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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게시판 스크랩 신사임당 (申師任堂) .. 만들어진 현모양처
이장희 추천 0 조회 66 14.08.29 21:38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신사임당 (申師任堂)

 

 

 

 

 

 

 

 

 

 

 

 

 

 

 

 

                                              자운서원     紫雲書院

 

 

 

 

 

 

 

경기도 파주시 법원동 동문리에 위치한 자운서원(紫雲書院) 일대는 이율곡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자운서원과, 이율곡 및 신사임당을 비롯한 부모 그리고 형제들의 묘가 한 곳에 모여져 있다. 일종의 가족묘역임을 알 수 있다.

 

 

부지가 약 8만평에 이르고, 자연경관이 좋고 한적하여 공원으로 꾸며 놓았다. 이곳에는 이율곡기념관이 있어 이율곡 및 부모의 遺品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매년 9월에는 율곡문화제가 열리고 있다.

 

자운서원은 율곡의 영정과 율곡의 제자 사계 김장생과 현석 박세채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광해군 7년(16150에 세워다가, 1868년(고종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던 것을 1970년 복원하면서 경기도 기념물 제45호로 지정해 놓았다.

 

 

 

 

                                               사임당     師任堂

 

 

 

 

 신사임당(申師任堂)의 본명은 "신인선"이다. 사임당(師任堂)은 당호(堂號)이다. 당호란 본채나 별채의 이름이다. 그리고 당(堂)은 안주인이 기거하는 집안의 한 건물을 말한다. 신사임당이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자신이 거처하는 곳의 당호를 지었는데, 후세의 사람들은 그를 "신사임당"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즉 "사임당"은 그의 호(護)가 아니라 그가 거처하던 건물의 이름이다.

 

 

 

                                                    사임   師任

 

 

"사임(師任)"에서 "師"는 스승을 의미한다. 그리고 사임의 "임(任)"은 옛날 중국 周나라 文王의 어머니 태임(太任)에서 따왔다. 즉 신사임당은 "태임(太任)"을 스승으로 본 받고 싶다는 의미에서 사임(師任)이라고 한 것이다.

 

 

특히 그는 태임(太任)의 태교(胎敎)를 본받고 싶어하였다. "태임"의 성품은 단정하고 성실하며 오직 덕(德)을 실행하였다고 한다. 그가 문왕(文王)을 임신하여서는 눈으로 사악(邪惡)한 빛을 보지 않았고, 귀로는 음란(淫亂)한 소리를 듣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오만(傲慢)을 말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태임이 文王을 낳으니 총명하고,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여 마침내 주나라 최고의 현군(賢君)이 되었다. 이렇게 신사임당은 이율곡을 비롯하여 7남매를 그렇게 키워냈다.

 

 

 

 

 

 

 

 

 

 

                             강릉  오죽헌     江陵 烏竹軒 ... 보물 제165호

 

 

 

 

 

 

 

 

오죽헌(烏竹軒)은 원래 형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낸 최응현(崔應賢)의 집이었다.최응현은 조산이라는 곳에서 살다가 이곳 北坪村(강릉의 옛이름)으로 이사와서 이 집을 지었는데, 그의 둘째 딸이 이사온이란 사람과 혼인을 하게 되자, 이 집을 사위에게 물려 주었다.

 

 

이사온과 최씨(최응현의 딸) 사이에는 용인이씨(龍仁李氏 .. 신사임당의 어머니)만이 태어났으며,용인이씨는 서울 사람인 신명화(申命和)와 결혼하였다. 용인이씨는 혼인 후 서울에서 살았으나, 병이 난 친정어머니(최응현의 딸)를 간호하기 위하여 강릉에 내려왔다가 계속 오죽헌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龍仁李氏는 딸만 다섯을 두었다.그 중 둘째가 신사임당이다. 사임당은 이원수(李元秀 ..율곡의 부친)와 혼인하고 계속 오죽헌에서 생활하였는데, 그래서 율곡도 이곳에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사임당의 어머니 용인이씨는 다섯 딸에게 재산을 물려주면서, 둘째 딸의 아들 율곡에게는 조상의제사를 받들라는 조건으로 서울 수진방(지금의 청진동) 기와집 한 채와 전답을 주었고, 넷째 딸의 아들인 권처균에게는 묘소를 보살피라는 조건으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주었다.

