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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조씨 조동화의 근본은 어디에서 왔느냐?
趙東和는 1950년 6.25 동란중 부친 조병옥과 모친 延日鄭氏 정순봉사이에서 김제시용지면와룡리267번지에서 長男으로 태어났다.
옛날 이름은 조재곤이라 하였고 金堤趙氏 시조 조연벽의 24세손으로 문량공 趙簡의 후손이다.
김제 와룡의 기차길옆 나의집에서 어린시절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기차가 검은연기를 내품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우렁차게 움직이는 기차의 기관사의 꿈을 갖었었는데 아버지께서는 종친 조찬익(당시 익산기관차사무소 운전조역)할아버지한테 국립철도학교 원서를 가지고 와 기관사과에 지원 합격후 1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20살 약관의 나이에 청운의 꿈과 희망을 안고 철도청공무원으로 발령받아 근무하다가 군에 입대 3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75년 복직하여 40여년 철도를 天職으로 알고 설렘과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는 청춘의 젊은이가 2009년 停年退職했다.
1985년 여름 김영한기관조사와 기관사직무를 수행 중 서대전-대전간 운행시 대전천 약200m교량상에서 6-7명의 어린이가 놀고 있는것을 발견 교량 한가운데 급정차하여 소중한 생명을 구했던일, 기억에도 생생한 1977년11월11일 21시15분 익산역폭팔사고로 숨진 동료직원들을 밤새껏 운구하던일 등 수많은 일들, 익산역 폭팔사고 후 11월19일 당시 소장으로 계시던 박순길 소장님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고 3명을 아들을 두고 있으며, 國家의 動脈인 鐵道에 40년 복무하는 동안 機關士로서 15년 복무 후 1996년 지도팀장으로 승진 후진기관사 양성하는 임무를 14년간 수행하고, 덧없는 세월은 현역을 떠나게 만들어 자연을 벗하며 황혼의 시간을 보내고 있답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김제조씨의 시조 조연벽 1대조로 세계를 이루어 6대조 조의(충청병마절도사)가 28세(세종22년 서기1440년)에 순절하여 조의의 정부인 강능김씨(매월당 김시습의 누이동생)가 식음을 전폐하여 죽으려다가 어린자녀들이 붓들고 痛哭하니 정신을 가다듬어, 어린5남매를 거느리고 양주로 부터 김제 죽산리(이문안)에 이사, 자녀들을 훌륭히 키워 김제조씨가 크게 번성한바, 조동화는 조의의 후손이며 김제조씨 24세손이다.
지금에 이르러서도 조의의 후손들로 이문안 마을은 집집마다 조씨 문패가 달려있어 김제조씨 집성촌임을 알수 있도다.
☛정읍옹동 작소(鵲巢) 백천제 답사)기록☚
⇒백천재주소: 전북 정읍군 옹동면 오성리126-1(산소위치 백천재주소와 동일, 마을이름 작소부락)
나는 1950년 김제시 용지면 와룡리 김제조씨 가문에서 태어나 韓國鐵道公社에서 指導팀장으로 停年 退職하고 남은 시간 自由人으로 살면서 나의 뿌리가 누구이며 나의 조상이 어떻게 세계를 이루고 살아왔는가를 宗寶와 族譜를 뒤적이며 살펴본후 祖上의 근거지 정읍옹동을 방문하여 답사한 내용을 몇글자 적고자 한다.
金堤趙氏는 本貫을 金堤로 시조 趙連璧 할아버지의 자손이 번창, 약 800년의 역사를 통해 약5만여명의 씨족으로 번성하였으나, 현대사회는 서구사회를 본떠 조상들이 지켜온 충효와 승조사상은 희박해지고, 현대학문에는 능할지언정 자신에 대한 祖上에 대하여는 거의 백지이며 자기조부의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인 현세태라고 한다.........지금부터라도 조상의 얼을 기리고 복받는 後孫이 되고자 다짐해 본다.
거년 모일에 내아우 정권이와 여동생 월선이 셋이서 승용차로 익산에서 약 30km 떨어진 정읍옹동작소로 1시간을 운행하여 백천재를 방문하고 인근 조상들이 묻혀있는 山所를 둘러보았다.
약2만여평의 산에 조상의 묘소들이 서너군데에 나누어져 후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현재 이곳 산 한쪽은 개간하여 건설회사에 흙을 팔아 宗中 收益金을 올려 宗中 基金으로 활용하고 있답니다.
이곳을 안식처로 잠들고 있었던 나의 선대 조상들 9세손 조윤침이 제일 어른으로 자리잡고, 봉분 10여기가 東向을 바라보며 자손을 지키고 있었다.
백천제 시제일은 음력 시월15일 백천재관리는 조동식 宗親이 하고 있으며 현재는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있으며 사위와 딸이 농사를 지으며 墓를 관리하고 있다.
백천당공파종중은 총42,000평의 땅이 있으며, 토지에서 세를 받아 기금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시제일에 타지에서 오는 종친은 10만원의 교통비, 가까운곳은 5만원의 교통비를 지급하고 있다고 합니다.
내아버지(炳玉)때는 종친 병희 아저씨와 시제일에 참석하여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였으나 현대에 이르러 단절되었음을 고백하고 조상의 충효사상을 깊이 세기며 세월을 살아가리라고 다짐해 봅니다.
백천재 뒷산에는 서너군데에 나누어져 9세손 백천당 윤침, 10세손 형륜, 11세손 잠, 12세손 응직, 응립, 14세손 상주 15세손 태정의 봉분이 있으며 신도비 비석이 여러개 있음을 확인할수 있었다.
백천재와 백천당 조상묘소 추모 답사후 옹동 작소마을 뒷산에 있는 13세손 必泰 호 호계 할아버지의 묘소를 찾아 나섰는데, 대나무밭에 쳐 박혀 있는 필태 할아버지의 묘를 찾고 수천의 후손들이 도리를 못한 죄를 되씹으며 야박한 현대사회의 개인주의가 도덕과 윤리가 파괴된 것을 목격하고 가슴이 쓰러져 내렸다.
옹동 작소에 상석과 봉분묘가 있으며 대나무속에 햇볕을 못보고 수년전부터 찾아오는 후손이 없고 무관심으로 방치되어 있다.
12세손 조응헌의 셋째 아들 필태(13대손)는 천성의 효성이 지극하여 묘려에서 삼년을 마치니 원근사람들이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께서 특별히 인견하시어 태학반에서 누락된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특별히 호계라는 호를 주시었다.
죽서공파 조응헌 죽서공의 행적-12세손
김제조씨 조동화와 조응헌(1653년 졸 향년72세)할아버지의 관계는 나의 중시조로서 김제조 12세손이다. 약373년 전 이세상을 살다 떠난 나의 선조로서 응헌할아버지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조동화는 죽서공 응헌할아버지의 후손으로 죽서공파라고 한다.
12세손 응헌은 호가 죽서공이요, 일찍이 연방에 올라 명나라가 패망한후 벼슬에는 뜻이 없어 한세대의 명현들과 더불어 글과 술과 서로 놀면서 의리를 밝히었으며 공은 일곱아들이 있으니 시인들이 말하기를 조씨의 칠룡이라고 말하였다.
공은 효종대왕4년(서기1653년) 향년 72세에 졸하다.
죽서공파 종중(정읍옹동면 호동)은 총9,000평의 땅이 있으며 토지에서 세를 받아 묘지관리와 시제 기금으로 활용하고 있다.
죽서공 시제일에 후손들의 참여의식 부족과 개인주의의 영향으로 참가자가 아주 극소수이다고 하니 세태를 한탄해야 될 것이니 후손으로서 얼굴을 들수가 없도다.
시제일은 매년 음력 10월16일이다.(백천당 시제 모시는 다음날)
비석에 세겨진 죽서공의 행장 주요내용은
공의 휘는 응헌이요 자는 자첨, 아버님의 휘는 잠이니 판관이다.
효성으로 보양을 부지런히 하는 것은 천성에서 나왔고 형제간에 우애의 즐거움을 돈독히 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하였으며, 몸에는 사치스러운 옷을 버리고 입에는 좋은 음식을 멀리하였다.
居喪 육년에 예를 쫓아 슬픔을 다하였으니, 향리에서 군자라고 칭송하였다.
세상에 있은지 70년에 경서를 연구하고 행실을 닦아 사림이 사표로 추존하였다.
일찍이 연방(생원진사과)에 올라 여러번 추천이 있었으나, 명나라가 패망한뒤로 세상일을 길이 끊고 벼슬에는 뜻이 없어 빛을 감추고 자취를 숨기어 다시는 시장에 나가지 아니하고,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한세대의 명현들과 더불어 글과 술과 서로 놀면서 의리를 밝히었으며 공은 일곱아들이 있으니 시인들이 말하기를 조응헌을 칠룡이라고 말하였다.
장남의 휘는 필대요, 2남은 필하, 3남은 필태요, 4남은 필수, 5남은 필후, 6남은 필중이요, 7남은 필제니 가풍을 승습하여 성효가 출전하였다.
3남 필태가 와룡 김제조씨 가문을 이어왔도다.
오직 공이 한적한 것을 취하여 이에 죽산 서쪽에다 당하나를 구성하고 여기에 거쳐하다가 여기에서 마치니 이로 인해 “죽서”로 호를 하였다.
죽서로 호를 택한 것은 淸之聖者(청지성자 : 덕과 지혜가 뛰어나고 사리에 정통하여 모든 사람이 길이 우러러 받들고 모든 사람의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의 풍토를 생각하여 고죽서산의 의리를 취한 것이다.
배위는 진주소씨니 증 병조판서 만선의 따님이시다.
충효의 절차와 독실한 행동은 말학의 본받는바가 되기 아니하겠는가. 가장으로 채택하여 그실적을 기록한다고 하노라.
공은 효종대왕4년(서기1653년) 졸하니 칠십이세가된다.
가선대부 충청병마절도사 조공 의 신도비문(6세손)
嘉善大夫 忠清兵馬節度使 趙公 義 神道碑文
우리 세종대왕께서 성철(聖哲)의 자질로 문명지치(文明之治)를 시행하시어 여러 현인들이 많이 나오고 많은 무리들이 쫓아서 변화되었으며 따라서 문무지재가 다 거용되었고 예악이 다 흥기(興起)하였다. 이때 절도사 조공 휘 의(義)의 기개가 탁락(卓)하고 지려(志慮)가 깊고 원대하며 효도하고 우애함이 돈독하고 관후하였으며 장성해서는 경사(經史)를 섭역하여 영명(슈名)이 드러났다.
二十에 장원급제가 되었으니 세종 十四년 임자이다. 친구들이 환영하여 추중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고 여러 번 관직에 추천되었다.
정산현감이 되어 잔민(殘民)을 소생시키고 폐단을 개혁하니 경내(境內)가 숙연하였다. 권농단련 판관을 하였으며 군부(軍府)를 연속 맡아 성심을 다하여 능히 진휼(賑恤)을 하니 아전과 백성이 서로 기뻐하여 치적이 가장 우수하였다. 선덕 五년에 경기 감목관이 되었다가 충청 감목관으로 옮기어 충청병마 절도사를 제수 받으시자 공이 지우(知遇)에 감격하여 그 정성을 더하고 그 충성을 다하였다. 사사로운 비용을 절약하여 어버이를 받들고 어른을 공경하는 의리를 격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하늘이 착한 사람을 남겨두지 아니하여 정통 경신년 五월 갑자일에 임소에서 몰하시어 부음(訃)이 올라가니 상(上)께서 놀래고 슬퍼하시어 부의를 주라고 명하시고 아전과 백성이 슬퍼하고 상심하니 은졸지전(隱卒之典 : 임금이 죽은 공신에게 哀悼의 뜻을 표하는 것)이 갖추어졌다. 천안 광덕산 개천동 감주산(坎主山) 계좌원에 예장으로 모시었다. 공의 선세(先世)는 김제로부터 일어났으니 고려 벽성군 연벽(連璧)이 시조가 되시고 문하시중 시호 문량 열헌선생의 휘 간(簡)은 도덕문장으로 세상에 드러났고 용암사에 봉향하였으니 즉 공의 고조이다.
증조는 영회(令晦)니 보문각 직학사요 조부는 통원(通元)이니 공조판서요 아버님은 희보(希甫)니 호조판서이며 어머님 정부인은 홍씨니 찬성 중선(仲宣)의 손자요 대언 임(琳)은 그의 아버님이다.
공이 태종 계사년에 출생하니 형모가 단정하고 엄숙하였으며 의상(意想)이 초연하여 보통 아이와 달랐다.
경학(經學)을 탐색하는데 뜻을 두고 시례지장(詩禮之)에 마음을 가라앉히어 청표아망(淸標雅望)이 이미 사부(士夫)들의 공경하는 바가 되었다.
절도사가 되어 힘을 다하여 직책을 봉행하는데 사심이 없었고 성색(聲色 : 佳聲美色)을 가까이 아니하며 뇌물을 막고 끊어 사령(使令)과 복예(僕隷)의 무리들이 감히 법을 범하지 못하고 기강이 수립되었다.
공이 죽기를 맹서하고 충성으로 보답하려고 하여 장차 상하가 협흡(協洽)하여 그 술법(術法)을 행하게 되려고 하는데 가생(賈生)의 한(恨)을 다하지 못할 것을 누가 말하였으랴. 배위 정부인 김씨는 강릉에 본관을 둔 사복시정 밀(密)의 여(女)이다.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종당(宗黨)을 공경하며 집안을 법도 있게 다스리어 가사(家事)로써 공에게 누를 끼치지 않았던 고로 공이 스스로 청백하였으니 실로 내조(內助)가 많았다고 한다.
부인이 문득 붕성지통(崩城之痛 : 남편이 죽은 아픔)을 만나 三자를 인솔하고 양주로부터 김제 죽산 옛터로 가서 거주하게 되었다. 성종 무술년 十二월에 돌아가 별도로 태인 금산동 묘좌에 장례 모시었다.
장남은 이지(理智)니 부사직이요 차남은 숭지(崇智)니 평고군으로 판서에 증직되었고 삼남은 승지(承智)니 사과이며 장녀는 호군 전빈(贇)에게 출가하였고 차녀는 허규(許珪)에게 출가하였다. 사직의 아들 원정(元禎)은 태복경이요 원우(元祐)는 참판이며 여서는 오서(吳)이다.
판서의 아들 원상(元祥)은 진사로 만호요 원륜(元倫)은 마천군으로 정사훈에 책록되었다. 사과의 아들은 원린(元璘)이니 부위요 여서는 하준(河濬)이니 현감이며 성익(成翼)이다.
