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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 ▩ 원문보기 글쓴이: 東彦(23世)
▣주촌(두루) 종가 연혁
25세 세준(두루종손)
*2005년 진성이씨 대종회간 열화 20호에서 가져왔습니다.
1. 위치
안동시내에서 북 동편으로 시청을 지나 안막재를 넘어 국도를 따라 조금 내려오면 중앙선 철길과 마주하게 되고 철길 굴다리를 지난 지점에서 주촌 종택 및 천년기념물 안내 간판을 끼고 좌회전하여 진입한다. 이어 가수내를 건너 이하역, 이상리를 지나면 주촌 종가가 위치한다. 또는 와룡면 소재지를 지나 안동소주 회사 앞에서 좌회전하여 속칭 말바우 가는 길로 진입할 수도 있다. 시내에서 승용차 기준 소요시간은 약 15~20분 정도이다.(주소: 안동시 와룡면 주하1리 633번지)
2. 종가의 규모와 특징
□ 규모: ○대지 760평 ○사당(3×1), 본채(9×7), 경류정(3×2), 방간채(3×1), 행랑채(6×1)로 구성된 남향의 전통 와가○ 가옥: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 72호(1987)○ 향나무: 천년기념물 제 314호(1982)
□ 특징: 구자형(口型) 본채 정면 좌우 꺽임 부분에서 각 두 칸의 주거공간이 다시 연결되어 새가 날개를 편 형상을 하고 있어 날개집(翼舍)라고도 부른다. 사랑마루는 마당 쪽으로 돌출시켜 8각 기둥 4주로 높게 띄워 누마루를 조성하고 누상 주는 원형으로 연결하였는데 일반 누의 기능을 겸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경류정은 겹치마 팔작지붕의 익공식翼工式건물로서 원형의 기둥 일부에 배흘림 흔적이 남아있어 주목된다. 그리고 정자앞 향나무와 오죽, 주변의 관상, 유실수, 전면 입구 좌우로 동서나무(老松), 은행나무, 느티나무 등 노거수가 앞 뒷산의 풍부한 수목과 더불어 경관이 자연스레 조화를 이룬다.
3.개기 및 주촌 유래
□ 개기: 1383년(홍무 16) 2세 송안군이 동란을 피해 득성지인 기곡(청송군 파천면 신기리)에서 마라촌(안동시 풍산읍 마애리)으로 이주하였고, 그 후 만년에 주촌에 개기하였으며, 정통년간(正統年間, 1436~1449)에 3세 부정공이 정착하여 대종가를 창건하였다.
작산사(鵲山祠) 상량문, 작산정사(精舍) 창건일기, 정자동지(亭子洞誌) 및 경북 문화유적지 관광안내 등에 송안군이 만년에 주촌에 터전을 열고 노후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고, 또한 봉선록(奉先錄)에는 부정공이 종가를 건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영가지(永嘉誌, 1602)에는 부정 이운후가 주촌에 정착하여 현감 이정회 대까지 계속해서 거주하고 있다 하였다.
주촌은 개기와 종가 창건 이래 600여년 대를 이어 세거하고 있는 진성이씨 집성촌인데, 종가는 선산공을 불천위(不遷位)로 봉안하는 대종가로서 씨족의 구심(근원)이며 숭조정신을 배양하는 성전이다. 그러나 농경사회 몰락과 시대의 변천에 따라 후손들은 생업을 찾아 점차 도시로 떠나고 현재 약 25호 정도가 향촌을 지키면서 전통 씨족문화를 계승하고 있다.
주촌 문중은 시조 소(所, 재사)를 포함해서 11개 재사(기곡, 두솔원, 가막, 수리동, 작산, 도목, 구로동, 덕전, 사야, 가후동, 명동) 및 작산정사를 관장하고 있으며, 가옥 및 위토소유자는 주촌 문중 대표(종손)명의로 등기되어 있다. 시조, 송안군 묘제 및 작산정사 향사시 제주(초헌관)는 도유사이고, 3세 부정공 묘제부터는 주촌 종손이 제주가 되며, 이하 집사자는 파별, 항고연장 순으로 분정(分定)하여 집례한다. 묘우(사당)제사 시 제주는 반드시 종자(宗子)이며, 묘제(墓祭)도 종자가 우선이나 지자(支子)도 제주가 될 수 있다는 예문을 근거한 것이다. 현재 주촌 종손이 실질적으로 수호하는 묘지 위수는 총 55기(계배위 8, 합장 1 포함) 중 재사에서 수호하는 22기를 제하면 33기가 된다.
