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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908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성령강림절 후 제16주)
신앙의 면류관: 승복
사35:4~7상; 약2:1~10,(11~13),14~17; 막7:24~37
오늘 우리는 다시 시로페니키아 여자의 신앙을 만나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로 지역으로 가셔서 어떤 집에 들어가 숨어계시기를 바라셨습니다.(예수님은 아마도 잠시 은둔할 필요가 있었던가 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의도와는 다르게, 귀신 들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 귀신 들린 딸을 고쳐주시는 치유기사지만, 사실은 귀신들린 딸이 초점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딸을 둔 어머니, 이방 여인의 신앙이 이야기의 초점입니다.
예수님께서 들어가셨던 두로라는 도시는 유다에 속한 도시가 아니라, 어떤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페니키아라는 독립의 주요도시였습니다. 이곳은 갈릴리에서 서북쪽으로 올라가면 지중해에 접해있는 항구도시가 나오는데 그곳이 두로입니다.(현재는 레바논에 속해 있습니다.) 예부터 두로는 그 아래에 있는 시돈이라는 도시와 함께 “두로와 시돈”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매우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이곳은 교통의 요충지였을 뿐만 아니라, 여기서 나는 도자기와 유리제품은 지중해를 통해 서방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전해졌고 그 품질이 가장 우수한 것으로 알려졌고, 물감과 포도주 등도 유명해서, 예로부터 오랫동안 두로와 시돈은 영화를 누리던 도시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시로페니키아 출생의 그리스 사람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분으로 따지면, 이 여인은 그렇게 낮은 신분의 여자가 아니었다는 거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보면, 이 여인은 유대에서 온 이방 남자로부터 아주 야멸찬 모욕을 당하게 되지요. (우리는, 예수님이 들리신 곳이 두로라는 헬라화된 도시였으며, 이곳에 이미 살고 있던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예수님이 이방인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그리스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찾아와 대뜸 그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면서 딸에게서 귀신을 쫓아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정신질환이기 쉬운데 딸이 귀신에 들렸으니 그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어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 주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매몰찬 거절이었습니다.
이 대목에서 마태복음 기사는 더 매몰찹니다.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 일행을 향해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내 딸이 귀신이 들려 괴로워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고 있는데, 예수님은 대꾸조차 없으십니다. 완전 무시입니다.(개무시) 오죽했으면 제자들이 다가와 예수님께 간청을 했다고 합니다. “저 여자가 우리 뒤에서 외치고 있으니, 그를 안심시켜서 떠나보내 주십시오.” (아마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이 여인에게 대답조차 하지 않는 모습이 무안했는지 모릅니다. 제자들이 아는 예수님은 필경 ‘네 딸을 이리로 데려오너라’ 라든가 아니면 ‘네 딸은 벌써 나았다’라는 말을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아니면 최소한 부드럽게 어깨를 토닥이며 ‘자, 집으로 돌아가 기도하십시오’라는 말이라도 해서 안심시켜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하신 대답은 “나는 오직 이스라엘 집의 길을 잃은 양들에게 보내심을 받았을 따름이다.” 였습니다. 우리가 이 대답을 들으면, 이 말은 제자들에게 했거나 혼잣말이었던 것처럼 들립니다. 적어도 여인에게 직접 대꾸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여인의 간청에 대해서는 완전한 무시, 즉 침묵과 냉담, 거절과 모욕이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누군가에게 정말 자신의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간청을 했는데 거절 당해본 경험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이 침묵과 냉담, 거절과 수모가 어떤 것인지 아실 것입니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예수님은 진정한 개무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십니다. 아마 한번도 이런 모욕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을 여인에게는(그것도, 이방 남자에게서) 큰 상처를 입을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바로 말합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에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는 얻어먹습니다.” 이 여인은 유대인 이방 남자가 자신을 향해 개라고 칭하는 말에 동의하며, 스스로 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완전한 승복(surrender)입니다. 완전한 수용(받아들임)이고, 완전한 아멘입니다. 저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받아먹는 개요, 저는 nothing입니다, 당신의 처분대로 하십시오 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15장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돼지치기를 하면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라도 좀 실컷 먹었으면 했던 둘째 아들이 제정신이 들어서 했던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으니, 나를 품꾼의 하나로 써주십시오.” 사실, 둘째 아들은 아들로 아버지를 찾아간 것이 아니라 품꾼으로 써달라고 주인에게 찾아간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승복이요, 완전한 수용입니다. “당신의 처분만을 바랍니다” 하는 태도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감은 바로 이런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나는 nothing이구나, 나는 “쓸모없는 종”이구나, 나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구나!