 

 

 

 

 

 

家父長의 권위가 강화되면서 재산상속이 長子 우선의 원칙으로 일관되어 오던 조선 後期와는 달리, 조선 前期만 하더라도 均分상속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모든 자녀가 균등하게 상속받았으며, 夫婦라 하더라도 상속 받은 재산을 따로 관리할 수 있었다.

 

이렇듯 조선 초기 재산상속의 관행에 따라 최응현의 집은 그 딸을거쳐 그 딸의 아들인 권처균에게까지 상속될 수 있었던 것인데, 그 후 권처균의 후손들에 의하여 관리되어 오다가 지금은 강릉시가 그 관리를 맡고 있는 것이다.

 

 

 

 

 

 

권처균은 외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집 주위에 까마귀와 같은 검은 대(竹)가 무성한 것을 보고 자신의 號를 오죽헌(烏竹軒)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오죽헌의 유래가 되었다.  

 

 

 

 

                                   선비행장   先비行壯   ... 율곡이 쓴 어머니 일대기   

 

 

 

 

신사임당(1504~1551)에 관한 기초적인 사료는 셋째 아들 이율곡이 쓴 "나의 어머니 일대기(선비행장)"이다. 이율곡은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의 행장을 쓰지 않고, 어머니 신사임당의 행장을 쓴 것은 그만큼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다.

 

 

 

 

 

 

                                               선비행장   선비행장

 

 

 

선비(先비)란 타인에게 세상을 떠난 자기의 어머니를 이르는 말이고, 행장(行壯)이란 사람이 죽은 다음에 그의 일생의 행적을 적을 글이다. 신사임당은 1551년 5월 17일에 48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는데, 이때 이율곡의 나이는 16세이었다. "선비"의 "비"자는 계집女 변에 비할 比(女比)이다.

 

 

 

 

 

 

신사임당이 세상을 뜨자 어머니의 행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율곡이 쓴 글이 "선비행장"이며, 이 글은 "율곡전서(栗谷全書)" 권18 "행장편(行壯編)"에 수록되어 있다. 남자들의 행장은 보통 성명,자호,관작, 생몰연월(生沒年月), 자손, 언행 등이 기술됨에 비하여, 신사임당의 "선비행장"은 품성과 언행 그리고 예술적 재능에 대한 기술이 중심을 이룬다.

 

 

 

 

 

 

 

 

 

                                                선비행장의 全文

 

 

 

자당(慈堂)의 휘(暉)는 모(某)로 進士 신공(申公...申命煥)의 둘째 딸이다. 어렸을 때에 경전(經典)을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 또한 바느질도 잘 하고 수놓기까지 정묘(精妙)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게다가 천성도 온화하고 얌전하였으며,지조가 정결하고 거동이 조용하였으며 일을 처리하는데 안존하고 자상스러웠으며, 말이 적고 행실을 삼가고 또 겸손하였으므로 신공(申公 ..아버지 신명환)이 사랑하고 아꼈다.

 

 

성품이 또 효성스러워 부모가 병환이 있으면 안색이 반드시 슬픔에 잠겼다가 병이 나은 뒤에야 처음으로 돌아갔다.가군(家君 .. 아버지 이원수)에게 이미 시집을 오게 되자 進士 申公(신사임당의 아버지)이 家君에게 말하기를 "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지를 않더니, 그대의 처만은 내 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 그려 "라고 하였다.