선산공의 3남(우양, 흥양, 계양) 대에 와서 소위 3파가 형성되었고, 파계 현조(顯祖)가 등장하면서 불천위 종가가 늘어나고, 또한 문중(門中)이 구분되었는데, 우양 계파는 현재 19파(주촌종, 이계, 호동, 구로동, 구천, 일직, 정자동, 사곡, 번곡, 주촌, 정노위공, 이동, 연곡, 영산, 아호, 대곡, 모계, 송곡, 구계-무순)로 분파되었다.
문중이란 동일 조상의 후손들에 의해 조직, 운영되고, 선대봉사를 통해 결속력을 강화, 화합하면서 씨족의 공동이익과 발전을 도모하는 혈연집단인데, 대문중과 파 문중으로 구성된다.
□주촌 유래 : 예로부터 이로촌(二老村), 주촌, 두루(周)로 불리우고 있으며 행정명은 주하리(周下里)인데, 윗마을 마창골에는 현재 영춘(永春)이씨가 세거하고 있다. 와룡면지(1933)에는 「옛 명칭은 이로촌인데, 선산부사를 역임한 두 노인(이정: 진성인, 이유선: 영춘인)이 한 마을에서 함께 노후를 보낸 것에 연유한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루는 사방이 나지막한 야산(소백산 지맥)으로 둘러싸여있고 산들 사이에 분지가 아주 좁직하게 열려있다. 좁은 지형이지만 두루라는 명칭에 맞게 모나지 않고 둥글지도 않으며 둥그스럼하게 형성되어 있다. 이러한 두루종가 주변의 비좁음은 진성 이씨 가문의 품격과도 일치한다.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 비좁음을 지켰기에 성현 거유가 배출되고 명문 대성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야트막한 주산(표고: 20~30m)의 청룡 능선 끝자락이 종가를 포근하게 끌어안고 있고 수려한 안산은 반달형을 이루고 있다. 보름달이 꽉 찬 달이어서 기울어짐을 의미한다면 반달은 새로 채워지는 달로 약동과 번영을 상징하는 것이다.
두루의 흉물은 중앙선 철길이다. 이 철로는 당초 옹천-송현-의성 노선으로 계획되었으나 막대한 추가 비용과 공기 지연을 감수하면서까지 설계를 변경, 부설(1937~1941)하였다. 일제의 의도적인 풍수지기 훼손은 전국적으로 자행되었는데, 전통 유교문화의 보고인 안동지역도 심하게 훼손시켰다. 평탄하고 곧은 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험한 지역을 돌며 많은 터널을 뚫고 진모래 철교까지 가설하면서 옹천-이하-안동으로 변경하였다. 철길은 두루의 혈맥인 주산(수창산)의 백호 능선을 자르고 동구 및 개천을 막으면서 종가 안산의 모봉 속으로 터널을 뚫어버렸다. 그리고 학봉 묘소 전면을 차단하고 독립투사 석주 이상용 선생의 생가인 임청각 안마당을 통과하면서 안동의 정기와 씨족문화를 쪼개고 짓밟아 버린 것이다. 1990년대 중반 철도청과 안동시가 철길 이전 계획을 발표한 적이 있으나 아직까지 유보되고 있다. 조속히 시행되어 안동의 정기를 살리는 계기로 삼아야 될 것이다.