증현손 이하는 세주(世胄 : 계자란 말)가 번다하여 가히 다 서술하지 못하나 그 문무관직이 가장 드러난 자는 승중(承重)은 현감이요 승서(承緒)는 참봉이며 윤벽(倫壁)은 내금위장이요 윤박(潤璞)은 참봉이며 윤침은 한성서윤을 누징 불취했고 호백천당이니 용암사에 봉향하였다.
윤규(潤珪)는 직장이요 윤정(潤)은 교위이며 지수(之秀)는 통덕랑이고 극공(克恭)은 군수이며 극양(克良)은 통덕랑이요 임(淋)은 부장이며 구(球)는 우수이다. 현손에 장집(長緝)은 만호요 장희는 판관이며 설(說)은 주부요 형륜(亨倫)은 찰방이며 정윤(貞倫)은 판관이요 몽득(夢得)은 판결사요 대붕(大鵬)은 사복시정이다.
五세손에 영립(英立)은 충성으로 죽어 참판에 정문을 명하였고 성립(成立)은 교관이며 잠(潛)은 판관이요 개(漑)는 생원이며 중립(中立)은 진사요 탁립(卓立)은 부위이며 유정(惟精)은 증좌승지이고 용창(用昌)은 효도로 정문을 명하였으며 필달(必達)은 통제사요 적(適)은 청백하였으며 시준(時俊)은 부사로 풍성군이요 상주(相周)는 자산부사이며 상은(相殷)은 거제부사이다.
공의 재지(才志)와 아조(雅操)가 족히 나라에 시행하고 세상에 현양되었을 것인데 능히 소온(素蘊)을 펴지 못하고 돌아갔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
오직 그 자손이 번성하고 잠신(簪紳 : 관직을 말한 것)이 세상에 울리었으니 진실로 하늘이 후손에게 보시(報施)한다는 것이 대개 틀린 말이 아니구나. 그 十八세손 장곤(璋坤)이 조상을 존숭하고 선대를 위하여 의금(義金)을 연출하고 대비(大碑)를 세워 묘도(墓道)를 크게 꾸미는데 조선실록을 수람(捜覽)한 사람은 양곤( 坤)이다.
지금 귀곤(貴坤)과 성곤(成坤)이 와서 나에게 일조지역(一助之役)을 간곡하게 서술하고 명(銘)하여 가로되 하늘이 공의 재주를 낳아 나라에 선양(홈良)이 있게 되었구나.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었으며 효도와 공경은 향풍(鄕風)을 변화하도다.
미루어 임군을 섬기는데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직무에 책임을 다하였지.
잔폐(殘)를 혁신하고 간인(姦人)을 물리치니 과정이 정립되고 치적이 높았네.
왕이 은총을 주시니 혈심(血心)으로 보답하기를 맹서하였도다. 밤낮으로 힘을 다 바치어 이에 선정(홈政)으로 나가서 안으로는 단련판관을 하고 밖으로는 충청병마절도사를 하였구나.
청백과 근신(謹愼)하니 영문(令聞 : 좋은 평판)이 성대하였는데 하늘이 연세를 아껴주지 아니하여 중도에 돌아가셨도다. 슬프다. 공의 원대한 뜻을 백에서 하나도 펴지 못하였네.
장차 크게 베푸는 것 같은 데도 어찌 그리 빼앗아 가기를 급히 하였는가.
광덕산은 높은데 개천동에 달빛이 밝았구나.
효성스러운 후손이 할아버님 생각하여 묘의(墓儀)하려고 하네.
내가 그 대략을 거두어 이 명사(銘詞)를 전각(篆刻)하게 하노다.
[기미년 三월 경자일에 나주 나진선(羅鎭璇)은 삼가 찬술함.]
충청병마절도사(忠清兵馬節度使)
조의공(趙義公)과 정부인(貞夫人)강릉김씨(江陵金氏)
조선조 세종대왕(世宗大王 : 1419~1450) 때 충청병마절도사(忠清兵馬節度使:종2품관)를 역임한 조의(趙義)는 김제조씨의 시조이신 고려 대장군 벽성군(碧城君) 연벽(連璧)의 5세손으로, 문량공(文良公) 조간(趙簡)의 현손(玄孫)이다. 보문각직학사 (宝文閣直學士 : 정3품관) 영희(令晦)가 바로 증조이고, 할아버님은 공조판서(工曹判書 : 정2품관) 통원(通元)이며, 아버님은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한 희보(希甫)이고, 어머님은 정부인 남양홍씨(貞夫人 南陽洪氏)로 대언(代言) 임(琳)의 따님이다. 공은 고려말 우왕(禑王) 10년(1384) 6월 26일에 출생하여 조선조 세종 22년(1440) 5월 갑자일에 돌아가셨으니 57세를 사시었다.
이제 공이 살으신 57년간의 행적(行蹟 : 발자취)을 찾아서 알아본다는 것은 이미 6백여 년이 지난 옛 일이라 결코 쉽지 않다.
후손들이 미숙한 탓으로 당시의 문헌이나 기록에서 공에 대한 사적(事蹟)을 찾지 못하여 더욱 죄스러울 따름이나, 다만 후세에 이르러 각종 자료를 수집하고, 이를 상고하여 쓴 비문(碑文)이 묘비(墓碑)에 새겨 있어 그 일단이나마 알 수 있게 된것이 다행이라 하겠다.
더욱 다행한 일은 천안 개천동(天安 開天同)공의 묘소에서 도굴(盜掘) 당한 지석(誌石)을 최근에 발견한 것으로. 이 지석은 현재 서울호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 전문이 우리 족보 자손록(子孫錄)에 실려 있으며, 다시 수년전에 묘소 주변에서 우연히 표석(表石)을 발견하여 공의 사적을 밝히는데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이 표석은 우리 대종회관(大宗會館)에서 소장하고 있다.
지석은 묘지(墓誌)라고도 하는데 원래 천재지변(天災地變), 또는 풍우나 오랜 세월의 흐름에 따라 혹시 분묘의 분실에 대비하여, 금속판이나 석판 등에 죽은 사람의 성명과 원적(原籍), 생졸일(生후日), 주요행적, 묘의 위치 등을 새겨서 눈에 쉽게 띄지 않도록 무덤 앞 땅 속에 묻었다.
이 지석은 그 말미(末尾)의 기록에서 1440년 5월에 공이 돌아가시고, 같은 해 12월에 충청도 천안 개천동(開天洞)에 장사한 뒤 45년이 지난 1484년 3월에 만들어 땅 속에 세웠다하니, 지금으로 부터 518년 전의 생생한 기록이다. 이제 지석에 새긴 기록을 쫒아 공이 살아온 57년간의 행적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공은 앞에서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아버님 호조판서 희보(希甫)와 어머님 남양 홍씨의 사이에서 1384년 6월 26일 출생하여 19세까지 서울에서 살았다. 지석에「父希甫戶曹判書母洪氏南陽洪武甲子六月二十六日生一歲至十九歲在京」라 쓰여 있다.
여기에서 1세부터 19세까지 서울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이 서울이 어디인가에 대하여 상고(詳考)하건대. 공이 출생한 홍무(洪武 : 명나라 연호)갑자년은 고려 우왕(禑王) 10년이니, 아버님(希甫)께서 이 무렵을 전후하여 고려의 조정에서 문하부직문하(門下府直門下 : 종3품관. 호조판서는 뒤에 조선조에서 역임)로 있었고, 할아버님(通元)이 공부전서(工部典書 : 工曹判書)를 역임한 것으로 보아, 공의 출생지는 고려의 서울인 개경(開京 : 개성)이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을 개국하여 태조 3년(1394)에 서울을 한양(漢陽: 漢城, 현 서울)으로 옮겼으니, 이 때가 공의 나이 11세로 적어도 이 때까지는 고려의 서울인 개성에서 살았고, 그 뒤로 19세까지는 조선조의 서울인 한양에서 살았다고 하겠다.
공의 성장기는 정치, 사회적으로 많은 변동과 혼란이 겹치는 격동(激動)의 시기이었다. 망국 직전의 혼돈의 시기에 출생하여 9세에 왕조가 바뀌는 큰 변동이 있었고, 11세에 천도(遷都)의 혼란을 겪었으며 14세에는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공은 이 격동의 와중에서도 19세까지 타고난 성품에 뜻이 깊고 원대하여 오로지 학문에 전념하였으니, 그 이름이 이미 원근지간에 널리 알려질 만큼 성장하였다.
20세에 김제에 사는 강릉김씨와 결혼하고 15년을 김제에서 살았다.
「二十歲娶金堤居江陵金氏留十五年」강릉김씨는 사복시정(司僕寺正: 정3품관) 밀(密)의 따님이다. 공의 신도비명(神道碑銘)에 단종(端宗) 때 생육신(生六臣)의 한 분인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누님이라 기록하고 있다. 「密女梅月堂金時習娣氏也」전해오는 이야기로는 매월당이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아 누님(강릉김씨)의 묘지를 그의 원에 따라 자손이 번성한다는 명당 터로 지금의 금산동(金山洞)을 택하여 정하였다. (擇地
定坐)고 한다.
그러나 이를 확인해보기 위하여 전북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강릉김씨 대동보」를 다 넘기면서 찾아보아도 김시습과의 관련이 있지 않았고, 다시 강릉김씨 종문의 한 대표를 찾아 문의하였으나 역시 확인이 되지 않았다.
공이 35세까지 김제에서 15년을 사는 동안 22세에 장녀를 낳아 강화 봉유(江華 奉紐)에게 시집가고,「二十二歲女子生適江華奉紐」라 하였는데, 공의 묘비(墓碑 : 忠清兵馬節度使公碑)의 비문에「女適江華奉紐 吏曹判書」라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장녀의 남편 즉 사위 봉유(奉紐)가 이조판서를 역임한 것이 아닌가 한다.
31세에 차녀를 낳아 천안 전빈(天安 全贇)에게 시집가서 애산수(埃山成 : 애산의 수비장)가 되었다. 여기서도 전기 비문에는 「季女適天安全贇爲護軍」라고 기록하였으니, 전빈이 오위(五衛)의 호군(護軍 : 정4품관)을 역임하였는지 아니면 애산수의 관직이 호군이였는지 불명하다.
공이 33세에 장남 이지(理智)를 낳으니 뒤에 사직(司直 : 정5품관)이 되고, 즉「三十三歲子理智生爲司直」이라 하였는데, 족보에는 「부사직 감찰」(副司直 監察) 즉 부사직과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정6품관)을 역임한 것으로 기록하고, 또한 묘비문에는 효행으로 추천되어 중종조(中宗朝)에서 특별히 감찰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고, 다시 사직을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行孝登剡中宗朝特徵以監察不起又徵以司直不就」라는 기록으로 보아 비록 취임하지는 않았으나 감찰과 사직을 제수 받은 것은 확실하다고 하겠다.
34세에 차남 숭지(崇智)를 낳으니 호군(護軍 : 정4품관)이 되고 감련관(監鍊官)이 되였다. 「三十四歲子崇智生爲護軍監鍊官」이어서 춘사연(春賜宴)에서 과거를 보아 급제하고 부장(部將:종6품관)이 되어 여러 군데 위영(衛출)의 진무겸운검이 되었으며 「爲登科以春賜宴爲部將爲諸衛鎭撫兼雲釰」,통정대부(通政 大夫: 정3품계, 당상관)로 영월군수(寧越郡守)가 되었다가 통훈대부(通訓大夫: 정3품계 당하관)로 행(行)여산군수(礪山郡守)로 옮기었고, 다시 양진첨사(揚鎭僉使)가 되었다. 「爲通政寧越宰移通訓行礪山宰爲揚鎭僉使」숭지(崇智)의 사적에 대하여는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관직까지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하였으나, 여기서 누락된 것은 평고군(平皐君)을 봉군(封君)받은 사실에 대하여서이다. 세조(世祖)13년(1467)에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 의병과 의곡을 모집하여 곧바로 금강을 건넜으나 그 사이 난이 평정되어 돌아왔는데, 이것이 적개공신(適愾功臣)으로 책록되어 평고군을 봉군 받고, 도총관(都摠官 : 五衛都摠府의 장으로 정2품관)과 지의금부사(知義禁府使 : 정2품관)를 역임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 :정2품계)에 호조판서를 증직(贈職) 받았다.
이상의 사실이 지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연유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다만 증직(호조판서)부분은 지석을 장립(藏立)한 때(1484)가 승지의 나이 57세이므로, 이 때 살아계셨다면 사후증직이므로 지석을 장립한 뒤에 증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시 지석의 본문으로 들어가 공이 35세에 상경하여 3년을 서울에서 살았는데, 36세에 아들 숭신(崇信)을 낳았으나 일찍 죽고
37세에 어머님이 돌아가셨다.「三十五歲適京留三年, 三十六歲子崇信生早沒 三十七歲母洪氏卒」. 38세에 다시 김제로 내려와 6년을 사는 동안「三十八歲適金堤留六年」41세에 3녀를 낳아 양주 허규「楊州 許珪」에게 시집가고「四十一歲女子生適楊州許珪」,45세에 3남 승지(承智)를 낳으니 호군이 되고 어모장군(禦侮將軍 : 정3품계)에 행사과(行司果)를 역임하였다. 「四十五歲子承智生爲濩軍爲禦行司果」공이 학문과 덕행으로 일찍이 영읍(營邑)에서 여러 차례 추천이 있었으나 매양 사양하고, 44세가 되어 양하도수참 찰방(察訪: 종6품관)으로 나갔다. 「四十四歲爲揚河渡水站察訪」46세에 경기도 감목관(監牧官 : 종6품관)이 되었다가, 충청감목관으로 옮겼고 다시 47세에 정산현감(定山縣監 : 종6품관)이 되었다. 「四十六歲京畿監牧移忠淸監牧官 四十七歲爲定山宰」50세에 온양으로 옮겨 6년을 살다가 57세가 되는 해 정통경신년(正統庚申年 : 명나라 연호, 세종22년 1440) 여름 5월 갑자일에 돌아가시니,「五十歲適溫陽留六年,五十七歲正統庚申五月甲子終」 그 해 겨울 12월 충청도 천안 개천동에 감산을 주산으로 하여 계좌정향(癸座丁向)으로 장사하였다.「冬十二月葬忠淸南開千同坎山作主癸座丁向」이상이 지석에 기록된 공(義)의 사적인데 여기서도 공이 정산 현감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약 10년간의 행적이 나와 있지 않았으니 그 연유를 알 수가 없다. 공의 묘비와 배위 정부인 강릉김씨의 묘비문(墓碑文)에는 이후의 사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
다. 공이 정산현감이 되어 선정(善政)한 치적(治績)과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 널리 알려져 당시 세종대왕께서 충청병마절도사(忠清兵馬節度使: 종2품관)를 제수하였다.
