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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 백운산(白雲山 1010m)의 모산은 덕유산 향적봉(1614m)이다.
향적봉에서 북서쪽으로 뼏어가는 덕유지맥은 두문산(1051m)을 지나 한참이나 달려 금강에 가라앉는다.
두문산에서 덕유지맥을 벗어난 능선 하나는 김해산~성지산을 거쳐 청량산(1122m)~깃대봉(1055m)~백운산을 지나 남대천에서 여맥을 갈아 앉힌다.
이 지맥을 굳이 산줄기 체계로 읽는다면 ‘덕유 성지단맥’ 또는 ‘덕유 백운단맥’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도상거리 20km가 넘는 이 단맥은 접속구간까지 합치면 거리는 더 늘어난다.
그래서 지난 성지산 산행에 이어 이 구간의 끝자락을 끊어서 타기로 한다.
나제통문을 탐방한 후 신두마을에서 백운산~깃대봉~청량산 거쳐 수성대로 내려오는 도상거리 9km정도의 산길은 찜통더위와 겹쳐 상상을 초월한다.
산행거리와 산행시간은 서로 상관관계에 있지만 절대적으로 비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폭염이 산행시간에 어떻게 작용하는지, 난이도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대강 짐작만 할 뿐 정확히 모른다.
오늘 우리는 백운산 산행에서 그 평범한 진리를 터득하였다.
덕유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는 나제통문(羅濟通門)은 무주제1경으로 석모산(石帽山) 기암절벽을 뚫어 만든 인공통문으로 신라와 백제의 국경이었다.
동쪽은 신라, 서쪽은 백제 땅으로 전략적 중요한 지점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통문은 일제강점기에 수탈을 위해 김천과 거창을 잇는 신작로를 내면서 우마차 용도로 뚫은 것.
날머리인 수성대(水城臺)는 신풍령에서 발원한 원당천이 남대천으로 흘러가면서 낳은 명소다.
구한말 개항기에 학자 송병선이 은거하면서 서벽정을 지었다.
송병선은 동방에 하나밖에 없는 선비라하여 동방일사(東邦一士)라 불린 인물.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위협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그 해 음력 12월 30일 국권을 강탈당한 데 대한 통분으로 독약을 마시고 자결하였다.
수성대 푸른바위의 깨끗하며 의젓함을 송병선(宋秉璿, 1836∼1905)의 호를 따 일사대(一士臺)로 고쳐 부르기도 한다.
산행궤적
청량산(1122m)을 다녀오지 않았지만 일사대 계곡까지 내려가 앱을 종료하였다.
고도표(들머리인 신두마을이 고도 약 300m, 날머리 버스가 대있는 37번 도로는 고도 약 430m)
국제신문 트랙을 따랐다.
향적봉에서 백운산까지...(지도는 지난 성지산 산행 트랙)
버스가 나제통문으로 가면서 처음 계획했던 재궁마을코스 입구인 '라제주유소'를 지난다. 이 코스는 약 2km의 포장도로를 걸어야하는 어려움이 있다.
<참고 안내판> 라제주유소에서 재궁마을을 경유하여 도로 끄트머리에 있는 안내판. 현위치가 가리키는 지점이다.
라제통문휴게소에 차를 댔다.
라제통문(고도 약 300m) 바위 능선 좌측 가까이엔 석모산(404m)이 있다. 능선 우측으로 고도를 높혀가면 거칠봉에 닿는다.
그 능선 가느다란 암릉에 원시적인 방법으로 굴을 뚫었다. 현대식 공법으로 뚫으면 터널.
굴 상단부에 나제통문(羅濟通門) 글자가 새겨져 있고, 우측에는 미처 카메라에 자세히 담지 않았지만 연도가 새겨져 있다.
<photograph by 천성산> '천성산'님의 카메라에 담긴 글자를 확인하니 일본식 버전의 글체로 '경자년 시월 일(庚子年 十月 日)'이라 새겨져 있다.
경자년이면 1960년, 1900년, 1840년~이다.
나제통문은 수탈을 위하여 일제강점기에 우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굴을 뚫었다고 하였으니...