4. 종가창건 및 보수내역
o3세 부정공( 휘 운후): 정통 년간에 주산의 청룡좌에 사당을 축조하고 대종가를 창건 o7세 호군공(휘 훈): 1505~1535년 사이에 종가를 주산의 서편 백호좌로 이건(와가 50칸) o10세 송간공(휘 정회): 1567년(정묘) 사당을 정침 서편 백호위에 이축하고, 불천위 결정으로 작산 묘우에 봉안한 선산공 위패를 이봉. 임진왜란(1592년)에 일부가 소실되고 대청 6칸과 행랑채 10여칸만 남았음 o11세 진사공(휘 벽): 1602년(임인) 침실 중위 10칸만 개축하고 북랑위는 완역하지 못하고 별세 o12세 마봉공(휘 증효): 종가를 부정공이 정한 구기에 다시 이건(1627정묘~1630경오. 40여칸). 사당은 현 위치에 준공 봉안(1651신묘~1652임진) o22세 북산공(휘 승걸): 1929년 본채 행랑채 중수 o23세 동명공(휘 용순): 1961년 가옥 전체 축대 개축 1964년 경류정 중수 o25세 세원(호명 세준): 1995년(을해) 안채, 1999년(을묘) 사랑채 경류정, 2002년(임오) 사당, 2004년(갑신) 행랑채 문화재 보수, 1999년(기묘) 안채부억 개조, 2001년(신사) 종택 진입로 포장, 2003년(계미) 종가 앞길 확장 포장
5. 사록
□가계도
석(시조)-자수(2세)-운구(3세)
-운후(3세)-정(4세)-우양(5세)-철손(6세)-훈(7세)
-흥양(5세)
-계양(5세)
-연(8세)-희안(9세)-정회(10세)-벽(11세)-증효(12세)-방익(13세)
-계진(14세)-태섭(15세)-용서(16세)-국명(17세)-우주(18세)-형만(19세)
-호(20세)-긍연(21세)-승걸(22세)-용순(23세)-제태(24세)-세원(세준, 25세)
-영경(상현, 26세)-도수(진우, 27세)
□ 사록
○시조(휘 석)
▶생거지: 청송군 진보읍 이촌(李村)이며 그 후 기곡에 세거
▶생존년대: 고려말 충렬왕~충선왕
▶관직: 성균생원(성균생원). 증 봉익대부 밀직사(증 봉익대부 밀직사). 사마시(생원시 급제)
▶배위: 증 정부인 송생(송생)김씨. 고의 휘는 김현(김현, 호장) 후비는 정부인 실성(실성)씨로 성을 알 수 없음
▶자녀: 2남(자수, 자방)
▶묘소: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산 7번지. 비위 양위 묘 동원(동원)
▶소명 및 묘제 정일: 기곡(기곡)재사(1839년 을해 1차, 1936년 병자 2차 중건). 음 10월 초정(초정)일. 문화재 지정(1994.9.29)
▶사록: 자제 송안군의 귀(귀)로 밀직사 증직. 고의 휘는 영찬(영찬, 호장)이고, 조부의 휘는 송주(송주, 호장)인데, 증 고조 이상은 고증할 수 없음. 장자 송안군 자수는 김씨 부인 소생이나, 차자 생원 자방은 어느 부인의 소생인지 알 수 없음.
천성이 공근하여 사람과 사물을 접할 때 먼저 겸손을 위주로 하였다. 이러한 덕행의 음덕으로 가문의 터전을 열고 후손이 번창할 기틀을 마련하여 마침내 대현을 배출하고 명문 대성으로 성장하였다.
시조 묘소가 기곡산에 있었으나 실전되어 산하에 단을 세우고 망제를 행하여 왔다. 그런데 다행히 1678년 문중 및 진보현 조사로 시조의 증손 양호(양호)의 무덤에서 나온 「?先祖食 永樂十八年 二月 壬子日」이란 문구가 새겨진 지석(지석)을 찾았는데, 이것은 영락 18년(1420년) 2월 임자일에 선조의 묘에 붙여 뫼심이란 뜻이며, 이로 인해서 삼위의 묘가 시조와 전후부인의 묘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1631년 일직파 이경준(이경준)이 무연고 고총들에 대한 현지 소문과 근거를 첨언하여 시조 및 3세 부정공의 묘소를 찾자는 의견을 통문으로 주촌 문중에 개진한 이후 47년만에 드디어 시조 묘소를 되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문중은 이듬해인 1679년(기미) 2월 30일에 제족들과 진보현 및 관찰사 향도군(향도군)을 지원 받아 삼위를 봉식(신관신의, 개수가토) 하던 중 중간 묘에서 벼루, 술잔, 술병 등의 부장품을 발견하였으나 상하 묘에는 아무런 기물이 없었기에 중묘는 시조 묘이고, 상하 묘는 전후부인의 묘임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상하 어느 묘가 선비이고 후비인지는 알 수 없었다.
○2세 송안군(휘 자수)
▶생거지: 청송군 파천면 신기리
▶생존연대: 출생은 고려 충선왕 원년(1309) 전후이며, 졸년은 홍무 15년(1382)이후로 추정
▶관직: 고려말 명서업(명서업) 급제(1330년, 至順 원년). 유비창주부(유비창주부, 1344년 至正 4). 지춘주사겸근농방어사(지춘주사겸근농방어사, 1364년, 至正 24). 판서운관사( 판서운관사. 1376년, 홍무 9년). 통헌대부 판전의시사(통헌대부 판전의시사, 1382년, 홍무 15년)
▶배위: 증 정부인 황씨
▶자녀: 2남(운구, 운후)
▶묘소: 안동시 서후면 명동 산 5번지. 비위묘 동원
▶소명 및 묘제 정일: 두솔원(두솔원)재사. 음 10월 15일
▶사록: 일찍이 선속으로부터 벗어나 학술을 연마하여 당세에 이름을 떨쳤으며 문과 무를 겸비했다. 고려말 홍건적을 토벌한 공훈으로 전민(전민)과 작위(송안군)를 하사받고 조선조에 고관직(판전의시사)에 입신하면서 사족(사족)으로 득세하였다. 예로부터 묘갈이 없어 상하 두 위중 어느 것이 고위이고 비위인지 판단하지 못하여 비석을 상하 중앙에 세움. 후손들은 작산에 송안군묘(廟)를 건립, 음 3월 초정(초정)에 향사를 집례하고 있다.
