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량산 가는 길에
『퇴계 예던길』을 걷다
퇴계 이황
청량산淸凉山 육육봉六六峯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믿을 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마라 어부魚舟가 알까 하노라’
청량산(870m)은 백두대간을 조망하면서 힘차게 용오름 하는 중간 정점에 낙동강을 품어 안고 봉우리마다 수려한 기암괴석으로 장관을 이루어 “소금강”이라고도 하는 우리나라 100대 명산 중 명산이다. 청량산을 필자는 설악산, 월출산과 더불어 우리나라 3대 석병石屛산이라고 하고 싶다.
청량산하면 퇴계선생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조선 성리학의 대가라는 칭호는 퇴계선생을 두고 하는 말이며 퇴계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가 바로 청량산 일대이다. 안동지방 곳곳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는 문구를 자주 접 할 수 있다. 이 문구의 뜻은 공자 노나라와 맹자 추나라는 예절을 알고 학문이 깊고 왕성 한곳이라는 유래성어로 혹자들은 우리나라 경상북도 안동과 전라북도 전주를 지칭 하여 추로지향이라 하기도 한다.
봉화군 명호면, 재산면이 원적인 청량산은 안동 도산. 예안까지 뻗어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어있다. 양쪽 주민들이 실제 주인이 자기들이라고 우기는 농담도 한다.
이상향의 꿈을 품고 오가는 시인 묵객들이 각자 그리는 그림 속 청량산을 그들의 소유라고 하면 어떨까? 허락이 안 된다면 퇴계선생 소유라고 하면 어떠한가?
도산서원에서 청량산까지 약 20km 길에는 퇴계종택-이육사문학관-단천교-청량산 전망대- 옹달샘정자-경암-농암종택-올미재-고산정 등으로 이어지는데 그중에 “예던길”이라 하여 “퇴계 오솔길”이 있다.
비록 원래의 “퇴계 예던길”은 안동 댐 때문에 차 올라온 물속으로 사라진지 오래다.
안동시에서 되살린 “퇴계 오솔길”은 단천교-전망대-농암종택-고산정 (약3km)이다.
비록 이 길이 “예던길” 본래의 길 보다 짧아 졌지만 퇴계선생이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길”이라 극찬한 길로 옛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을 뿐 더러 많은 풍류객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으로 찾아와서 저 마다의 느낌으로 수 많은 기행문과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청량산을 비롯한 퇴계 오솔길은 역사, 문학 그 이상를 지향하는 문화적 요소가 충분한 명승지이다.
『퇴계 오솔길(예던길)』
강줄기 휘돌아 굽이치는 언덕에서 산세를 조망하느라 잠시 멈추어 서서 흐르는 강변에 서 작은 아버지를 찾아 가다 잠시 쉬어가던 열 살이 갓 넘은 퇴계는 무엇을 생각했었을까. 때로는 아름다운 자연의 풍광에 싸여 청운에 뜻을 학문에 두기로 했었을까.
청량산에서 수학한 퇴계는 세상에 출사표를 던지고 한양 길에 오른다.
퇴계는 승문원권지부정자로 벼슬을 시작하여 43세 때까지 안정 된 관료 생활을 보낸다. 그러나 이때에도 끊임없이 학문 연마에 정진하였다. 종3품인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 43세의 퇴계는 이때부터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갈 뜻을 품는다.이 후 52세 때 까지 그는 세 차례나 귀향과 소환을 반복하면서 관료 생활에서 벗어나 야인 생활로 접어드는 일종의 과도기를 준비한다.
임금의 질문에 대답하는 역할을 맡은 홍문관(弘文館)관직이 가장 오랜 재직 시기 이었다. 45세 때 을묘사화가 일어나 많은 선비들이 희생당하고, 그 자신도 한 때 파직 당하였다가 복직되었다. 그 후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암을 짓고 호를 퇴계라 하며 벼슬에서 물러날 뜻을 굳힌 것으로 보이며, 외직을 구하여 단양군수와 풍기군수로 나갔다가 끝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하였다. 특히 풍기 군수로 있을 때는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을 조정에 요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최초의 사액을 받게 하였다. 퇴계는 50세 이후에는 고향의 한적한 시냇가에 한서암과 계상서당 및 도산서당을 세우고, 그의 학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문인들을 가르치며 성리학의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물러난 후에도 조정에서는 성균관 대사성, 홍문관과 예문관 대제학, 공조판서, 예조판서, 의정부 우찬성, 판중추부사 등 계속하여 높은 관직을 제수하였으나, 거듭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잠시 나갔다가도 곧 사퇴하여 귀향하기를 반복하였다.
그렇게 젊은 시절에 벼슬을 지낸 퇴계는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 나이를 넘어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을 기르는 데 힘쓴다.