 

 

신혼을 치른지 얼마 안되어 進士가 작고하니 喪을 마친 뒤 新婦의 예로서 시어머니 홍씨(洪氏)를 서울에서 뵈었는데, 몸가짐을 함부로 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하루는 종족들이 모인 잔치 자리에서 여자손님들이 모두 이야기하며 웃고 하는데, 자당만 말없이 그 속에 앉아있자, 홍씨가 자당을 가리키며 " 새 며느리는 왜 말을 않는가? "하셨다. 그러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 여자는 문밖을 나가 본 적이 없어 전혀 본 것이 없는데 무슨 말씀을 하오리까? "하니 온 좌중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그 두 자당께서 임영(任瀛 ..강릉의 옛 이름)으로 근친(覲親 ..친정집에 가는 것)을 가셨는데, 돌아오실 때에 자친(慈親)과 울면서 작별을 하고, 대령(大嶺 .. 대관령) 중턱에 이르러 북평(北坪)땅을 바라보고 백운(白雲)의 생각을 견딜 수 없어 가마를 멈추게 하고 한동안 쓸쓸이 눈물을 짓고 다음과 같은 시(詩)를 지었다.   

                                                                                                                                             (백(白雲.. 당나라 적인걸(狄仁傑)이 태행산에 올라가 흰구름(白雲)을 바라보며 "저 구름 아래 우리 아버지가 계신다"하고 섰다가 구름이 옮겨 간 뒤에야 그 곳을 떠났다는 故事에서 온 말로 어버이를 생각하는 뜻으로 사용된다)

 

 

 

                                               蹂大關嶺  望親庭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네

 

 

                                      慈親鶴髮  在任瀛     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  獨去情     서울을 향하여 홀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  時一望     돌아보니 북촌(오죽헌)은 아득도 한데

                         白雲飛下  暮山靑     흰 구름만 저문 산을 날아 내리네 

 

 

                          

 

 

한성에 이르러 수진방(壽進坊)에서 살았는데 이때에 홍씨는 늙어 집안 일을 돌보지 못하셨으므로 자당이 맏며느리 노릇을 했다. 家君(율곡의 아버지)은 성품이 호탕하여 집안 일에 무관심하였으므로 가정 형편이 매우 어려웠는데, 자당이 윗분을 공양하고, 아랫사람을 길렀는데 모든 일을 맘대로 한적이 없고 반드시 시어머니에게 고하였다.

 

 

그리고 홍씨 앞에서는 희첩(姬妾 .. 시중드는 여종)도 꾸짖는 일이 없고 말씀은 언제나 따듯하고 안색은 언제나 온화하였다. 家君께서 어쩌다가 실수가 있으면 반드시 간하고,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를 하였으며, 좌우가 죄가 있으면 꾸짖으니 종들도 모두 존경하며 떠받들고 좋아했다.

 

 

자당이 항상 임영(任瀛 ..강릉)을 그리워 하며 밤중에 사람 기척이 조용해지면 반드시 눈물을 흘리며 울고 어떤 때에는 새벽이 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는 친척 어른되는 심공(沈公)의 시희(侍姬)가 찾아와 거문고를 뜯자 자당께서는 거문고 소리를 듣고 눈물을 흘리며 "거문고 소리가 그리움이 있는 사람을 울게한다 "고 하셨는데, 온 방 사람들이 슬퍼하면서도 그 뜻을 몰랐다. 또 어버이를 생각하는 시(詩)를 지었는데 그 글귀에...

 

 

 

 

                                                사친  思親

 

 

                      千里家山萬疊峰      산 첩첩 내 고향 천리이건마는

                      歸心長在夢魂中      자나깨나 꿈 속에도 돌아 가고파

                      寒松亭畔孤輪月      한송정(寒松亭)가에는 외로이 뜬 달

                      鏡浦臺前一陳風      경포대 앞에는 한줄기 바람

                      沙上白鷗恒聚散      갈매기는 모래톱에 헤락 모일락

                      海門漁艇任西東      고깃배는 바다 위로 오고 가리니

                      何時重踏任瀛路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고 가서

                      更着班衣膝下縫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꼬

 

 

 

 

 

                                               낙귀   落句

 

 

                       夜夜祈向月       밤마다 달을 보고 비노니

                       願得見生前       생전에 뵈올 수 있게 하소서

 

 

 

 