이에 공이 지우(知遇)에 감동하여 그 정성을 더하고 죽기를 맹서하면서 충성으로 보답하려고 힘을 다하여 직책을 봉행하였는데, 하늘이 착한 사람을 남겨두지 아니하여 세종 22년(1440) 5월 갑자일에 임소에서 돌아가시니, 부음(訃급)을 접한 임금께서 슬퍼하며 부의를 넉넉히 하라고 명하시고, 은졸지전(隱卒之典 : 임금이 죽은 신하에게 애도의 뜻을 표함)을 갖추어 특별히 예장(禮葬)을 명하여 장사 모시었다. (沒于任所訃間上震悼命賻吏民哀喪傷隱卒之典備矣禮葬)여기서 예장이란 죽은 신하에게 임금께서 내려주는 최상의 예우이고 영예로써 오늘날의 국장(國葬) 이상의 것이었다. 조선 태종(太宗) 때 신하의 관직에 따른 사후예우(死後禮遇)를 규정하기 위하여 예장증시법(禮葬贈諡法)을 제정하고 이를 시행하였으니,
대상은 종1품관 이상으로 한정하였으나 관품이 미달하여도 공덕이 있거나 임금의 특지(特旨)가 있으면 예장할 수 있다. 따라서 공의 예장은 종2품의 관직으로는 미달되나 당시 세종대왕의 특별한 배려 즉 특지로 이루어졌으니 그 뜻이 더욱 크다고 하겠다.
참고로 관원이 죽으면 일정한 기간을 지나야 장사(葬事)하는 장일제(葬日制)가 있는데 4품 이상은 3개월, 5품 이하는 1개월로하였다.
전기 지석에서 공이 20세에 김제 사는 강릉김씨와 결혼하였는데, 이 때 강릉김씨(뒤에 貞夫人)의 나이가 몇 세인지 기록에 나와 있지 않고 그 출생연대도 알 수 없다. 대략 추정하기로는 결혼 당시 공의 나이가 20세이므로 그 보다 2~5년 연하로 보아 15세에서 18세쯤 되고, 이에 맞추어 출생 년대도 1386년에서 1389년 까지로 추정된다. 또한 지석에서 정부인께서 성화 무술(成化 : 명나라 연호, 戊戌 : 1478)11월에 돌아가셨다.「妻成化戊戌十一月丙午終」라고하니, 돌아가실 때의 나이가 적어도 90~93세로 추정된다.
정부인께서는 일찍이 김제의 양가에서 태어나 자라면서부터 맑고 깨끗한 성품과 고매한 인품을 갖추었으니, 공이 청백한 목민관(牧民官)으로 선정(善政)한 것도 다 내조의 덕이 컸었다고 후세까지 전하고 있다.
공이 1440년 5월에 충청병마절도사의 임소(任所)에서 57세 로 돌아가시니 정부인(貞夫人)께서는 붕성(崩城 : 성곽이 무너짐)의 아픔을 못 이겨 며칠 동안 식음을 전폐하더니, 이내 고쳐 깨닫고 억지로 일어나 장례(예장)를 모시고, 곧바로 3남 2녀(장녀는 36세로 이미 봉유-奉紐에게 출가하였음)를 인솔하여 양주(경기도 楊州)에서 김제 죽산(竹山 : 현제의 복죽동(이문안)의 옛 고향으로 이거(移去)하였다.
이 후 자녀들을 훌륭하게 양육하여 후세에 큰 인물로 가문을 빛나게 하였다. 1478년 11월에 공과 사별한지 38년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 우리 종문이 대를 이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크게 벌족하고 번창한 것이 정부인께서 생전에 쌓은 공덕이라 하겠다.
공의 묘소(墓所)는 지석(誌石)에 기록되어 있는 대로 충청도 천안 남쪽 개천동(忠清天安南開天洞)에 감산을 주산으로 하여 계좌정향으로 장사하였고「坎山作主癸坐丁向葬」그 뒤 45년이 지난 성화 갑진년 3월에 지석을 장립하였다. 「後四十午年成化甲辰一1484.年三月藏立誌石」.정부인의 묘소 또한 지석의 기록대로 무술년(戊戌 : 1478) 11월에 돌아가시고「戊戌十一月庚午終」기해(己亥 : 1479) 12월에 장사하니, (己亥十二月葬), 전라 태인동옹지 석장동「全羅 泰仁 東翁池 石藏洞」(지금의 정읍시 옹동면 금산동)에 진산을 주산으로 하여 묘좌유향이다.
震山作主卯坐酉向』여기서 참고로 공의 아버님 자헌대부(資憲大夫 : 정2품계) 호조판서(戶曹判書 : 정2품관) 희보(希甫) 와 어머님 정부인 남양홍씨(貞夫人 南陽洪氏)의 묘소가 지석(誌石)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니, 아버님은 경기도 양주 동쪽 옹장동에 감산을 주산으로 하여 자좌 오향으로 장사하고 「顯考葬京畿楊州東翁匠洞坎山作主子坐午向」어머님은 경기도 양주 동쪽 석성동에 진산을 주산으로 하여 묘좌 유향으로 장사하였다. 「顯妣葬京畿楊州東石城洞震山作主卯坐酉向」그러나 양위(兩位)의 분묘는 모두를 실호(失濩)하여 찾을 길이 없다. 언제 실호하였는지 조차 알 수 없으나 우리 족보의 창간호인 병인보(丙寅譜 : 1746년 간행)에서는 실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그 이후 260년 동안에 실호한 것이라 하겠다.
===종보4호 부록 우리선조이야기 조명근(전주시장엮임)엮음에서 가져옴===
가선대부충청병마절도사(嘉善大夫忠清兵馬節度使) 조의(趙義)
절도공(節度公)의 휘(諱)는 의(義)요 이조(李朝) 太宗 13年 서기 1384년에 경기도(京畿道) 양주(楊州)에서 출생하셨다. 시조 벽성군(碧城君)의 5세손(世孫)이고 문량공(文良公)의 현손(玄孫)이며고(考)의 휘는 희보(希輔)이시고 위로 형님 한분이 게시니 휘는 달(達)이며 공(公)은 차남(次男)으로 태어나셨다.
어머니(妣)는 정부인(貞夫人) 남양홍씨(南湯洪氏)로 정당문학(政堂文學)이였든 휘(諱) 중선(仲宣의 손너(孫女)가 되시는 분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성이 준수(俊秀)하야 학문과 무예(武藝)에 능(能)하고 효행이 지극하야 그 앞날이 촉망되는바 과연(果然) 일직이 등과(登科)하여 초직(初職)에 충청도(忠清道) 정산현감(定山縣監)을 비롯하여 사직(司直) 판관(判官) 군(郡) 부(府) 목(牧)등을 연임(連任)하시다가 치적(治跡)이우수함을 인정(認定)받아 마침내 중추부첨지사(中樞府僉知事)에 이어 충청병마절도사(忠清兵馬節度使)를 제수(除授)하시니 더욱 감격하시고 심혈(心血)을 받쳐 봉사(奉仕)하시다가 세종(世宗) 22年-(西記 1440年)에 28歲로 순직(殉職)하시매 上(상)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와 예장(禮葬)을 명(命)하시니, 충청도 천원군 광덕산 개천동(忠清道天原郡廣德山開天洞)에 묘소(墓所)를
정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개천동은 심산유곡(深山幽谷)이고 또 자손이 원거리(遠距離) 거주하야 이조(李朝) 말엽(末葉)에는 교통이 험난(險難)함으로 성묘가 소홀(疎忽)한 틈이 생겨 투장(偸葬)을 당한적이 여러번 있었고.일시 묘를 잊어버렸다.
다시 찾은 수난기(受難期)를 겪은 일이 시도기(時到記)에 기재(記載)되여 있다. 앞으로 자손들의 개심(開心)이 있어야 하겠다.
시제일(時祭日)은 매년 음 3월 3일이다.
墓所在地:忠清南道 天原郡 廣德面 寶山院里 山 149番地 1町 1反
===1984년도3월에 발간된 종보제3호에서 옮김===
정부인(貞夫人) 江陵金氏(강능김씨) 할머니
정부인 강능김씨 할머니는 절도공(節度公)의 배위 (配位)되시는 분이며 사복시(司僕寺) 정밀(正密)의 딸로 훌륭한 가정에서 법도(法度)와 규범(閨範)을 가춘 맑고 깨끗한 성품과 고매(高遲)하신 인품은 내조(內助)의 큰 기틀이 되여 공으로 하여금 마음껏 일할 수 있는 힘이 되였다고 전하여 온다.
연이나 할머니의 행복된 젊은시절은 잠시동안이 되고 말았으니
즉(即) 공께서 28세의 연세(年歳)로 순직(殉職)을 하셨다. 공의 늠늠한 기상(氣常)에 기대(期待)했든 희망(希望)이 일시에 무너지는 절망감(絕望感)에 빠저 극도(極度)의 실의(失意)와 비애를 가눌길 없든 할머니께서는 남편의 뒤를 따라 하종(下從)하기를 결심하고 음식을 전폐(全廢)하야 사경(死境)을 헤매기 여러날만에 문득 눈을 떠보니 어린 자녀(子女)들이 붓들고 어울여 통곡(痛哭)하고 있음을 보고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이르기를 「내가 이대로 죽기는 쉬운 일이나 어린 5남매의 살길이 막연(漠然)할 뿐 아니라 이 가문(家問)에 후사(後嗣)가 끊어지니 경솔(輕率)이 내가 취할 바 아니라」하시며 공의 장례(葬禮)를 모시고 5남매를 거느리고 양주(楊州)로부터 김제 죽산리(竹山里)에
이사하시니 수대(數代)만에 환고향(還故鄕)하셨다.
고향에 정착(定着)한 후 3남 2녀를 홀륭이 양육(養育)시켜 장남 이지(理智) 차남 숭지(崇智) 3남 승지(承智)는 각각 등과(登科)하여 나라에 충성을 하고 두 딸은 좋은 곳에 출가(出嫁)시켜 각기 후손이 번창(繁昌)하야 각처에 거주하고 있다.
할머니께서는 이조성종(李朝成宗) 9년 서기 1478년에 作故하시고 다음해에 전북 정읍군 옹동면전산동(全北井邑郡瓮東面全山洞)의 현묘소(現墓所)에 장례하였다. 享祠日은 每年 陰 10月 15日.
===1984년도3월에 발간된 종보제3호에서 옮김===
충청병마절도사 조의의 정부인 강능김씨 비석 묘표
금강의 남쪽이며 태인군 금산리의 동쪽인 침묘면 서쪽의 언덕에 도끼 같은 형세가 있는 곳은 정부인 강릉김씨의 체백(體魄)이 편안히 쉬는 곳이니、풍수에 좋고 길한 기운이 융융(瀜瀜)하다。
복자(卜者)가 이르기를、 『청학(青鶴)이 등지로 돌아오는 상이다。』 하니、이는 하늘이 감추고 땅이 비장하여 길인(吉人)을 기다리는 곳이다。
정부인은 충청도절도사인 김제인 조공 휘 의(義)의 배(配)이고、사복시 정인 휘 밀(密)의 여식이니、법가(法家)에서 생장하고 규수의 법절을 갖추었으며 여자로서 절도사공에 출가하여 효도로 시부모를 섬기고 공경히 남편을 반드니、종족과 향당에서 모두 그의 모범적 행위를 취하였다。
절도공이 관직에 있으면서 사방으로 돌아다일 때에 부인께서는 집안일을 주관함에 법도가 있었고
집과 공이 이어지지 않기 예문에 절도공은 빙벽(氷벽) 합을 스스로 유지하여 아름다운 영예가 전파되고 들리었으니、실상 이는 내조한 것을 의지함이 많았다。
절도공은 지위가 덕과 대칭이 되지 않았는데、하늘이 또 수명에 인색하여 五十七세에 상당(上黨:청주)의 임소에서 졸하었으니、부문(訃聞)이 임금게 들리니 슬퍼하시고 유사를 시켜서 부물(賻物)을 하사하고 천안군 서쪽 개천리 계좌의 언덕에 예장을 명하였다。
정부인이 문득 붕성(崩城:남편의 죽음)함을 만나서 마음으로 따라갈 것을 맹서하고 물과 음료를 입에 넣지 않은 지가 여러 날이었는데、공 번연(飜然)히 이 마음을 고칠것을 깨닫고 말하기를、 『약자(弱子)와 어린 딸을 누가 장차 기르는가! 어찌 차마 스스로 죽으면 조씨에게 제사하지 못할 것이 아닌가!』 하고、이에 억지로 일어나서 염하고 하관하며 장례하고 우제를 지냄을 예를 따라 하여 한이 없게 하고、이미 일을 마침에 3자2녀를 이끌고 양주에서 김제의 죽산리(이문안) 이가(移家)했으니, 선세의 옛적 터전이다.
아들을 의(義)의 방법으로 가르쳐서 문호에 성립시키고、딸은 내훈으로 가르쳐서 사위를 선택하여 출가시겼으니、아! 비색한 재액을 당기어서 태형(泰亨)의 운명으로 돌렸으니、호걸의 선비도 또한 능하기 어려운 것인데、정부인게서 능히 하였으니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선릉(宣陵:성종) 무술년(一四七八) 十二월에 졸하니 명년에 넘어와 이곳에 장사하였다。
조씨는 빛나는 명문가니、절도공의 五세로 휘 연벽(連璧)은 고려 고종의 조정에서 벼슬하여 관직이 대장군에 이르고、익조의 공으로 좌정승에 추증되고 벽성군에 봉해졌으니 벽성은 곧 김제이다。
자손이 이를 인연해서 관적을 삼았다。
고조의 휘는 간(簡)이고 호는 열헌(悦軒)이며 은청광록대부 문하시중 우정승이고 시호는 문량이며、문장과 도덕은 고려 때에 문헌공 최충으로 더불어 문묘에 제향하였는데、조선에 이르러서 사전(祀典)에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오현당의 예를 의지해서 본향에 별묘를 세우고 제향한 일이 선릉실록에 있다.
증조 휘 영회(令晦)는 판문하사 보문각직학사이고、조의 휘는 통원(通元)이니 공조판서이며、고의 휘는 희보(希甫)니 호조관서이다。 비(妣)는 정부인 남양홍씨니、정당문학 휘 중선(仲宣)의 손녀이다.
二남을 두었으니、백의 휘는 달(達)이니 형조판서이고、다음은, 절도공이니 공을 양주리에서 낳았다.
