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한바퀴 87- 화성행궁(華城行宮)
8월20일 이태완부부랑 수원 화성행궁을 돌아보았습니다. 제일 먼저 반겨주는것이 정약용이 만든 거중기(擧重機)입니다. 거중기는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이 도르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수있도록 고안한 장치입니다. 지금의 기중기와 비슷한 기구로 위 아래의 각각 4개씩의 도루래를 연결한후 그끈을 물레에 감아 당기면 무거운 물건도 가볍게 들어올릴수 있어 수원화성 축성에 큰도움을 주었습니다.
팔방미인'은 여러 가지 방면으로 못하는 게 없는 사
람을 일컫는 말인데요. 유교뿐 아니라 과학, 의학, 경제 등 실제 생활과 관련된 학문에도 뛰어난 정약용의 능력을 알아 본 임금, 정조는 자신의 뜻을 받쳐 줄 신하들을 키우기 위해, 능력 있는 사람들을 관리로 뽑기 시작했습니다. 세자를 책봉한 기념으로 과거 시험이 열렸던 날이었습니다. 정조는 비슷비슷한 답안지들 사이에서 뛰어난 답안지를 발견하고 흐뭇해했지요.바로 22세에 과거에 응시한 정약용의 답안지였어요. 천재 왕이 천재 신하를 알아본 셈이었습니다.정조를 도와 다방면으로 활약한 정약용은 문과 시험에 급제했고, 그 후 관리가
되어서 규장각에서 일했습니다. 정조와 정약용은 함께 화성 건설 계획을 세웠어요.정조는 특별히 정약용에게 화성 설계를 맡겼습니다.
화성을 건설하려고 하는데 문제가 발생했어요.당시의 공사 기술로 성을 지으려면 10년 정도 시간이 걸리는데, 그 기간 동안의 막대한 공사비용과 공사에 동원되어 고통당할 백성들의 문제였습니다.정조는 정약용과 규장각 신하들에게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지시했습니다. 신하들은 청에 들어와 있는 서양 과학 기술 책까지 구해서 열심히 연구했습니다. 정약용은 한발 더 나갔어요. 서양 과학 기술 책을 보고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는 기계인 거중기를 만들어냈습니다.
거중기를 비롯해 다양한 방법을 총동원하고, 벽돌을 이용한 최신 공사 기술 등을 사용한 결과, 공사 기간은 2년 9개월로 단축되고 공사비도 대폭 줄일수 있었습니다. 또한 배다리를 만들어 정조의 화성 행차를 도왔습니다.
2022년 1월 13일 이전까지 '특례시'라는 말은 법적 용어가 아니었고, 대도시 특례 혜택이 있던 인구 50만 이상의 도시를 부를수 있는 마땅한 용어가 없었기에 편의상 '특례시' 또는 '특정시'-불렀으나, 특례시의 법적 기준이 인구 100만 이상의 도시로 정해지면서 수원시는 특례시가 되었습니다.
행궁은 임금님이 밖으로 행차했을 때 머무는 궁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온양 행궁을 비롯하여 모두 5개의 행궁이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마지막에 세워진것이 화성 행궁입니다.
이곳에 행궁을 지은 이유는 정조가 아버지 사도 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에 행차할 때 머물기 위해였습니다. 정조는 화성 행궁을 다른곳에 있는 것보다 큰 규모로 지었
습니다. 그 이유는 훗날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자신이 이곳에서 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정조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사도세자)를 여의였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본 정조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컷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위에 오른 후에 아버지의 묘를 더 종은 곳으곳으옮기기로 했습니다.정조는 화산에 아버지의 무덤인 현륭원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화산에 거주하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할 계획도시를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화성입니다.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수원입니다.
수원화성행궁(水原華城行宮)은 정조가 능원에 참배할때 머물던 임시 처소로서, 평소에는 부사(府使) 또는 유
수(留守)가 집무하던 곳으로 활용되던 행궁입니다.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 기슭에 건립되었습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옮긴 이후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12년 간 13차례에 걸쳐 화성에 행차했고, 이때마다 행궁에 머물렀습니다.
576칸[間]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며 국내 행궁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지만 대한제국 시기에 경기도 관
찰부, 수원 군청, 자혜의원, 학교 등이 자리하면서 용도
변경이 있었고, 1910년 8월 일제강점기 이후에는 낙남
헌을제외한 대부분 시설이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
살 정책 및 병원과 학교 건물 증개축 등으로 파괴되었습니다.
1980년대 말 뜻있는 지역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화
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마침내 482칸으로 1단계 복원이 완료되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되었습니다. 2023년 현재 객사인 우화관과 별주 장춘각을 비롯한 나머지 94칸에 대한 2단계 복원이 진행 중입니다.
조선시대 행궁은 남한산성 행궁이나 북한산성 행궁, 온양행궁 등 여러 곳에 있었지만, 전국의 행궁 가운데 화성행궁은 규모에서나 격식에서 가장 돋보이는 곳입니다.
정조는 1789년 10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옛 수원부 읍치자리로 울기고, 이듬해 2월부터 1800년(정조 24년) 1월까지 모두 13차례 현룽원을 방문하였는데 이때마다 화성행궁에 머물렀습니다. 특히 1795년에는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화성행궁에서 치르면서 이름도 고치고 건물도 새롭게 지었습니다.
화성행궁은 1909년부터 수원 주민들을 위한 병원으로 쓰이면서 건물이 철거되어 낙남헌만 남아 있었습니다. 화성축성 200주년인 1996년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2003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습니다.