하셨으니, 대체로 그 孝心은 천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자당은 1504년 10월29일에 임영(任瀛 ..강릉)에서 태어나 1522년 家君에게 시집오셨으며, 1524년에 한성으로 오셨다. 그 뒤에 임영으로 근친을 가 계시기도 하였고, 봉평(봉평)에서 살기도 하다가 1514년에다시 한성으로 돌아 오셨다. 1550년 여름에 家君이 수운판관(水運判官)에 임명되었고, 1551년 봄에는 삼청동 우사 (三淸洞 우舍)로 이사를 했다. 이해에 家君이 조운(漕運)의 일로 관서(關西)에 가셨는데 이때 아들 선(璿)과 이(珥)가 모시고 갔다. 

 

 

이때 자당은 수점(水店)으로 편지를 보내시면서 꼭 눈물을 흘리며 편지를 썼는데 사람들은 그 뜻을 몰랐다. 5월에 조운(漕運)이 끝나 家君께서 배를 타고 한성으로 향하는데, 당도하기 전에 자당께서 병환이 나서 겨우 2~3일이 지났을 때, 모든 자식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살지 못하겠다" 하셨다. 밤중이 되자 평소와 같이 편히 주무시므로 자식들은 모두 병환이 나은 줄 알았는데, 17일 새벽에 갑자기 작고하시니 향년 48세이었다.

 

 

그날 家君께서 서강(西江)에 이르렀는데, 이(珥)도 배행하였다. 행장 속에 든 유기그릇이 모두 빨갛게 되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괴이한 일이라고 하였는데 조금있다가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들려왔다. 慈堂은 평소에 묵적(墨迹)이 뛰어났는데, 7세 때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모방하여 산수도를 그린 것이 아주 절묘하다. 또 포도를 그렸는데 세상에 시늉을 낼 수 있는 사람이 없다. 그리고 그 그림을 모사(模寫)한 병풍이나 족자가 세상에 많이 전해지고 있다. 

 

 

  

 

 

 

 

 

                                         

 

 

 

 

 

 

 

 

                                    화폐 인물, 신사임당 ..  트집잡기

 

 

 

 

 

 

 

 

 

신사임당이 화폐 인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하여도 의문이 많다. 현모양처의 전형으로 선정하였다면 실제 사실과 맞지 않는다. 여성운동계에서는 현모양처의 상징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였지만, 아닌 것을 그런 것으로 우기며 반대한 우스운 꼴이다.

 

 

또 아들이 화폐 인물인데 어머니까지 선정해야 할 정도로 한국사에 인물이 없느냐도 의문이다. 여성예술가로서 선정했다면 그럴듯하지만, 허난설헌, 황진이 같은 인물은 검토 대상에서도 제외되었는지 설명이 없다.

 

 

 

 

 

 

 

 

                                                   가족묘역

 

 

 

 

이 묘역에는 1. 율곡의 첫부인 노씨 묘  2. 율곡 묘 3. 율곡의 맏형 이선와 부인 곽씨의 합장묘 4.율곡의 부모 합장 묘 5.율곡의 맏아들 이경임 묘 6. 율곡의 큰누님 매창의 시부모 합장묘 7. 매창과 매부의 쌍분묘 8. 매창의 둘째 아들 조영 묘 9.율곡의 8대손 이목 묘 10. 율곡의 둘째매부 윤섭 묘 11.율곡 5대손 이계의 부인 김씨 묘 12.율곡의 장손 이제와 부인 정씨의 쌍분묘 13. 율곡의 둘째 부인 김씨 묘 ... 등등 모두 14기의 묘가 함께 있다. 

 

 

 

 

 

 

 

 

부모 묘 윗자리에 아들과 며느리가 있고, 남편의 묘 위에 부인이 있으며, 매형, 생질, 사돔의 묘가 한 묘역 안에 있다.울곡은 16세에 모침 신사임당이 세상을 떠나자 이곳에 장사지내고 3년동안 시묘(侍墓)살이를 했다. 자신이 죽은 뒤에는 어머니 묘 윗자리, 첫부인 아랫자리에서 영면에 들었다.