토계마을에 서당을 짓고 학문을 가르치다가 나중에 그 유명한 도산서당을 짓고 후학 양성에 더욱 힘쓴다. 퇴계가 거닐던 소나무 숲은 안동댐 물 밑에 잠겼다. 그가 낚시를 즐기던 물줄기도 물속으로서 흐르고 있다. 물은 그렇게 도산서당 주변에 그가 사색하던 자연을 다 삼키고 잔잔하게 고여 있다.
퇴계는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와 시와 글과 자연과 마음을 나누며 지냈다. 그러다가 예순을 넘겨 손자 손을 잡고 그가 어릴 때 걷던 청량산까지 이어진 그 길을 다시 걷는다. 강바람에 날리는 흰 수염을 정갈하게 쓰다듬으며 퇴계는 손자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아마도 자신이 예 길을 걸으면서 생각했던 것들을 들려주었을 것이다.
농암종택 저 아래 강이 흐르고 산그늘에 묻히지 않는 집은 강바람에 어수선할 법도 한데, 햇볕이 아늑하게 고인 마당이 오히려 적막했다.
문을 들어서자 왼쪽으로 큰 집이 보인다. 정면에는 작은 집 하나 떨어져 있다. 한눈에 별채임을 알아챘다. 그곳이 ‘긍구당’이다. 고려시대 지어진 것을 조선시대에 농암 이현보가 중건한 모양 그대로 지은 것이다. 농암종택 자체가 전부 옮겨 지은 것이기 때문에 옛 건물 배치와는 다르겠지만 강바람을 맞이하는 긍구당의 자리 배치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사계의 청량산은 계절마다 특별한 경치를 만들어낸다. 모두 그 나름대로 여행객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오늘은 눈에 싸인 아니, 눈에 덮이어 가는 청량산의 잔잔한 모습을 보고 싶다. 그러나 그런 기대와는 달리 너무나도 화창하다. 강가로 내려섰다. 물이끼가 낀 강은 폭이 넓었다. “퇴계 예던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강가 모래밭을 따라 걷다가 물 건너 저쪽을 살펴보아도 아리송하다. 숲이 있는 곳으로 발길을 돌려 서성거렸지만 마른풀에 붙은 먼지만 풀풀 날릴 뿐이었다.
물가 산기슭 숲으로 들어가려 하자니 마른 풀 더미 사이로 마침 이곳이 퇴계 오솔길임을 알리는 표지석이 보인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퇴계 오솔길이고, 길에 조망이 좋은 몇몇 곳의 이름을 새겨놓았다. 산을 다니던 감각을 살려 길 아닌 곳으로 들어가다 보니 오솔길이 나왔다. 간혹 풀에 가려 길이 없어진 곳이 있지만 길은 길이었다. “학소대”를 지나 한옥에서 하룻밤 지내기 위해 농암종택을 찾았으나 예약이 되지 않아 발길을 돌리는데 청량산이 비치는 낙동강이 하도 아름다워 한동안 바라본다. 늦가을에서 겨울로 이어지는 해거름 볕이 청량산 연봉에 걸쳐 소리 낮추어 붉게 흐르는 강을 사색하게 하더니 이윽고 나를 시심의 길로 이끈다.
“낙동강은 청량산을 지나야 비로소 강의 모습을 갖춘다.”라는 말이 있듯이 낙동강이 휘어 도는 사이에 청량산 이곳저곳 계곡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과 물이 합류해서 흐르는 지점이 “지천들이 모여 만들어 낸 소”라 하여 “미천장담彌川長潭”라고 한다.
“미천장담”을 바라보는 퇴계의 시심에 실려 본다.
한참 동안 기억하네
어린시절 여기서 낚시하던 일을
삼십년 긴 세월
속세에서 자연을 등지고 살았네
내 돌아와 보니 알 수 있네
옛 시내와 산 모습을
시내와 산은 반드시 그렇지는 못하리라
나의 늙은 얼굴을 알아보지는
-퇴계,“미천장담”
밤이 깊어 하나 둘 사람들이 방으로 들어가고 방 불이 하나 둘 꺼지면서 산중은 잠이 들어간다. 한참을 누어있자니 따뜻한 방바닥 기운에 포근해지기 시작한다. 꿈속인가. 선계와 의식의 경계에 함박눈이 펄펄 내린다. 청량산이 눈에 싸여 설경을 이룬다. 퇴계의 걸음으로 걸어 온 길이 눈에 덮인다. 저 쪽 세상은 까마득한 추억일 뿐 두절된 자유로 지금은 온전히 혼자이다. 객고의 간지러움 증세가 시작된다. 가와바다 아스나리 “설국”에는 누군가 있었다. 그 곳에는 사랑이 있었는데, 어디선가 임지훈의 절절한 통 키타에 실려 “꿈이어도 사랑 할래요” 음률이 청량산의 이슥한 천상에 울려 퍼진다.