공은 천성이 영오하고 기개가 탁락하였으나、어려서부터 효도와 우에가 범인을 뛰어 넘었고、장성해서는 무과에 올라 정산현감으로 나갔으며 치적이 가장 좋으니 임금께서 가상하게 여기고 특별히 승자(陞資)하여 충청영마절도사 겸 권농단연판관에 제배하였다。
영름(英陵: 세종) 경신년(一四四0) 五월 갑자에 관사에서 졸하였다。 四남 三녀를 두였으니、장남이지(理智)는 부사직이고、차남 승지(崇智)는 부사인에 적개(敵愾)한 공으로 평고군에 봉하고 호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다음은 승신이니 일찍 졸(卒)하였고、다음 승지(承智)는 사과이고、장녀는 강화 봉유(奉紐)에게 출가시키고、차여는 호구 천안인 전윤(全贇)에게 출가했고、다음은 양주인 허규(許珪)에게 출가하었다。
이지의 남은 원정(元禎)이니 태복경이고、원우(元祐)는 직장이니 정사공신에 책록되고 참관에 추증되었으며、승지의 남은 원상(元祥)이니 진사이고、원륜(元倫)은 감찰이니 정사의 공으로 마천균에 책봉되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승지의 남 원린(元璘)은 부위이다.
五세손 시준(時俊)은 부사이니 갑란에 녹훈(錄勳)되어 풍성군에 책봉되었고、원우의 남 윤벽(潤璧)은 내금위장이며、윤박(潤璞)은 참봉이고、윤침(潤璞)은 한성서윤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학행으로 용양서원에 배향되었으며、윤규(潤珪)는 참봉이고、윤정(潤珽)은 교위이며、윤벽의 남 장집(長緝)은 만호이고 장희(長熙)는 관관이며 손자 성림(成立)은 임진년과 갑자란에 창의하고 유일로 천거되여 교관이며、영립(英立)은 만호이니、무오년에 순충(殉忠)으로 참판에 추증되었고 정려를 명하였으며、증손 용창(用昌)은 병란에 거의(擧義)하고 뒤에 효도로 정려를 표했으며、윤박의 남 설(説)은 주부이고、윤침의 남 형륜(亨倫)은 문과에 올라 찰방이고、정륜(貞倫)은 판관이며、손자 잠(潛)은 판관이고、개(溉)는 참봉이며、윤규의 남 몽간(夢簡)은 진사이고、몽득(夢得)은 관결사이며、손자 중립(中立)은 진사이고、탁림(卓立)은 부위이며、윤정의 남 대붕(大鵬)은 참봉이니 사복시 정에 추증되었고、손자 유정(惟精)은 참봉이니 좌승지에 증직되었으며、현손 필달(必達)은 통제사이고 청백에 녹선되었으며、나머지는 기록하지 않는다。
아! 절도공은 기절(氣節)과 포부가 있었는데、중도에 졸서하여 의지를 퍼지 못하였고、정부인은 단일하고 정수하고 순전하였는데 어려운을 만나서 일찍 졸하여 그 보답을 받지 못한 것 같았으나、그러나 자손이 창대하고 문무로 현양(顯揚)하였으며、혹 공훈이 있어서 정려에 표하고 사실과 학식을 좇아 조두(组豆)에 배향되었으며、천도의 보시가 이와 같음이 있으니 가히 착합의 행위로 오늘을 권한다.
그 후손 한종(漢鐘)이 세적(世德)을 잘 기술할것을 생각하고 널리 국사와 야승을 상고하여 가장을 만들고 나를 찾아와서 수도(隧道)의 문을 청하였으니、삼가 개괄하여 위와 같이 썼다。
===2018김제조씨 대동보에서 옮기다.===
죽서공 위 응헌비문(竹西公諱應巘碑文)-12세손
공의 휘는 응헌(應巘)이고 자는 자첨(子瞻)이며 호는 죽서(竹西)이니、고려의 명상(名相) 문량공 휘 간(簡)의 十세손이고、九대조는 보문각직학사인 휘 영회(令晦)이며、八대는 공조관서 휘 통원(通元)이고、七대는 호조판서 휘 희보(希甫)이니 문학정당인 홍증선(洪仲宣)의 손녀에게 장가들었으며、六대는 정산현감인 휘 의(義)니 사복 김밀(金密)의 여식을 취(娶)하였고、五대는 부사직인 휘 이지(理智)니 지평 홍령(洪齡)의 여식을 취(娶)하였으며、고조는 훈련참군인 휘 원우(元祐)니 자는 필경(弼卿)이고 병조관서 박인석(朴仁碩)의 여식을 취(娶)하였으며、증조의 휘는 윤침(潤琰)이니 자는 가헌(可獻)이고 호는 백천당이니 여산군 송익(宋益)의 손자 련(璉)의 여식에게 장가들었고、조(祖)는 평름도찰방인 휘 형륜(亨倫)이니 자는 천서(天敍)이고 문안공 이희맹(李希孟)의 아들 찰방 종(鐘)의 여식에게 장가들었으며、고(考)는 내섬시 판관인 휘 잠(潛)이니 자는 현경(顯卿)이다。
비(妣)는 가평이씨 지평 여주(茹舟)의 여식이고 가성군 철근(鐵根)의 현손이다。
공은 일찍이 학문을 하고 남는 시간에 문장을 하였다。 나이 二十九세인 경술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니、여러 번 대성(호省)의 천거에 올랐으나 간록(干祿)에는 뜻이 없고 안반(安貧)을 스스로 즐기었으며、七남 一녀를 두었으니 재예(才藝)가 모두 일대(一代)의 머리가 되었으니 당시 사람들이 조씨의 침룡(七龍)이라 하였다。
장남의 휘는 필대(必大)니 별제 김구(金遴)의 여식에게 장가들었고、二남의 휘는 필하(必夏)니 진사 김래복(金泰福)의 여식에게 장가들었으며、三남의 휘는 필태(必泰)니 진사 김관(金灌)의 여식에게 장가들었고、四녀는 선비 이상구(李尚久)에게 출가했으며、五남의 휘는 필수(必受)니 참의 신언호(申彥浩)의 손자이고 상급(尚级)의 여식에게 장가들었으며、六남의 휘는 필후(必後)니 군수 김민학(金敏學)의 여식에게 장가들었고、七남의 획휘 필중(必重)이니 부사 홍이성(洪頤性)의 여식에 게 장가들었으며、 八남의 휘는 필제(必濟)니 도사 김감(金堪)의 여식에게 장가들었다。
공은 만력 十년 임오년(一五八二) 十二월 十四일에 출생하고 계사년(一六五三) 七월 十六일에 졸 하였으니 향년이 七十二년이고、배(配)는 진주소씨 증병조판서이고 행직으로 찰방인 만선(萬善)의 여식이고、감사 동도(東道)의 누이니、을유년(一五八五) 十二월 十二일에 출생하고 무신년(一六六八) 三월 二十六일에 졸 하였으니 향년이 八十四년이고、태인 고천에 합폄하였는에 묘소가 붕괴하여 태인 동지면 호동 해좌의 억력에 이장하였고、그리고 옛적에 세운 단갈(短碣)은 아직 새기지 않았기 때문에 불초 증손 여재(汝載)가 삼가 기록하였다。
승정 기원후 一一九년 병인년(一七四六) 四월 0일에
불초 현손 성진(聲震)은 삼가 글씨를 쓰고、도유사는 불초 현손 항진(恒震)이다。
호계공 위 필태행록(虎溪公諱必泰行錄)-13세손
공의 휘는 필태(必泰)요 자는 내보(來甫)니 천성의 효성이 지극하여 마음을 봉양하는 절차와 감지(甘旨)로 받드는 것을 사람들이 흠모(欽慕)하게 되여 유림에 공의(公議)가 향천(鄉薦)과 도천(道薦)에 까지 이르니 공이 증론(衆論)을 힘써 배제하고 감히 감당치 못할 혐의적은 것으로 자처를 하니 중론이 중지되었다。 사랑하는 날에는 하늘에 대신하기를 빌고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들이었으며 상고를 만난 튀에는 모려(墓廬)에서 三년을 마치니 원근 사람이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임금님에게 정문을 청하자는 의론이 여러 번 발하였는에 공이 그 자질(子姪)로 하여금 그 유론(儒論)을 굳건히 말리어 거행하지 못하였으니 그 본심이 순수하게 소박하여 천양되지 않고자 하는 것을 가히 보겠으니 그 세상에 탁월한 행적을 가히 알겠다。
백천당의 독학지업(篤學之業)과 족서공의 역행지절(カ行之節)을 공이 과연 승습하였고 공이 실로 사모한 것인데 또 문장이 풍부하였다。 향해(鄉解)에 十二의 법식이 있는데 형제 六명이 다 十차에 나갔으나 마침내 성균방(成均榜)에는 들어가지 못하니 그때 사람이 애석하게 여기었으니 후손의 개한(慨恨)이 어떠하겠는가。
인조대양계서 특별히 인견하시여 세상에 탁월한 재주가 마침내 태학반(太學班)에서 누락된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인해 호계(虎溪)라는 당액(堂額)을 주시었다。 태인현 동쪽에 과연 호계가 있는데 일가는 사람이 지금까지 지점(指點)하는 것은 대개 공의 옛날 집터이다。
본현에서 백장군 광언(光彦)의 모층사(慕忠祠)를 창건할 때 공으로 배향하자는 의론이 일어나 거이 상(上)에게 아뢰자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공의 제四자 상의(相宜)가 그 문무가 같지 않은 것을 혐의하여 힘써 저지하므로 시행하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도내유림(道内儒林)이 같이 전하면서 탄식하는 바이다。
유지(遺誌)를 널리 채택하고 실적을 대량 기록하여 민멸하지 않는 의론이 정립되기를 기다리노라。
===명나라 갑신년에 뒤 三무인년 七월에
족 현손 영선(永善)은 삼가 기록함===。
백천당 선생 조공 휘 윤침 묘갈명(百千堂先生趙公諱潤琰墓碣銘)-9세손
중종 조정의 문치(文治)는 예전 시절의 다스림보다 훨신 나았으나、모든 유현(儒賢)이 사도(斯道)를 천명하여 성대한 세상이라고 부르짖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여 세상의 모법이 되고 부지런히 위기(爲己)의 학문을 하는 자는 오직 백천당 선생 조공、휘는 윤침(潤L)이고 자는 가헌(可獻) 뿐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천자(天資)가 특수하고 용모는 우아하여 억연(嶷然)히 노성(老成)한 사람 갈았으니、희롱함을 좋아하지 않았고 손에서 책이 떨어지지 않았으며、어버이를 섬기고 선조를 받드는 예절과 형제간에 우애하는 절차가 일체 소학의 의범(儀範)을 따랐고、인사(人士)를 대하면 반드시 충선(忠善)으로 깨우치게 하였으니、비록 비복이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무흘(撫恤)하고、사람을 인솔함에는 따뜻하고 인자하게 하였으며、정성을 들여서 연마하고 조용히 물러나서 문달(聞達)함을 구하지 않았다。
기묘년 북문의 사화가 일어나서 문정공 조정암 등 제현들이 적거가 되고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종일 슬픈 마음이 그치지 않았으니、그의 학문은 정주(程朱)를 독신(篤信)하고 의리를 강구하며 확연하게 도를 즐거워하면서 주야로 힘쓰고 진취해서 현인이 되는 것으로 기약을 삼았고、그 사이에 문성공 목은 선생의 글을 읽고 말하기를 「우리 선조는 두 현인으로 더불어 교유하면서 사전(思傳: 증용)을 취하여 간질히 갈고 닦음이 백 번이고 천 번이 된다는 뜻으로 그 당(堂)에 편액하기를 「백천(百千)」이라。』 하였으니、그의 독학(篤學)하여 힘씨서 실천하는 뜻을 실제로 볼 수가 있다。 자사(刺史: 감사)가 명경(明經)과 행효(行孝)로 조정에 천거하여 왕께서 돈소(教召:왕이 신하를 간곡히 부르는 것)하고 한성서원을 제수하였다。 그러나 공은 효효(囂囂:자득하여 욕심이 없는 모양)히 진취할 뜻이 없었고、초연히 홀로 영화와 공명의 밖으로 나와서 심리(心理)의 설에 침잠하고 그 심오한 곳을 반복하였으니、진실로 타인이 엿보고 해아릴 바가 아니었다。향리의 사람으로 덕의에 훈도되여 일을 따르는 자는 숙사(垫舍) 를 용납하지 않았으니、그의 백성을 교화하여 풍속을 이루는 풍화가 어찌 성대하지 않은가!
삼가 상고하건대、김제조씨는 벽성군 휘 연벽(連璧)에서 시작하였고、고려에서 문하시종이고 우정승이며 시호 문량(文良)인 휘 간(簡)은 용암사에 제향하고、보문각직학사인 영회(令晦)를 낳았고、학사가 관서 통원(通元)을 낳았으며、고조의 휘는 희보(希甫)니 호조판서이고、증조의 휘는 의(義)니 정산현감이며、조(祖) 이지(理智)는 사직이고、고(考) 원우(元祐)는 참군이며、비(妣) 박씨는 판서 인석(仁碩)의 여식이니、공을 성종 七년 병신년(一四七六)에 낳았고、인종 을사년(一五四五)에 졸하였으며、태인 옹지면 가전 경향(庚向)의 언덕에 장사하였고、배(配) 송씨는 층의위 련(璉)의 여식이니、묘지는 공과 합부(合袝)하였다。 二남 四녀를 두었으니 장남 형륜(亨倫)은 찰방이고、다음 정륜(貞倫)은 판관이며、四녀의 사위는 김복(金福) · 정후주(鄭後周) · 김자명(金自明) · 성세덕(成世德)이다.