○3세 부정공 (휘 운후)
▶생거지: 마라촌에서 주촌으로 이주하여 정착
▶생존연대: 세종 초 출생으로 추정
▶관직: 봉정대부 군기시부정.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 통예원 좌통예(봉정대부 군기시부정. 증 통훈대부 사복시정. 통예원 좌통예). 증손 우(우)의 귀로 증직
▶배위: 숙인(숙인) 화산(화산, 안동) 권씨
▶자녀: 1남(정)
▶묘소: 안동시 와룡면 가구동 산 126번지
▶소명 및 묘제정일: 가막(가막)재사(1820. 3. 2 창건). 음 10월 13일. 비위 묘는 안동시 북후면 도진동 산 164번지에 있음. 수리동(수리동)재사. 음 10월 14일
▶사록: 공은 풍산읍 상리 권희정(권희정, 증 좌의정. 비는 김씨, 정경부인. 자는 軫, 우의정)의 딸에게 장가들어 김혁(김혁, 안동인), 배상지(배상지, 흥해인) 등과 동서지간이 되었다. 이때부터 안동의 주요 토성인 안동권, 김씨 등과 서로 혼맥을 형성하였다.
공의 묘소는 가구의 가막산(가막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전되어 매년 수리동 비위 묘소에서 합제를 행하였다. 「가막산에 수상한 고총이 하나 있는데 이씨 조상 묘라고 전한다. 정원노가 가막산 모친 묘제 후에 후 묘인 외조상 묘에 헌작하였다. 」등의 구전이 있다는 유의남(유의남, 진사)과 인근에 거주하는 촌로 등의 증언이 있은 후 마침내 도목재사 회전 시 부정공 묘소를 찾기 위한 상산(상산)을 1631년(신미) 윤 11월 16일로 결정하였다. 그 때 주촌 종손 증효(증효) 및 유사들이 증언자들과 함께 가막산에 올라 산재한 분묘를 답사하여 드디어 정원노(정원노)의 무덤과 백호 등 고총 아래에서 그의 친모 무덤을 찾은 것이다. 이어 정씨 문중에 확인하니 정원노의 부친이 정보문(정보문)이고 모친이 진안(진성)이씨 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부친 정보문은 선산공의 사위이며 모친 진안이씨는 공의 3녀로 부정공의 친 손녀가 되고 정원노의 외증조부가 부정공이 되는 것이니 고총은 부정공의 묘가 분명해진 것이다.
직손이 침원(침원)하고 외손이 수호한 까닭에 감히 모친을 부정공의 묘하에 입장할 수 있었던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후 산지는 정씨문중 소유가 되어 주변에 정씨 묘들이 다수 매장되어 있었으니 정문(鄭門)이 이러한 사실을 대대로 숨겨온 사연이 되는 것이다.
중년에 잃어 버렸던 묘소를 다행히 찾게 되어 1670년(경술) 10월에 9대손 마봉공(휘 증효, 호 磨峯)이 입석고유 하였으며, 지문이 소략하여 20대손 동명공(휘 容純, 호 東溟)이 개갈하였다.
○4세 선산공(휘 정)
▶생거지: 주촌
▶생존연대: 미상
▶관직: 원종공신(원종공신). 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가선대부 호조참판. 행 한산군사. 경주부판윤. 중직대부 선산도호부사(증 통정대부 병조참의. 가선대부 호조참판. 행 한산군사. 경주부판윤. 중직대부 선산도호부사). 손자 우(?)의 귀로 병조참의, 증손 황(滉)의 귀로 호조참판에 증직
▶배위:증 정부인 안동 김씨(知甫州事 金정의 따님)
▶자녀: 3남 6녀 (우양, 흥양, 계양, 남백경, 유봉수, 정보문, 李疇, 박근손, 권종)
▶묘소: 안동시 북후면 물한리 산 73번지. 비위 묘 동원
▶소명 및 묘제정일: 가창(가창)재사. 음 9월 초정. 불천위 기일(선산공: 음 8월 15일, 안동 김씨: 음 5월 초 2일)
▶사록: 공은 천성이 청렴하고 자질이 용맹하여 승마와 활쏘기에 능하였다. 영변 판관으로 재직 시 사람을 해치는 호랑이를 찾아 일발의 화살로 넘어뜨려 세인을 탄복하게 하였다. 그리고 제비원 석불상(보물 제 115호, 석벽 10m에 몸통을 새기고 2.5m 높이의 머리 부분을 조각하여 올려놓은 고려시대 마애불) 위에서 공중 회전하여 뛰어내리는 등 젊은 시절부터 용맹을 떨쳤다.
