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 하나만 가지고도 재미있게 놀았던 어릴 적 일이 생각납니다. 각색의 쇠붙이들을 마당 가운데 펼쳐놓고, 노끈으로 길게 매단 말굽자석으로 그것들을 낚시하듯이 건져 올렸습니다(골1:13). 못이나 철사 같이 가벼운 것들은 쉽게 끌려오지만 낫이나 호미 같이 무거운 것들은 도중에 떨어져나가곤 했습니다. 쇠붙이가 무거울수록 더 크고 힘이 강한 자석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큰 말굽자석이 들어있는 교실 벽에 붙어있던 교내방송용 스피커가 늘 탐이 났습니다.
거듭난 새 사람의 마음속에는 서로 대적하는 두 생각이 날마다 싸우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롬8:5). 영의 사람이라도 육체를 입고 이 땅을 사는 동안은 육신의 생각이 안 날 수가 없습니다(롬7:21~23). 그래서 거듭나기만 하면 정욕과 탐심이 죽어 육신의 생각들이 안 날 줄 알았던 사도 바울도 자신에게 절망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4).
그러나 그는 이것이 거듭난 사람의 실상임을 깨달았습니다(롬7:25). 그리고 왜 성령으로 충만한 새 사람을 입어야 하는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으려면(벧후2:22) 의지적으로 날마다 새 사람을 입어야 합니다(엡4:22~24).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갈5:16~17).
육체의 소욕은 쇳덩이와 같고 성령은 이 육체의 덩어리를 생명의 길로 끌고 가는 자석과 같습니다(요14:6). 육신의 생각이 많을수록 성령의 자석은 강력해야 합니다. 만약 이 육신의 생각을 죽이지 못하고 육체의 소욕에 끌려가면 그 마침은 멸망입니다(빌3:19).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8:13).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살고 싶으나 번번이 실패하고 있다면 육신에게 져 끌려가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