라 이렇게 설명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양자의 영을 받아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지. 양자의 영을 받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속에는 예수님이 주시는 하나님의 씨가 있는데 이 가장 중요한 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영을 주셨다 말씀했죠. 하나님의 영을 우리가 받아야 돼요. 이것이 바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말입니다. 영으로 거듭나야 하나님의 자녀가 돼요.
거듭나지 못한 자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건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이렇게 말씀하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5장 7절에도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요한복음은 1장 1절 시작에서부터 태초의 말씀이 계시니라~ 그랬어요.
창세기는 태초에 하나님이 계시니라 그렇게 말씀했는데, 요한복음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어서 설명하기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1장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심에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하나님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주 충만하더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내 속에 있다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성령이 내 안에 충만하다. 성령 충만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자격이 없습니다.
둘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씨는 바로 말씀이다 하는 거죠. 우리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가득하게 채워야 합니다. 누가 복된 사람입니까? 시편 1편 1절과 2절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때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이렇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이 말씀을 찬양하고 있는 시편이 대표적인 19편과 119편입니다.
간구의 영을 부어주신다
나균용 목사님
스가랴 12장 10절-14절
10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 독자를 위하여 애통하듯 하며 그를 위하여 통곡하기를 장자를 위하여 통곡하듯 하리로다
11 그 날에 예루살렘에 큰 애통이 있으리니 므깃도 골짜기 하다드림몬에 있던 애통과 같을 것이라
12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하되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3 레위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시므이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며
14 모든 남은 족속도 각기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리라
간구하는 영을 부어주신다 이게 무슨 소리냐. 여기에 보면 애통한다, 통곡한다, 이런 말들이 계속 나오고 있어요.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에게 이렇게 큰 애통, 큰 통곡 이런 것이 일어나게 된다~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게 대관절 언제 이루어질 일이냐. 또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우리가 이 말씀을 읽기는 읽지만, 무슨 소린지 제대로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성경의 모든 예언의 말씀들을 살펴보면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예언들이 무엇이 있는가 이거를 생각해 봐야 돼요.
그 예언들이 다 이루어지면서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져야지만 할 예언들 중요하게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 재림하시기 전에 하나님께서 어떤 한 나라를 세우신다고 말씀하셨어요. 이 나라를 세워서 세상에 없는 큰 부와 영광이 가득하게 만드시는 이런 역사를 이루시는데 이러한 나라를 보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하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시기하게 된다는 말씀이 로마서 10장에 한번 나오고 11장에 두번 나오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기하게 되는 한 나라가 세워지고 엄청난 복을 받게 된다, 이것이 이사야 60장에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내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라고 하시는 말씀 가운데서 나타나죠.
우리가 우리 민생의 고난을 당하는 거를 오히려 기뻐하고 감사하고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어야지만 하겠습니다. 자 그래서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 이렇게 새로운 나라 이스라엘이 시기하기까지 할 그런 나라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이루어지지 않은 거는 대환난입니다. 이 세상에 엄청난 환난이 일어난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24장에서 설명을 하셨어요. <이 세상에서 일어날 환난 전에도 없었고 그 다음에도 없을 엄청난 환란이 일어난다> 왜 이렇게 이런 게 일어납니까? 그래서 이건 첫째는 자연재해로 오죠. 기근, 지진과 전쟁과 전염병 이런 것들이 이 땅을 가득하게 뒤덮여야 된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일이 왜 일어나느냐. 이게 오늘 본문 우리 본문이 스가랴 12장인데 13장 8절 9절 말씀을 이렇게 보면 말세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 것인가? 하면서 이 땅의 어마어마한 환난이 일어나요. 태양이 막 쏟아지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 인류의 3분의 2가 멸절을 당하고 3분의 1이 남는데 이 3분의 1을 불 속에 집어넣어 금같이 은같이 이렇게 연단을 해서 하나님 잘 섬기는 백성으로 만드신다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 환난이라고 하는 거는 단순히 죄에 대한 심판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이 환난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될 사람들을 불러내시고 그들을 연달 시키시고 그래서 천국백성 만드시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연단되어 구원받게 되는 사람들을 가리켜 너희는 내 백성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이 백성들도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고백하게 만들고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드신다는 거예요. 이렇게 돼서 드디어 예수님이 재림하시고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역사가 이렇게 일어날 것을 설명하고 있어요.
셋째로, 중요한 거는 자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구원을 받게 될 것인가? 오늘 스가랴 12장 12절을 중심으로 앞에 10절과 11절 뒤에 13절 14절 이렇게 5절의 말씀인데 이 속에 이스라엘에게 큰 애통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애통이 일어나느냐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시고 간구하는 이 회개의 영을 부어주신다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니까 이스라엘의 큰 회개가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을 했나 하고 찾아봤더니,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유대인들이 다 회개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말씀이 성취된 거다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런데 내가 그 말 설명을 들으면서 아니야. 이건 아니지 그거는 그 설명이 될 수가 없어요. 왜 그런 설명이 될 수 없느냐 이 설명을 보면 참 신기한 설명이 그다음에 나옵니다. 그래서 12절에 보니까 온 땅 각 족속이 따로 애통한다. 이거는 세상 모든 백성들이 폐기한다는 거를 얘기 암시하는 거죠. 그런데 다윗의 족속이 따로 가고 여기 각 족속이라는 것을 이거는 이스라엘의 각 족속을 얘기하는지 몰라요. 그래서 다윗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의 아내들이 따로 합니다. 나단의 족속이 따로 하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하고 레위족 족속 그리고 시므이 족속 그들이 따로 한 대요. 전부 따로따로 이렇게 한다.
