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강스 사업이나 할까?
서울에서 큰아들이 주말에 벗들과 시골집으로 놀러 온다고 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말하는 촌캉스를 즐기러 상주 시내에서도 한참 들어오는 두메산골 할머니 집으로. 지금은 할머니가 살고 계시지 않아서 평소에는 빈집이다. 주말에 우리 부부가 내려가서 집수리도 하고 텃밭도 가꾸면서 지낸다.
봄에 고구마와 땅콩을 심을 때, 가을에 추수할 때, 형제들이 다 함께 모여서 밭농사를 짓고 있다. 여름에는 휴가차 내려가서 냇가에서 물고기도 잡고 다슬기도 잡고 산딸기 따면서 보낸다. 한겨울에는 집을 비워두기 때문에 집이 꽁꽁 언다. 양력으로 3월이지만 아직도 산골 마을은 춥다. 보일러를 켜도 벽에서 냉기가 나오니 하룻밤 자고 오는 일이 없다.
1박 2일로 시골집에서 먼저 촌캉스를 보내고 왔다. 솔직한 마음으로 자식 일이라 팔을 걷어붙이고 시골집에 왔다. 남편이 집수리한다고 영동할매가 바람을 몰고 내려온다는 음력 2월 15일인 오늘 시골집에 가자고 했으면 단호하게 고개를 흔들며 집에서 편안하게 주말을 보냈을 것이다. 내심 남편에게 속을 들킨 것 같아서 조금은 그랬지만 우리 자식이 아닌가? 그냥 모른 척했다.
아들이 모처럼 할머니 집으로 벗들과 놀러 오는데 그래도 너무 어설프면 아들 체면도 구겨지니까 대청소했다. 겨우내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뿌연 현관 유리문을 말끔하게 닦았다. 사람 사는 냄새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주방도 정리 정돈을 했다. 평소에도 시누이들이 깔끔해서 우리 집보다 정돈이 잘 되어있다. 라면과 생수를 사다 놓고 냉장고에는 소주와 맥주 와인 그리고 담근 술을 가득 채워놓았다. 방 이 두 개인데 작은 방 냉장고는 주류와 물만 저장해놓는다. 실컷 먹고 마시고 놀다 가라고 마음을 담아서 채워놓았다.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피자도 3판 냉동실에 넣어두고 바비큐 할 수 있도록 숯이랑 도구들을 처마 밑에 잘 보이도록 놓았다. 이불도 햇볕에 말리고 이불장도 하루 열어놓고 환기를 했다. 작은 방도 잘 수 있도록 전기장판을 깔아놓고 청소했다. 우리 부부가 시골에 내려오면 잠자는 추억이 어린 방이다.
처음 시집와서는 장작불을 지펴서 밥을 짓던 시골이었다. 화장실도 우리 외할머니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재래식이 변소였다. 그 옆에는 소 외양간이 있고 흑염소가 대문간에 매여 있어서 음매 하고 아는 체했다. 밥상을 들고 높은 문지방을 오르락내리락할 때는 밥상이 무거운 것보다 높은 문지방이 더 무서웠다. 낮은 문을 드나들면서 머리 찧는 것은 다반사고 ‘키도 작은 사람이 왜 그리도 조심성이 없냐?’꾸중 반 놀림 반 걱정을 들으면서 보내야 했다.
일 년에 제사가 두 번, 설날과 추석 시부모님 생신에 다니러 갔다. 처음에는 신기하고 낯설지만 재미있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너무 힘이 들었다. 그 후로 주방도 개조하고 방도 새롭게 보일러를 깔고 집도 구석구석 수리를 해주었다. 새 사람이 왔으니 그 사람에 맞춰서 해줘야 한다고 시아버님이 사랑으로 며느리를 맞아주셨다.
1박2일에 걸쳐서 집안 곳곳을 둘러보고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새삼 감회가 새로웠다. 시아버님이 참으로 며느리를 귀하게 생각하셨다. 아버님이 계셔서 시집에서도 마음 둘 곳이 있었다. 시댁 어른들이 성품이 온화해서 그다지 힘들게 하지 않았지만, 새댁 때는 누가 뭐라고 해서 어려운 게 아니라 그냥 시댁 자체가 어려운 남의 집이었다. 이제는 아버님도 먼 나라에서 우리를 지켜보고 계신다. 어머님도 96세의 노구라 걸음을 걸을 수 없어서 보호시설에서 계신다. 아직은 우리를 알아보시니까 자식들이 자주 찾아가서 뵙고 온다. 가끔은 시골집에 모시고 와서 하루를 보내기도 한다. 거동이 불편하니까 오고 가는 일이 쉽지 않다. 날도 따스해지고 벚꽃도 활짝 필 때쯤 어머님을 모시고 형제들이 꽃놀이를 계획하고 있다.