아! 공의 학문을 좋아하고 착함을 즐거워하는 마음은 천성에서 나았으니、뜻을 돈독하게 하고 실천하며 수신제가의 도를 강명(講明)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이치를 연구하여 사림의 표준이 되었다。 그러나 여러 번 변화를 거치고 세월이 오래되여 인멸(湮滅)되어서 선행과 선적을 다시 고증할 수가 없다。
문간공 기정진(奇正鎮)이 말하기를 『경화(更化)의 처음에 사람들은 모두 세상을 위해 일하려 하였으나、공은 홀로 세 번 불러도 일어나지 않고 숨어서 삶을 좋아하였다。』 하였고、
숙제(肅齋) 조병덕(趙秉德)이 말하기를
『도를 즐김이 확연하고 개석(介石) 의 지조가 있으니、누가 흡양하여 흉기하지 않했는가!』 하였고、봉곡(鳳谷) 김동준(金東準)은 말하기를 『자제를 가르침은 반드시 임금게 층성하고 어버이게 효도하는 행실로서 하고 사우를 교섭함에는 반드시 책선(責善)과 강도(講道)하는 방법으로 하였다。』 하였으니、이에 위의 및 사람 군자의 말씀은 하나의 깃털을 보고 그 전체의 봉(鳳)을 아는 것과 같을 것이다。
철종 十四년 계해(癸亥、一 八六三)에 향유(鄉儒)들이 공의 덕을 흠모하여 용암사에 추향(追享)하였으니、이는 백세로록 공론이 없어지지 않음을 보인 것이다。
공의 十四세손 찬신(燦信)이 선조를 사모하는 정성으로 자신의 재물을 연보하여 민식(珉石)에 각하고 묘도를 내고 여러 번 묘문을 진선(鎭璇)에게 청하였다。 진선은 후생으로 학문이 엷으니 어찌 감히 그 사이에 췌설(贅説)을 하겠는가! 사양하였으나 승낙을 받지 못하였고、드디어 서문을 쓰고 그를 위하여 명(銘)을 한다。
아! 문량은 경술(經術)로 파란 일으켰고
보물과 양을 돕는 계책 승국에 천양했다네。
벼슬아치 연속하여 잇고 이었고
하늘이 이 도를 도와 선생께서 나왔다네。
뜻은 낙민(洛聞) 에 두고 사전(思傳)의 공 배가 되었네。
널리 배우고 상세히 물음을 부지런히 하여 게으르지 않았다네。
몸을 닦고 집을 다스리고 덕을 임하에서 길렀다네。
책을 쓰고 종유하였으나 강당은 허용하지 않았네。
졸렬함을 지키고 참을 보존하며 행의가 상달하였다네。
세 번이나 부른 돈소(敦召)함을 공은, 개의하지 않았다네
왕은 잘한다 말하고 서윤을 주여 시험했다네。
공 또한 감개하여 마음을 따름이 둘이 아니라네
아! 착한 자취 이미 불탓으니 어찌 있겠는가!
누가 능히 나타냈는가! 노사(蘆沙) 기정진이라네
숨어 삶을 좋게 여기고 그 공부 백번 천번 했다네。
번성한 자손들 힘써 배우고 입방(立防) 했다네
나는 묘문에 아부하지 않으니 이 석조의 행장을 상고하시라。
===정사년 입훈의 절서에
나주인 나진선(羅鎭璇)은 삼가 찬(撰)하다。===
문량공 簡 행적 (2世)
(文良公 簡 行蹟)
공의 휘는 간(簡)이요 자는 자삼(子三)이며 호는 열헌(悅軒)이요 시호는 문량(文良)이다. 고(考)의 휘는 연벽(連璧)이니 고려 고종때 대장군으로 김제에 거주하였는데 후일에 좌의정을 증직하였다.
어느날 밤 꿈에 백의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나는 벽골제(碧骨堤)의 용이다. 명일 남쪽에서 오는 흑룡이 나의 소혈을 뺐으려고 하니 바라옵건대 공은 내일 아침 일찍이 와서 구하라 하였다.
꿈을 깨고 나서 마음에 심히 괴이하게 여기어 궁시(弓矢)를 가지고 새벽에 벽골제가에 이르니 얼마 후에 조각구름이 남쪽으로부터 이르더니 뇌우(雷雨)가 대작하여 제방물이 움직이고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공이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오직 기회만 기다렸더니 홀연 검은 비늘이 수상으로 노출하거늘 공이 정신을 가다듬어 활을 쏘니 검은비늘이 땅에 떨어졌는데 큰 쟁반 같았고 붉은 피가 물가에 가득하여 비가 날리는 것 같았는데(아경俄頃) 잠시 후에 바람이 고요하고 물결이 그치어 하늘은 푸르고 해는 밝았다.
밤 꿈에 또 노인이 와서 말하기를 공의 정대한 기운으로 굳센 활을 한번 발하여 저 요물을 쫓아버리고 나의 거처를 영구히 편안하게 하여 주었으니 공의 은혜는 보답하기 어렵습니다.
반드시 자손의 흥기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더니(송나라 경정(景定)이고) 고려 원종(元宗)五年 갑자에 [단기 三五九三年] 公이 과연 출생하니 모골(毛骨)이 범인과 다르고 등 위에 용의 비늘 七점이 북두성의 모양같이 벌려있고 두 어깨에 껍질이 있어 그때 사람이 크게 이상하게 여기어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벽골제의 용의 정기라고 하였다.
나이 겨우 五六세에 괴화나무에 올라가서 잣는데 읍재(邑宰郡守)가 낮잠을 자다가 나무 위에 쌍룡이 설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잠을 깨어 사람을 시켜 알아보고 즉시 권하여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사람이 시귀(詩句)를 불러 가로되
벼루 위에 검은 구름은 붓을 휘둘은 뒤에 일어나누나(硯上黑雲揮筆後)라 하니 공이 소리를 응하여 가로되 뜰 앞에 붉은 비는 꽃 떨어질 때 내리도다.
(庭前紅雨落花時) 라고 하니 원근의 듣고 본 사람이 그 신기함을 탄복하였다.
가정이 본래 청한(淸寒)하였고 어버이에 효하고 어른에게 공경하여 남은 힘으로 글을 배워 문장이 이에 대성(大成)하였다.
충렬왕 원년에 [三六○八] 여자 무당이 하나 있어 요신(妖神)을 받들고 협주(陜州)로부터 군현(郡縣)을 지나가는데 사람들이 다 분주하게 서로 다투어 제를 올리었다.
공이 이것을 듣고 말하기를 세상길이 그릇 되었구나 무당의 화가 홍수(洪水)보다 더한데 무당을 없애고 요신을 불태우는 사람이 없으니 어느 곳에서 공도보(孔道輔)같은 사람을 얻겠는가 하였다.
무당이 상주에 이르니 판관 안공 향(珦)이 장형(杖刑)을 하고 가두어 놓았다.
들은 자가 다 말하기를 공의 정대한 기운이 노성인(老成人)과 서로 부합한다고 하였다.
장성하기에 미처서는 여러 사람보다 뛰어나 기위(奇偉)하였고 독실하게 배우고 힘써 행하여 사문(斯文)의 책임을 몸소 맡았다.
나이 十六으로 고려 충렬왕 [宋祥興때] 五년 기묘 六月十一日정해에 장원급제에 올랐고 명년 경진 五월계묘일에 충렬왕이 시부(尸賦)로 문신(文臣)을 친히 시험을 보이었는데 공이 또 제일(第一)이어서 황패(皇牌)를 주시고 내시(內侍)에 관적(官籍)을 두었으며 인해 거주하는 땅을 용두동(龍頭洞)이라 하고 또 거처하는 당을 열헌(閱軒)이라고 하였다.
여러번 보궐로 옮기어 후학을 이끌어 진출시키어 세상의 종주가 되었다.
공사에서 물러 나오면 반드시 의관을 정제하고 서적을 친히 열람하였으며 매양 안공 향(安公 珦)의 문하에 출입하여 안공이 항상 정학(正學)이라고 추장(推獎)하였다.
동방(同榜)인 김공 순(恂)과 이공 진(瑱)과 권공 박(搏)과 더불어 교계(交契)가 날로 깊어 민폐를 제거하고 학교를 흥기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으로 하였다.
공이 외지에 있을 적에 서신을 보내어 권공에게 주자사서 집주(朱子四書集註)를 간행하라고 권하였다. 동방의 성리학(性理學) 이이로부터 비로소 전해졌다. 충렬왕 十四년 무자 여름 四月二十四日 무인에 궁중의 꽃이 성개하여 왕이 군신(群臣)과 더불어 향각(香閣)에서 잔치를 하는데 공이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신곡(新曲)을 지어 바치었는데 전리정랑민공지(閔公漬)와 좌부승지 안공 향(珦)이 또한 지어 올리어 악부(樂府)에 넣으라고 명하여 三학사곡이라고 칭도하였다.
부상(父喪)을 만나 여묘(廬墓)삼년에 슬픔과 예절을 함께 다하니 충렬왕이 아름답게 여기어 정문(旌門)을 명하고 특별히 기거주유 첨의사인을 제수하였다.
경상도 안염사로 나가 있을 적에 안동 영호루(映湖樓)에 시를 써서 가로되
이 누각의 풍경은 사람을 고달프게함이 많구나. (此樓風景腦人多)
팔영 상계의 경치인들 이것보다 더하라.(八詠雙溪不敢加)
기개는 초동목수의 길을 그림자가 사귀고(旗蓋影交樵牧路)
현성은 아전과 백성의 집에 소리가 떨어지네(管絃聲落吏民家)
공중을 넘는 첨아가 넓으니 피부에 소름이 생기고(跨空豁膚生栗)
물에 비치는 마루가 높으니 눈이 어지러워 꽃이 피네 (照水軒危眼現花)
옥도끼로 다듬어 광한전을 수성하였으니 (玉斧修成廣漢殿)
표연히 선차에 오른 듯 의심이 아니 나누나(飄 然不訝僊槎)라고 하였으니 당시 재자(才子)가 문장의 대가라고 칭찬하였다. 二十四年 대덕(大德) [元나라 처음 황제의 연호] 무술년 [단기 三六三○] 八월 갑술일에 공이 총랑으로 선법(選法)을 주간하였고 二十七年 신축 五月무진에 공이 좌부승지로 지공거(知貢擧)가 [都試官] 되었고 五월 기묘일에 좌간의 우승지로 제수되어 새로 급제된 사람을 인솔하고 수영궁(壽寧宮]으로 나가 왕을 뵈우니 王이 공으로 전시문생을 하고 마루에 임하여 잔치를 내리었다.
六월 을미일에 왕이 공으로 하여금 국학박사를 고시하여 능히 六經을 통하는 자를 하여금 품질을 옮기게 하니 시험보는 자가 겨우 일이경(一二經)을 통하는고로 다 서용(敍用)을 하지 못하였다.
가을 七월 신축일에 밀직부사로 제수되었는데 불교를 배척하고 유도를 숭상할 것을 힘써 진달하였다.
충선왕 원년 五월 신묘일에 왕이 관호(官號)를 바꾸어 놓는데 공으로서 형조시랑 우간 의대부를 제수하였으며 같이 제수된 자는 조공 인규(仁規)와 안공 향(珦)등 三十 여인이다.
이때 내료(內僚) 이지저(李之氏 )가 양부관으로 제수되었는데 공이 고신장(告身狀) [사령장]을 쓰지 아니하였다.
왕이 공을 불러 말씀하기를 대관 하나가 경에게 감정을 가지고 있으니 경은 삼가라 하였다. 상흥(祥興) 三十七年 정미 三월 신묘일에 왕이 원나라에 있으면서 김문연(金文衍) 김유(金濡)등을 보내어 밤에 순군부로 들어와 비준(批准)을 [신하가 제출한 문서에 임금이 可不를 결정하여 허가하던 일] 선포하고 공으서 우상시를 하였다.
무신년 四월 병인일에 공과 허공 유전(有全)에게 명하여 그때 일을 진언하게 하니 무릇 허물과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즉시 소(蔬)로 임금께 올리었다.
계축년 三월 신해일에 안공 우기(于器)와 더불어 같이 밀직부사가 되었다. 충숙왕 원년 갑인 六월 경인일에 공이 평리(評理)로서 찬성 권공 박(薄)과 도감사(都監事) 이공 진(瑱)과 삼사사(三司使) 권공 한공(漢功)과 밀직 안공 우기(于器)와 더불어 성균관에 모이어 강남의 신구서적 一만 八백권을 상고하고 또 경학(經學)을 시험보았다.
공이 유도를 숭상하고 백성을 구제하여 정신을 가다듬고 선치(善治)를 도모하여 대가(大駕)가 환궁하시기를 기다리어야 한다는 말씀을 진달하니 王이 눈물을 흘리어 가르되 경들의 말씀을 청종(聽從)하는 것으로 임무를 하겠다고 하였다. [충선왕이 이때 人質로 元에게 납치되어 돌아오지 못하고 世子忠肅과 大臣에게 治政을 맡기었다.] 경신년 十二月에 상왕이 [충숙왕이 즉위하여 충선을 上王으로 모시었다.]
토번(吐藩)에 있었다. 환관 및 좌우(左右)가 옛정치를 회복하기를 도모하여 [崇佛정치] 구신(舊臣)을 시골로 방축하고 창고는 다 고갈되었다.
전영보(全英甫)의 아우 중산지(山枳) 및 오불로(五佛老)등이 백안 독고사에게 붙어 벌떼같이 일어나 난(亂)을 부채질하였다. 이때 공이 김제구거(金堤舊居)에 물러나 쉬고 있다가 이공 진과 허공 유전에게 서신을 보내어 서로 의논하고 계획해서 간사한 요물들을 쓸어 쫓아버렸는데 얼마되지 아니하여 공을 불러들이었다.
신유년 가을 칠월에 상왕이 토번 독지리에 이르러 공과 최공 유감 권공 박과 허공 유전에게 글을 붙이어 가로되 내가 운수가 기구하여 이런 우환(憂患)을 만나게 되어 만五千里를 발섭(跋涉)하였다.
지나간 날 토번이 우리 사직을 욕되게 함이 지극하였다.
잠자리에서는 벼개가 편안치 못하고 음식을 대하면 맛을 알지 못하겠도다.
모든 국노(國老)의 노심하는 심사를 생각하니 황괴한 마음이 더 하도다.
국왕이 나이는 젊고 아는 것은 없으니 지난날 나를 꺼리던 군소(群小)배가 반드시 내가 이같이 된 것을 다행이 여기어 그 간교(奸巧)한 수단을 발사하여 우리 부자(父子)를 이간질할 줄 어찌 알으리.
다행이 모든 국노들은 동심협력하여 제(帝)에게 자주 아뢰어 나로 하여금 속히 돌아가게 하라 하였다. 이에 허공유전과 민공지들을 쫓아 원나라로 가서 왕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주기를 청하였으나 심왕당(瀋王黨)의 저지한 바 되어 마침내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공이 가로되 하늘이어 하늘이시어 어찌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는가 하고 계속 눈물을 흘리었다.
十一월에 상왕이 공과 최공 유감과 권공박과 배공 정(裵公挺)과 이공 진과 허공 유전과 김공거(金公琚)에게 서신을 보내어 가로되 내가 十月十六日에 토번 산사곁에 도착하였도다. 제(帝)가 나의 환국을 하락했다는 것을 들은 것 같으니 그 말이 만약 사실이라면 공등은 염려할 것이 없다.