▣청량산 산행 수첩
청량산은 기암괴석이 봉을 이루며 최고봉인 의상봉을 비롯해 보살봉 금탑봉 연화봉 축륙봉 등 12개의 암봉이 총립해 있고 봉마다 대(臺)가 있으며 자락에는 8개 굴과 4개 약수, 내청량사(유리보전)와 외청량사 (웅진전), 이퇴계 서당인 오산당(청량정사) 등이 있다.
청량산은 우선 산 곳곳에 깎아지른 듯한 층암절벽이 괴상한 모양의 암봉들과 어우러진 모습이 절경이다.여덟 개의 암봉들이 품고 있는 동굴만도 열두개에 이른다. 또 동굴 속에는 총명수 감로수 원효샘 같은 샘들이 솟아나고 있다.
산행의 백미는 의상봉 정상에 올라 낙동강 줄기를 감싸안은 청량산 줄기가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있는 모습을 조망하는 것. 정상 남쪽의 축융봉(845m)에서 바라보는 청량산의 전경 또한 일품이다.
청량산 속에는 한때 30개의 사암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내청량사, 외청량사 두 곳이 남아있을 뿐이다. 응진전은 원효대사가 머물렀던 청량사의 암자로 663년에 세워진 청량산에서 가장 경관이 뛰어나다.
외청량(응진전) 못지않게 내청량(청량사)도 수려하다. 응진전에서 20분거리. 풍수지리학상 청량사는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힌다. 육육봉(12 봉우리)이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다. 청량사는 연꽃의 「수술」자리이다.
응진전과 함께 지어진 고찰 청량사에는 진귀한 보물 2개가 남아있다. 공민왕의 친필로 쓴 현판 "유리보전"과 ‘지불’.유리보전은 약사여래불을 모신 곳이라는 뜻이다. 지불은 종이로 만든 부처. 국내에서는 유일하다. 지금은 금칠을 했다.
청량사 바로 뒤에는 청량산이 한눈에 들어오는 보살봉이 있다. 원래 이름은 탁필봉이지만 주세붕선생이 지형을 보고 봉우리 이름을 다시 지었다고 한다.
청량산의 아름다움은 퇴계가 자신의 시조에서 "청량산 육육봉을 아는 이는 나와 백구뿐"이라고 읊은 데에서도 잘 나타난다. 퇴계는 어릴 때부터 청량산에서 글을 읽고 사색을 즐겼으며 말년에도 도산서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이 산을 찾았다.
청량산 주변에는 신라시대 최치원의 유적지로 알려진 “고운대”와 명필 김생이 서도를 닦던 김생굴 외에도 암릉을 따라 금강굴, 원효굴, 의상굴, 반야굴, 방장굴, 고운굴, 감생굴 등이 들어서 있다.이밖에 공민왕이 피난 와서 쌓았다는 청량산성, 최치원과 김생이 바둑 두던 “난가대” 등도 더듬어볼 만한 발자취다. 입석에서 등산로를 따라 30분 정도. 뒤로는 거대한 금탑봉이 병풍처럼 둘러 서있고 아래는 아득한 낭떠러지. 바위가 마치 9층으로 이뤄진 금탑모양을 하고 있다. 층마다 소나무들이 테를 두른 듯 암벽에 뿌리를 내렸다.
☞12봉과 12대
12봉:장인봉, 외장인봉, 선학봉, 자란봉,자소봉, 탁필봉, 연적봉, 연화봉, 향로봉, 경일봉, 금탑봉,축륙봉, 등 12봉우리
12대:어풍대, 밀성대, 풍형대, 학소대, 금가대, 원효대, 반야대, 만월대, 자비대, 청풍대, 송풍대, 의상대 등 12개의 대(臺)
☞‘예던길’이란? 예(曳)는 '끌다, 고달프다' 라는 뜻으로 예던길은 '선현들이 신발과 지팡이를 끌고 다니셨던 길'이란 의미이다.
▣가볼만 한 곳=봉화 청암정 닭실마을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해서 붙여진 닭실마을은 한과로 유명해 한과 마을로도 불린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였던 충재 권벌(1478~1548) 선생이 마을에 자리 잡은 이후 지금까지 후손들이 지켜오고 있는 안동권씨 집성촌이다. 마을에는 충재박물관, 청암정, 석천정사, 삼계서원, 추원재 등 다양한 전통체험거리가 있다.
닭실마을은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유곡리를 말하며 동북으로 문수산, 동남으로 옥적봉, 서남으로 백설령으로 둘러싸여 있다. 조선후기의 인문지리학자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이곳 닭실마을을 경주의 양동마을, 안동의 내앞마을, 풍산의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의 하나로 꼽았다. 닭실마을에 있는 충재박물관은 1994년 충재유물전시관으로 시작하여 2007년 충재박물관으로 개관하였고, 보물 482점, 고서 및 고문서 등 총 5,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유교문화관련 중요한 박물관이다. 박물관에는 후손들이 소중히 지켜온 충재 선생의 발자취가 전시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