 

이 묘역의 매장 형태는 현재까지도 논란의 대상이 되고있다. 즉, 아머비나 할아버지 묘 위에 아들이나 손자의 묘를 쓰는 도장(倒葬 ..또는 逆葬) 문제 , 부인 묘를 남편 묘 위에 쓸 수 없다는 논란, 문중 묘역에 타성(他姓) 심지어는 사돈의 묘까지도 쓰고 있다. 예법이 특히 강조되던 시대에 특이한 사례일 것이다.

 

 

 

 

 

 

 

 

 

                                            만들어진 賢母良妻  1

 

 

 

 

현모양처 ? 신사임당.. 그러나 아들 이율곡이 지은 "어머니 일대기.. 선비행장"의 기록을 보면 의문이 남는다. 아들이 그린 신사임당의 실제 모습은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멀기 때문이다. 신사임당이 1522년(중종 17)에 이원수(李元秀)와 혼인한 곳이 外家의 外家인 江陵이란 사실부터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신사임당은 혼인 3년 후에야 시어머니 홍씨를 처음 만났다. 혼인 직후 세상을 떠난 부친 신명화(申命和)의 3년상을 치르고 나서야 상경했던 것이다.

 

 

 

 

                                                                        친영례   親迎禮

 

 

 

이 무렵 조선은 혼인 방식을 중국식 친영례(親瀛禮)로 바꾸려는 왕실, 사대부들과 오랜 혼인 전통을 유지하려는 민간 풍습이 충돌하며 진통을 겪고있던 시절이었다. "장가(장인 집) 간다"는 말처럼 신부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고 상당 기간 머물며 노동력과 패물을 제공하며 사는 것이 전통 혼례의 풍습이었다. 반면 왕실과 사대부들은 신부집에는 인사만 하고 당일 本家로 볼아오는 친영례로 바꾸려 했다.

 

 

세종 17년(1435) 파평군 윤평이 태종의 서녀(庶女) 숙신옹주와 혼인할 때 최초로 친영례를 실시하였다고 "세종실록"은 전하고 있다. 사임당의 혼인 무렵의 왕인 중종이 재위 10년(1515)에 "혼인은 만세(萬歲)의 시작인데,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것은 천도(天道)에 역행하는 것이니 어찌 옳겠는가?"라고 하면서 비판한 것은 혼인 방식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왕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중국식 찬영례로 바꾸는 사대부들이 늘어났지만, 사임당과 그 부모는 전통혼례 방식을 고집한 것이다.

 

 

이율곡이 신사임당이 서울 시댁에 정착한 때라고 전하는 1541년(중종 36)은 혼인 19년 후이었다.서울에 정착한 이유도 "시어머니 홍씨"가 이미 늙어서 가사를 돌볼 수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시어머니가 家事를 돌볼 수 있었다면 師任堂은 서울로 올라오지 않았을 것이다. 사임당의 어머니인 이씨도 혼인 후 16년 동안이나 찬정에서 따로 살았다. 상경 후에도 사임당은 그의 詩句대로 "자나깨나 꿈속에도 돌아가고파"의 마음뿐 이었다. 한편 율곡은 이 글에서 "아버지가 혹시 실수하는 일이 있으시면 반드시 옳은 도리로 간하셨다"고 적은 것처럼 신사임당은 여필종부보다는 때로는 남편도 꾸짖는 여인이었다.

 

 

 

 

 

 

 

 

 

                                         만들어진 현모양처  2

 

 

 

 

일반적으로 유교적인 현모양처는  며느리라는 위치에 그 기반을 둔다. 즉 시집살이를 전제로 한 "좋은 아내, 훌륭한 어머니"이다. 그런데 사임당이 살았던 17세기 이전에는 우리의 선조들은 시집살이를 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딸도 제사를 지내고 또 재산도 똑같이 상속받아서 사실 여자들은 며느리로서 보다는 오히려 딸로서의 정체성이 더 강하기도 했다.