춥지만 그래도 한겨울이 아니라서 전기장판을 켜놓고 절절 끓는 방바닥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며 하룻밤을 보냈다. 침대가 아니라서 허리도 아프고 몸이 배겨서 힘들지만, 하루 이틀은 즐겁게 지내기로 작정하면 마음이 편안하다. 아주 오래전, 좋아하는 동서가 있었다. 동서가 처음 시집와서 시골집에 있는 찌그러진 양은 냄비를 보고 개밥그릇이라며 마당에 던진 기억이 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재밌고 귀엽든지 아마도 내가 못 하는 것을 대신해서 해주는 동서가 좋았던 것 같다. 동서도 나쁜 마음이 아니라 장난 반 진심 반이라서 피식 웃으며 다시 마당에서 주워서 왔다. 벌써 색 바랜 추억이 되었다.
마당에 큰솥을 걸어놓고 장작불을 지폈다. 상주시장에서 토종닭을 한 마리 사 왔다, 대추와 여러 가지 약초를 넣고 말 그대로 푹 삶았다. 한 시간 정도는 삶아야 한다는 닭집 주인장 말대로 했는데 가스 불이 아니고 장작불이라서 살이 흐물흐물했다. 모처럼 닭다리 하나 먹을 수 있다고 잔뜩 기대했는데 닭다리는 어디로 사라지고 앙상한 뼈만 생뚱맞게 나를 반겼다.
커다란 양은 쟁반에 담아서 남편이랑 한 마리를 다 먹었다. 워낙 식성이 남다른 남편하고 평소에는 가슴살만 조금 먹었던 나도 닭다리 하나가 내 몫이 되어서 맛있게 먹었다. 집에서는 아들과 남편에게 양보하니까 닭다리는 내 차례가 안 된다. 그다지 삼계탕을 좋아하지 않아서 가슴살만 조금 먹는 정도였다. 둥그런 앉은뱅이 밥상에 닭 한 마리와 김치 청양고추 오이 쌈장이 전부인 시골밥상을 받고 무척이나 행복했다.
냉장고에 사과 모양의 메모지를 붙여놓았다. 아들이 참고하라고 몇 가지 적어놓았다. 이리저리 뒤져서 알아서 하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엄마 마음을 놓고 왔다. 한결 깔끔해진 집안을 둘러보니 내가 더 기분이 좋았다. 아들이 처음 할머니 집으로 벗들과 놀러 오는데 오래 기억될 추억을 만들었으면 좋겠다. 할머니가 계시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맏손자라고 지금도 사랑이 끔찍하시다. 골방에 처박혀있던 어머님이 게이트볼 대회에서 우승한 트로피를 꺼내서 말끔하게 닦았다. 어머님이 사용하시는 진열대 위에 나란히 놓았다. 할머니의 멋진 모습을 손자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구순이 넘도록 게이트볼 대회에 나가셨던 여장부 할머니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봄에 집에 오시면 어머님이 좋아하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안팎으로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 마당도 훤하고 텃밭에 상추와 쑥갓 얼갈이배추도 심어놓았다. 장독대가 있는 뒤뜰에는 딸기와 당귀를 심었다. 홍매화 가지에는 꽃망울이 맺혀있고 대추나무 모과나무 진달래도 봄을 잔뜩 머금고 있다. 올해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봄의 전령사가 되어서 시골 마을을 들썩이게 할 것 같다.
추운 겨울을 씩씩하게 견뎌 낸 대파와 쪽파가 파릇하게 자라고 있다. 쪽파김치를 담그려고 20리터 쓰레기봉투에 가득 채워서 왔다. 텃밭 가장자리에 심어놓았는데 쪽파가 풍년이다. 파김치 담글 만큼만 가져왔다. 달이 환하게 길을 비춰주는 평화스러운 귀갓길이다. 또 다른 행복을 선물로 안고 간다.- 2024년3월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