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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씨 11/9〉, 그들의 민낯글쓴이 유지나 / 등록일 2018-12-04 10:15: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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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의 일치처럼 ‘화씨’로 시작하는 영화 두 편을 연이어 만나게 되었다. 하나는 미국의 부조리한 현실 고발에 초점을 맞춘 다큐멘터리 붐을 일으킨 마이클 무어의 〈화씨11/9 : 트럼프의 시대〉(2018)이다. 다른 하나는 SF고전영화로 꼽히는 〈화씨 451〉 (프랑소와 트뤼포, 1966)를 케이블TV 영화로 리메이크 한 〈화씨 451〉(라민 바흐러니, 2018)이다. 재난적 테러에 직면한 부시 정부의 무능함을 신랄하게 고발한 〈화씨 9/11〉(2004)에서부터 제목에 굳이 ‘화씨’를 붙인 것은 사상의 자유 통제를 고발하며 영화화된 레이 브래드버리(1920~2012)의 원작소설 〈화씨 451〉에 대한 오마주로 알려진 바 있다.
‘화씨 시리즈’, 정보화시대 통제하는 권력을
날씨나 체온 등 일상적으로 섭씨를 쓰는 우리에게 화씨는 환산이 필요한 표지이다. 우리의 섭씨처럼 일상적으로 화씨를 쓰는 미국에서 ‘화씨 451도’는 책이 불타는 온도로 (섭씨로 환산하면 233.77...°), 사상의 자유를 금하는 분서갱유 재난상태의 징표로 작동한다. 그런 점에서 SF 소설과 영화, 다큐멘터리들로 지속적으로 생성되는 ‘화씨 시리즈’는 정보화 시대 통제 권력의 문제를 다룬 테마 장르로 보인다.
마치 재치문답처럼 〈화씨 11/9〉는 숫자 뒤집기 놀이로 열린다. 정치와 자본권력의 야합을 고발한 전작 〈화씨 9/11〉의 숫자 순서가 뒤집어진다. 그러면 뉴욕이 충격적 테러를 당한 ‘9월 11일’은 2016년 ‘11월 9일’, 즉 트럼프가 대통령으로 당선한 날로 연결된다. 무어의 재치라고만 보기에는 기묘한 우연의 일치이다.
“힐러리! 힐러리!…”이렇게 연호하며 미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나온 듯 열광하는 대중집회로 영화는 시작된다. 트럼프 같은 인물은 결코 대통령이 될 수 없을 것이란 막강한 예상이 깨져나간 후, “모든 것은 한낱 꿈이었을까?” 무어의 비탄스런 질문과 함께 정치 권력판이 풀어내야 할 미스터리로 주어진다. 퍼즐 맞추기 게임처럼 펼쳐지는 이 여정에서, 대선을 비롯한 온갖 선거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여론몰이와 포퓰리즘이 난무하는 시대, 어디에서나 손안에 들어오는 휴대폰이 일상의 공기 같은 정보화 시대, “과연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어떻게 실현해 나갈 것인가?”라는 질문을 연이어 하게 만든다.
대선을 중심으로 중앙과 변두리를 오가며 펼쳐지는 무어의 카메라 탐사는 미시건주 플린트라는 빈민지역에서 플로리다주 고교 총격사건까지, 그리고 트럼프가 부동산 거부로 승승장구하며 보여준 아메리칸 드림은 어떤 것인지 언론이 보여주지 못했던 비루한 민낯이 점차 드러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오바마의 민낯을 보여준 대목이다.
정보화시대, 민주주의란? 어떻게?
납중독을 일으킨 물 오염으로 재난에 빠진 플린트시를 방문한 오바마는 자본권력을 옹호하는 주지사와 달리 해결사로 대대적 환영을 받는다. 대안을 발표하는 단상에 서자마자 오바마는 급히 달려온 먼 길이기에 목이 마른지 물 한 잔을 요청한다. 그러자 그를 반긴 대중은 “생수병! 생수병!”을 외친다. 오염된 수돗물이 아닌 병에 든 생수를 마시라는 배려이다. 그러나 그는 훈훈한 미소를 지으며 “아니오, 저는 그냥 (수돗)물을 마실 겁니다.”라며 고통을 나누는 겸손한 자세를 취한다. 심지어 가난했던 어린 시절 페인트가 묻은 작은 나무 조각을 먹고도 건강하게 자라난 에피소드까지 들려준다.
그런데 충격적인 대목은 깊이 들어간 카메라가 잡아낸 그의 민낯이다. 그는 유리컵을 들고 물을 마시는 것처럼 보여주려고 입술만 댄 것뿐이란 점이 들통났기 때문이다. "방문하기 전 그는 나의 대통령이었지만 방문 이후 더 이상 나의 대통령이 아니다"라는 한 시민의 인터뷰도 곁들여진다. 그와 시민의 만남을 환영하는 커다란 거리의 벽화도 이 사건 이후 그의 머리 부분이 훼손된 이미지로 변화한다.
전복적 다큐 미디어를 통해 알게 될수록 아픈 권력의 민낯에도 불구하고, 다른 한편엔 희망의 불씨도 보인다. 학교 총격사태로 충격받은 십대들이 불시에 SNS로 조직한 역사적인 대집회는 총기협회 후원으로부터 탈주하는 정치세력화이다. 그것은 총기 위협 없이 평화롭게 살고픈 기본적 인권을 누리기 위한 피선거인의 권리 실천이다.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되찾는 운동을 벌이는 용감한 십대를 키운 윗세대를 자랑스럽게 여기려는 무어에게 한 십대 학생은 전복적인 답을 보여준다. “우리를 이렇게 키워준 건 SNS랍니다!” 이런 상황은 민주주의를 내건 윗세대보다 SNS 능력이 뛰어난 십대가 존재하는 우리 사회의 변화하는 민주화 풍경도 성찰하게 해준다.
- 글쓴이 : 유 지 나 (동국대 교수, 영화평론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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