무예24기보존회의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이기도 하며 대장금등의 사극 촬영지로서 자주 쓰이고 있었습니다.
화령전의 정문은 닫아놓은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닫혀있더라도 화성 행궁을 통해 화령전까지 갈 수 있습니다
화성행궁에 큰 행사가 있어 종로의 도로가 통제되면 심각한 교통 체증이 생긴다. 장안동 정류장에서 팔달문 정류장까지 30분 가까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멀리 산 위에는 거대한 불상이 보이는데 대승원이라는 절이있습니다. 하지만 절은 의외로 작습니다.
오산시에서 진행하는 오산 시티투어의 코스 중 융건릉과 함께 둘뿐인 오산시외 탐방코스입니다. 대부분의 시티투어 코스가 시내 구간을 도는 것을 감안할 때 특이한 케이스라고 볼 수 있습니다.
뒤주는 곡식(쌀, 콩, 팥)등을 담아 보관하는 생활 용기입니다. 쌀벌레가 생기지 않는 회화나무로 만드는 것이 가장 좋으며, 두꺼운 장만으로 퀘짝처럼 짜고 4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려 있습니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쌀뒤주는 보통 쌀 1~2가마가 들어가는 크기이며 잡곡뒤주는 이보다 작습니다.
1762 (영조 38년) 윤5월에는 정조 임금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뒤주에 같여 비운의 죽음을 맞이 하기도 했습니다.
뒤주와 관련된 속담으로는
"뒤주 밑이 긁히면 밥맛이 더 난다'가 있으며 무엇이 없어지는 것을 보면 그것이 더 애석하게, 여겨지고 더 간절히 생각난다는 말입니다.
홍상수의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장면 일부를 화성행궁에서 촬영했습니다.
일본 후지TV에서 제작한 이방자 여사 전기 드라마 '무지개를 건년 왕비'의 한국 촬영분이 이 곳에서 이루어졌으며 후지TV와 제휴관계에 있는 MBC에서 협조하여 일본 드라마 치고는 관련 고증이라든가 한국인 배우들의 연기가 괜찮았다고 합니다
BBC의 2002 한일 월드컵 중계방송 오프닝(Match of the day) 중 상당수 장면이 이 곳 화성행궁에서 촬영되었습니다. 한국 관련 대표 이미지로 풍물패의 상모돌리기, 소리꾼이 도포에 갓까지 차려입고 장구를 치는 모습, 왕비의 전통 복식 등이 나옵니다
드라마 대장금속의 수라간(水剌間)모습입니다. 수라간은 임금님 음식을 준비하는 궁중부엌으로 소주방(燒廚房)이라고도 불립니다.
임금님이 드시는 수라상. 임금님에게 올리는 밥을 높여 "수라"라고 합니다. 수라는 아침 저녁 두번을 올리며
기본음식 외에 12가지 찬품이 준비됩니다. 수라중간에는 간편한 죽과 미음, 다과를 올립니다.
정조대왕 능행 반차도
화성성역의 의계
그림 중앙이 정약용이 배다리를 만들어 정조 화성행차를 도왔습니다
수수문의 앞의 물수(水)변입니다. 壽(목숨)이 물과 같이 흐르게 지나가라는 뜻으로 쓴것같습니다.
정조대왕의 처소.
정조대왕이 화성행궁 행차시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를 연출한 공간입니다. 원래는 유여택이 신하를 접견하고 쉬던 장소였으나 관람의 편의를 위해 이곳에 연출하였습니다. 특히 병풍은 당대의 최고 화원 김홍도가 정조시대 정조를 위해 주자의 시를 그림으로 그려 진상한것으로 정조는 극찬하며 항상 곁에듀어 보았다고 합니다
화성행궁의 정전 봉수당
봉수당은 임금행차시 정전(正殿)으로 쓰인 건물로 중심 4칸을 왕권을 상징하는 편전공간으로 연출하였습니다. 을묘원행시 이곳은 혜경궁 홍씨의 진찬연이 열린 공간으로 이때 정조는 "만년(萬年)의 수(壽)를 받들어 빈다"는 의미의 봉수당(奉壽堂)이라는 당호(堂號)를 지어 조윤형으로 하여금 현판을 쓰게하므로 부터 이건물이 봉수당이라고 불리우게 됐습니다.
봉수당에서의 진찬연
1795년 을묘원행시 진찬연 장면을 부분 연출한 공간으로 정조대왕이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게 예를 드리고 있고 여관(女官)들은 왕과 혜경궁을 보좌하고 있습니다. 이날 진찬연에서 혜경궁 홍씨에게 12기의 소별미와 70가지 음식 그리고 42개의 상화(床花)가 바쳐졌습니다.
ㅇ
느티나무는 350년된 나무로 수고가 16m,흉고둘레가 3.8m으로 1982년 10월15일에 보호수로 지정했습니다
장독이 있습니다.
곤장때리는 곳인데 이태원이가 나보고 누워보라고 하더니 진짜로 두대를 때립니다. 평소에 때리고 싶었나 봅니다.ㅎㅎ
화성행궁에서 파킹장으로 가는데 금보여인숙이 보이는데 아주 옛날 여인숙 그대로 입니다.
팔달문이 보입니다. 내가 첫 직장이 낙시대 제조 판매 수출하는 로얄 낙시대였는데 수원의 낙시도매상이 오른쪽에 있어 출장을 자주와서 생각이 나 이곳을 지났는데 제일낙시점은 없어졌고 다른 상점이 있습니다