일제강점기(1910~1945)엔 경자년이 없지만 아무래도 1900년일 것으로 짐작된다.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기 얼마전이니 수출의 이름으로 수탈이 진행되던 시기이다.
예전 말본(문법)을 배울 때는 '두음법칙'이 있어 첫머리에 나올 때는 라(羅)자를 나(羅)자로 읽어야 한다고 배웠다.
북한식 버전으로 읽는다면 '라'자가 맞을 테지만 필자는 아무래도 두음법칙에 길들여져 있어 '나'자로 읽는 게 자연스럽다.
높이 약 3m, 폭 4m, 길이 10여m의 인공동굴을 지나 반대쪽에서 올려다 본다.
반대쪽 언덕배기에 '경주김씨 열녀비'가 세워져 있고,
통문 바로 옆 원당천에 가로놓인 설천교 아래엔 바위사이로 포말을 일으키며 계류가 흐른다. 계류 조금 아래엔 남대천과 합류지점.
'의병장 강무경 상'이 세워져 있어...
안내석엔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심남일(沈南一)과 의형제를 맺고 김율(金聿)의 의병부대에 합류했다.
1907년 김율이 죽자, 심남일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선봉장이 되었다.
이후 전라도지역에서 일본군에게 타격을 주었으나 7월 장성 동치(洞峙)전투에서 일본군에 대패하자, 순종이 내린 해산 조칙(詔勅)에 따라 부대를 해산했다. 그뒤 풍치의 바위굴에서 은신생활을 하던 중 8월 26일에 일본군에 붙잡혔다.
12월 광주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된 뒤, 32세의 젊은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1962년 건국훈장국민장이 추서되었다.
나제통문 탐방을 마치고 차에 탑승 500여m 떨어진 신두마을에 차를 댄다.
처음엔 재궁마을을 들머리로 계획하였지만 다수의 일행들이 국제신문 가이드를 선호하는 바람에 계획을 신두마을 기점으로 바꾸었다.
연일 수은주가 올라가고 폭염주의보가 내린 오늘, 들머리에서의 난이도를 낮추기 위하여 사실 고심하였다.
재궁마을 기점은 포장도로 약 2km(20분 소요)가 난점이지만 도로끝 안내판 지점이 고도 약 540m로서 이후 오름길이 상대적으로 수월하리라고 보았다.
차에서 내린 우리들은 아직 어떤 어려움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짐작하지 못한다.
알에서 갓 부화한 어린 거북이들이 본능적으로 바다를 향해 기어가듯 우리들도 그들의 생태처럼 산으로 향한다.
사각정자가 있는 신두마을로 들어가면...
곧 삼거리 갈림길.
뒤돌아보니 금방 포기할 여성회원 두 분이 고개를 숙인 채 뒤를 따른다.
그 길은 신두마을 뒷산으로 붙는 세멘트 포장 농로.
포장농로는 다시 삼거리.
삼거리에선 좌측길을 선택하여...
돌아본 모습.
다시 만난 'ㅏ'자 삼거리에서도 좌측.
그러니까 갈림길을 만나면 모두 좌측길을 선택하여야 한다. 멀리 백운산 봉우리가 백운(白雲) 아래 솟아있다.
포장 임도는 비포장 임도로 바뀌어...
곧장 이어진다.
임도가 작은 건계곡을 살짝 건너...
곧게 자라는 솔숲으로 들어서면...
솔숲 우측 능선이 오늘 우리가 올라설 산자락.
임도급 산길이 우로 휘어지는 이 지점에서...
우측 산자락으로 올라 붙는다.
초입 숲속에서 일행들을 앞세우고 퍼질고 앉았다. 땀이 비오듯 흐른다. 물통을 끄내 벌컥벌컥 물을 마신다.
뒤따르던 일행들 대여섯 명이 산행을 포기한 '산포꾼'이 되어 되돌아 내려갔단다.
이제 숨고르며 오름짓.
턱하니 버티고 선 두 봉우리. 나중에 이정표에 나오는 일봉이라는 말은 저 첫봉을 말하는 것인지 지금도 감을 잡을 수 없다.
오래전 산불이 난 지역인 듯 우리는 땡볕에 노출이 된다.
땡볕에 속수무책이지만 이리저리 눈가는 데는 열린다.