그런데 오순절 때에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해 가지고 그때의 마가의 집에 모여들었던 이 사람들에게 이 성령 받고 막 방언을 이렇게 하니까 거기에 구경하러 왔던 사람들이 소란스러우니까 모여들어, 자기네들 살던 그 땅의 방언으로 이렇게 얘기하는 게 대관절 이게 뭐냐 하고 깜짝 놀랬던 일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때에는 각 족수 이 마가의 집에 모였던 120명 이 사람들 속에서 이 회개 운동이 일어났죠. 그래서 불똥이 튀어서 그날에 3천 명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그다음엔 또 5천 명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이렇게 했다고 하는 말씀이 나오지만, 이거는 여기에 있는 말씀과 다른 거는 이 지배층에 있는 사람들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얘기가 아니고 이거는 서민들이라고 하는 거예요.
서민층 위에 있던 사람들이 했고 따로 모여서 회개 운동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이것은 함께 모여있을 때의 회개 운동이 일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이 전할 때에 사도들의 전도를 들은 그 사람들에게 회개 운동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자 그런 점이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그러니까 마지막 때에는 전혀 다른 역사가 일어나요. 오늘날은 이스라엘 족속 열두 지파가 다 흩어져 버렸기 때문에 지금 유대 나라의 이스라엘 나라에 찾아와서 우리가 보통 유태인이라고 부르는 그 사람들도 사실은 진짜 유태인이 아닐 수도 있죠. 어떤 거는 가짜 유태인들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진짜 유태인이 아닐 수도 있어요. 진짜 순수한 이스라엘의 혈통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 거기에 따라와서 그냥 거기서 살고있는 이런 사람들일 수도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누가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닌지를 분간할 수가 없어요. 그런데 우리 만주 땅에도 유태인들이 많이 살았대요. 아마 지금도 후손들이 많이 살고 있겠죠.
그리고 유태인들이 이스라엘 멸망당한 후에 전 세계로 흩어져서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 자기 살길 찾아서 갔었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누가 유태인이고 누가 아닌지를 분단하기가 너무 어려운 시대가 되었는데 그러나 이 사람들이 어딘가는 살고 있잖아요. 그래서 그들이 따로따로 이렇게 애통한다. 통곡한다. 하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함께 모여서가 아니고 바로 따로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역사가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 회개의 영을 부어주시니까 간구의 영을 부어주시니까 회개하면서 하나님 앞에 부르짖었기도 하고 이렇게 해서 놀라운 역사가 온 세상에서 일어나게 된다고 하는 거예요. 심지어 누구가 누구 따로 하느냐 남편들이 따로하고 아내들이 따로 하고 이런 말씀을 몇 번이나 강조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 따로 한다는데 부부가 함께 있어 가지고 함께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게 아니라 아마 내가 볼 때는 여자들이 더 먼저 회개할 거예요.
먼저 말씀을 받아들이고 회개 운동 일어나서 그다음에 남편들도 회개시키고 하는 이런 일들이 일어나지 않겠느냐 되는 것입니다. 자 이런 거룩하고 놀라운 생명의 새 역사를 위해서 누가 전도를 해야 되고 누가 이 길에 뛰쳐나갈 일을 해야 될 것인가?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크리스천, 특별히 우리 한인 크리스천들이 이 거룩한 사역을 감당해 나가야지만 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이스라엘 사람들 유태인들은 돈 벌고 세상적으로 영광받고 사는 이런 일에만 관심이 많지 예수님에 대해서 아주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고 살고 이렇게 반대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이들도 깨닫고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에서 그들이 자기들이 찌른 그분을 보게 될 것이라 이렇게 설명하고 있잖아요. 그들이 찌른 예수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첫째는 유태인들에게 이스라엘의 이 역사가 먼저 일어나는 거고, 이것이 성장해 나가서 온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유태인들에게 그리고 온 세계에 있는 많은 속속들이 다 주님께로 돌아오게 되는 새 역사가 일어난다, 인류의 3분의 2가 멸절하고 3분의 1이 남게 된다면 유태인들만 남는 거는 아니잖아요. 거기에는 우리 한국 크리스천들 또 미국의 선교사들이 온 세계에 나가서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세상 사람들을 다 이렇게 모아서 회개시키게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게 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기를 위해서 기도하고, 이것을 믿고 우리는 더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생명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야지만 하겠습니다. 우리에게 이 거룩한 사명을 주신 것 감사하고 주님 앞에 충성하는 새 일꾼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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