그렇지 않다면 유청신과 오잠의와 더불어 고왕이 성무제에게 원왕이 세황에게 솔선귀부(率先歸附)하여 운을 돕고 공을 세웠으며 선고 충렬왕이 공주를 왕비로 맞이한 것과 나 역시 제실(帝室)에 작은 공로가 있다는 것으로 제에게 표문을 올리어 청하고 승상에 아뢰어 나로 하여금 이곳에 오래 있지 않게 해달라고 하였다. 공이 상황을 청환하는 것으로 자기의 책임을 하였으니 권한공(權漢功)의 저지한 바가 되었다.
二년을 지난 계해년 정월에 이등을 보내어 원나라로 가서 상왕을 소환하기를 청하였다.
二월 무자일에 타사마의 땅으로 헤아리어 옮기라고 명하였다. 六월 정사일에 원나라 진왕(晉王)이 제위(帝位)에 나가 천하를 대사(大赦)하고 상왕을 소환하였다.
갑자十一年 춘정월 갑인에 제가 상왕에게 칙서를 내리어 여장(予章)으로 돌아오게 하니 다 공의 힘이다. 공이 평양 부벽루에 시를 써 가로되
태평 세월에 어가가 동방으로 돌아 오고자 하시니(太平車駕浴東還)
금벽은 거듭 금수강산에 빛나누나(金碧重輝錦繡山)
달을 뚫는 노 젓는 소리는 탑우에 연하였고(穿月棹聲連榻上)
공중에 등불의 그림자는 물결사이로 떨어지네(掛空燈京落波間)
은 빛이 흐르는 여울에 낚시질하는 늙은이는 고기와 같이 즐거워하고(銀瀾鈞叟 魚同樂)
푸른봉우리 둘러싼 속에 신선같은 중은 학과 같이 한가하누나(翠嶂 仙僧鶴空閒)
이곳을 대하여야 민약 많고 적은 경치를 논할진댄(對此若論多少景)
남빈과 팔영이 다 안색이 없으리로세(南濱八詠摠無顔)이라고 하였다.
五月 임신일에 공이 최공 유감과 더불어 백관군민(百官軍民)을 인솔하고 글을 붙이어 중서성(中書省)에 올리어 가로되 본국이 일본과 더불어 멀지 아니합니다.
청하옵건대 국왕으로 하여금 일찍이 본국에 들어와 백성을 편안히 무마하게 하소서라고 하였다. 상왕이 연저(燕邸)에서 흉(兇)하기에 공이 북망통곡하여 몇 번 까물어졌다가 이에 소생하였다.
공이 이미 늙었는데 단저(癉疽)가 [악성종기] 나서 어깨와 목을 분간 못하게 되었다.
의승(醫乘)이 있어 가로되 병이 뼈에 부리가 밖혀 뼈가 반은 썩었으니 긁어버리지 아니하면 고치지 못하겠는데 오직 참지 못할가 두렵도다 하거늘 공이 가로되 죽는 것도 같으니 한번 시험해보라 하였다.
예리한 칼로 긁어내고 약을 붙이니 기절하여 혼명(昏冥)한지가 二일이나 되었다. 王이 사람을 보내어 문병하였고 상락군 김순(金恂)이 가서 문병을 하고 울기를 말지 않거늘 눈을 돌리고 사람을 시키어 말하기를 공이 가서 말하기를 공이 나를 이같이 만망이 여기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어찌 마음으로는 기뻐하면서 안색에만 슬퍼하는 것이 아닌가 순이 가로 되 이것이 무슨 말씀인가. 五十년 동년계(同年契)가 어찌 정이 없다고 하겠는가 하니 공이 가로되 내가 죽으면 방중(榜中)에 먼저 말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니 순이 눈물을 거두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은 자네가 죽지는 아니 하겠다 라고 하였다.
영명사(永明寺)에서 시를 써서 가로되 가벼운 배를 타고 승사를 찾고 하였다가(擬慾經舟訪僧寺) 미친 노래로 취해 춤추면서 중류에 흘러가네(狂歌醉舞流中流) 대앞에 물결이 조용하고 아름답게 움직이는 것은 일강(一江)의 얼굴이요(臺前瀲 灩一江面) 섬 밖으로 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것은 천산(天山)의 머리로세(島外出沒千山頭) 흥이 많은 유자(遊子)는 말이 시끄럽고(與多遊子語擾擾) 도가 높은 늙은 중은 말씀이 상양하구나(道古老衲言休休) 월암봉 위에 한 둥근 달은(月巖峰上一輪月) 사람 사람과의 지금과 옛근심을 비춰 파해주누나(照坡人人令愁)라고 하였다.
이어서 밀직학사 진(瑱)의 시에 가로되
부모를 간즈러히 경사로 함께 모신 것은 드믈게 보고 듣는 것이며(俱慶提衡罕見聞)
어진 아들 얻는 것은 옛날 용문에 오를 때보다 도리어 낫도다(得賢還勝舊龍門)
술잔 가운데 수를 송축하는 것은 가이 거듭거듭 볼것이지(觴中壽可重重見)
당우에 어버이는 다 두분두분 생존하시었네(堂上親皆兩兩存)
어느해에 난손의 향취가 습복할 것인가(幾歲蘭孫香襲馥)
일번에 도리는 비로소 번화하에 열렸구나(一番挑李始開繁)
열헌의 기쁜 기상은 어찌 용납하여 다 말하리(悅軒喜氣邦容說)
사람의 길에는 갑과에 합격된 손자를 새로 더했도다.(人道新添甲科孫)라고 하니 한자리에 있었던 인사들이 다 칭선하였다. 은청광록대부 밀직제학 검교첨의 평리 찬성사를 역임하고 문하시중 우정승을 더하고 치사(致仕)하여 [나이가 많아 벼슬을 그만두는 것] 별장으로 돌아가서 제생(諸生)과 더불어 경전(經傳)을 강론하고 충효를 권면하니 당시 사대부가 염락(濂洛)의 의취(意趣)가 있다고 다 칭송하였다. 을축년 겨울에 돌아가니 시호는 문량공이다. 가정 이공곡(穀)이 용두동을 지내가다가 시를 써서 가로되
우연히 장원 방속을 향하여 걸어가니(偶向壯元坊裏行)
옛거처하던 곳에 저녁해가 앞기둥으로 들어오네(舊居斜日入前楹)
장옥에서 군용과 싸울 때는 매양 장원을 하였고(每魁場屋群龍鬪)
잠영중에서 하나의 독수리가 가로질러 나는데는 독보이었지(獨步簪纓一顎橫)
세상을 싫어해서 공은 일찍이 병락으로 돌아갔었지(厭世公曾歸擘落)
이웃을 찾아서 나는 황정을 깍고자 하였네(卜隣吾欲斷 黃精)
지령 인걸이란 옛 말은 견디어 믿을만 하구나(地靈人傑言堪信)
공경대부가 끝없이 연속해서 낳는 것을 보리로세(看取公卿哀哀生)라고 하였다.
저헌(樗軒)공 석형(石亭)이 가정(稼亭)의 장원방 운(韻)을 따서 시를 지어가로되(世祖十二年丙戌년에 李公이 八道禮察使로 김제를 순찰하였다]
장원방속에 장원이 가니(壯元坊裏壯元行)
고목이 소삼하여 작은 기둥이 그늘속에 있구나(古木蔬森陰小楹)
운한이 문채를 나누니 해빛이 쏘이고(雲漢分章日光射)
산천이 수기를 길러 그 기운 가을에 가로질렀네(山川毓秀氣秋橫)
학해에서 능함을 다투니 문용을 내적하였나(爭能學海文龍敵) 사림에서 재주를 싸우니 각호의 정신이로세(戰藝詞林角虎精) 천년후에에서 여풍을 길이 읍하고(爭揖餘風千載下)
높이 읊조리며 홀로 서 있는 한 서생이로다.(高吟獨立一書生)이라고 하였다.
뒷날 사림에서 조두(俎豆)로 봉향하자는 이론이 있어서 우리 문종대왕때 봉소지론(封疏之論)이[소장을 임금께 올린 것] 있었는데 바로 임이 승하하시어 이루지 못하였고 우리 성종대왕 성화 二十四년 무신에 유림의 의론으로 인하여 대제(大提) 서화령 아래 용암 서쪽가에 三간 사우(祠宇)를 짓고 춘추로 제향을 받들었다.
그 뒤 병란으로 소탕되었는데 우리 선조대왕(萬歷三年乙亥)에 유림의 소청이 있어서 중창하였고 그후 광해 四년 임자五월에 읍내 성산아래로 이건(移建)하고 묵암(墨巖) 이선생 계맹(繼孟)과 건계(建溪) 나선생 안세(安世)를 추향하였다.
===김제조씨 종보 제4호(2006.12 회장 조철권 편집 조명근)에서 옮겨옴===
月村趙漢栢先生紀績碑撰
21世 四選 國會議員 遞信部長官
趙漢栢 紀績碑文 忠臣派
先生의諱는 漢栢이요 號는 月村이며 本貫은 金堤이다.
高麗大將軍碧城君이신 諱連壁이 始祖이며 資憲大夫户曹判書인 諱希輔는中祖요 壬亂倡義忠臣이신 諱英立은 顯祖이다.
高祖의 諱는 完成이요. 諱章奎는 曾祖이고 祖는 諱學默이며
考諱斗鉉과 妣扶寧金氏의 獨子로 西紀一九〇八年 成申三月三十日 金堤市明德洞二五五番地에서誕生하었다.
先生은 天性이 醇厚 英敏하고 才氣가 過人하였을 뿐만아니라 德行이篤實하고 行誼가 重厚嚴正하며 또한孝友가 敦篤하여 鄉方의 師表이기도 하였다.
青雲의 뜻을 품고 全州師範學校 卒業後 十七星霜을 後學育成에 獻身하었고 倭政治下朝鮮語教育廢止事件에 抗拒하면서 教職을 自退하였다.
祖國光復以後 初代國會議員으로 政界에 投身 憲法을 制定하고大韓民國民主政府樹立에 重要한 役割을 하였고 財經分科委員長職에 있을 때 처음 열리는 韓美經濟會談에서 많은 經濟援助를 얻어 냈으며 農村振興을 위한 農地改革法과 糧穀買上法等 韓國經濟發展의 기틀을 다지는데 卓越한 力量을 發揮하였다.
先生은 制憲議員을 비롯하여 第四, 五, 七代의 四選議員으로 政治發展에 功續이 많았으며 韓民黨組織部長, 國民黨幹事長, 民主黨總務組織部長, 新韓黨運營委員長, 新民黨副總裁等 三十餘年間의 政治活動을 하면서 志操가 굳건하고 信義가 높으며 毅然하고 清백한 品位와 人格은 與野를 떠나 政界의 龜鑑이 되어왔다.
波瀾萬丈한 迂餘曲折의 政局에서 傳統野黨의 旗手로 反獨裁民主化闘爭의 先峰이 되어왔던 先生의 事績은 韓國 民主化를 이끌어왔던 原動力이 되었다.
遞信部長官 在職時에는 많은 鄉人의 就業幹旋과 社會進出에 對한 先導的役割은 他人不及이요 愛鄉心없이는 不可能한 일이었다.
先生은 언제나 따스하고 多情多感하면서도 外柔内剛責 任感있는 性品과 公義를 앞세우는 生活信條로 孤高한 老節을 보내 後進들의 師表가 되었다.
五十年만에 이루어진 政權交替의 喜悦을 합게 나누시지 못하고 哀惜하게도 九十歲를 一期로 一九九七年三月十八日에 逝去하여 先塋下에 安葬하였다.
平素 先生을 敬慕하는 後進들과 金堤人이들이 뜻과 精誠을 모아 頌德의 紀績碑를 建立하게 된 것이다.
===김제조씨종보 제3호 2001년2월 발간에서 옮김===
☛金堤趙氏의 來歷☚
-始祖 : 趙連璧
-本貫 : 金堤
김제조씨의 시조는 고려고종때 상장군(대장급)을 지낸 조연벽(趙連璧)이다.
시조 조연벽은 김제 용두동(지금의 옥산동)에서 태어났으며 무예가 뛰어나 장수의 재목으로 꼽혔다고 하며,
시조 조연벽(趙連璧)은 1231년(고려 고종18년) 몽고군이 내침했을 때 대장군에 임명되어 몽고군을 소탕한 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어 후손들은 조연벽을 시조로 모시고 본관을 김제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조연벽은 삼남을 두었는데 장자 조기는 선친의 뒤를 이어 무장이 되었고 대장군에 올랐으며, 차자 조서는 대사헌 좌승지에 올랐으나 후사가 없다.
삼자 조간은 초시 중시 친시를 공의 나이 16세때(1279년 고려 출렬왕5)인 모두 장원급제하여 우정승을 역임하였고 “주자사서집주”를 간행하여 큰 공헌을 하였다.
조간은 父喪에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였으며 1264년(고려원종4)에 김제용두동에서 태어나 1325년(충숙왕15년)세상을 떠났으며(향년62세) 시호는 문량공이다.
6세 趙義는 중시조로서 정산현감, 권농단훈련관, 충청병마절도사를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천안 개천동에 예장되었다.
의는 이조 태종13년 서기1413년에 경기도 양주에서 출생하여, 세종22년 서기1440년 28세로 순직하시메 세종께서 부음을 들으시고 크게 슬퍼하시와 예장을 명하여 묘소가 심산유곡 천안시 광덕면에 있다.
조의의 정부인 강능김씨 할머니는 공이 28세에 순직하여 행복된 젊은시절은 잠시동안이 되고 말았으니 絶望感에 빠져 下從하기를 결심하고 食飮을 全廢하여 사경을 헤메는 여러날만에 어린자녀들이 붓들고 痛哭하니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어린 5남매를 거느리고 양주로부터 竹山리에 이사, 故鄕에 定着하여 3남2녀를 훌륭히 養育하여 長男 理智 2남 崇智 3남 承智는 각각 登科하여 나라에 충성하고 두딸은 출가하여 子孫이 繁昌하였으며 할머니께서는 李朝成宗9년 西紀1478년에 作故, 井邑옹동 금산동에 墓가 있다
9세손 처사 조윤침(趙潤琛)은 한성서윤에 여러차례 임명되었으나 잇당사화 정쟁풍토에 환멸을 품어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 후학지도에 일생을 바쳐 그이름을 원근에 떨쳤다.
집 하나를 구성하여 학업을 연구하는 장소로 백천이라고 하였으니 수삼명현과 더불어 문주지유(文酒之游 글을 짓고 술을 마시며 노는 것)하였다.