이 말이 너무 자학적이고 모욕적이라고 느낀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기독교의 핵심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현대의 사조는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의 독립을 강조하기 때문에, 이런 말들이 아주 거스를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결코 감상적이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결코 달콤하지만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극한적인 삶의 진실을 무자비하게 펼쳐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먼저 우리의 진정한 현실을 무자비하게 드러내 보여줍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꼬라지를 똑똑히 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제 힘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 도와주십시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게 합니다. AA 12단계에서 1단계, “우리는 알콜에 무력했으며, 스스로 생활을 대처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고 시인했다.”라는 명제에서처럼, 승복은 우리를 중독자로 철저히 인정하도록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바로 그래 반갑다, 네 입에서 그 말이 나오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실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십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자비는 무자비합니다. 천지불인이요 천도무친입니다.
여러분,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인의 태도는 전적인 승복의 표상입니다. 오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침묵과 거부, 냉담과 모욕에 물러서지 않았고, 예수님의 “안 돼”에도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이 여인이 화가 나서 오기로 버텼다든가 안 되면 되게 하라는 식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가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승복은 그와는 다릅니다. 승복은 오기나 적극적 사고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열고 내어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nothing입니다, 나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나는 “자녀들이 먹을 빵을 요구할 자격”이 전혀 없습니다, 라는 것은 우리의 본디 모습과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말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인”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모든 것이 공하다(오온개공)이라 하고 “시제법공상”(모든 존재는 텅 빈 것이다)라고 합니다. 아빌라 데레사는 “모든 것은 다 헛되이 지나간다”라고 했습니다. 종교마다 이 어려운 것을 왜 이렇게 강조할까요? 우리가 이것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한, 우리는 사실 불행하도록 예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짝거리는 것들을 붙잡아 그것으로 자신의 근거로 삼으려는 기본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토머스 머튼이 이렇게 말했지요. “우리 마음은 까마귀와 같습니다. 까마귀는 쇠붙이가 둥지에 얼마나 불편하든 관계없이 번쩍거리기만 하면 무엇이나 다 주워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댈 것만 있으면 그것으로 자신의 근거를 삼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과도하게 될 때 우리는 엄청 불편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끊지 못합니다. 중독상태가 된 것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보고 자신이 아무 것도 걸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회개이며, 승복입니다. 자신이 벌거숭이인 것을 똑똑히 알아차리는 것,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 그것을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을 알 때 우리는 진정 자유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삶은 그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도장이며 현장입니다. 이것을 똑똑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신이 이루는 모든 업적, 자신이 열심히 탐색하는 마음공부도 다 헛일이 됩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장한다고요?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도 반짝이는 쇠붙이에 불과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청과 기도를 무시하시면서 우리에게 응답하십니다. “자녀들을 먼저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이 먹을 빵을 집어서 개들에게 던져주는 것은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간청과 기도에 대해 침묵과 거절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님의 부재와 침묵뿐입니다. 이 말을 풀어 말하면 제대도 되는 것이 없고, 뜻대로 되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보이는 것마다 문제요, 일어나는 일마다 방해거리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완전히 무릎 꿇게 하시는데, 키팅신부님의 표현을 빌자면, 우리가 무릎 꿇고 있는 양탄자마저 빼내버리시려고 하는 듯합니다. 이것이 오늘 그리스 여인이 느꼈던 감정이었을 것이며, 둘째 아들이 돼지우리에서 느꼈던 감정일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승복하길 바라십니다. 아니 승복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쳐서 항복을 받아내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어맡기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오늘 시로페니키아 여인은 이 일을 통해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거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라는 응답을 얻었습니다. 여기서 딸에게 들어온 귀신은 “반짝이는 것이면 무엇이든 주어오는 우리의 마음”, 우리의 과도한 집착, 우리의 지독한 나르시시즘일 것입니다. 이 여인은 무응답, 거절, 무시, 모욕 가운데 진정한 승복을 보였고, 마침내 참된 자유를 얻게 되었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은 이 여인에게 “여자여, 참으로 내 믿음이 크다. 네 소원대로 되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이런 말입니다. “오 사랑스런 여인이여, 그대의 믿음이 참으로 놀랍다! 그대는 바라는 모든 것을 차지할 자격이 있다. 그대는 아무 것에도 방해받지 않고, 아무것에도 놀라지 않았다. 지나가는 것들로 그대의 근거를 삼지 않고, 인내함으로 모든 것에 도달하였다. 불변하시는 하나님을 품었으니, 그대는 아무것에도 부족함이 없으리라.”
