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마을...23..130831
의흥 장터 색시 집(안방집) 과 요정.
의흥
장터 부근 색시집 은 서너군데 였으며 이 문제는 예민한 문제라..구체적인 것은 거론하기를
보류하고..우선
그 풍경과 그 속에서 이루어진 사건들 만 거론 키로 한다...문제가 좀 예민하다.
색시집은
안방에 술상을 차리고 일반집 보다 가격이 고가며 색시는 주로 유행가를 부르고 젓가락
으로
장단을 맟추며..술을 따른다. 손님?은 이 술받아 마시고 폼을 잡는다.
술상도
아주간단한 작은 사각상 이나 개다리 상으로부터 책상만큼 큰상에 산해 진미 까지 다양
했으며..형편과
사정 에 따라 상의 크기가 정해지고 주로 정종을 마시며 약간의 탁주. 청주.소주
등
이고 그 시절 까지는 맥주는 없었다고 해야 맞다..그런 시절이야기다. 술집색시 를 그 때는
기생이라고
도 불렀으나 기생수준 에는 한참 못미치는 색시 들이며 접대부 수준이라 할까?
이
색시들은 공급처가 대략 대도시 며 간혹 정처없이 이리 저리 떠도는 색시도 많았다..말하자면
이
집에서 저집으로..식으로 다. 옛부터 의흥은 색향 이라는 좋지 않는 말이지만 있었던 것은
부인
하면 거짓 말 이 된다..사실 그렇게들 말 했다..색향 이건 유녀가 많다는 뜻이기도 하고
따라서
의흥은 색시 술집이 아니면 술집이라 부르지 않을 만큼 그런 문화가 있었다.
저
마다 배부르고 등 따신 축에 드는 사람은 첩을 얻거나 기타 외도하는 것은 보통의 풍속이 였고
첩이나
조강지 처 를 둔사람의 외도도 형편이 되는 사람이면 당연시 되던 시대..그런시대가 우리
어릴적
풍습의 시대라고나 할까? 첩을 그느린 사회지도급 인사들이 많았고 이 축첩행각을 하시던
어른들을
지금 뚜렸이 기억 할 지경이다..그 만큼 시대가 그러 했다.
이런
형편이다 보니 여자끼고 술마시고 흥청이는 것은 보통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에 편승
하여
호황을 누리는 것은 색시 집이다...그레도 시골이라는 지형적인 여건 때문에 색시가 많지는
않았고
기끝 열손가락으로 셀정도 였으나..그 색시들에게 혼을 빼앗기고 폐가 망신 까지 가는 경우
도
있었고..우리도 한창 젊은 시절 색시집 출입을 할 정도 였어니..참 심했다고 나 할까??
술집
색시들어 앉혀 살림 차리고 온기진지 모두소진 하여 폐가망신 하고 어떤이는 중간에 그만
두기도
하고 우리 윗대사람들 의 도덕관념은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쩐지 이 방면은 찜찜 한것
투성이다..그러면서
도 조강지처 에 대한훈육과 훈계를 하고 자기는 시쳇말로 호박씨 를 까고
하는
그런 경우를 생각하면 좀 뭣하다..사실이 이렇했다는 말이지 결코 비난 할 생각은 아니다.
술집
색시와 진탕 술을 마시고 하룻밤 동침 이라도 하면 큰 출세라도 한양 어시데던 그사람
들여앉혀
아이까지 출산하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날마다 색시가 아니고 살림사는 여자로
변신한
그 여인을..어쩌지도 못하고 당시로서는 천대를 받던 첩의 자식만 늘리고..약간의 비관
과
후해 그 다음은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불화로 이어지며..끝내는 마약 도박 으로 간 사람들..