조윤침의 호는 백천당이며 서기1476년(성종7년) 공조참판 원우의 셋째아들로 태어나 일흔살이 되는 1545년 인종원년에 별세하셨다.
12세손 응헌은 호가 죽서공이요, 일찍이 연방에 올라 명나라가 패망한후 벼슬에는 뜻이 없어 한세대의 명현들과 더불어 글과 술과 서로 놀면서 의리를 밝히었으며 공은 일곱아들이 있으니 시인들이 말하기를 조씨의 칠룡이라고 말하였다.
공은 효종대왕4년(서기1653년) 졸하니 칠십이세가된다.
응헌(應巘)의 셋째 아들 필태(13대손)는 천성의 효성이 지극하여 묘려에서 삼년을 마치니 원근사람들이 찬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었다.
왕께서 특별히 인견하시어 태학반에서 누락된 것을 아깝게 여기시고 특별히 호계라는 호를 주시었다.
13세손 趙必達장군은 父가 思誨(12세손)로 호조참판, 조부 유정(11세손)은 승정원좌승지, 고조부 윤정(10세손)은 병절교위(정6품)이었다.
공은 1600년(宣祖 33년) 7월 7일 김제에서 태어났다.
조필달장군은 일찍이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을 필두로 벼슬길에 나가 순안현령(順安縣令)과 보성군수, 양주목사(揚州牧使) 등 외직을거쳐 포도대장(捕盜大將)과 3도통제사(三道統制使) 등 무려 일흔 두 군데의 관직을 거쳤다.
공은 어느 자리에 있거나 국사(國事)를 공정히 처리하고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지 않아 부임하는 곳마다 청렴결백한 관리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공의 행장(行狀)을 듣고 임금이 시험해 보기 위해 제주목사(濟州牧使)로 제수한 후 얼마 뒤에 파면시키고 암행어사를 보내어 그가 돌아오는 배를 조사하게 하였다. 이윽고 배 안에는 짚신 3켤레와 쌀 3되,군복 한 벌 장검(長劍)과 추(錐)가 각각 한개씩 뿐이라는 어사의 보고를 받자 임금은 크게 기뻐하여 '만고청백우성장조필달 (萬古淸白于城將趙必達)' 이라는 친필 휘호를 내렸다.
1664년(顯宗 5년) 공이 평안병사 겸 안주목사로 재임 중 별세(향년64세)하니 임금이 예조(禮曹)에 명하여 부조를 후히 하도록 했으며, 예조정랑 박청(朴淸)을 보내어 제사를 치르도록 하였고, 고향으로 운구할 때에 예의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도록 명하였다.
그의 군복, 호남육군사령기(湖南陸軍司命旗), 고신(告身), 화살통, 논시(論示), 교지(敎旨) 12매 등 6종 17점의 유물은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04호로 지정되었으며 김제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대에 이르러 김제조씨문중의 명예를 선양한 인물로는 제헌 및 4선국회의원을 역임한 趙漢栢 종친이 커다란 족적을 남겼고, 2선국회의원을 지낸 趙尙來 종친이 뒤를 이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종친이 배출되어 가문의 명예를 선양하고 국가사회에 기여하고 있다.
김제조씨는 현재 북한과 해외동포를 포함하여 약5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집성촌(集姓村)
-전북 김제군 월촌면 일원
-전남 무안군 현경면 양학리
-전북 정읍군 이평면 창동리
-전북 김제군 김제읍 일원
-전북 김제군 용지면 일원
조(趙)씨 姓의 유래
본래 趙氏 姓은 확실한 증거는 없으나 중국 宋나라 태조 조광윤(趙光胤)의 후예라는 설이 많이 전해집니다.
金나라의 침략으로 휘종(徽宗) 흠종(欽宗)이 그들에게 납치된후 고종이 남경에서 즉위하여 남송을 건국했으나 북방에 처져있는 황족들은 금나라의 박해를 부지할수 없어 황해를 거쳐 고려에 亡命하게되어 고려땅 여러지방에 정착한 趙姓은 지명을 따라 貫鄕을 삼고 점차 그수가 불어나자 여러갈래로 분파되어 관향과 시조가 발상한 뒤 수백년후에 족보가 편찬되어 이로 인해서 그원조를 알수 없게 되었으리라 짐작되나 우리나라의 趙姓은 원래는 모두 같은 혈통이라 생각됩니다.
일설에 의하면 조씨성(趙氏姓)은 원래 중국사람으로 중국에서 동래하여 우리나라에 정착 세거하게 되었다고, 각종 문헌 및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나, 조씨성의 본관이 정 하여진 때는 고려시대 태조 왕건~ 광종에 이르기까지 고려를 통일하고, 관료제 개편 및 지방 행정구역을 조정 하였을 무렵, 통치수단으로, 각 지방 유력호족 들의 세거지 및 고려통일 공신들에게 대부분 각지역별 행정구역을 기준하여, 본관을 분정(나눔) 하였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조씨성의 원류는 하나이나, 살고있는 세거지를 기준으로 나누다 보니 本貫을 달리 하였던 것이며, 각 지역의 조씨성을 가진 가문들은 지정한 본관을 기준으로, 흥망성쇠를 달리한 것 뿐입니다.
趙氏 姓의 본관 !
강서(江西) 강진(康津) 경주(慶州) 김제(金堤) 남해(南海) 밀양(密陽) 백천(白川) 순창(淳昌) 양주(陽州) 옥천(玉川) 임천(林川) 주천(酒泉) 직산(稷山) 진보(眞寶) 태원(太原) 평산(平山) 평양(平壤) 풍양(豊壤) 하동(河東) 한양(漢陽) 함안(咸安) 횡성(橫城) 흥양(興陽)
조(趙)씨는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1,055,567명으로 조사되어, 한국 성씨 인구 순위 7위이다. 본관은 문헌에 200여 본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현존하는 본관은 56본이며, 이 중에서 시조와 계대를 알 수 있는 본관은 풍양(豊壤)·한양(漢陽)·양주(楊州)·임천(林川)·백천(白川)·함안(咸安)·순창(淳昌)·횡성(橫城)·평양(平壤)·김제(金堤)·직산(稷山)·옥천(玉川) 등 20본이다. 조(趙)씨는 본관별로 시조와 유래가 다르고, 분적된 본관이 없기 때문에 동원동근(同源同根)을 주장하지 않는다. 다만, 조선 현종 때까지 동성이본도 통혼을 금했기 때문에 현재까지 같은 성씨끼리 결혼하지 않는 관례가 있다.[1] 한편,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서로 본관이 혼동되어 기록된 경우가 더러 있었다.[2] 인구는 한양 조씨(31.2%)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그 다음으로 함안 조씨(26.3%), 풍양 조씨(12.6%), 백천 조씨(6.7%), 옥천 조씨(5.1%), 평양 조씨(4.2%) 순이다.
직산 조씨(稷山 趙氏) 시조 조성(趙成)은 백제 개국공신으로 전한다. 2000년 인구는 3,387명이다.
풍양 조씨(豊壤 趙氏) 시조 조맹(趙孟)은 고려 개국공신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로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 천마산 동굴에 은둔하여 농사를 짓던 사람이라고 한다. 시조 이후 세계를 고증할 수 없어 조지린(趙之藺), 조신혁(趙臣赫), 조보(趙寶)를 각각 1세조로 하는 3계파가 있다. 조선 후기의 세도가문이다. 2000년 인구는 113,798명이다.
횡성 조씨(橫城 趙氏) 시조 조익(趙翌)은 평장사(平章事) 조첨(趙瞻)의 아들로 965년(광종 9) 고려에서 처음 실시한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한림학사(翰林學士)를 역임하고, 광종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올랐으며, 횡성군(橫城君)에 봉해졌다. 후손인 조영인(趙永仁)이 1201년 문하시중에 올랐다.[3]2000년 인구는 5,337명이다.
배천 조씨(白川 趙氏) 시조 조지린(趙之遴)이 고려 목종(穆宗) 때 이부시랑 지은대사(吏部侍郞 知銀臺事)로 임명되었고, 1011년(현종 2년)에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참지정사(叅知政事)에 이르렀다.[4] 2015년 인구는 75,978명이다.
순창 조씨(淳昌 趙氏) 시조 조자장(趙子長)은 고려 때 순창호장(淳昌戶長)을 지냈다. 그의 5세손인 조인평(趙仁平)이 1177년(명종 7)에 망이·망소이 난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워 금오위낭장(金吾衛郎將), 대장군(大將軍)에 올랐다. 2000년 인구는 17,923명이다.
함안 조씨(咸安 趙氏) 시조 조정(趙鼎)은 고려 대장군 원윤(元尹)이다. 2015년 인구는 282,890명이다.
임천 조씨(林川 趙氏) 시조 조천혁(趙天赫)은 본명은 조수강(趙守康)이고 송 태조 조광윤의 손자인 기왕(冀王)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라 한다. 그는 송나라에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서두공봉관(西頭供奉官)이 되었으나, 979년 조광의(趙匡義)가 황위를 찬탈한 이후 고려로 도망쳐 와서 임천(충청남도 부여군 임천면)에 정착하여 살았다고 한다. 2000년 인구는 11,040명이다.
평양 조씨(平壤 趙氏)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 때 고려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서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하였다. 2000년 인구는 41,047명이다.
옥천 조씨(玉川 趙氏)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시대 광록대부(光祿大夫) 검교대장군(檢校大將軍)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냈다. 옥천(玉川)은 전라북도 순창군(順昌)의 마한시대 지명이다. 2000년 인구는 49,847명이다.
양주 조씨(楊州 趙氏)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후기에 호장(戶長)을 지내고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에 추증되었다. 2000년 인구는 23,942명이다.
김제 조씨(金堤 趙氏)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上將軍)을 지냈다.
조연벽(趙連壁)은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蒙古)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대장군(大將軍)에 임명되어 부장(副將) 김윤후(金允侯)와 함께 처인성(處仁城: 현 경기도 용인)에서 몽고군을 소탕한 공(功)으로 상장군(上將軍)에 올라 벽성(碧城 : 김제의 옛 이름) 군(君)에 봉해지고 좌정승(左政丞)에 추증되었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연벽(連璧)을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本貫)을 김제(金堤)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한양 조씨(漢陽 趙氏)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덕원부(德源府) 용진현(龍津縣 : 현 함경남도 문천시, 원산시 일대)에 세거해 온 사족(士族)의 후예로 고려 조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朝順大夫 僉議中書事)를 지냈다. 그의 독자 조휘(趙暉)의 후손들이 쌍성총관부의 총관을 계승했다. 고려 왕족이라는 설도 있다.[5][6] 후손들이 조선이 개국하자 한양(漢陽)으로 이거하여 한양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2000년 인구는 307,746명이다.
영흥 조씨(永興 趙氏)는 함경남도 영흥군에 세거하던 가문으로 조인재(趙麟才)의 증손 조영무(趙英茂)는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우고 판전중시사(判殿中寺事)에 올라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었으며, 죽은 뒤 태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조영무의 아들 조서(趙叙)는 1399년(정종 1)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하여 봉상시박사(奉常寺博士)가 되었다. 그 뒤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사간원예의(司諫院禮議)·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에 이르렀다. 시호는 안정(安靖)이다.[7]
신창 조씨(新昌 趙氏) 시조 조영규(趙英珪)는 조선 개국공신이다. 이방원을 도와 개국공신 2등에 책봉되었다.
===위키백과 참고===
조(趙)씨는 총 68개의 本貫에 인구는 2000년 기준 984,913명입니다. 조씨의 본관별 종류는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한양조씨(漢陽趙氏.307,746명)- 시조 조지수(趙之壽)는 고려 중엽에 조순대부 첨의중서사를 지냈다. 그 후 후손들이 조선 개국 때 한성(현재의 서울)으로 옮겨 가세가 크게 번영한다. 많은 인물을 배출하면서 본관을 한양으로 삼았다.
▲함안조씨(咸安趙氏.259,196명)- 시조 조정(趙鼎)은 중국 후당(後唐) 사람으로 고려통일에 큰 공을 세워 개국벽상공신 대장군에 올랐다. 그래서 후손들이 함안에 살면서 본관을 함안으로 했다. 함안(咸安)은 경상남도 남부 중앙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옛 함안군과 칠원현이 합하여 이루어진 지역이다.
▲풍양조씨(豊壤趙氏.113,798명)- 시조 조맹(趙孟)의 원래 이름은 바우(岩)이다. 그는 풍양현(현 남양주시 진건면 송능리)에서 태어나 농사를 지으며 천마산 기슭 바위동굴에 은둔해 살았던 도인이었다. 왕건이 그를 찾았을 당시 나이가 70세였다. 이때부터 신라 정벌의 길에 나섰다. 그 뒤 태조 왕건이 맹으로 이름을 내렸다. 풍양(豊壤)은 경기도 양주(楊州)의 옛 지명이다.
▲배천조씨(白川趙氏.66,155명)- 시조 조지린(趙之린)은 송나라 태조(조광윤)의 맏아들인 조덕소(위왕)의 셋째 아들이다. 979년(고려 경종 4년) 난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황해도 배천(白川.땅이름은 백천이 아닌 배천으로 발음한다)군 도태리에 정착했다. 그의 아들 조양유(趙良裕)는 고려 덕종과 정종 때 벼슬을 지낸 후 백천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배천으로 했다. 배천(白川)은 황해도 남동부에 위치한 연백군(延白郡)의 옛 지명이다.
▲옥천조씨(玉川趙氏, 순창.49,847명)- 시조 조장(趙璋)은 고려 중엽에 문하시중을 지냈다. 그의 증손 조원길(趙元吉)이 공양왕 때 일등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옥천(순창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했다. 집성촌은 전남 순천시 주암면 주암리를 비롯하여 13개 리에 걸쳐있다. 이 중에서도 주암면 주암리에 가장 많이 살고 있다. 곡성군 삼기면 양촌리,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곡성군 곡성면 동산리 등도 집성촌이다. 옥천(玉川)은 순창의 다른 이름이다.
▲평양조씨(平壤趙氏.41,047명)- 시조 조춘(趙椿)은 고려 예종과 의종 때의 인물이다. 그는 고려 때 남송에 가서 금나라를 토평한 공으로 송나라 상장군이 되었다. 그의 5세손 조인규(趙仁規)의 딸이 충숙왕의 왕비가 된 후 평양부원군에 봉해졌다. 이 때 충렬왕의 명에 따라 본관을 상원(詳原)에서 평양으로 바꾸었다.
▲양주조씨(楊州趙氏. 23,942명)- 시조 조잠(趙岑)은 고려 때 호장, 판중추원사를 지냈다. 조선시대에 359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집성촌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묵안리, 전북 김제군 청하면 관상리 등이다. 양주(楊州)는 경기도 중남부에 위치한 지명이다.