 

 

한마디로 그 시절에는 조선에 아직 유교적인 현모양처가 나올 사회적 환경이나 토양 자체가 마련될 수 없었던 것이다. 율곡의 어머니 행장에도 율곡은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이나 성격을 묘사한부분이 많다. 당시 율곡의 눈에는 어머니는 무엇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또 본인의 재능이나 기호에 몰두한 사람으로 비춰졌던 것 같다.

 

 

자녀교육에 대해서도 율곡에게는 어머니를 기억할 만한 별다른 일이 없어 보인다. 행장에 교육에 관한 이야기는 그저 한 줄 "자녀가 잘못이 있으면 훈계를 하였으며... "라는 것 뿐이다. 신사임당은 자식에게 해준 게 별로 없는 인물이었다. 

 

 

 

 

 

                                  사임당은 어떻게 현모양처로 만들어졌나?

 

 

 

이러한 사임당이 유교적인 훌륭한 어머니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은 이율곡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장생(金長生)과 그의 제자 송시열(宋時烈)이  사임당의 그림에 찬사를 보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행의 정수를  얻고 원기의 융화를 모아... 마땅히 그가 율곡을 낳으실 만하다" 라는 다분히 성리학적인 작품 평이 그것이다. 또 송시열의 제자 "송상기"는 "율곡선생은 백세의 스승이다.세상에 그 스승을 섬기면서 그 스승의 모친께 불경한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이율곡과 사임당을 동일시했다. 물론 이율곡의 글을 통해 사임당이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나 그들은 눈을 감았던 것이다. 

 

 

 

결국 사임당은 율곡의 어머니이었기 때문에 賢母良妻로 만드러져 갔다. 전해 오는 이야기에 "남편을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하여 10년 뒤에 만나기로 했다"는 강릉지방의 전설이 잇었는데, 이를 노산 이은상이 소설 "사임당편"에서 인용하였기 때문에 그 전설이 지금도 자주 인용되고 있지만, 이 이야기 역시 혼인 19년만에 시댁에 정착한 일에 대한 꾸며낸 이야기일 뿐인 것 같다.

 

 

 

 

 

 

 

 

 

 

 

 

 

 

 

 

 

 

 

 

                                        이씨분재기   李氏分財記

 

 

 

 

 

 

 

 

이 분재기(分財記)는 율곡의 외할머니이자 사임당의 어머니인 용인이씨(龍仁李氏)가 신사임당을 포함한 다섯 딸에게 媤家와 친정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노비 포함)을 나누어준 문서이다.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이씨분재기(李氏分財記)로 명명하였으나, 용인이씨 분깃문기(分衿文記)가 맞는 명칭이라고 한다.

 

 

분깃문기(分衿文記)란 자식들 몫별로 재산을 나누어주는 문서를 말하며, 주로 재부(財主)인 부모가 죽기 직전에 자손들을 모두 모아 하였다고 한다.

 

 

용인이씨는 외동딸이면서 자신은 딸만 다섯을 두었기 때문에, 시댁과 친정에서 상속받은 재산을 다섯 딸에게 골고루 분배하였다. 그리고 외손자인 율곡에게는 봉사조(奉祠條)로 현재 수송동과 청진동에 해당하는 수진방(壽進坊)의 기와집과 전답을, 넷째 딸의 아들인권처균에게는 배묘조(拜墓條)로 오죽헌 기와집과 전답을 별도로 분급하였다.

 

 

이 문서의 끝 부분에는 문서 작성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수결(手決)이 있다. 조선초기만 하더라도 재산의 상속은 균등분배가 원칙이었으며, 묘소관리와 제사문제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문서인동시에, 烏竹軒이라는 당호(堂號)가 집 주인인 권처균의 號에서 유래된 것임을 보여주는 문서이다

 

 

 

 

 

 

 

 

 

 

 

 

 

                                         신사임당의 작품 .. 글씨

 

 

 

 

 

 

 

 

 

 

 

 

 

 

 

 

 

 

 

 

                                     신사임당의 작품 ..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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