바람도 없다. 그늘도 없다. 쉴 곳도 없다. 그러니까 삼무(三無)다.
최고조로 치닿는 한낮 더위에 흐르는 땀을 훔치며 고개를 드니 우측 끄트머리 산자락에 높다란 시설물이 보인다..
살짝 당겨보니 처음에 계획했던 재궁마을 들머리 옆에 있는 '무주태권도원' 전망대다.
저곳을 오르는 데는 태권도원(입장료 4,000원)을 들어가 셔틀버스를 타고 전망대 앞에서 모노레일(2,000원)을 이용하여야 한다.
민주지산 방향으로 장쾌한 하늘금..
멀리 삼도봉 석기봉 라인, 가까이엔 석모산 나제통문에서 고도를 높혀 거칠봉을 향해가는 능선.
민주지산 하늘금을 뒷배경으로, 가까이에 야트막한 석모산과 나제통문, 그리고 우측으로 급히 치솟는 거칠봉 능선.
등로 좌측은 오래전 산불이 난 지역인 듯해서 계속 땡볕노출에 저항불가.
그래서 좌측으로 시계가 열려 거칠봉이 보인다.
잡목 숲속을...
구부정한 자세로 헤쳐야만...
비로소 햇볕노출과 잡목저항에서 해방이 된다. 이 지점(520.5m봉 능선갈림길)에서 앞서간 일행들이 퍼질고 앉아 쉼을 하고 있다.
내려가겠다는 일행들께 되돌아 내려가기에는 올라온 과정이 아깝다며 등행을 권했다.
이제부터 등로는 가팔라지고...
속도는 느려진다.
여든이 넘으신 권선생님은 초반에 천천히 페이스조절을 하시더니 후반부에선 거뜬히 고행(?)을 감당하신다.
가파른 산길에 길다운 길도 없지만...
첫 소방 안전목 '백운 22'에 닿았다.
정상 1.2km, 주차장 1.2km 이정표가 있는 지점 바위는 무슨 곤충(메뚜기?)을 닮은 바위. 이정표의 주차장은 재궁마을 깃점의 도로끝 안내판에 보이는 주차장인 듯.
한동안 너덜지대 사면으로 비스듬히 돌다...
궁궁지지(弓弓之之) 가파른 산길을 올라야 한다.
한동안 땀께나 흘려야만...
이정표가 있는 전망지대에 도착하지만...
땡볕에 달궈진 바위는 그대로 온돌인 셈.
조망이 열려...
정상부위를 올려다 보다...
한덤 님께 전망바위 앞으로 한 발짝 나아가보라 하였더니, 기껏 여기에서 모델의 임무완성. ㅋㅋ
멀리 향적봉.
이제 다소 경사가 완만해지더니...
일봉이라고 적혀있는 이정표를 만나 조금 나아가 보았더니...
불과 1~20여m 전망에 멋진 전망대가 있다. '일봉전망대'라고 부른다.
<photograph by 한덤>
거칠봉 뒤로 향적봉이 보인다.
거칠봉과 향적봉. 중앙의 마을은 월현마을.
일봉전망대에서 바라보면 중앙의 마을이 거칠봉의 기종점인 구산마을. 벌한천 골짜기로 4km가량 깊숙히 들어가면 벌한마을.
그 벌한마을 뒷산에 사선암(四仙巖)이 있어 옛날 네 신선들의 노닐던 흔적들이 암각으로 살아있다.
구산마을 원점회귀를 거칠봉~선인봉~사선암을 한다면 16km가 넘을 것이고, 시간은 7시간은 족히 걸릴 것.
이렇게 눈이 가면 마음 따라가고, 마음 따라가면 몸 따라 가는 법. 거칠봉이 우리를 손짓하는 이유다.
방향을 틀어 동쪽으로 돌리면 거칠봉에서 내려앉는 능선 끝자락에 나제통문이 보이고, 들머리였던 하두마을도 보인다.
뒤로 굵게 산맥을 그은 하늘금은 백두대간으로 민주지산과 삼도봉 라인.
카메라를 휘익 남쪽으로 돌리면 성지산 김해산 향적봉으로 뻗어나가는 가칭 '덕유백운단맥'.