이처럼
흘러가는 삶을 더러 보았고 그 기억들이 강열하게 남아돈다,,생각하면 색시 역시 그리되기
까지의
피할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 것이고 그들 역시 귀한 사람인데 일시 운명의 탓으로 색시로
전락
하였을 것이고 비난들 받는 직업여성이 된 것이나 속내는 나나 그나 같은 인간임 에는 틀림
없다..지난
일로 거치지 않고 지금도 진행되는 일이니 피차 조심 할 일인가 한다..
요정
들 과 여인..
요정은
몇군데 되지 않았고 여기는 정식으로 기예를 배운 여인들이 지키고 있는 곳이다..
의흥의
또하나 별명은 예향 이란 거다..기예가 뛰어난 곳 이란 말..그리 된 연유를 살피자면
아마도
옛부터 관청? 이 있었고 관리(현령) 와 그에따른 여러사람들이 많았고 관기제도 비슷
한
제도도 있었어리라..그 레서 그 여성들의 몫이 변해서 와서 현재에 이르다 보니..
자연히
예향이란 말을 듣게 된것 아닌가 한다..그리고 사실로는 기생학교 가 있었고 그기서 가르치
던
선생님 도 몇 십년 전 까지 생존하셨고 그기에서 기예를 배운 사람들도 얼마전 까지 생존했
으니
예향이라고 할 만 하기도 했나 싶다..그레서 이 문제역시 지금은 예민 한 문제가 되어 구체적
인
속내늘 보류 한다.. 생존하는 후손들 의 명예를 위해서..
요정이란
이렇게 정식 기예를 배운 사람들의 생계터전이며 수단이다..여기는 요리가 다양하고 그
품격도
고상하고 그기서 오가는 대화들도 고급? 이라..웬만한 사람은 출입하지 않았고 출입한다
하여
대우도 못 받는 곳이다..출입은 자유나 평가는 주위가 어렵게 한다..주 고객은 지방의 유지
급
인사 와 각종기관 의 수장들 이며 일부 사업가와 부자 들 기술자 들이 포함 된다..
접대의
분위기는 차분하고 약간은 들뜨게 하기도 하고..상차림 역시 도시 못지 않은 수준의 것이
많고
다양하며 가격은 상상불허로 비싸다..여기에는 그들의 기예의 값 까지 포함되어야 하니..
주로
은밀한 담소가 많고 어쩌다 신명이라도 펼쳐지고 옛가락 뽑아네고 장구를 치면 그야 말로
정서가
무르익고 육체는 살 살 녹아 든다..이런 집 들이 몇군데 있었고..
이런
호시절지나고 6.25. 한국전쟁 이후 모든시설이 잿 더미가 되고 사람사는 꼴이 초라할데로
초라해지고
그기다가 가난이 곂치고 먹고 산다는 인간 본연의 문제가 대두되어 그 요정을 하던
여인들도
직업에서 벗어나 농사에 종사도 하고 일부는 결혼도 하고 출산도 하여 그 자손들이 우리
친구가
되기도 했고 우리와 함께 지금도 세상을 살아 간다..표없이..그들 죄가 아니니..
어떤이는
이분 저분 의 둘쩨 부인도 되고 이남편 저 남편 옮겨 다니기도 하고 그들의 운명도
많은
굴곡이 생기고 하였으나 그 여인들은 비록 신세가 달라져도 그 외양은 옛 품위를 유지하고
의복과
용모가 단정 했음이 특별히 기억된다..그리고 아무도 농투산이의 후실이 되지는 않았고
행세
께나 하는 분들의 후실이 되었어도 기죽지 않고 당당히 운명과 대결하는 모습을 보았다.
이처럼
색향이요 예향이요 하는 이야기도 모두 옛말이 될 만큼 살아온 것이 우리들이다..여인들
이나
그 당시를 살던 윗대 어른들이나..모두가 시류를 타고 자신을 시류에 싣고 인생을 보낸 것
이며
지금와서 궂이 비판이나 비난이나 를 하지는 못 할것 같다..나 라고 하여 그시절 그 입장
에서
라면 어찌 하였을 런지 어찌 알리요..모두가 살아가는 토막이야기로 쳐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