1431년(세종 13) 평안도 영변 판관으로 재직 시 오랑캐의 침공을 막기 위한 영변진 설치와 약산성 증축의 역사를 감독하여 완공하고, 다시 최윤덕에 종군하여 여진을 치는데 공로를 세워 세종으로부터 작위를 하사 받았다. 그리고 공이 영변에서 귀향 시 옮겨와 본가에 심은 향나무는 천연기념물 제 314호(1982)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원종공신녹권[1459년(세조 5) 7월 15일] : 조선 초 세조 집권의 단초를 열었던 계유정난시 왕조의 입장에 동참함으로써 원종공신(3등)에 녹훈. 녹권상에 본관을 보성이라고 하였는데 보성은 진보의 고명이다. [진보의 고명은 보성, 진성, 진안, 청보, 진해 등이다. 시조의 생거지 명이 본관인데, 보성(송안군의 전의정안 및 선산공의 공신녹권에 보성으로 기록), 진성(퇴계, 송계, 송간 등이 진성으로 사용. 최초의 대동보인 경자보 표제를 진성으로 표기), 진안(부정공의 묘소 봉심통고문, 휘 철손, 훈 및 송계공 묘갈명, 송간공 만사 등에 진안으로 기록), 진보(퇴계의 향시 답안지, 각파 세보, 와룡면 호적 등에 진보로 기록)로 전문이 병용하였으나 현재는 본관을 진성으로 통용하고 있다.]
○5세 현감공(휘 우양)
▶생거지: 주촌
▶생존연대: 미상
▶관직: 인동현감. 승의랑. 경진년 무과급제.
▶배위: 공인 청주 이씨
▶자녀: 1남 1녀 (철손, 사직 임계종)
▶묘소 및 묘제정일: 안동시 와룡면 주계리. 도목재사. 음 10월 10일. 기해년 창건. 비위 묘 와룡면 이하리 구로동(九老洞)재사. 음 10월 11일
▶사록: 공은 활쏘기와 승마에 능하였고 문행(文行)도 뛰어났으며, 특히 1452년(문종 2) 금급문기(衿給文記)를 남겨 후손들로 하여금 지표로 삼게 하였다. 자식 남매에게 정해진 몫의 노비를 상속하고 종토 유지를 위하여 부모, 보증인이 착명서압으로 수결한 문서이다. 승중위(承重位) 봉사조 몫을 별도로 상속하였으며, 「원컨대 너희들은 내가 물려주는 조상의 전민(田民)과 가재(家財) 등을 자자손손 영원히 전하되, 만일 빈궁해서 팔아야 할 때에는 종족에게 잡히도록 하고···· 타성에게 방매 시 이 문서의 내용을 관에 고하여 본손에게 되돌릴 일이다」라고 유서를 명기하였는데, 이것은 조선 초기 분재의식을 대변하는 중요한 내용이며, 우리 가문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 재산상속의 일반 원칙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480년 3형제(우양, 흥양, 계양)가 작산에 가창재사 창건. 안동댐(1971~1976) 건설로 도목재사, 위토수몰. 1972년 인근 주계리에 대토, 재사 매입.
○6세 충순위(휘 철손, 1441~1498)
▶관직: 승의부위(승의부위). 충순위(충순위)
▶배위: 단인 함창(청주) 이씨(사직 이종원의 따님)
▶자녀: 3남 1녀 (훈, 감, 종, 정언보)
▶묘소 및 묘제정일: 안동시 와룡면 이하리. 선비(先?)묘전. 비위 묘 동원. 구로동 재사. 음 10월 11일. 1846년 구로동 재사 중건(창건연대 미상). 2004년(갑신) 중수
▶사록: 천성이 청렴하고 근검하였으며 특히 집안 대소가 및 족친의 돈목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성품이 호탕, 다양하여 농한기에는 족친들과 매 사냥을 즐기기도 하였다.
2남 감은 이계파, 3남 종은 호동파, 감은 3남(옥, 제, 흡)이고 제는 3남(윤남, 형남, 호남)인데, 형남은 구로동파, 호남은 구천파로 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