▲순창조씨(淳昌趙氏, 17,923명)- 시조 조자장(趙子張)은 고려시대에 호장(戶長)을 지냈다. 본관을 순창으로 한 것은 고려 때 대장군에 오른 조인평(趙仁平)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인평(趙仁平)은 고려 명종 7년 계룡산의 토적을 토평하고 벼슬에 올라 금오위 랑장(金吾衛 郞將)에 오르고 대장군이 되었다.
▲김제조씨(金堤趙氏 50,000명 추산)- 시조 조연벽(趙連壁)은 고려 고종 때 상장군을 지냈다.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의 살리타이가 침략했을 때 몽고군을 소탕한 공으로 벽성(김제의 옛 이름)군(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김제로 삼았다. 조선시대에 23명의 과거 급제자가 있다.
▲임천조씨(林川趙氏.11,040명)-시조 조천혁(趙天赫)은 송나라 태조 조광유의 손자인 조유길(趙惟吉)의 다섯째 아들이다. 그는 송나라에서 벼슬을 지냈으나 979년 위왕(魏王)이 화를 당하자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천혁(天赫)으로 이름을 바꾸고 임천에 정착하여 살았다. 그 후 고려 현종 때 강감찬과 함께 거란군을 대파하여 가림백(가림은 임천의 옛 이름)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임천으로 했다. 집성촌은 충남 홍성군 홍동면 신기리, 충남 예산군 삽교읍 수촌리, 충남 부여군 세도면 화수리, 충남 논산군 양촌면 석서리, 충남 대덕군 기성면, 충남 서산군 음암면 탑곡리, 충북 중원군 이류면 문조리, 충북 중원군 동량면 대전리, 충북 괴산군 소수면, 충북 진천군 초평면 용산리, 전북 익산군 함라면 함열리, 전북 임실군 관촌면 등이다. 임천(林川)은 충청남도 부여군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백제 가림군(加林郡)이었다. 1914년 부여군에 통합되었다.
한국의 장례 문화
옛날에는 집에서 장례를 치렀고 장례가 끝나면 조상들의 무덤이 있는 곳이나 그 근처에 묻었다.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무덤 옆에 작은 집(움막)을 지어(만들어) 그 안에서 3년 동안 사는 사람도 있었다. 3년이 지나야 장례가 완전히(모두) 끝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장례 기간 동안 입고 있던 장례복(상복)을 벗었다.
요즘은 병원의 장례식장이나 전문 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른다. 장례가 완전히(모두) 끝났다고 생각하는 기간도 달라졌다. 아주 많이 짧아졌다. 예전에는(옛날에는) 집집마다 장례를 치르는 방법이 거의 비슷했지만 요즘은 종교에 따라 다르다. 어떤 종교인지에 따라 장례 방법이 조금씩 다르다. 예전에는(옛날에는) 땅에 묻었지만 요즘에는 땅에 묻는 대신 다른 방법을 하기도 한다. 땅에 묻을 경우에도 공동묘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땅에 묻지 않을 경우에는 시신(죽은 사람의 몸)을 불에 태우는 '화장'을 하기도 한다.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성인(어른) 남녀 천 명에게 설문조사를 한 결과 죽으면 화장을 하겠다는 사람이 80%가 넘었다. 그리고 실제로 10명 중 6명 정도는 화장을 한 것으로 조사되었다. 1998년 화장률이 27,5%였던 것에 비하면 십년만에 두 배 이상 늘었다.
또 최근 수목장을 하겠다는 사람들도 늘고 있다. 수목장은 화장한 후 나무 밑에 묻는 것을 말한다. 자연과 하나가 되고 환경도 생각한다는 점에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현재 우리나라는 매년 여의도 면적만큼의 묘지가 새로 생겨나고 있다고 한다.
전국적으로 산에 있는 묘지는 2000만기를 넘어섰다고 하는데, 땅은 한정되있고 묘지는 계속해서 늘어나 더이상 묘지를 쓸 땅도 어렵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묘지는 개인묘지가 69% 집단묘지는 31% 으로 개인묘지의 70%이상이 불법묘지라고 한다.
국민 1인당 평균 주거 공간은 4.3평인데 묘지 면적은 평균 15평에 달해 주거공간보다 3~4배나 크다고 한다.
대부분의 묘지는 산에 조성되기 때문에 산림 훼손, 자연생태계 파괴, 환경파괴의 원인을 제공한다.
앞으로 수도권은 3년, 전국적으로 10년내에 묘지 공급한계가 예상이 되어 사후에도 시신을 안치할곳이 없기때문에 봉안제도가 도입되고 확산이 되는 추세이다.
시묘살이
부모상을 당했을 경우, 묘지 옆에 초막이나 여막을 짓고 3년(만2년)을 생활하며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모시는 생활을 ‘시묘살이’라고 한다. 여러 예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중국 공자의 제자들에게서 유래된 풍습으로 조선시대 사대부에서 성행했던 풍습이다.
옛날에는 부모상을 당할 경우 묘지에 초막을 지어 3년간 거처하며, 살아계실 때와 마찬가지로 아침 · 점심· 저녁으로 상식을 올리고, 밤이 되면 침상을 마련하는 것이 예의 기본이었다. 이것을 시묘살이라 한다.
시묘살이는 유학의 발달로 많은 사람들에게 퍼져나갔다. 유학은 효를 중시했기에 유학자는 지극정성으로 돌아가신 부모를 3년 동안 모셨다. 그 때문에 시묘살이 중에 심각하게 건강이 악화되는 경우도 많았고, 심하면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시묘살이는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인 『가례家禮』 등에서는 언급되지 않은 내용이다. 그럼에도 조선시대에 시묘살이가 사대부가에 유행한 것은 중국에서 공자 제자들이 스승님을 위해서 했던 일이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 아닌 유교적인 전통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시묘살이는 어떤 의례서에서도 기록을 찾아볼 수 없다.
시묘살이가 예서에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가례』에 규정되어 있는 상례의 일정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장례가 끝나면 망자의 혼백은 집으로 모셔 와서 신주를 사당에 모셔야 한다. 그런데 시묘살이를 하게 되면 혼백을 집으로 모셔오는 ‘반혼(返魂)’이 삼년 이상 미뤄지게 된다. 따라서 예학자는 시묘살이를 명쾌하게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시묘살이에 대한 기록은 퇴계 이황(李滉)이 『사례편람』의 인용문에서 “지금 여묘의 풍속은 성하고 반혼하는 예는 없어졌으니 한탄스럽다. 다만, 말세에 예법이 무너져 집으로 부모의 혼백을 모셔와 근신하지 못 하는 일이 많이 생긴다면, 여묘를 행하여 혼잡을 피하는 것보다 못하게 된다.”고 한 것과, 율곡 이이(李珥)가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장례 후에 반혼하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정말 바른 예이다. 다만, 세속 사람들이 잘못 본떠 여묘하는 풍속을 폐하되, 반혼 후에는 각기 제집으로 돌아와 처자와 한데 거처하면서 예법을 크게 무너뜨리니 심히 한심하다. 무릇 어버이상을 당한 이는 스스로 헤아려보아 일일이 예를 따라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없어야 할 것이니, 마땅히 예에 따라 반혼하고, 혹시라도 그렇지 못하면 옛 풍속에 따라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옳다.”라고 한 것이 전부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이황과 이이는 원칙적으로 반혼을 바른 예라고 규정하면서도, 만약에 반혼의 효를 다하지 못할 바에야 시묘살이를 해도 된다는 입장을 나타내고 있다. 실제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시묘살이 풍속을 현실로 인정하는 태도를 보인다.
이 외에 사대부의 일기에서 시묘살이를 확인할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에 살았던 이정회(李庭檜)와 서울 서소문에 살았던 이문건(李文楗)의 일기가 그것이다. 이정회는 1578년 5월 1일에 모친상을 당해 시묘살이를 만 2년 동안 했다. 그는 장사 후에 여막에 거주하면서 초하루와 보름에는 꼭 삭망제(朔望祭)를 지냈고, 손님을 맞이하였다. 틈틈이 농사일도 돌봤다. 추수가 끝난 겨울에는 열심히 묘역에 상석(床石)이나 표석(標石)을 조성하는 일을 했다. 이문건은 1535년 1월 5일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그의 집은 서울 서소문이었지만 양주 인근에 모친을 모셨다. 이문건도 상중에는 열심히 묘역을 돌보면서, 사회활동과 경제활동도 함께 했다. 그는 평상시 하던 전답 관리와 소속된 노비 관할 등을 계속했다. 일상생활의 하나인 봉제사(奉祭祀)와 접빈객(接賓客)도 빼놓지 않았다. 시묘살이 중 이문건은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상중 내내 감기 기침에 시달렸다. 그래서 간혹 아침과 저녁에 하는 조석곡(朝夕哭)을 생략했다. 그는 건강을 지키기 위해 인삼이나 약을 복용하였고, 간혹 술을 마셨다. 상중에 금기시되는 술을 마신 것은 약해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예기禮記』의 「상대기喪大記」에도 거상 중에 병이 있으면 술을 마시거나 고기도 먹을 수 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상중에는 철저하게 소식(素食)하였다. 상중에는 관직 생활을 하지 못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먼 길을 떠나는 것 역시 못했을 정도로 제약이 많았다. 반면 이러한 제약으로 학문에 몰두하여 상 중에 저술 활동을 하는 사람도 있었다.
시묘살이는 살아계실 때와 동일하게 묘 옆에 움막을 지어 생활하며 부모가 돌아가셨지만 생전에 못다한 효도를 이어간다는 의미가 있다. 시묘살이는 『국조오례의』나 『가례』등의 예서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지만 사대부의 생활 속에 자리 잡혀있던 전통적인 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선양(宣陽)리에는 시묘곡이라는 고개가 있다. 시묘곡은 풀이하면 ‘시묘살이했던 골짜기’라는 뜻이다. 현재 이곳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인공호가 들어서 ‘시묘살이골’이란 이름만이 전해지고 있다.
시묘살이를 한 이유
예전에는 삼 년간 시묘살이했다. 그것은 아이가 태어나면 삼 년간 부모가 돌봐주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 년간 시묘살이했던 것이다.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효심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다.
경기도 파주 지역에서 상장례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이다.
2005년 이기형이 엮어 민속원에서 펴낸 『한국구전설화집 2』에 수록되어 있으며, 2004년 1월 14일 이기형이 경기도 파주시 문산읍 이천 1리 441-18에서 김기철(남, 79세)으로부터 채록한 것이다.
예전에는 시묘살이라는 것을 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건품만 했다. 건품은 가묘를 해 묻어두었다가 삼 년이 지난 후에 원 자리에 갖다 모시는 것을 말한다. 이제 삼 년 간에는 여막을 짓고 거기서 머리도 안 빗고 지냈다. 그전에는 다 머리를 빗고 상투를 틀 때였다. 빨래도 안 해 입었다. 아침저녁으로 상식을 하고 여막에서 삼 년을 지내야 했다. 그렇게 지극정성으로 효를 행하며 부모를 모셨다.
이렇게 삼 년을 졸곡하고, 장사를 지내고 그런 다음에 산지(묘지)를 잡으러 갔다. 지금은 부모가 죽으면 바료 묘지를 잡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성을 드린 다음에 묘지를 잡았던 것이다.
선산이 있으면 선산에 묘를 쓰는데, 먼저 선산 산에 올라가서 산신제를 잘 지내야 했다. 묘를 쓰기 전에 산신제를 지내는 것은 산의 임자가 바로 산신이기 때문이다. 산신께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면 묫자리를 내주게 되어 있다. 아무리 명당이라도 또 명당을 잘 잡는 지관도 산신이 묫자리를 내어주지 않으면 못 보는 법이다. 산신께 정성껏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눈을 가려서 명당자리가 보이질 않는다고 한다.
예전에는 시묘살이를 삼 년 동안 했다. 옛날에는 탁아소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머니 젖을 삼 년 동안 먹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죽었다. 아이는 세 살이 되어야 이가 나와서 이밥을 먹었다.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는 내가 태어나서 세 살까지 날 먹어주고 입혀주며 돌봐줬기 때문이다. 부모의 은공을 갚기 위해, 효심으로 시묘살이를 하는 것이다.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는 전통 장례에서 삼 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이야기이다. 사람은 태어나면 삼 년 동안 부모가 돌봐줘야 살 수 있다. 이런 부모의 은공에 보답하기 위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묘 옆에 움막을 짓고 그곳에서 삼 년 동안 시묘살이를 했다는 것이다. 시묘살이는 생전에 못다 한 효도를 지속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시묘살이는 『가례家禮』를 비롯한 유가의 보편적인 예서에는 없는 내용이다. 정몽주는 부모님 돌아가시자, 각각 삼년간의 시묘살이를 한다. 이후 시묘살이는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 널리 유행하게 된다. 시묘살이는 의례의 실천이라기보다는 사대부가의 삶 속에 자리 잡은 전통풍속이라고 할 수 있다.
지청(상청)설치와 삼년상
전통사회 온가족이 모여살던 시절 조동화는 중학1학년때 1964년 할머니가 58세에 돌아가시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대청마루 한쪽에 광목으로 칸을 막아 지청을 설치하여 영정사진을 비치하고, 아침 저녁으로 상을 차려 올리었다.
지청을 다른말로 상청(喪廳)이라고도 하는데 어른들이 지청이라고 하였다.
초하루와 보름이 되면 음식을 장만하여 큰상을 차리여 올리었다.
저녁이 되면 귀신이 나올까 무서운 생각도 들었다.
지청은 설치하고 1년만에 철거한 것 같다.
전통사회는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어 조상숭배 사상이 강했다.
유교식 전통 상례의 핵심은 삼년상이라 할 수 있다.
수백 년 동안 우리 조상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삼년상을 치렀다.
삼년상은 인간이 태어나서 3년이 되어야만 부모의 품을 떠날 수 있다는 의식에서 비롯되었다.
즉 삼년상에는 적어도 3년이 될 때까지는, 살아있는 부모를 모시듯 돌아가신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여야 한다는 효사상이 담겨 있다.
부모는 자기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비록 상복을 벗더라도 상중인 것처럼 행동을 삼가고 마음속으로나마 상기를 치르는 것처럼 행동하였던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삼년상의 본질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삼년상에 들어 있는 의미를 안다면 결코 부모에게 소홀히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삼년상은 거의 시행되지 않는다. 사십구재나 100일 탈상을 하고, 일년상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심지어는 부모의 시신을 매장한 다음날 3일 탈상을 하는 경우도 흔하다. 아예 탈상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일도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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