여러분,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침묵과 거절에 대해서 바르게 응답하는 것입니다. 그 응답은 승복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와서 만나는 일들은 환대와 형통이 아니라 침묵과 거절일 때가 더 많습니다. 천지불인이요, 천도무친입니다. 천지는 우리에게 사사로운 정을 베풀지 않고, 하늘의 도는 우리를 골라서 은혜를 베풀지 않습니다. 그것이 삶이요, 현실입니다. 여기에 투덜거리고 불평할 시간이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 태어난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세상은 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승복을 배우러 이 땅에 왔고, 세상은 지금 우리에게 승복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승복이란, 마음을 열어 자신을 내어맡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시시때때로 승복을 배웁니다.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남편이나 다른 식구들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병고와 갑자기 닥친 환난 속에서, 우리의 실패와 좌절 속에서, 우리의 침묵기도 속에서, 우리의 예배에서 우리는 승복을 배웁니다. 여기서 나는 nothing이고, 나는 무력하며, 나는 “쓸모없는 종”임을, 신비롭게 깨우칩니다. 물론 이것은 자학이 아니며 그래서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것은 “진짜 자기”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며, 그래서 우리를 진정한 희망으로 이끕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진정한 안전, 진정한 인정, 진정한 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교회에서 하는 신앙생활은 승복의 연습입니다. 침묵기도야말로 승복의 환경입니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어떤 응답도 듣지 못하는듯 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엔 하나님의 부재와 어둠, 침묵과 거절만이 있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의 승복을 배우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주일예배는 여러분의 승복을 요구합니다. 종종 주일예배의 관습과 규례는 우리의 현대적 정신인 자유를 침해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주일성수는 아직 관습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의 유아적 신앙의 발로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하는데, 목욕물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 있는 우리 누구도 예배라는 신앙적 틀에서 자유로울만큼 그렇게 초탈한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히려, 시간표가 우리를 구해줄 듯이, 시간표를 성실히 지켜야 하며, 성실하게 주님 앞에서 엎드려 승복의 표지를 보여야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 계속해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흠숭해야 하며,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을 구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두로를 떠나 갈릴리 바다로 오셨을 때, 귀먹고 말더듬는 사람을 고쳐주신 이야기도 나옵니다. 말더듬이 귀머거리, 예수님은 그를 따로 데려가셔서 손가락을 그 구에 넣고 침을 밷어 그의 혀에 대시며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시고 그에게 “에바다”(열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다는 것은 그야말로 “먹통”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고립되어 있고, 자기 안에 잡혀 있습니다. 마음이 닫혀진 상태이며 따라서 누구에게도 자신을 열어보일 수 없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골방으로 데리고 들어가 이 사람의 귀에 손가락을 찔러 넣었고, 침을 밷어 혀에 손을 넣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람을 보시며 탄식하셨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승복할 수 없는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에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열리라! 예수님은 지금도 말더듬이 귀머거리인 우리에게, 아주 고집 세고 자기중심적인 우리에게 “열리라”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잡히지 않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궁극적인 자비와 은총을 믿는다면, 우리는 마침내 주님의 자비를 입을 것입니다.
오늘 테오리아에 올린 글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구름을 꿰뚫는 그런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떤 거절도 진짜 거절로, 진짜 ‘안 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를 계속했다.
그녀는 시험을 당하면 당할수록 오히려 예수를 더 믿고 신뢰했다.
그리하여 마침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바라는 모든 것을 얻었다.
신앙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마음 자세는 바로
당신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시건 간에
당신의 자비를 믿고 의지하겠다는 자세이다.
오직 깊은 신앙만이 표면상의 거절을 꿰뚫어보고,
거기에 깃들여 있는 사랑을 감지하고
거기에 완전히 몸을 내맡길 수 있다.
토마스 키팅, <신앙의 위기, 사랑의 위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