우산나물이 꽃을 피웠다.
이정표에 주차장이 나왔다. 주차장은 아까 재궁마을 코스 안내판이 있는 곳을 말하는 듯. 그럼 주차장이 가리키는 이곳으로 내려가야 재궁마을로 가남?
소방 안전목은 '백운 22'에서 숫자가 거꾸로 내려온다. '백운 17'지점.
백운산 정상이다. 지금 시간은 정각 오후 2시다.
역광에서도 기념은 기념.
정상 이정표에서도 주차장 이정표(2.4km)가 있다. 반딧불이공원 방향으로 조금만 진행하면 나중 깃대봉 암봉에서 보았던 헌걸찬 전망대가 있을 것.
그런데 쉼터는 어는 곳, 어떤 쉼터를 가리키는지?
야생화 스승 '제비꽃' 님에게 카톡문의하였더니 조그만 이 꽃은 '가는장구채'란다.
백운산에서 8~90m 고도를 낮춘 안부에서 다시 차고 오르는 가파른 암릉길.
요리조리 안전 디딤길로 오르자...
전망바위에 선다. 뒤돌아보는 백운산자락 좌측에 도드라진 바위전망대가 보인다. 필자는 처음에 저 전망대를 일봉전망대인 줄 알았다.
한마디로 잘못된 정보를 산악회 유인물인 개념도에 적시했으니... ㅉㅉ
전망바위가 있는 이 능선길은 '반딧불이 공원'으로 이어지는 길.
폭염에 지치지 않았다면 빠뜨려서는 안될 포인트일 것.
깃대봉은 아직 더 가야만 하는데...
이 넘의 미역줄은 등로를 온통 휘감고 있어 여간 까탈스럽지 않아.
좌측 뚫린 하늘 사이로 올라...
하얀 손수건을 던지면 푸른 물감이 뚝뚝 묻어날 창공 너머 덕유산을 중앙으로 좌측이 거칠봉, 우측 뽈록 솟은 봉은 성지봉일 것.
거칠봉과 월현마을. 월현마을도 거칠봉의 드날머리로 이용된다.
구산마을과 월현마을.
카메라맨 문채님을 담았더니...
필자의 모습을 성능좋은 카메라에 담았다. 푸른 창공에 뭉개구름 두둥실하니 여긴 신선들의 영역일 터.
깃대봉은 아무런 표식없으니 부지불식간에 지나가고...
이름모를 야생화를...
'제비꽃'스승한테 카톡문의해야만...
고도를 낮추더니 마지막 한간힘을 쓰며 산죽을 헤친 뒤에야...
삼각점봉에 닿는다.
오늘 산행길에선 제일 높은 봉우리(1127.1m봉).
조금 내려서자 산정에 제법 널따란 평지가 형성돼 있다. 청량산은 서쪽 방향 능선으로 200여m 지점에 있지만 펑퍼짐한 평지에서 능선을 찾기란 쉽지 않다.
이럴 땐 나침반을 끄집어내 정확한 방향을 잡는 게 상책. 평지 저편에 청량산을 다녀 온다는 '천성산'님을 만난다.
그들은 청량산을 찾노라고 한참이나 이곳을 맴돌았다고 한다.
<photograph by 문채> 더위에 지친 필자.
펑퍼짐한 능선을 따르자 거대한 암봉을 만난다. 암봉을 기어오르는 '천성산' 님.
'별빛 찬준'님과 함께한 여성회원. 그녀는 준족이면서도 당차다. 나중에 닉네임을 확인하니 '별사랑' 님.
이 암봉은 가까이에서 카메라에 다 잡히지 않을 정도로 거대하다.
천성산 님은 암봉 좌측 밑둥으로 돌아 주능선에 붙어 기어코 정수리에 올랐지만 겁많은 필자는 우회길을 선택하였다.
올려다 보는 암봉 정수리.
암봉을 올려다보는 바위에 있는 잘 생긴 소나무.
암봉에 오르자 중간에 박혀있던 5~60kg의 돌덩이가 쿠르르 떨어진다. 밑에 사람이 있었다면 위험한 상황.
그렇게 위태하게 붙어 있었으니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한 셈이 되었다.
우회하여 능선에 붙었다.소나무 지점 바위에서 10여m 되돌아가 우회하는 길은 내리막으로 조금 내려서서 암봉을 우측 어깨에 짊어지고 돌아가는 길.
현위치를 알기쉽게 그렸다.
암봉을 바라보며 우회로를 확인한다.
그리곤 암봉 방향으로 한발짝 다가가 보지만...
이제 능선을 고수하며 비박하기 좋은 바위를 지나고...
미역줄이 잡아 당기는 지역을 통과하여...
산사면을 좌로 비스듬히 돌아 좌측 내리막으로 쏟아지니 수성대와 성지산 갈림길이다.
내리막 바위를 지나자...
급히 쏟아지는 급내리막.
체력이 바닥 났으니 낙엽과 마사토는 후반부에 쉽지 않은 길.
삼각점을 확인하고...
좌표를 확인하니 566.6m.
삼각점에서 딱 10분 만에 차가 대있는 국도변에 내려선다.
산포족, 아니 산포꾼들이 걱정스런 눈빛으로 우리들을 바라본다. * 산포꾼: 산행을 포기한 산꾼들.ㅋ
돌아본 하산 지점.
도로 건너 능선을 이으면 서벽정 이정목이 가리킨다.
수성대 계곡은 수량이 많은 날은 위험하니 공단에서 출입을 금지하고 있다.
와룡담과 학소대, 일사대를 가리키는 이정표.
차에서 옷가지를 챙겨 비포장 도로를 따른다.
4경 와룡담 안내판을 지나자...
우측 돌계단 끝에...
서벽정(棲碧亭)이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으로 전라북도 기념물 제80호다. 한말의 유학자 연재 송병선이 1886년(고종 23)에 건립하였다.
연재 송병선은 망국의 한을 품고 충절을 지켜 자결을 한 애국지사. 매천 황현보다 5년이 먼저다.
학소대와 이정표.
도로끝.
일사대 안내판.
계곡을 비스듬히 내려서면 녹슬은 다리는 출입금지.
수심은 제법 깊은 듯해 비가 많이와 수량이 많아진다면 물놀이는 위험할 것..
너럭바위엔...
이거 공룡발자국이다. 학술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
다시 되짚어 올라와...
차 뒤로 조금 옮겨 셋팅된 뒷풀이 마당에서 시원한 맥음료로 "우리 안죽고 살아왔땅."
'연재 송병선 선생이 순절했다는 소식을 듣고 혼자서 들판에서 애통해하다(聞宋淵齋先生殉義之報私慟于野)’라는 매천 황현 선생의 칠언율시가 전해지고 있다.
龍德淵潛正有需 / 風霜一日滿皇都 / 白麻擬壞寧終默 / 腦子隨呑不復蘇
못에 잠긴 용의 덕 정히 쓸데가 있나니
풍상이 하루아침에 황도에 가득했네.
교지를 찢으려다 차라리 끝내 침묵하였고
이어서 독약 삼켜 소생하지 못하였네.
독약을 마시고 금방 죽지않자 "내가 아직도 죽지 않았구나."하며 몇번이고 약을 더 마신 뒤 반나절을 고통스런 경련속에서 절명하신 선생의 모습이 겹쳐진다.
첫댓글 산마루님의 산행기로 더 자세하게 알게 되었네요~천성산님 말씀과 같이 보니 제 기록이 잘못 되었네요~~^^
너무 상세한 설명으로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항상 안산 즐산 하세요~^*^
예, 잊을 만하면 찾아 주시는군요. 열정과 활력, 그리고 체력이 돋보입디다.
열정만 갖고도 안되는 게 산이죠. '별빛 찬준' 님은 삼박자가 맞아요.
시간이 허락되는 날 미답의 산에서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산마루 ㅋㅋㅋㅋㅋ
제가 부족한게 그 세가지입니다~^^
잘 알지못해서 무식한 산행을하고 있습니다~^^
가고싶은산은 많은데 모든 여건이 안되서
멋진곳만 찾게되네요
제가 다닌지는 얼마안되지만 한마음 산마루님이 제일 박식하시고 세밀하게 설명해주시고 안내가 최고입니다
시간되면 한번씩 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